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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弼銖 助師 鬱陵島 訪問記(1914년)
8월 15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진 吳甲允이가 왔다. 울릉도는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사람도 많이 죽고 곡식도 흉년이 됐다오. 9. 울릉도 시찰(視察) 1914년 10월 6일 음 갑인년 8월 17일 오후 3시에 부산 출발이다. 선객들은 갑판 위에 나와서 집이 보인다고 하나 내 눈에는 집이 없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집이냐고 물으니 손으로 가르치며 저 돌 무덕이가 집이요. 하기에 자세히 보니 돌 무덕이 사이에 창문이 보인다. 집 위에 돌을 저렇게 올려놓았을 때는 울릉도 바람이 센 모양이지요? 그 사람 말이 집을 짓고 지붕 이울 때 나무쪽을 기와처럼 고기 비늘같이 매달아 이우고 그 위에 돌로 눌린 것이 저 모양이라고 한다. 배는 울릉도 태아동 앞을 지나 도동항에 들어간다. 도동은 수심관계로 선박이 대이기는 하나 작은 계곡이고 좌우는 층암절벽이라 배는 풍랑이 두려워 오래 지체하지 않고 물건 내리기 바쁘게 곧 돌아간다. 배가 부두에 가까이 갈 때 나는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부두에 모여선 사람가운데 모자나 수건으로 손을 흔드는 남녀들이 아마 교인인 듯 하다. 때는 오후 3시다. 배가 부두에 대자 내가 내리니 남녀교인들이 기쁘게 맞아주는 가운데 결찰서장과 도사까지 나와 인사를 한다. 나는 화물표를 道洞敎會 領袖를 주었다. 나는 傳道人 金秉斗氏의 인도로 도동교회 金領袖 집을 갔다. 교인들은 모두 쌀을 운반해서 임시로 예배당에 쌓아 두고 내 곁으로 모여와서 기뻐한다. 나는 모인 교인들과 함께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보며 孤島에서 천재를 만난 것이 신앙상 인내심을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의 인도로 도동여관에 숙박을 했다. 이튿날 도동교인들이 대부분 모여와서 쌀과 의복을 분배하는데 서로서로가 양보하며 적게 가지고 기뻐하는 모습이 고도에 사는 애정이라고 할까 진실한 신앙의 사랑이라고 할까 과연 육지에서 복잡하게 사는 사람들의 심정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교인 중에 조병호란 교인은 단 내외간 뿐 이라는데 쌀은 반가마를 준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조병호씨 부인이 초산에 산월이 가까웠으니 산후에 좋은 쌀을 대접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고마운 치하를 하고 내일 예배는 도동예배당에서 연합예배를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두가 좋다고 한다. 이튿날 일요일 연합예배는 많은 교인과 구경으로 온 사람도 많았다. 나는 예수님 생애란 제목으로 육적생활과 영적생활을 구분해서 설교를 했다. 모두가 감탄하며 새로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十여명이 된다. 나는 월요일 교회 순시를 나가니 교회마다 별도로 환영회를 베풀고 양을 잡고 돼지를 잡고 하나 나는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육미를 못 먹기 때문이다. 우스운 얘기다. 台霞洞 교회에서 돼지를 잡았는데 내가 육미를 못 먹는다니 닭백숙을 해 왔다. 교인들은 돼지고기로 회식을 하고 나는 닭을 먹었다. 조금 후에 나는 배가 아프고 두더르기가 일었다. 나는 이것이 웬 일이냐? 울릉도 닭이 독이 있는 모양이라 하며 배를 틀어쥐고 몸을 긁고 있었다. 한 처녀가 와서 자복(自伏)해 하는 말이 조사님을 위해서 잡은 돼지를 못 잡수신다고 하니 너무 섭섭해서 돼지 삶은 국물을 한술 떠서 닭 고음에 넣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나는 이 병이 크게 욕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미안하게 생각지 말라고 위로를 하니 모두가 전에 이렇게 아플 때 무슨 약이 좋았느냐고 묻는다. 