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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 유마경 강의 11
二品. 方便品
(①이시에 비야리대성중에 ~ 능선사량하며)
불국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교의 이상세계, 또 모든 사람들이 다 꿈꾸는 영원한 평화와 행복한 세상, 그것을 불국품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꼭 우리가 유의해야 할 중요한 구절들이 있었죠.
정토, 불국정토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장 마음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생활환경, 또는 국토, 그것은 과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장소가 따로 있는가, 아니면은 내가 그것을 만드는가, 이런 문제도 이야기가 됐죠.
그래서 이 사바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떠나서 따로 없다, 하는 그런 원칙하에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 거기에서 우리의 어떤 이상 세계를 실현해야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실은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라고 해서 범부든 성인이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높고 낮은 사람 그런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내지 중생들까지 전부 함께 더불어 사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범성이 혼잡하고 ‘용사(龍蛇)가 혼잡(混雜) 하고 범성(凡聖)이 교참(交參)이라’ 그런 말이 있어요. 용과 뱀이 함께 더불어 있고 범부와 성인이 같이 있다, 이런 표현들이 선구(禪句)에 있습니다마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땅이 그런 곳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들 자신이 불국정토로 만들면은 불국정토가 되는 것이고, 내 자신이 불국정토로 보지 못하고 불국정토로 수용하지 못하면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이 불국정토가 되지 못한다.
내가 만들면은 불국정토가 된다, 하는 그런 그 이야긴데. 이땅이 어째서 나쁘냐, 우리가 사는 이 환경이 왜 나쁘냐,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안 좋은 땅이 아니고, 정토가 아닌 것이 아니다. 그대로 정토다. 그런데 단, 너희들 마음속에 높고 낮음의 차별심이 있어 가지고 그런 차별심 때문에 제대로 수용을 못해서 그렇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비유를 들죠.
저 태양이 어찌 밝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은 보지 못한다. 맹인들이 태양빛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태양이 어둡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는가 태양은 저처럼 밝지만은 맹인이 눈이 어둡기 때문에 못보는 것 아니냐 그러니 태양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의 눈에 허물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 환경도 사실은 훌륭한 정토임에 틀림이 없는데 너희들 마음속에 높고 낮은 그런 차별심이 있어서 그래서 이 정토를 정토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들 마음만 곧고, 너희들 마음만 맑으면은 그대로 너희들이 수용하고, 태어나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는 이 우리의 삶의 현장, 이대로가 그대로 불국정토다 라고 하는 그런 것을, 도저히 우리가 변명할 수 없는, 달리 어떤 다른 이견을 붙일 수 없는, 거의 정말 완벽한 부처님의 이론으로서, 우리에게 정토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쭉 살펴봤습니다.
아주 불국품의 그런 내용들은 불교의 중요한 내용을 잘 표현한 그런 구절들이었죠
욕득정토(欲得淨土)댄 당정기심(當淨其心)이니
수기심정(隨其心淨)하야 즉불토정(則佛土淨)이다
정토를 얻고자 하는가? 그러면 너희들 마음을 깨끗이 하라.
마음 깨끗한 것을 따라서 불국정토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였죠.
오늘은 두 번째 품, 방편품 되겠습니다. 방편품(方便品).
어떤 분들의 연구는 불국품까지가 서분에 해당되고, 다시 말해서 서론에 해당되고 방편품부터 이제 본론이다.
유마경의 본론은 유마거사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본론이 되고, 또 유마거사께서 방편으로 병을 앓게 되는거죠. 병을 앓는 이야기로부터 비로소 이제 유마경의 본론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방편품부터 본론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 이제 그 문단 문단에 부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또는 이 유마경은 유마거사의 설법이 또 내용이 많습니다.
부처님 말씀보다도 어찌 보면 유마거사의 말이 더 많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또 제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한편의 희곡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부처님의 일방적인 말씀도 아니고, 또 유마거사의 일방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그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서 한 편의 훌륭한 경전이 이루어지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유마경은. 그래서 아주 불교의 경전 중에서 유마경은 아주 뛰어난 경전 중에 손꼽히죠.
그래서 이 방편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불교에서 익히 우리가 들어서 알듯이 그야말로 방편입니다. 방편.
유마거사가 병을 앓아눕게 되요.
그런데 유마거사는 상당한 수행력이 있는 분입니다. 상당한 수행력 정도가 아니고, 부처님에 버금가는 그런 그 어떤 법력과 내지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있는 그런 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앓아눕게 됩니다. 물론 부처님도 병을 앓기도 했지만은.
그것은 이제 방편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또 사실 유마거사가 그렇게 병을 앓았다 하더라도 그건 우리가 공부하는데 좋은 방편으로 활용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유마거사의 병뿐만 아니고, 부처님이 병을 앓아누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 우리가, 우리가 공부하는데 아주 좋은 방편으로 그것을 수용해야 되고, 나아가서 우리 개개인들의 어떤 병고도 역시 내 인격을 완성해 가는, 다시 말해서 수행해가는 좋은 방편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그게 이제 불자의 바람직한 견해다, 하는 것입니다.
