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마 테라피(Aroma Therapy)가 유행하기 시작한 게 10년 안쪽. 그러니 꼬마 자동차 붕붕은 아로마 테라피의 선구자인 셈이지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로마 테라피는 허브식물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이용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몇 달 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연구팀에서 '아로마 테라피의 의학적 효능은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아로마 테라피가 사실은 공중누각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56명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단 사흘 동안 실험한 결과라니 왠지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런 벼락치기 실험으로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왔을까요? 몇 년 전 시카고 후각기능연구소에서는 아로마 테라피 요법이 휴식과 안정을 준다고 발표했는데 과연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걸까요.
향기요법의 신봉자가 요즘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흑사병이 유행했던 중세에는 로즈마리의 향이 병을 막아 준다고 생각해, 집집마다 로즈마리를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 병사들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향유(香油)를 흡입했습니다.
어디 외국만 그랬나요. 우리나라도 역사책을 뒤져 보면 향에 관한 얘기가 심심찮게 나옵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눌지왕 때 향을 피워 공주의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내의원에 지금의 조향사에 해당하는 향장이라는 직책이 있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식물의 향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연구팀이 맞는다면, 아로마 테라피나 플라워 테라피(Flower Therapy)는 인류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였던 ‘쓸데없는 짓'이 되겠지요. 여러분은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은지요?
꽃향기, 너를 만나면 마냥 좋다
혹시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기억의 한 토막이 아득한 시간 속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왔던 경험은 없으신가요? 후각은 인간의 여러 가지 감각 중 기억 회생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른 감각보다 더 직접적으로 뇌를 자극한다고 합니다. 이는 냄새 입자가 후각신경을 통해 대뇌변연계로 전달되고, 인간의 감정과 생리 기능을 관장하는 중추신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렇다면 향기란 공기 중에 잠시 방출됐다 사라지는 입자 그 이상이 아닐까요.
식물의 향이 과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분을 좋게 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합니다. 스트레스가 정수리 근처에서 바글바글 끓어 넘칠 때, 괜히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 꽃향기를 한번 맡아 보세요. 꽃향기가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 줄지 누가 아나요.
나를 건드려 봐!
향기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허브를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브의 가장 큰 특징은 대가 없이 공짜로 향기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허브가 스킨십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허브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는 손으로 살짝 쓰다듬어 줘야 합니다. 바람이 많이 불면 아무 노력 없이도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만, 어쨌든 허브의 향을 즐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노동력이 필요하지요. 사람이 됐든 바람이 됐든….
허브는 물ㆍ바람ㆍ햇빛의 3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잘 자랍니다. 보통의 경우 건조한 상태를 좋아하므로 물은 겉흙이 마르면 주도록 하고, 햇빛과 바람이 충분해야 하니 실내보다는 실외에서 키우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물빠짐이 좋은 흙을 사용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허브의 일종인 헬리오트로프는 짙은 보랏빛 꽃에서 달콤한 초콜릿향이 강하게 납니다. 꽃잎을 따서 입에 넣으면 향이 입 안 가득 퍼지지요. 헤르만 헤세는 <정원 일의 즐거움>에서 헬리오트로프의 향기를 두고 “열광적으로 춤추다 풀어헤쳐진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촉촉하게 빛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영 감이 안 온다면 방법은 하나, 직접 맡아 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헬리오트로프. 개화 기간이 긴 헬리오트로프는 고온다습에 약하므로
여름철에도 시원한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다양한 허브들. 손으로 쓰다듬으면 향기가 난다.
먹고 싶다, 꽃향기
흰 장미를 방불케 하는 우아한 꽃이 피는 꽃치자는 남국의 과일향을 풍깁니다. 어찌나 그윽하고 달콤한지 딱 한 송이만 피어도 집 안에 향기가 가득하지요. 단점이 있다면 꽃이 질 때 다소 처참하다는 것, 그리고 새순에 진딧물이 엄청 꼬인다는 것. 이 두 가지만 잘 견뎌 낼 수 있다면 항시 곁에 두어도 좋을 만한 꽃입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는 노지에서 자라지만, 추위에 그리 강하지 않아 중부 이남에서는 겨울철 실내로 들여와야 합니다. 꽃치자는 물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물을 너무 자주 주면 잎이 떨어지니 겉흙이 마르면 주시고, 공중습도가 높은 걸 좋아하니 스프레이를 자주 해 주세요.
