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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주일대 유람기
1.필자 이덕홍
간재 이덕홍(1541~1596)은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문하로서 영춘현감을 지냈다.
2.여정
계림(鷄林) → 첨성대(瞻星臺) → 월성(月城) → 불국사(佛國寺) → 요광원(要光院) → 감은사기(感恩寺基) → 이견대(利見臺) → 대왕암(大王巖) → 감포(甘浦) → 장기현(長鬐縣) → 연일(延日) → 월성(月城)
3. 경주유람 경위
이덕홍이 경주에 있는 집경전(集慶殿,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의 참봉을 제수받고 8개월이 지난 후에 평소 가보고 싶었던 경주를 비롯하여 경북 동쪽지역 여행을 나섰다.
1580년 음력 4월 17일 친구인 선사(仙槎) 장운거(張雲擧), 하남(河南) 정중립(鄭中立)이 함께 유람하기로 약속했지만 장운거가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래서 정중립과 함께 말을 타고 경주 계림을 향했다.
4. 경주 계림(鷄林)(1580.4.17.)
친구와 함께 말을 타고 들른 곳은 경주 계림이다. 숲속은 달리 특이한 것은 없고 오직 노송만이 울창하게 하늘에 솟아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숲속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닭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계림(鷄林)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5. 첨성대(瞻星臺)
첨성대(瞻星臺)를 지났는데, 첨성대는 당시에 기상을 관찰하던 곳이다. 다듬은 돌을 쌓아서 높이가 수십 길이고, 형체는 둥글고 덮개는 네모나며 가운데는 넓고 목 부분은 좁다. 허리 쪽 구멍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서 위로 올라간다. 아, 우리나라 좁은 땅에 삼국(三國)이 대치하여 각각 그 기상을 살피고 각자 닥쳐올 일에 대해 대응하였으니, 운수가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6. 월성(月城)
월성은 신라왕의 옛터이다. 그 형세는 동서쪽이 단절되어 있으며, 남쪽은 문수(蚊水.문천), 북쪽은 계림이 있어 한 줄기 맥으로 연결되는 언덕이 없었다. 동쪽은 평평한 들판을 위주로 하고, 뒤쪽은 성처럼 높고 앞쪽은 갈고리처럼 굽어 있으니, 참으로 납갑법(納甲法)에서 말한 ‘간월형(艮月形)’이었다. 당시 번화하고 문물이 성대하던 곳이 모두 변하여 산골 아이와 목동의 터가 되어 버렸으니,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이치를 또한 볼 수 있다.
7. 불국사
일행은 동쪽으로 길을 돌려 10여 리를 가서 송목정(松木亭)에서 한 식경(잠깐)을 쉬었다. 저물녘에 불국사에 들어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마치 인적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돌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큰 바위 가에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홈통을 통해 폭포가 몇 리를 가로질러 흘러서 돌 유구에 쏟아져 내렸다. 폭포를 넘어 구름다리(청운교,백운교)를 올라가니, 다리는 돌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문으로 들어서자 금칠한 누각과 석탑과 오래된 불상과 새로 그린 그림이 천태만상으로 기괴했는데, 모두 신라의 유적이다. 내가 중립에게 “신라왕이 쓸데없이 허무한 곳에 백성의 힘을 다 끌어 썼으니, 애석하다.” 하였다.
8. 경남 양산에서 스승 견응기를 찾아 불국사에 온 김함과 함께 술을 마시고 범영루(泛影樓)에서 묵다.
양산(梁山)에 사는 김함(金緘)이 걸어서 스승을 쫓아와서 들어와 절을 하니, 스승은 바로 견응기(堅應箕) 어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견 어른과 함께 유람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또 그가 스승을 쫓아온 뜻을 가상히 여겼기에 함께 여러 순배 술을 마시고 자리를 마쳤다. 그리고 좌경루(左景樓,현재는 불국사 범영루(泛影樓)에 묵었다. 현판에 걸린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글귀를 보고 자신도 글을 짓다.
9. 둘째날(1580.4.18.) 감은사, 이견대를 둘러보다.