사물이라든지 사건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게 참 중요해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게 바로 그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임제록에서 우리 공부했듯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바른 소견이다. 올바른 소견, 거기에 달렸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 온갖 일들을 우리가 매일 매일 겪고 사는데 그런 일들에 대해서 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를 갖는다고 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하죠.
그래서 부처님의 병이 그렇고, 유마거사의 병이 그렇고 우리들 개개인이 겪는 어떤 병고 또한 그렇습니다. 그 병고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고 내가 어떻게 그것을 소화할 것인가. 이것은 그 참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병이 들었다. 덮어놓고 병으로 그렇게 두고 말 것이 아닙니다.
사람 따라서 그 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도 천차만별이예요.
어떤 사람은 조금만 감기 걸려도 앓아눕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감기 걸렸다고 앓아눕는 것, 그 무슨 소용있느냐, 감기 걸렸다고 그 누우면 어떻게 되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눕는다는 건 감기 정도 가지고 상상도 못하는 사람들이 또 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 누울 시간은 있어도 그런데 걸릴 수록 더 많이 움직인다, 더 활동을 더 한다, 식사도 더하고 활동도 더 한다 이런 사람들이 또 있는가 하면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병이라고 하는 유마거사의 병에 대한 이야기가 이 품에 나오고 그 다음품부터 제자품 보살품 그 다음에 문수보살 문질품까지 이렇게 이어지면서 소위 유마거사의 병 얘기 하나 가지고 방편품, 제자품, 보살품, 문수보살 문질품 이렇게 네 품이 연결이 되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만치 유마경에서는 유마거사가 병든 내용에 대한 것이 그만치 중요한 역할을 해요. 그게 핵심이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실은.
주된 내용이 되는데, 그래 그 병을 우리 개개인의 병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것인가.
여기선 바로 방편으로 이해해야 된다, 방편으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 이 병을 그냥 지고 앓고 누워있으면은 그걸로 예를 들어서 병이 나으면 그걸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 되고 뭔가 건져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병이 들어서 하루쯤 누웠다, 거기서 뭔가 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병을 앓은 것보다 더 큰 소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도반스님이 근래에 화재를 당했는데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그동안에 참 탐심을 부려가지고 온갖 것을 자기가 만들어서 쌓아놓기도 하고, 어디서 구해다가 쌓아놓기도 하고 별별 걸 다 쌓아놓았어요. 상당한 소장가라고 소문이 났던 사람인데 한 개도 못 건지고 싹 다 타버렸거든요.
그래 내가 위문을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는 세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더라구요. 스님들은 항상 그런데 관심이 있으니까요. 그거 관심 빼버리면 스님들 뭐 사실 뭐 있습니까, 그래 뭘 깨달았냐 그러니까, 불이 다 타고 나서 그날 저녁에 이쪽에 또 자기가 쓰는 방이 또하나 있는데 거기 와서 저녁에 마음도 심난하고 그래가지고 평소처럼 붓글씨를 썼다는 거예요. 붓글씨를 척 쓰고 있다가 깨달은 건데 ‘야, 이 형상 있는 건 다타는데 형상 없는 건 안타는구나. 안타는 게 또 있구나.’ 이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평소에 스님들 맨날 하는 소리지. 그런데 그것이 얼마만치 가슴에 와닿느냐 하는 것은 또 천차만별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일을 겪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아 그 근사한 소리 아니요, 그렇죠? 스스로 체험하고 하는 소리라. 모양 있는 건 다타는데 모양없는 건 안타더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뭐 굉장히 값어치 있는 것, 남이 다 좋아하는 그런 중요한 물건들을 다 태웠는데, 그 태우고 말면은 곤란하다 이거예요. 뭔가 거기서 건지는 게 있어야 된다 이거예요 건지는 게, 뭐 잿더미 속에서 건지라는 게 아니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거기서 태워버린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거기서 건져야 된다, 어떤 깨달음의 어떤 안목을 거기서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병을 하루를 앓더라도 그냥 앓고 말아선 안되요.
병을 앓는 대신에 거기서 뭔가 느낌이 있어야 되고, 나아가서 깨달음이 있어야 되고, 그 나름의 거기 어떤 체험을 통해서 보다 더 슬기로울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돼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서 유마거사는 당신이 한 번 아픔으로 해서 상당한 철학이라고 할까요. 진리를 거기서 표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권의 경이 이렇게 탄생이 되고, 이것은 또 오랜 세월동안 아주 뛰어난, 훌륭한 불교 정신, 부처님의 정신이 잘 표현됐다 라고 찬탄을 받는 하나의 경전이 됐다고요.
유마거사의 아픔이 방편이고, 부처님의 아픔 또한 방편이고 우리들의 아픔도 또한 방편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편품이예요. 이게 방편. 이게 하나의 수단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단이.
그래서 여기에서 뭔가 어떤 새로운 소득, 그동안 익지 않았던 그야말로 미증유한 소득이 있어야 된다.
어떠한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조금만 우리가 정신을 차리면요, 어떤 손해도 손해가 아니예요, 나중에 알고보면요.
