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렬공 김방경 및 그 후예들의 혼인과 안동
1. 충렬공과 그 후예들의 혼인관계1)
1) 충렬공의 가계와 혼인관계
충렬공 김방경(1212-1300)은 안동김씨로『안동김씨대동보』2)(이하 족보)에 의해 그의 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경순왕→4자 은열(殷說)→3자 숙승(叔承)→장자 일긍(日兢)→장자 이청(利請)→장자 의화(義和)→장자 민성(敏成)→2자 효인(孝印)→방경으로 이어지며, 그의 모는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 낭장(郎將) 송기(宋耆)의 딸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그의 증조부 의화는 사호(司戶), 즉 읍사(邑司)의 호장(戶長)으로서 향리였는데, 조부 민성이 장야서승(掌冶署丞) 직사관(直史館)을 지내면서 중앙관료로 진출하였고, 부 효인은 과거를 거쳐 병부상서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리고 부와 동일한 시기에 과거를 통해 진출한 백부 金敞3)(초명 효공(孝恭))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에 이르렀다. 따라서 김방경은 무신집권기에 향리에서 성장해 중앙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다.
김방경과 그 후예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1)『고려사』권104 열전 김방경, 2) 그의 묘지명과 행장 및 후예들이 수록되어 있는『족보』이다.4)『고려사』열전 김방경에는 아들로 선(愃 혹은 瑄) ․ 흔(忻) ․ 순(恂) 3형제가 보이고,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익정(朴益旌)5)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선 ․ 흔 ․ 순과 사위 조변(趙忭) ․ 김원충(金元冲) ․ 권윤명(權允明) 등 3남 3녀를 두었고, 박씨 사후 손씨와 혼인하여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채의(蔡宜)와 혼인한 1녀 등 3남 4녀를 두었다. 그러나『족보』에는 경주 가씨(加氏) 서운관정(書雲觀正) 석윤(錫胤)의 딸과 혼인하여 론(惀) ․ 돈(惇) 두 아들이 더 실려 있고, 채의는 채홍철(蔡洪哲)로 나오며, 사위로는 김원충 대신 청주경씨 경번(慶蕃)의 아들 수(綏)가 실려 있다.
김방경의 부 효인이 고려 희종 4년(1208) 과거에 급제하여 전중시어사, 상서좌승 등을 역임하고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그의 혼인은 당대 명문가와의 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방경 자신의 혼인부터 일대 변화가 왔다. 그는 죽산박씨 박익정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박익정의 아들 휘(暉)는 원종 대 명재상이었던 인주이씨 이장용(李藏用)의 딸과 혼인하였다.6) 즉 김방경부터 당시 명문가와 혼인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자식들의 혼사도 당대 명문가들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먼저 그의 사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맏사위 조변은 횡천조씨로 조영인(趙永仁) →충(冲)→계순(季珣)→변으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신종 5년 9월 문하시중으로 졸한 조영인의 맏아들 준(準)은 최충헌(崔忠獻)의 아우 충수(忠粹)의 사위였고, 둘째 아들 충은 철원최씨 최선(崔詵)의 딸과 혼인하여 2남을 두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계순이다.7)
둘째 사위 지첨의부사 김광원(金光遠)의 아들 김원충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셋째 사위 권원명은 광산김씨 호구단자8)에 의하면 득공(得公)→제(濟)→윤명으로 이어지는 가계였음을 알 수 있고, 그의 딸이 광산김씨 김진(金稹)과 혼인하였으며, 김진의 모가 순흥안씨 안향(安珦)의 딸이었다. 넷째 사위에 대해서 묘지명에는 채의,『족보』에는 채홍철로 나오는데, 채홍철묘지명9)에 그의 부인이 첨의중찬 상락공의 딸이었다고 하므로 채홍철로 정리한다.