소주에 꿀을 타서 먹는 것이 제일 좋았다고 했더니 처녀는 급히 꽉새등이 어디인지 모르나 꽉새등까지 가서 꿀을 구하고 소주를 가져와서 조병호씨 부인과 같이 방에 들어와서 사과를 하며 간호를 해준다. 육미 못 먹는 관계로 울릉도에서 세 번 이러한 고통을 당했다. 교회 순시와 교인들의 가정방문 일회를 마치고 울릉도에 처음 이주해 온 七인중에 金병두(전도사와 同名 異人)씨란 노인이 생존해 계신다기에 나는 이 섬에 처음 들어와서 개척한 역사를 듣기 위해서 역부로 찾아갔다. 당시 85세로 부인 자식 다 있는 팔자 좋은 노인이다. 게다가 체력과 정신이 좋으며 얼굴이 청수하다. 내가 인사를 드리니 무한히 반가워한다. 나는 어르신이 울릉도에 들어온 동기와 무인절도에서 지나온 역사적인 얘기를 물었다. 김노인은 처음 동기는 무슨 비결(秘訣)에 한양지말(漢陽之末)에 무염자가외(無髥者可畏)라 즉 한양말년에 턱수염 없는 자가 두렵다는 비결이 있으니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범이 턱수염이 없으니 아마 호환(虎患)이 극심할 것이니 어디나 범 없는 곳을 가야 피난을 한다고 하기에 범 없는 곳을 탐문하니 울릉도라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정치가 문란하여 곧 난이 날 것 같고 인심이 소란하여 모두 피난 할 곳을 찾을 때이라 金노인도 피난 갈 동지를 구하니 마침 자기 同鄕人인 경주 진밭 사람이 셋이고 강원도 삼척 사람이 셋 자기까지 7인이 모의를 하고 울릉도로 가자고 합의가 됐다고 한다. 마침 제주도 사람들이 울릉도 좋은 나무로 배를 만들기 위해 가는 배를 이용해서 일곱 집이 함께 들어 온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60년이다. 첫째로 범은커녕 뱀도 없고 사람 해칠 생물이 없고 둘째 산천에 육지에 있는 온갖 가시나무가 다 있으나 가시가 없으니 아무리 설치고 다녀도 몸을 찌르지 않으니 이 보다 더 좋은 福地가 없고 또 천생 사람 살리는 풀과 꽉새가 있고 바닷가에 미역이 얼마든지 있고 고기도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라 어리석어서 잘 낚이고 또 겨울 양식 준비로 산에 가서 칡뿌리를 파면 하루 七八짐을 할 수 있고 이 칡뿌리는 육지 것과 달라 전부 복영이 되어서 토실토실한 가루뿐이고 맛도 감미가 있어 미역국에 새알심을 넣어서 끓여 놓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농사는 감자, 옥수수, 지정, 조, 등속을 심어두면 잘 되고 산에 뽕나무가 많아서 누에는 얼마든지 칠 수 있으니 명주 짜서 경울 옷 해 입고 삼을 갈아 삼배 옷 해 입고 바닷물 조려서 소금 만들고 참 얼마동안까지는 낙원생활을 했지요.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와 있어도 육지 사람들보다는 착할 것이요 하는 말씀이 울릉도를 참으로 복지로 아신 말씀이다. 말을 마치고 나서 무염자가외란 그 말이 왜놈을 두고 한 말을 범으로 오해했다며 웃으신다. 울릉도 생활 이야기는 많으나 그만두고 나의 직무인 교회와 교인들의 가정 방문의 임무를 3개월동안 하는 사이에 적설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 했다. 양력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경축을 마치고 26일 울릉도 여러 형제자매들의 환송을 받고 떠나왔다. 28일 오후에 부산에 도착하여 매목사에게 울릉도 교회현황을 보고하고 3개월 월급36원을 받아 넣고 저녁에 목사 장로들과 환담을 나누고 이튿날 삼동에 와서 본 교회 교인들의 환영모임에 울릉도 얘기를 해주고 이튿날 30일 어머니와 그 동안 비워 두었던 집에 가서 불을 많이 넣고 소제하고 母子가 한적하게 있으니 가끔 병산 친구들이 와서 얘기도 듣고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보고 가동도 가서 놀고 병산 갈 때면 쌀 몇 되씩 사서 지고 母子간에 끓여 먹고 이렇게 보내는 시일이 어느 듯 양력 음렬 설이 다 가고 새해의 정월 보름이 됐다. 