이익도 또한 이익이 아니야. 손해가 손해가 아닌 사람은 이익도 이익이 아님을 알아. 이익있는 만치 손해가 있었고, 손해 보는 만치 이익이 있었어. 그 중요한 거 다 태웠지만 거기서 자기는 어떤 느낌과 그런 깨달음을 거기서 얻었다면 그게 그 말이 정말 가슴 깊이, 그 말대로 정말 가슴 깊이, 그 말대로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어떤 교훈으로 자기가 지닐 수 있다면은 이건 정말 어떤 물질적인 손해보다 더 값진 거예요. 사실 값진 거예요.
그게 이제 얼마나 갈지, 그게 이제 문제이긴 합니다마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병고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노병사 해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통 중에 하나죠. 누구나 겪는 것이고, 또 이 몸을 가지고 있다면 뭐 부처님으로부터 못난 중생에 이르기까지 다 겪는 것인데 그것을 정말 하나의 수단으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을 해야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분명히 어떤 소득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게 방편으로서 훌륭한 것이고 결코 그건 손해가 아니다 뭐 이런 결론을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방편이란 것은 이제 불교 안에서 또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하면은 사실은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방편의 반대말은 실이라 그래요. 실법이라 그럽니다.
진실이라 그러는데, 진실과 방편. 이걸 법화경 같은 데선 계속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법화경도 물론 방편품이 있습니다만.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서 80퍼센트는 방편이예요. 그다음에 20퍼센트가 실법이다, 진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중생들의 소견이 각양각색이고 근기가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어떤 근기와 인성과 관습과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이것에 일단 이것에 맞추어서 뭔가 교훈이면 교훈, 깨달음이면 깨달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이 자신의 본래의 어떤 마음을 일단 접어두고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어서 말할 수 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별의별 방편이 다 있는 거예요. 불교 안에 우리가 행하고 있는 불교적인 모든 일들이 거의 방편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사실 화두 들고 참선하는 것 까지도 방편이예요. 그것이 불교에서 뭐 최고급의 수행이다, 우리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최상의 수행법이다, 서슴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은 그 또한 방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마음을 찾는다든지 마음을 깨닫는다든지 하는 그런 일을 얻어내려고 하는 거죠.
꼭 그 일, 화두 들고 참선을 해야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방편이 되는 거죠.
기도를 해도 그게 가능하고 또 경을 봐도 그게 가능하고, 열심히 살림살이를 해도 역시 마음 깨닫는 일은 역시 가능해요.
꼭 화두 들고 참선을 해야만 된다 하면 그거는 방편이 아닐 수가 있죠. 그래도 방편인데 하물며 다른 것을 해서도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거는 화두 들고 참선하는 건 두말 할 것 없이 방편이예요.
그 방편이라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타의 거야 뭐 말할 거 없겠죠.
여타는 전부 다 방편이라고 해도 사실은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팔만사천 근기에 따라 팔만사천 법문이 있고, 그 팔만사천 법문이란 대개가 그 사람의 어떤 근기를 성숙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도 내가 말한 모든 법을 뗏목의 비유처럼 알라. 뗏목이라고 하는 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다, 이거예요.
강을 건널 때만 필요한 거예요. 뗏목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거든요. 뗏목을 탔다면은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라, 강을 건너고 나면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다구요. 강을 건너주는데 그렇게 고마운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버리거든요, 그게 방편이라.
강 건너는데 필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래 부처님의 모든 설법을 여벌유자(如筏喩者)니라.
지아설법(知我說法)을 여벌유자(如筏喩者)니라.
내 설법에 대해서 너희들이 어떻게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냐, 뗏목의 비유처럼 이해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뗏목은 뭡니까, 방편이다.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방편이다.
우리 쉬운 표현으로 모든 불교적인 그런 그 수행법이 결국은 이 한마음 깨닫는데 방편이다 이렇게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거 보면 방편이라는 낱말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마경에 있어서의 방편품의 의미는 앞에서 병고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한 거와 결국은 같은 내용이 되겠습니다. 드디어 이제 유마거사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어떤 분이냐,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그 분의 인격이 어떠냐 하는데 대한 이야기가 되겠죠. 그래서 주인공의 인격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마경의 주인공은 두말 할 것 없이 유마거사고, 그 유마거사 내지 주인공의 인격은 어떠하냐. 앞에는 부처님의 위대한 덕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여기서는 유마거사의 인격을 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이제 병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가는, 그래서 결국은 이 육신이란 어떤 것이고 또 불신이란 어떤 것이다, 부처의 몸은 어떤 것이고 우리들 갖고 있는 이 육신이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유마거사가 이 병을 가지고 쭉 이렇게 위문 온 사람들을 향해서 깨우칩니다.