2) 아들과 후예들의 혼인관계
맏아들 선과 후예들의 혼인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은『족보』에 의하면 사재경(司宰卿) 순창설씨 설안(薛晏)의 딸과 혼인하여,10) 아들 자(資)11) ․ 승용(承用) ․ 승택(承澤) ․ 승우(承祐), 사위 나윤(羅允) ․ 이완(李完) 등 4남 2녀를 두었다. 설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들「김승용묘지명」에 설인검(薛仁儉)으로 나오므로 충렬왕 때 첨의참리를 지낸 설공검(薛公儉)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김선의 맏사위 나윤은 나득황(羅得璜)의 아들이라고 하므로 나득황→유(裕)→익희(益禧)로 이어지는 나주나씨 가계로 유의 형이거나 동생일 것으로 판단되며,12) 나익희는 여흥민씨 민지(閔漬)의 사위였다.13) 둘째 사위 이완은『족보』에 의해 수안이씨 이연송(李連松)의 아들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
『고려사』열전 김방경에는 선의 아들로 승용(承用) ․ 승택(承澤)14), 승용의 아들로 후(厚), 후의 아들로 칠우(七祐), 승택의 아들로 묘(昴), 묘의 아들로 구용(九容) ․ 제안(齊顔)이 실려 있다. 족보와 묘지명 자료를 이용하여 선 후예들의 혼인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승용은 충렬왕 13년 2월 첨의중찬으로 졸한 원주원씨 원부(元傅)의 아들 관(瓘)15)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후(厚) ․ 구(玖)와 사위 유지연(柳之演)16) 등 2남 1녀를 두었다. 후는 여흥민씨와 혼인하여 아들 칠우 ․ 칠림(七霖) ․ 칠양(七陽), 사위 박거실(朴居實) ․ 김군정(金君鼎) ․ 노숭(盧崇) 등 3남 3녀를 두었고, 구는 아들 성목(成牧) ․ 천순(天順)을 두었다.
승택은 경주김씨 김혼(金琿)17)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묘 ․ 면(冕)과 사위 임경유(任景儒)18) ․ 김광재(金光載)19) ․ 유지정(柳之淀)20) 등 2남 3녀를 두었다. 묘는 여흥민씨 민사평(閔思平)의 딸21)과 혼인하여 아들 구용22) ․ 제안 ․ 구덕(九德)23)과 사위 김사안(金士安) ․ 이창로(李彰路)24) ․ 최유경(崔有慶)25) ․ 허호(許顥) ․ 허의(許誼)26) ․ 이존사(李存斯) ․ 김첨(金瞻)27) ․ 김수천(金壽千) ․ 최자하(崔自河) 등 3남 9녀를 두었다.28) 면은 박인비(朴仁庇)의 딸과 혼인하여 구정(九鼎)과 사위 박진(朴震) 등 1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승우는 지연(之衍) ․ 지서(之瑞) 등 2남를 두었고, 지연과 지서는 각각 아들 윤(潤)과 유(儒)를 두었다.
흔의 후예는『고려사』에 실려 있지 않다.『족보』를 통해서 아들 승고(承固)와 사위 민적(閔頔)29) ․ 조련(趙璉) 등 1남 2녀를 두었음을 알 수 있고, 승고는 사위 의성김씨 김서지(金瑞之)의 아들 태권(台權) 뿐으로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의 사위 민적은 선의 아들 승용의 장인이었던 원관의 사위이기도 하였으며, 조련은 평양조씨 조인규(趙仁規)의 둘째 아들이다.
순은『고려사』에 아들로 영돈(永旽) ․ 영휘(永暉) ․ 영후(永煦)가 보이지만 영돈과 영휘의 후사와 관련된 기록은 없고 영후의 아들로 천(蕆)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족보』에 의하면 순은 양천허씨 허공(許珙)30)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영돈 ․ 영휘 ․ 사순(思順) ․ 영후와 사위 정책 ․ 백이정(白頤正) ․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 등 4남 3녀를 두었다.