나는 마산가서 할머니를 보고 울릉도 얘기도 해드리고 하로 쉬는 사이에 의신학교 선생들 및 기숙생들과 울릉도에 대한 좌담회를 열고 재미있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을묘년(1915) 정월하순 어느 날 朴성태 조사가 찾아와 울릉도 얘기를 재미있게 듣고 나서 뜻밖에 山城 일을 어쩔거냐 고 묻는다. 나는 산성 일이 뭐냐고 도로 물었다. 朴조사는 웃으며 辛조사는 그동안 잊어버렸구나 지난 봄에 말하던 산성 처녀 말이야! 나는 허허 웃으며 朴조사 참 정신 좋구나 그것이 언제 일이라고 지금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니 그런 정신 가졌으면 천당 가기는 문제없다고 놀려먹었다. 朴조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서 꼭 믿고 말을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어디라도 결혼은 해야지? 글세 앞으로 어머니 근력이 줄고 하면 그때는 어디 봐서 식모처럼 하나 구해두고 어른들께 정성이나 지극하고 마음씨나 순하고 좋으면 정을 두고 살는지 몰라도 아직은 생각 없고 나는 하필 처녀라야 결혼한다는 것이 아니고 처녀건 과부건 마음씨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니 곁에서 어머니가 들으시고 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아무래도 과부는 제 행투가 있는 법이라고 타이른다. 제의추진유보도(弟衣秋盡猶補搗) 고말동과매언봉(姑襪冬過每語縫)이라 인간이 됐건 못 됐건 처녀라면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지 않아요. 그러면 쫓아버리지도 못하지요? 말해야 듣지도 않지요? 그럴 경우를 당한다면 숨통이 터져 죽지 않겠어요? 그럴 때 내가 다른 계집에 미혹되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좋지만 내 마음을 굽힐 수 없을 것이고 그러니 어머니가 괴로워도 한 四五년 더 있어 봅시다. 朴조사는 곁에서 한 참 듣고 있다가 그렇게 까지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요. 내가 말하는 산성 처녀는 그런류는 아니다. 얼마든지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순종 할 사람이지 조금도 반항 할 사람은 아니다. 하여튼 아무데도 나는 결혼생활에 마음을 두지 않으니 산성 가서 단념하라고 말하세요. 공연히 나를 믿고 있다가 나중에 나이 많아 시집 못 갔다는 원망 말도록 하소. 朴조사는 내가 가서 말은 그렇게 하겠소. 하고 떠났다. 나는 어머니가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그 마음을 이해하시도록 만단 설화를 해드리며 모쪼록 안심하시도록 힘쓰고 우스운 이야기를 많이 해 드리고 하루하루를 지겹지 않게 보낸다. 하루는 산막 재일 영수 아재가 올라 왔다. 우리는 반갑게 맞아 방에 들어갔다. 아재는 배달부가 준 편지를 내준다. 편지는 매목사가 나와 의논 할 일이 있으니 속히 오라는 편지다. 영수 아재는 자기 집에 가서 자고 내일 부산을 가라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산막에 내려와 자고 어머니는 가동을 가시고 나는 부산을 갔다. 매목사는 빨리 왔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니 지금 예배당의 세금면제 신청을 위한 예배당 부지와 건물측량을 측량해서 해내라고 합니다. 그러니 기장 동래 북면까지는 辛조사가 해야 겠소. 나는 사절 할 수도 없고 힘껏 하겠다고 하니 매목사는 고맙다고 치하를 한다. 미 선교회 서기인 鄭창희는 매목사를 보고 辛조사 온 김에 용지와 물품을 사서 가져가도록 대금을 얼마 드리라고 한다. 매목사는 깜박 잊은 듯이 오오! 하며 돈 10원을 내주며 아무쪼록 빨리 하라고 부탁을 한다. 鄭창희는 나와 같이 나오며 매목사는 전에 왕길 목사보다 깍쟁이라고 험담을 한다. 나는 權장로를 잠깐 보고 가겠다고 하니 鄭창희도 같이 權장로 집에 갔다. 권장로는 나를 좋아하는 어른이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어찌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교회당 측량이야기를 했다. 