그래서 아주 거창한 법문이, 유마거사의 법문이 한 번 있고나서 그다음에 이제, 그건 이제 일반 대중을 상대한 법문이 되요, 그리고는 그 다음에 정말 부처님 제자, 제자 한사람 한사람부터 유마거사의 어떤 법문이 소개 되어지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2-①
爾時에 毘耶離大城中에 有長者하니 名은 維摩詰이라 /已曾供養無量諸佛하야 深植善本하며/ 得無生忍하야 辨才無碍하고/ 遊戱神通하며 逮諸總持하야/ 獲無所畏하며 降魔勞怨하야 /入深法門하며 善於智度에 通達方便하야 大願成就하고 明了衆生의 心之所趣하며 又能分別諸根利鈍하며/ 久於佛道에 心已純淑하야 決定大乘하며/ 諸有所作에 能善思量하며
그 때에 비야리성 안에 한 장자가 있는데 그 이름은 유마힐이라 한다.
일찍이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네에게 공양하시되, 깊이 착한 뿌리를 심고 무생인을 얻어서 변재가 걸림이 없으시며, 신통스레 유희하고 총지를 얻어서 두려운 바가 없으시며, 마구니인 뇌로움을 항복받고 깊은 법문에 드셨으며, 지도에 잘 방편을 통달해서 큰 원을 이룩하셨으며,중생의 마음의 추창하는 바를 밝혀 알고, 또한 능히 모든 근기의 날카롭고 우둔함을 판가름하여 오랜 불도에 마음이 순숙하고 대승을 결정하신지 오래시되 모든 짓는 바에 능히 잘 생각하시며
爾時에 毘耶離大城中에 有長者하니 名은 維摩詰이라
(이시에 비야리대성중에 유장자하니 명은 유마힐이라)
이때 비야리 성중에 장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유마힐이라.
이시(爾時)에 비야리대성중(毘耶離大城中)에 유장자(有長者)하니 명(名)은 유미힐(維摩詰)이라 그랬어요. 그 때에 비야리대성, 바이샬리라고 그 성 중에 장자가 있었다. 이 장자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격이 뛰어난 분, 경제적으로 또는 덕화로, 지식으로, 모든 방면에 있어서 뛰어난 분을 흔히 그렇게 장자라고 불렀습니다. 장자가 있으니 이름은 유마힐이다.
번역을 하면 정명(淨名)그러죠. 맑을 정(淨)자 이름 명(名)자, 깨끗한 이름 참 이름 치고는 좋습니다. 이름 중에 벌써 이름 명(名)자가 물론 있습니다마는 청정한 이여 라고 하는 뜻입니다.
已曾供養無量諸佛하야 深植善本하며
(이증공양무량제불하야 심식선본하며
이미 일찍이 무량제불에게 공양하여 깊이 선의 근본을 심었으며
이증공양무량제불(已曾供養無量諸佛)하야 심식선본(深植善本)하며 그랬어요.
열 가지 덕이라고 이제 흔히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자르는데 따라서 열 가지가 넘기도 하고 한 열 댓가지가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첫째 구절이 이증공양무량제불(已曾供養無量諸佛)하야 심식선본(深植善本)이라 그랬어요. 이미 일찍이 무량제불에게 공양을 해서 깊이 선본을 심었다. 깊이 선본(善本) 선근을 심었다.
그러니까 모든 부처님에게 여기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유마힐이 보기에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받들고 공양 올린 거죠. 그러면 부처님이 되는 거예요. 유마힐에게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었을 것입니다.
그건 뭐 내가 유마힐이 아니니까 다 알 수 없겠습니다마는 여기에 그 인격으로 보아서 유마힐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님이다, 아미타불만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분은 아니예요.
무량제불(無量諸佛)이라 했지 않았습니까, 한량없는 부처님.
그렇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 내지 모든 사람들을 전부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 올리고, 이렇게 해가지고서 선본(善本)을 깊이 심었다. 선의 근본을 깊이 심었다.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었다면은 그 보다 더 선한 일이 없겠죠. 그보다 더 선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 심식선본(深植善本)이야. 선의 근본을 깊이 심었다. 그리고
得無生忍하야 辨才無碍하고
(득무생인하야 변재무애하고)
무생인을 얻어서 변재가 무애하고
득무생인(得無生忍)하야 변재무애(辨才無碍)하고 고것도 이제 한 구절이 되요. 무생인(無生忍)을 얻어서 변재(辨才)가 무애(無碍)다. 변재(辨才)는 여기 저 변(辨)자가 말씀언 들어있는 변(辯)자로 쓰기도 하고 이렇게도 통용을 합니다. 상관이 없어요. 이건 가릴 변(辨) 그 다음에 안에 말씀 언(言)이 있으면 변론할 변, 변호사(辯護士)할 때의 변(辯)자죠.
변재가 걸림이 없다. 말을 아주 잘 한다 이거예요. 그런데 말을 잘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흔히 언변이 좋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변재가 걸림이 없다. 자유자재하다 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도 진리를 깨달아야 돼.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아야 돼, 그래야 제대로 말다운 말을 한다.
그럴 때 변재무애(辨才無碍)예요. 말을 더듬지 않는다. 뭐 청산유수처럼 한다, 그 뜻이 아닙니다. 절대 그 뜻이 아니예요.