중국이 원산지인 꽃치자는 7,8월에 흰 꽃을 피운다.
강한 햇빛보다는 약한 햇빛이 좋으니 반그늘에서 키우도록 한다.
토심이 깊고 비옥한 토양에서 생장이 양호하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고광나무는 짙은 바나나 향기가 납니다. 별다른 매력이 없어 보이는데 보면 볼수록 진국인 사람이 있지요? 고광나무가 바로 그렇습니다. 꽃은 평범하지만 워낙 향기가 좋아 자꾸 뒤돌아보게 만듭니다. 울타리로 만들어도 좋고, 큰 화분에서 키워도 잘 자랍니다.
고광나무. 건조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물을 충분히 주도록 한다.
비옥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내한성이 강하다.
‘칵테일 사랑'이란 노래를 아시나요. 마음이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걷다가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하지만 애니시다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에 가지 않아도 되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발랄한 노란 색의 꽃이 피는 애니시다는 향기마저도 참 상큼합니다.
레몬 향기가 폴폴 날리는 애니시다를 키우려면 약간 부지런해야 합니다.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게으름을 부리다가는 말려 죽이기 십상이지요. 콩과에 속하는 애니시다는 남부 유럽의 덥고 건조한 고원지대에서 주로 자라는 식물이므로, 배수가 잘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키워야 합니다.
애니시다. 새로 자라나는 가지를 계속 잘라 주어야 깔끔한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다.
란타나도 참 얄궂은 꽃입니다. 연분홍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주황으로, 다시 주황에서 빨강으로 꽃빛깔이 수시로 변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꽃빛깔이 일곱 번 변한다 하여 ‘칠변화'라고도 부릅니다. 향기 역시 사탕 냄새 같기도 하고 후르츠 칵테일 같기도 하고, 참 묘연합니다. 이렇게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꽃이, 원산지인 아메리카 열대지역에서는 잡초로 취급받는다고 합니다.
란타나. 내한성이 약하므로 겨울철에는 실내에서 키우고, 물이 잘 빠지는 토양에 심는다.
넌 내게 반했어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이 촉촉한 눈망울로 “예라이샹 예라이샹“ 하면서 불렀던 노래를 기억하시나요. 잘못 들으면 화들짝 놀랄 말한 말이지만, '예라이샹‘은 야래향(夜來香)이라는 꽃을 말합니다. 등려군이 '첨밀밀'에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지요.
야래향은 가끔 중국집 이름으로 사용되지만, 향기를 맡아 본다면 중국집 이름으로는 너무 과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사실 야래향은 꽃으로만 보자면 완전히 낙제생입니다. 저것도 꽃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야래향이 꽃으로 대접받는 건 순전히 향기 덕분이지요. 향기가 없었더라면 야래향은 아마 '화류계‘에서 삼류 변두리 인생을 살았을 겁니다.
야래향은 낮에는 꽃잎을 오므렸다 밤이 되면 활짝 벌립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래향. 달밤에 맡는 야래향 향기는 그야말로 ‘죽음'입니다! 우아하고 고독하게 죽고 싶으신 분은 한밤중에 야래향 향기를 맡아 보세요. 아마 한 5초 동안은 깜빡 죽었다 살아나실 겁니다.
야래향의 꽃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향기 하나는 비할 데가 없다.
야래향은 햇빛과 물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물이 필요할 때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물 주는 시기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초콜릿 향이 난다고 해서 ‘발렌타인 자스민'이라는 별칭이 붙은 듀란타 레펜스(Duranta repens). 꽃집에서는 그냥 발렌타인으로 통합니다. 마편초과에 속하는 발렌타인은 가지를 늘어뜨리며 자라기 때문에 성목이 되면 아주 멋진 자태를 뽐냅니다. 발렌타인은 비교적 키우기 쉬운 식물로 특별한 관리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므로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도 아닌데 굳이 향기를 봉인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가끔은 향기 나는 꽃에 비닐 봉지를 씌운 다음 봉지 안에 얼굴을 들이밀어 보세요. 그리고 코를 킁킁…. 아마 감각의 지평이 훨씬 넓어질 겁니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정도는 되지 않겠지만.
발렌타인. 가지가 처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 주는 것이 좋다. 반그늘에서도 잘 자라며 겨울철에는 5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해 준다.
- 글
지근화 / 자유기고가 /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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