권장로는 항상 어려운 일은 辛조사를 시키며 보상은 넉넉히 주지 않지. 鄭창희는 거기서도 또 떠들어댄다. 먼저 울릉도 갔다오는데도 한달에 12원씩만 계산하고 이번에 용지대금도 줄 생각을 안 하는 것을 내가 주라고 하니 그제야 10원 주지 않아요. 참 깍쟁이라. 나는 이 사람아 왜 그런 말을 하니! 노인주는 마침 집에 있다. 셋은 모두 친구이며 장난도 좋아한다. 노인주는 좀 어리석은 편이고 정창희는 좀 경망한 편이다. 노인주 집에서 막 저녁을 먹으려니 朴성태가 들어온다. 성태는 나를 보고 놀라며 어쩐 일이요? 鄭창희가 앞질러 이야기를 한다. 이 날 밤에는 넷이 모였으니 주고받는 이야기에 웃음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즐거운 밤이다. 이튿날 나는 집에 와서 묶은 측판과 줄을 다시 손질하고 내려가 우리 예배당부터 재고 내덕을 갔다. 내덕교회 우귀덕 영수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영수 부인은 내가 콩밥을 좋아하니 특별히 굵은 콩을 예비해 두었다가 내만 가면 꼭 콩밥을 해 주곤 한다. 전에도 우귀덕씨는 나를 자기 처제와 결혼하라고 여러 번 권고 한 적도 있었다. 자기 처가가 북면 구서교회 박중거씨 집이다. 이 집도 가난한 등급으로는 2등쯤 된다. 우귀덕씨 부인의 治財범절과 그 온순한 마음씨로 볼 때 그 아우되는 사람이니 언니를 닮지 않았을까? 저 정도면 괜찮겠다는 마음이 드나 말은 하지 않고 내가 이번에 구서까지 갈 터이니 가서 보고 속담에 한배의 개새끼도 알숭이 달숭이가 있다니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단정을 했다. 떠날 때 우귀덕씨 말이 이번에 구서까지 가지 않겠소? 가면 반드시 내 처가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잘 생각하라고 부탁을 한다. 나는 별반 거기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그 길로 신평교회와 기장읍 교회를 거처 월전교회에 들어갔다. 어느 교회나 환영해 주는 것은 좋으나 二년전 혼인 말하든 교회들을 들어가려니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난다. 그 때는 그렇게 말했지만 벌써 다 시집을 갔는데 그렇게 논 주마 집 주마하든 그들을 대하려니 내가 특출한 인물도 아니면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았나 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월전교회 일을 마치고 가는 길에 대변 朴재형씨(朴順天씨의 父) 집을 방문차 들렸다. 朴참봉 내외는 항상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더 친절을 베풀며 기어코 자기 집에서 하루 쉬어 가라고 잡는다. 나는 그 내외의 인정에 끌리어 하루 쉬는 동안에 朴참봉은 자기재산 처리문제를 얘기하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묻는다. 나는 절반은 딸에게 소유권을 주고 반에 반은 養子를 주고 나머지로 당신 내외가 가지고 있다가 최후에 양자나 딸에게 상속이 가던 말던 죽은 뒤에 간섭 할 것 없지요? 朴참봉은 나를 잡고 辛조사 말대로 해 달라고 간청을 한다. 이번 교회일이 바쁘다니 이것을 마쳐놓고 해드리겠다고 승낙하고 하루 쉬어서 송정을 거처 구서로 갔다. 아닌게 아니라 나를 접대하는 집이 내덕의 우영수 처가 집이다. 그래서 나는 유심히 살펴봤다. 처녀가 있는데 우영수 부인보다는 몸이 툭지고 이목구비에 하나도 인상에 남을 만한 것이 없다. 또 어려운 살림살이니 그렇겠지만 우영수 집보다 가구 정리에 질서가 없고 처녀를 유심히 보았지만 돌아서면 기억에서 살아지니 내 생각이 저런 이는 마음을 통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자파(自罷)를 했다. 그러나 그 가족은 어떤 소개를 받은 듯 나에게 친절과 대접이 분수를 넘는다. 나는 하루 쉬고 두구동 교회로 왔다. 朴성태 조사가 두구동 교회에 주제 해 있다. 朴조사는 역부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성태 부인은 항상 나를 동생이라고 부르며 반가워하고 친절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나는 이날 내가 맡은 책임을 마쳤다. 