설법제일 부루나라고 하는 분도 설법을 잘해서 부루나다, 말하자면은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해서 설법제일이다 그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법을 전하러 가서 순교를 했습니다. 죽었어요. 목숨을 바쳐가면서 부처님 법을 전했어요. 저기 수로나라고 하는 서쪽나라에 아주 포악한 사람들이 사는 그 나라에 가가지고 불법을 펴다가 결국 그 나라 사람에게 맞아서 죽게 됐습니다.
불법을 펴다가 순교를 했어, 그래서 설법제일 부루나라고 그렇게 붙여진 거예요.
물론 말씀도 잘했겠지요마는 천상유수같은 언변을 두고 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무생인을 얻었기 때문에 변재가 무애라는 것이예요. 생사없는 이치를 깨달았다 하는 것입니다. 이치를 깨달아야 제대로 된 말이 나오는 거죠. 청산유수같은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아무 알맹이도 없고, 내용도 없고 그저 웃기기나 잘하고 한바탕 웃다가 끝나면 일어서면 아무 남는 것도 없어, 그건 변재가 아니예요. 그저 만담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만담이라고는 할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건 불교에서 말하는 설법이라든지 변재라든지 이렇게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치에 밝아야 되고, 여기서 말한 무생인을 얻었다면 더 말할 것 없습니다.
무생인(無生忍)은 지난 시간에 내가 말씀드렸죠. 인(忍)은, 어째서 참을 인자냐, 생사 없는 그런 지혜를 왜 참을 인자를 쓰냐,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은 지혜 그것을 참을 인자를 쓴 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 육신은 아파도 그 아픈 척을 안 할 수가 있거든요. 참고 아픈 척 안할 수 있다고요.
그 속엔 아픈 거예요, 내용은 아픈 거라, 아프지만 아픈 척 하지를 않고 태연한 모습을 지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걸 참는다고 그러거든요. 그렇다고 내용까지 안아프냐 하면 아니야.
그렇듯이 우리 육신은 생사가 있지만은, 우리 마음에, 내용에는 생사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참을 인자를 쓴다. 내가 이제 그런 말씀을 드렸죠, 중요한 내용입니다. 인(忍)자 하나가요. 불교의 어떤 생사 없는 이치를 깨달아서 알면 더 말할 것 없지만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아는데 열쇠가 되요. 요 인(忍)자 하나가.
불교는 걸핏하면 생사해탈, 생사해탈 그러지 않습니까, 생사해탈에 대해서 또는 성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은 없다 하더라도 말은 많이 듣잖습니까. 말은. 수없이 들어오거든요.
불교는 펼쳤다 하면 그저 생사해탈이고, 무슨 뭐 무생, 불생불멸 그런데 여기 인(忍)자가 생사 없는 이치, 또 생사해탈의 그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좋은 열쇠
아프다 이거예요 그런데 안아픈 척 할 수 있어 참고. 마찬가지로 생사가 없는데 생사가 있는 척, 육신은 생사(生死)를 받는다 이거예요. 다 생사 받았잖아요.
석가달마도 다 죽었어. 생사가 있는 척했어. 왜냐, 육신의 한계가 그러니까. 생사가 있는 척 했다 이거예요. 외면으로는.
그러나 내면까지 생사가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야. 내면은 무생사야.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가히 생사해탈 생사해탈 생사가 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 이치가 없으면 생사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죠. 어떻게 말합니까. 뭐 누구한테 그렇게 뭐 사기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해서 당신들에게 무슨 소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렇게 하나같이 생사가 없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생사가 없다, 했다고 누가 존경하는 것도,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분명히 생사가 없어요. 생사가 없어, 다 누구에게나 생사가 없는 그런 소지를 다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는데 그걸 단 우리가 체득을 못해서 그것을 제대로 수용을 못하고 그냥 이 육신이 죽을 때 따라서 죽어서 그렇지.
죽음이 없는 것을 우리가 못 봐, 내 살림살이로 만들지 못해서 육신이 죽을 때 그것 뿐인 줄 알고 같이 따라 죽는 거예요. 그런 뜻에서 이 인(忍)자는 무생을 이해하는데, 무생의 이치를 이해하는 아주 좋은 열쇠가 된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지혜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지혜, 인(忍)을. 생사가 없는 지혜를 얻었다. 그래서 변재가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다. 그다음에
遊戱神通하며 逮諸總持하야
(유희신통하며 체제총지하야)
신통 속에서 노닐며 여러 총지를 얻어
유희신통(遊戱神通)하며 체제총지(逮諸總持)했다.
신통에 유희한다 이말이예요. 신통속에서 노닌다 이말이예요, 유희는. 신통속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냥.
육신통. 흔히 육신통 이야기하죠. 온갖 보통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우리가 신통이라 이야기 합니다. 이분이 유마거사가 그런 분이다 하는 거죠. 신통도 대단했다.
체제총지(逮諸總持)라. 여러가지 총지를 체(逮) 총지에 미쳤다, 이르렀다, 얻었다 이렇게 알면 됩니다.
어떤 데는 체득총지다 라고 되어 있는 데도 있어요. 책이.