비가 오려 하자 사람들이 “날씨가 만약 비가 내린다면 바닷가를 가더라도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니, 잠시 뒷날을 기다렸다가 날이 개었을 때 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고 여기며 다른 날에는 또 어떤 제약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동쪽 고개(추령.楸嶺)로 걸어갔다.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깔리고 소나기가 오락가락하여 원근을 분간할 수 없었고, 다만 발아래 한 줄기 길이 보일 뿐이어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중립이 말하기를 “하늘의 해는 비록 볼 수 없지만, 은빛 파도와 흰 물결은 어둑한 저녁 무렵에 우리 두 사람이 부모님과 이별하고 나라를 떠나는 심회를 한 번 가질 수 있을 것이니,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소의 소원을 이루는 것만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나도 좋다고 하고 마침내 말을 타고 가며 피리 부는 사람에게 재주를 보이게 하니, 간드러지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져 마치 학이 높은 하늘에서 우는 것 같았다.
한낮에 비를 맞으며 요광원(要光院)에 당도하여 말에게 여물을 주며 어깨를 펴고 쉬었다. 골은 깊고 숲은 우거졌으며 기암괴석이 좌우에 줄지어 있었다. 큰 비는 여전히 내려 앞 시내가 넘치려 하였다. 몇 잔의 술을 마시고 그대로 취해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하였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 점점 바다 어귀에 이르니, 평야가 널찍하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는 한 쌍의 탑(3층 석탑 둘)이 있었으니, 곧 신라 시대 감은사(感恩寺) 터이다.
바닷가에 투숙하여 비로소 큰 바다를 바라보니, 안개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바람에 이는 파도가 마치 산과 같아서 하늘과 물이 맞닿아 형상을 분간할 수 없었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졌는데, 깎아지를 듯이 서 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을 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아마도 신라왕이 《주역》 〈건괘 구오(乾卦九五)〉에 이른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라고 한 데서 뜻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헌(東軒)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뾰족뾰족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大王巖)이다. 속언에 “용이 이 바위 위에 나타나 신라왕과 서로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다. 서로 함께 몇 잔을 마신 뒤 파하고 날이 저물어 잠자리에 들었다. 율시 한 편을 읊었다.
10. 셋째날(1580. 4.19) 감포, 동헌에서 술을 마시다. 전복을 먹고, 장기태수가 기생 대접을 하다.
다음날. 가랑비가 아직도 뿌리고 구름은 어제와 같이 어두웠다. 또 소봉래로 가는 길이 막혀 우리 두 사람은 이른 아침밥을 먹고 도롱이를 걸치고 감포(甘浦)로 향해 출발하였다. 길 왼쪽에 봉화대가 우뚝 솟아 있는데 한 사람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봉화를 피울 조짐이 없으니, 태평시대의 기상을 볼 수 있었다. 말 위에서 비로소 동북쪽 한 쪽에 푸른 하늘이 보이기에 정군을 불러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정군이 “정성이 독실했으니 하늘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잠시 뒤 구름이 흩어지고 햇빛이 새어 나오니, 해당화는 선명하고 큰 물결은 잠잠해졌으며 흰 돌은 맑은 빛을 띠고 푸른 소나무는 무성하여 비 갠 뒤의 천태만상은 이루 다 접할 겨를이 없었다.
또 정군에게 이르기를 “어제 어두울 때에는 어찌 오늘 이처럼 맑고 밝은 경치가 있을 줄 알았겠는가. 바로 사람의 마음이 마치 비록 지극히 어둡고 가려졌더라도 한번 선(善)의 단서가 드러나 마침내 밝아지게 되면 그 본체가 드러나는 것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부가 중단되면 그 어두움이 또 이르니, 퇴계 선생의 시에 ‘찬 서재에 홀로 앉아 변화를 관찰하노라니, 겨우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지니 어두우면 밝기 어렵네.[獨坐寒齋看變化, 纔明還晦晦難明.]’라고 하였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오후 1시경에 우진(右鎭)에 이르니 진장(鎭將) 정군웅(鄭君應) 시중(時仲)이 우리들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헌(軒)에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술을 몇 잔 마셨다. 정군에게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만사가 분수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무(武)를 갖추는 일이겠는가. 함께 배를 타고 훗날 쓰이게 될 자질을 시험해보고 싶네.”라고 하고, 마침내 함께 배에 올랐다. 바다 어귀에서 몇 리쯤 들어가서 고기 잡는 사람을 불러 전복을 잡아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자 나란히 함께 들어가 물결을 차고 수영을 하면서 번갈아 들어갔다 나오며 백여 개를 잡았다. 회로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다.