朴조사는 일을 마쳤으니 조용히 하루 놀자고 한다. 교인들이 모여왔다. 하루 놀면서 울릉도 얘기를 듣고자 한다. 나는 울릉도에서 보고들은 대로 얘기해 주고 교회서는 떡과 단술을 해 왔다.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도면수정을 해 가지고 부산을 갔다. 매목사 집에 들어가니 鄭덕생 목사와 鄭창희가 같이 있다. 각 교회당 측량한 도면을 내 놓았다. 모두들 보고 정밀히 잘 했다고 차하를 한다. 매목사는 다른 데서는 아직 오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면서 일한 삯인지? 20원을 준다. 감사히 받고 鄭덕생 목사의 집으로 갔다. 정목사는 가동 연구 재종조 사위이나 일찍 상처를 하고 재혼을 했다. 인척으로 말하면 내 재종고모부가 된다. 그러니 나와는 더욱 친밀하다. 내가 세상을 싫어하고 산에 들어가 있는 것을 무척 애석하게 여기고 되도록 사회에 끌어내려고 힘쓰는 분이다. 이번에도 만난 기회에 여러가지로 나를 권유를 한다. 지금 국가사회가 이를수록 나와서 싸워봐야지 산골에 들어가 이름 없이 죽을 게 뭔가? 그도 무자격한 인간이라면 몰라도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은거하는 것은 너 하나로 봐서는 애석하다고 할 뿐이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손실이니 깊이 생각하고 나와서 한번 싸워보자. 내가 교회에 들어온 것도 하필 천당만 바라보고 온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 싸우고 나면 천당은 의인을 위해 준비한 곳이니 두 말 할 것 없고 우선 싸울 길을 찾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그래도 생기 있는 곳이 교회뿐이니까 이 길로 들어오지 않고는 싸울 길도 없더라. 너도 길은 바로 들어왔고 교회단체가 너를 그만큼 신임하니 오직 좋으냐. 이제 山中생활 버리고 좌우에서 결혼하자고 청하니 어디든지 너 원대로 택해서 결혼하고 敎會일을 하자 그것이 곧 싸우는 것이다.- 잘 들었소. 내가 산에 들어간 것도 하필 이 사회의 부정만이 아니라 내 마음에 상처를 받은 데다가 세상 꼴이 이 모양이라 그저 죽음대신에 산을 택해 찍히고 상한 심신을 수양이나 해 볼까하고 들어갔지만 모두가 이렇게 움직이고 흔드니 정신이 어리둥절해 어찌 할까 아직 지향을 못 잡겠다. 덕생이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하늘이 너를 버리지 않는데 너 스스로 버리고자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받은 상처도 山에서 얼마만큼 치료를 했으면 이제 활동을 해야지 끝까지 싸매고 있으면 결국 폐인이 되는 것이다. 너는 요사이 신부후보가 수두룩하더구나. 나는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하나 뿐이겠지? 서로 웃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나의 번민은 더욱 심했다. 밤이 깊도록 숨을 죽이고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인생 70이니 백년이니 하고 人生壽限이 짧다고 부운 같은 인생 또는 일장춘몽이라 하는데 나는 겨우 30년 걸어온 세상이 이렇게 장원하고 지루하건만 그들은 어떤 행락을 못 잊어 그렇게도 탄식을 할까? 이렇게 올빼미 밤을 새우고 이튿날 鄭목사와 작별을 하고 탁박타박 걸어오는 길이 어떻게 되었든지 겨우 와여에 와서 자고 이튿날 가동에 와서는 어머니에게 좋은 기분을 보이려고 헛웃음을 치며 어머니 내 돈 많이 벌어 왔어요 하고 돈을 보이니 어머니는 이 자식아! 웬 돈을 그렇게 많이 주더냐 하시며 기뻐하신다. 나는 눈으로 남을 가르키며 돈 있다고 하지 마소. 하고 우선 쌀 사라고 3원을 드렸다. 어머니는 쌀 두말 사고 넉양이 남았다고 한다. 나는 돈대로 사라고 했다. 나는 곰내댁에 가서 재종 조모님과 종고모들과 말썽을 일으키고 웃음판을 만들었다. 젊은이들은 온 김에 바느질 좀 해주고 가라고 잡고 늘어진다. 가만있어 실이 있나 없나 가보고... 