총지를 체득했다, 얻었다.
총지는 우리가 흔히 다라니 다라니 하는 것을 번역하면 소위 총지가 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다 이거예요. 모든 것을 가진다. 요건 이제 대개 불법의 이치라든지, 세상이치라든지 요런 것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는 총지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도 빠뜨리지 아니하고 다 기억하고 있고, 불법이든 세속법이든 어떤 무슨 이치든 간에 다 알고 있는 것. 그리고
獲無所畏하며 降魔勞怨하야
(획무소외하며 항마노원하야)
무소외를 얻어 원수도 항복받고 마구니를 항복받는다
획무소외(獲無所畏)하며 항마노원(降魔勞怨)했다, 그랬어요.
무소외(無所畏)를 얻었다. 두려운 바가 없음을 얻었다. 아무것도 두려움이 없다 이거예요 이 유마거사는.
유마거사는 아무것도 두려운 바가 없다. 그래서 원수도 항복받고 마구니를 항복받는다, 마구니를 항복받고, 원수를 항복받는다. 노(勞)자는 수고롭게 한다 그런 뜻이지만 항복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원수와 마구니들을 다 항복받는다, 아무도 두려운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入深法門하며 善於智度에 通達方便하야 大願成就하고 明了衆生의 心之所趣하며 又能分別諸根利鈍하며
(입심법문하며 선어지도에 통달방편하야 대원성취하고 명료중생의 심지소취하며우능분별제근이둔하며)
깊은 법문에 들어가며 지혜의 바라밀로써 방편을 잘 통달하야 큰 원을 다 성취하고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바를 환하게 안다 또 능히 모든 근의 영리하고 둔한 것을 능히 분별한다
입심법문(入深法門)하며 선어지도(善於智度)에 통달방편(通達方便)하야 대원성취(大願成就)하고 또 명료중생(明了衆生)의 심지소취(心之所趣)하며 우능분별제근이둔(又能分別諸根利鈍)하며 거기까지를 이제 하나로 보기도 하고 그래요.
입심법문(入深法門)이라. 깊은 법문에 들어갔다. 도의 이치.
우리가 법문 법문할 때 어떤 사람들은 잘 모르고 이제 글월 문(文)자를 쓰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게 아니예요.
이 문 문(門)자를 써서 법문(法門)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를 들어서 뭐 스님이 설법하는 것도 법문, 부처님이 하시는 것도 법문, 누가 또 괜찮은 소리하면 ‘아, 좋은 법문이라’고 법문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왜 문 문(門)자로 쓰느냐, 진리의 문에, 법은 진리니까요,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하나의 수단이다 이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법문을 한다, 그러면 내가 법문하고 있는 그것이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하나의 길이 돼, 문이 된다고요. 바로 그것을 통해서 진리에 들어간다. 그래서 법문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 법문도, 우리가 법문이라고 하는, 부처님 말씀을 법문이라고 하거든요. 그 가르침을 통해서 진리의 문에 들어간다. 그래서 문 문(門)자를 쓰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런 깊은 법의 진리의 문에 들어갔다.
선어지도(善於智度)에 통달방편(通達方便)이다. 지혜의 바라밀, 도(度)자는 바라밀이라는 그런 뜻도 되죠. 지혜의 바라밀의 방편을 잘, 지혜의 바라밀에 방편을 통달했다. 그러니까 선(善)자는 잘했다 그런 뜻이 되요.
지혜의 바라밀로써 방편을 잘 통달했다. 아까 방편이야기는 많이 했으니까요. 그래서
대원(大願)을 성취(成就)했다. 큰 원을 다 성취했다.
이 불교에는 지혜를 참 중시합니다. 지혜가 근본이 되요. 지혜가. 그러기 때문에 지혜가 없으면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지혜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세상사도 그렇죠. 세상사에도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지혜는 물론 아니지만은 지혜를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원들을 다 성취하고
또 명료중생(明了衆生)의 심지소취(心之所趣)라 그랬어요.
밝게 안다. 명료(明了)는. 무엇을, 중생들의 마음의 갈 바를, 중생들의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저 중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저 중생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저 중생은 여기 와서 앉아 있어도 속에는 딴 생각하고 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을 이 유마거사는 환히 안다 이거예요, 환히 안다, 그게 명료예요. 중생의 마음에 나아갈 바를 환히 안다. 그래야 뭐 거기에 맞춰서 사실 법문을 할 수가 있겠죠. 이것만 해도 속에 뭘 생각하고 있는지 도대체 모르니까 참 답답하죠.
말을 하는 걸 제대로 소화를 하는지, 이 말이 저 사람한테 사실은 소용이 되는지, 관심이나 있는지, 듣기나 하는지, 사실 마음이 없으면은 안 듣잖아요.
바로 앞에 큰소리를 하면서도 큰 소리로 실컷 이야기 해놓고도 멀뚱멀뚱하게 있으면 ‘내 소리 내 말 듣는거야, 안듣는 거야’ 이러잖아요.
그렇다고요, 마음 없으면 안 들려요. 전혀 안 들려요.