정군과 함께 해변을 따라가니 길가의 방파제와 돌 봉우리, 가파른 바위가 있기에 말에서 내려 시를 읊었다. 소봉래를 향해 달려가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이 섬은 바다 가운데에 우뚝하게 서 있는데, 아랫부분은 바위고 윗부분은 흙으로 푸른 소나무와 늙은 전나무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서 있었다.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엷게 걷혀 거울 면을 닦아 놓은 듯하였다. 거꾸로 비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금빛 물결이 드넓게 일렁거려 마음과 눈이 확 터져 황홀하기가 홍몽(鴻濛)을 넘어 우주를 벗어난 듯하였다.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이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있다면 이곳이 제일가는 봉우리일 것인데, 어찌하여 소(小)라고 일컬은 것일까.
우리 세 사람이 취한 몸을 부축하고 일어나 노송(老松)에게 아뢰고 이름을 썼다. 또 회재 (晦齋.이언적)선생의 “땅이 다해 동쪽으로 바다와 맞닿으니, 천지간 어느 곳에 삼신산이 있으려나. 비좁은 먼지 세상 살고 싶은 생각 없어, 가을바람에 노나라의 뗏목 타고 떠나고파라.[地角東窮碧海頭, 乾坤何處有三丘. 塵寰卑隘吾無意, 欲駕秋風泛魯桴.]”라는 시를 읊고, 삼가 차운하였다.
서로 이별하고 장기현(長鬐縣.포항)으로 향하였다. 태수 이한(李僴)공 인립(仁立)이 잔치를 열어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자 인립이 “여색을 취할 때 반드시 못생긴 여자를 취하면 남들에게 빌미가 되지 않고 마음도 편안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손을 잡고 칭찬하기를 “이것은 대장부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고, 함께 매우 즐겁게 보냈다. 달이 이미 중천에 떠올랐고, 중립과 주인은 먼저 취하여 중당(中堂)에 누웠다.
11. 넷째날(4.20),감포 태수가 주는 노자를 거절하고 사슴고기포를 받고 영일현에 도착하다.
이별할 즈음에 태수가 뇌록(礌綠.목조건물에 벌레가 생기거나 부식,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녹색 안료)을 노자로 주기에 쓸 일이 없다고 사양하였고, 사슴고기 포를 주기에 어머니께 드리려고 사례하고 받았다. 연일(延日.영일)을 향하다가 길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날이 저물어 현(縣)에 이르렀다. 그곳 수령이 활쏘기를 하다가 또한 정성스럽게 대우하였다. 이어 태수에게 “이곳은 문충공 정(몽주) 선생의 고향입니다. 어찌 유풍과 여운이 남아 있는 곳이 없습니까?”라고 하니, 태수가 사람들을 경내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늠름하여 머리카락이 서고 마음이 서늘한 것 같았다. 이어 근체시 한 편을 읊었다.
12. 다섯째날(4.21) 동해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며 평소의 꿈을 이루다.
성으로 돌아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5, 6일이 되지 않았다. 동해의 빼어난 승경과 신선이 사는 곳의 기이한 경치를 다 찾아보고 돌아와 평소에 쌓아둔 소망을 모두 펼칠 수 있었다. 아, 나 같은 자는 배우지 못해 볼만한 것이 없는데, 당세에 명성을 도적질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임무를 받아 오늘 여기에 왔고, 또 지방을 유람할 수 있었으니, 어찌 내 인생의 하나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만 관람하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여 평생토록 지킬 바를 돌아보지 못했으니, 말단을 일삼고 근본을 버린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주 선생(주자)의 시에 “인하여 알겠네. 평생의 회포, 세속의 생각과 함께 없어지지 않음을.[因知平生懷 未與塵慮泯]”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지나온 행적을 기록하고 또 나의 단점을 기록하여 스스로 힘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