나는 연구댁 아랫방에 있는 재봉기를 열어보니 실이 조금 있다. 또 가동에서 하루를 먹게 된다. 재봉기를 앞에 놓고 찰밥 하라는 둥 닭 잡으라는 둥 장난을 하며 옷을 두벌쯤하고 나니 실이 떨어진다. 다음에는 너이들이 실 준비해두고 모시러 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안와 하며 농담하고 웃으니 나의 고민도 잠깐 사라진다. 이튿날 나는 쌀을 조금 지고 어머니는 장을 조금 가지고 가동 큰골을 넘어 집에 가니 어느 듯 滿山紅綠이 어울려 붉은 꽃 노란꽃 들이 여기저기서 봄바람에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웃음을 머금고 나를 기다린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준다. 자연의 품에 안겨 그저께 하든 얘기도 잊어버리고 노랑나비 흰나비 쌍쌍이 뭉쳐서 나르는 광경과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모두가 부자연한 인간을 조롱하며 대자연의 신비를 자랑하는 듯하다. 대자연의 품안에서도 내 머리는 간간이 무엇이 왔다간다. 그래도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정신의 힘이 강해지고 때론 새 희망도 솟아오르는 것이다. 아차 대변의 朴참봉 부탁을 잊었구나. 갑자기 어머니를 보고 대변 朴찹봉 전답 측량 좀 해 달라는 것을 깜박 잊었어요. 내일 가서 측량 해주고 고기 많이 가져 올 테니 어머니는 믿는 집 늙은이를 데리고 와서 집에 계세요. 이튿날 측판을 묶어 매고 예림 뒷고개를 넘어 대변을 갔다. 朴참봉 내외는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그 집 토지측량을 했다. 그 때는 토지 소유권 보존증명을 내려면 도면첨부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나는 도면을 만들어 명연(朴順天)이 것과 朴참봉 것, 양자에게 줄 것을 각각 따로 만들어 가지고 기장읍내 대서인 金모씨를 찾아가서 각자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도록 부탁을 하고 朴참봉은 대서료와 인지대를 주고 대변으로 왔다. 朴참봉은 나를 돈 15을 주며 이건 수수료가 아니라 일용으로 쓰라고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한다. 그러시다면 받지요. 나는 웃으며 내가 올 때 어머니보고 고기 많이 사 가지고 올테니 집 잘 보라하고 왔거든요. 두 내외분는 웃으며 어린애 달래듯이 달래놓고 왔구나. 내가 고기 사러가려니까 명연이 어머니는 내가 가야 싸게 사지 辛조사는 가면 달라는 대로 다 줄 것이다. 하시며 바구니를 들고 나가신다. 조금 후에 크다란 광어 한 마리 도다리 세 마리를 사 왔다. 값이 얼마냐고 물으니 웃으며 아직 값을 모르는데 하시는 말이 돈 안 받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자기 집에 말려둔 갈치를 한 보따리 싸서 한테 뭉쳐준다. 나는 이렇게 지고 가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마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부끄럽지 않고 기뻐요. 명연이 엄마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하시며 더욱 기뻐하신다. 나는 인사를 하고 생고기 상할까봐 족불의지로 달려와서 예림고개를 올라서니 어머니가 밭에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고개에서 큰소리로 엄마하고 불렀다 어머니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올라오신다. 母子가 서로 만났다. 어머니는 병산의 吳생원네 늙은이하고 같이 자고 집에 있었다고 하신다. 집에 와서 고기를 풀어 보니 아직 상하지 안았다. 내 손으로 광어 한쪽은 회를 떠고 나머지는 저리고 마른 고기는 걸어두고 모자가 마주 앉아 회를 먹으며 어머니 참 좋지요. 이 산골에서 이렇게 먹는 것도 하나님 덕이라고 합시다. 이렇게도 웃고 저렇게도 웃다가 하루하루 가는 것을 거의 잊어버리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