그전에 그런 노래 있었죠.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려.’ 하하 안 들린다고 그러더니 정말 그래요, 말하다 눈을 딱 보면 듣는지 안 듣는지 우리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듣느냐’고 ‘내 소리 지금 듣느냐고’ 우리가 흔히 그러는데. 그렇습니다. 이 유마거사는요 부처님이나 그 덕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거의 뭐 세속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추앙 받는 분이예요. 또 그렇게 여기서, 유마경에서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마음에 나아가는 바를 환히 알고 있다. 그리고
우능분별제근이둔(又能分別諸根利鈍)이라, 또 능히 모든 근의 영리하고 둔한 것을 능히 분별한다.
요 두 구절이 참 좋은 대목이예요. 중생들의 마음 속에, 상대의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고, 또 요 정도 가르치면 되겠다, 요렇게 가르치면 되겠다 안되겠다. 아 이것은 저사람이 둔해서 소화를 못한다. 이건 뭐 영리해서 충분히 소화하고 남는다. 이런 이야기는 벌써 저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 안된다 이런 것들을 환히 이 유마거사는 알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적절하게 법문을 할 수가 있겠죠. 그 다음에
久於佛道에 心已純淑하야 決定大乘하며
(구어불도에 심이순숙하야 결정대승하며)
오랫동안 불도에 있어서 마음이 순숙하여 대승을 결정하며
구어불도(久於佛道)에 심이순숙(心已純淑)하다. 오랫동안 불도에 있어서 마음이 이미 순숙(純淑)하다. 순은 순일하다, 다른 게 잡된 게 섞여있지 않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숙자는 맑다, 깨끗하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순일하고 맑다. 그러니까 다른 게 섞여있지 않으니까, 불도 이것만이 유마거사의 관심사다 이거예요. 다른 데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말숙할 수 밖에 없지. 단순하고. 순일하고. 맑아서,
결정대승(決定大乘)하며, 대승을 결정하며, 대승을 결정한다는 말은 뭔 말인고 하니 오랫동안 이 불도에 마음이 순일해 있었기 때문에, 불법에 굉장히 마음이 오래 젖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 불교의 여러 가지 단계의 교리 가운데서 어떤 것이 큰 가르침이고 어떤 것이 작은 가르침이고 어떤 것이 대승이고 어떤 것이 소승이고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것들을 환히 꿰뚫어 알고 있다 이거예요.
그게 야 결정대승(決定大乘)이라, 대승은 큰 가르침 이예요.
큰 가르침을 결정해서 알고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돼야 되요. 우리 불자들이, 불자들이 자꾸 불교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자꾸 오랫동안 우리가 마음을 이렇게 쓰다보면은 소견이 열리고 귀가 열려요.
귀가 열리고 소견이 열려. 어떤 노보살님한테 이야기 들어보니까. 저기 뭐 어느 절에서 연례행사로 한 일주일씩 뭐 전국의 유명한 법사들을 다 초청해서 법문을, 여러가지로 10년 이상을 들어온거야. 또 다른데서 다니면서 듣고.
그래가지고 앉아가지고 별로 유식하지도 않은 노보살님인데 앉아가지고 들으면 스님 속을 환히 알고 있어. 환히 알고 있다고요. 그만치 벌써, 그 수준을, 설법하는 스님들 수준을 점검, 달고 있어. 달고. 그 정도로 안다고요. 그래 시시한 소리하면 ‘에이 또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고, ‘또 저런 소리 하고 있다’고, 앉아서 다 저울질 다 하고 있어요. 그래 말 함부로 못해요. 노보살님들이라고 해서.
워낙 많이 들어 가지고, 오랫동안 여기 보십시오, 오랫동안 불법에 마음이 이미 순숙해져 가지고서 순숙해가지고 그냥 환히 저울질 다 알고 있어.
저건 차원 높은 소리다. 저건 차원 낮은 소리다. 저건 보살들 꼬이려고 하는 소리다, 저건 뭐 좀 울거낼려고 하는 소리다. 그냥 말 떡 떼면, 운만 떼면 알아들어 버려. 운만 떼면 알아듣는다고요.
그래서 여기서 결정대승(決定大乘)이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 가장 크고 높은 최고의 가르침을 딱 붙들고 있다 이거예요. 결정해서 다, 어떤 것이 최고의 가르침인지를 다 확정짓고 알고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諸有所作에 能善思量하며
(제유소작에 능선사량하며)
모든 지을 바 있음에 능히 잘 사량하며
제유소작(諸有所作)에 능선사량(能善思量)하며, 모든 지을 바 있음에 이건 이제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또는 뭐 교화하는 일에 있어서, 또 그 다음에 자기가 하는 온갖 일들이 제유소작이야.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능선사량이라, 능히 잘 사량한다 이거예요.
우리가 모를 때면 무턱대고 막 하지만은 제유소작(諸有所作) 뭔일이든지 그냥 하라면 하고 말이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친구가 이러자면 이러고 저러자면 저러고, 그렇게 하지만 어때요,
자기가 세상살이든지 아니면은 불교적인 어떤 차원의 안목까지 가지고 있다면 결정대승(決定大乘) 최고의 어떤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은 누가 뭐라고 하자고 한다 한들 그거 함부로 따라가서 하지 않는다고요.
선능사량이야. 제유소작이야. ‘아 어디가면 용한 데 있단다’그러면 그냥 혹 해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정대승(決定大乘) 올바른 이치에 마음이 딱 이렇게 중심이 잡혀져 있는 사람은 ‘글쎄 그거 뭐 아무리 용하다 한들 내한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잘 동요가 안돼.
이게 제유소작(諸有所作)에 능선사량(能善思量)이라. 능히 잘 사량을 한다, 생각한다 이거예요. 잘 생각해서 해야 되요. 덥석덥석, 뭐 용하다고 해서 덮어놓고 덥석덥석 그냥, 부적 그거 몇 십만 짜리 쓱쓱 쓰지말고 손재수 들었을 땐 그것도 하는 것 괜찮아.(웃음)
괜히 다른데 가서 손재수 떼이느니 차라리 하하 불공해서 손재수 때우는 게 나. 사람이 손재수 들면요, 그거 안나가곤 못배기는 거예요. 그럴 땐 차라리 불공으로 하는 게 낫지. 이왕 나갈 바에는 음, 거 불공같은 게 다 손재수 때우는 길이예요. 그게 좋은 길이라 그게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게. 결국은 손재수 때우고 복 짓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 제유소작(諸有所作)에 능선사량(能善思量)이라는 말이 참 중요한 말이예요. 하는 일에 대해서 잘 생각을 해야 돼.
그게 그런데 생각하려니까 뭐 생각할 밑천이 있어야 생각을 하지. 아는 것이 있어야 생각을 하지. 뭐 기준이 있어야, 자기 나름대로 어떤 기준이 있어야 생각을 할 텐데. 기준이 없으니까 생각을 못하고 생각이 없으니까 덥석덥석 막 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은 배워야 돼. 배우고 자꾸 알아야 되고, 견문을 넓혀야 되고, 친구에게도 많이 듣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많이 듣고 하다못해 텔레비라도 자꾸 많이 봐야 돼. 심야토론 같은 것 특히 그런 것 좀 열심히 봐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말예요.
첫댓글 方便品 ... 모든 불교적인 수행법은 결국 이 한마음 깨닫는데 방편이다... 우리들의 아픔도 또한 방편이 돼야 된다는 말씀이 더욱 와 닿습니다.^^*....꽃물들다님! 전법하시고 녹취하시고... 너무 감사히 공부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_()()()_
저 태양이 어찌 밝지 아니한가!...차별심만 버리면 우리의 삶의 현장 이대로가 불국정토다...큰스님의 가르침 가슴에 새깁니다. 녹취법사 꽃물들다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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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이 하나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꽃물들다님....너무 수고하셨습니다..잘 공부하고 갑니다.._()()()_
우리들 자신이 불국정토로 만들면은 불국정토가 되는 것이고, 내 자신이 불국정토로 보지 못하고 불국정토로 수용하지 못하면은 불국정토가 되지 못한다... 큰스님, 깊이 새겨두고 살겠습니다. 꽃물들다님 고맙습니다 _()()()_
"모양있는 건 다 타는데, 모양 없는건 안 타더라"는 도반 스님의 말씀.....꽃물들다님, 유마경 물 들이고 갑니다. 감사요~_()()()_
불교적인 모든 수행은 이한마음 깨닫기 위한 방편이다.. 꽃물님! 더운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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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정토로 보는 마음의 눈을 ..큰스님 감사합니다 꽃물들다님 고맙습니다._()()()_
諸有所作 能善思量_()()()_
久於佛道에 心已純淑하야 決定大乘하며 (구어불도에 심이순숙하야 결정대승하며) 오랫동안 불도에 있어서 마음이 순숙하여 대승을 결정하며 ...... 생기 넘치시는 큰스님 사자후 감동이 다시 물결져옵니다! 꽃물들다님 덕분에 좋은 시간 선물받아서 늘 감사해요...... 잘 모시고 갑니다....^^*_()()()_
形像이 있는 것은 다 타고 형상이 없는 건 안타더라?,,,화재를 당하기전에 그 理致를 알아야 훌륭한 깨달음이지 다 타버린 후에 그 스님이 깨달았다면,,, 그건 '버스 지나간 뒤 손들기'와 마찬가지이지요,,,!
감사합니다^^
諸有所作 ,能善思量. 감사합니다 _()_
若至博奕戱處라도 輒以度人하고, 감사한 마음가득 _()_
-()()()-
지아설법(知我說法)을 여벌유자(如筏喩者)니라.ㅡ 내 설법에 대해서 너희들이 어떻게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냐, 뗏목의 비유처럼 이해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즉 방편이다.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방편이다._()()()_
_()()()_
강을 건널 때 뗏목이 필요한 것처럼 불법을 이해하는데 방편으로 삼아라.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_()()()_
_()()()_
나무유마힐소설경 나무유마힐소설경 나무유마힐소설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