순의 장인인 허공은 파평윤씨 윤극민(尹克敏)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언양김씨 김취려의 손자 김변(金賆)과 김순이 사위였고, 최징(崔澄)의 여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평양후 현(平陽侯 眩)과 조련이 사위였다. 조련은 김순의 형 김흔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맏사위 정책은 충렬왕 31년 찬성사로 과거를 주관하였던 청주정씨 정해(鄭瑎)31)의 아들이고, 이때 순의 아들 영돈이 급제하여 정해와 좌주 ․ 문생관계를 맺게 되었다. 셋째 사위 별리가불화는 원에서 중서좌승상(지정 4년, 1344) ․ 우승상(7년, 1347) 등을 역임하고 10년(1350) 죽었다.32) 둘째 사위 백이정은 남포인으로 충렬왕 6년 대사성으로 과거를 주관하였던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며, 원에서 많은 성리학 서적을 구해 고려로 돌아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 등을 가르쳤던 인물이다.33)
영돈은 이천신씨 신여강(申汝岡)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진(縝)과 사위 오원경(吳原敬)34) ․ 윤식(尹湜) 등 1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진은 문화류씨 류보발(柳甫發)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익달(益達)을 두었다.35) 류보발의 가계는 류공권(柳公權)→경(璥)→승(陞)36)→인기(仁奇)로 이어지며, 어머니는 충렬왕 26년 11월 도첨의찬성사를 지낸 광주김씨 김지숙(金之淑)의 딸이었다.37) 김지숙의 부 련(練)은 충렬왕 4년 참지정사로 졸하였으며, 그의 사위가 홍규였다.38) 류보발의 증조인 류경은 최씨정권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고, 조모는 남양홍씨 홍진(洪縉)의 딸이었으며, 홍진의 손자가 녹주(祿遒)이다.39)
영휘는 이성우(李成祐)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행(荇)과 사위 박광후(朴光厚))40) ․ 남약생(南若生) ․ 정시(鄭試) 등 1남 3녀를 두었다. 사순은 출가하였으며, 영후는 조부가 한강(韓康)인 청주한씨 한보(韓譜)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천 ․ 장(萇)을 두었다. 천은 현풍곽씨 곽원진(郭元振)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사겸(士謙) ․ 사렴(士廉) ․ 사안(士安) ․ 사형(士衡)과 사위 허강(許綱) 등 4남 1녀를 두었으며, 장은 아들 수(綏)를 두었다.『고려사』와 김방경묘지명에 보이지 않는 론은 아들 영조(永照)와 영요(永曜), 돈은 아들 영위(永暐)를 두었고, 영요는 아들 행(杏) ․ 송(松) ․ 백(栢)을, 행은 아들 길(吉) ․ 철(哲)을, 백은 아들 달(達)을 두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김방경과 그 후예들의 혼인관계를 통해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이 죽산박씨와 혼인한 이래 충선왕 복위교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계로 선정된 재상지종41) 가운데 경주김씨, 횡천조씨, 남양홍씨, 공암허씨, 여흥민씨, 언양김씨, 평강채씨, 평양조씨 등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어 왔으며, 재상지종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재상지종 가계와 혼인관계로 연결되었던 원주원씨, 문화유씨, 광주김씨, 청주정씨, 나주나씨 등과도 혼인을 하였다.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 안동김씨 김방경 가계는 고려후기 대표적인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김방경과 그 후예들의 혼인은 개경을 중심으로 중앙정계에서 일정하게 활동하면서 중첩된 혼인관계를 가진 집단 내에서의 혼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묘소도 당시 중앙정계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들의 묘소처럼 개성 주위의 지역에 마련하였다. 즉 덕수현(德水縣) 마산(馬山)의 김순42), 묵동(墨洞) 북쪽 산기슭의 김승용43), 덕수현 앙동산(仰洞山)의 김영돈44), 여흥 남쪽 발산(鉢山) 서쪽의 민사평처김씨 묘소로부터 서쪽으로 수십 걸음에 위치한 김묘 처민씨45) 등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다만 충렬공 김방경의 묘소는 안동 예안 西山之麓46) 즉 지례산(知禮山)47)에 썼다.
2. 충렬공 후예들의 혼인과 안동
앞에서 살펴본 충렬공 김방경과 그 후예들의 혼인 가운데 안동지역과 관련된 혼인만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광산김씨 예안파와의 혼인48)
충렬공 후예들과 광산김씨와의 혼인은 김광재와 김진의 경우이다.49) 김광재는 선의 차자 승택의 둘째 사위였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어, 김진 중심으로 정리한다.
고려후기부터 상경종사가 활발했던 광산김씨 여러 파계(派系) 가운데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번창한 계열은 호구단자를 남긴 김연(金璉)의 가계이다. 김연의 자 사원(士元)과 손자 진(稹)이 각기 순흥안씨 안향과 안동권씨 권윤명의 사위가 됨으로써 나중에 그 후손의 일부가 안동지방에 낙향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진은 안향의 외손과 충렬공의 사위였던 권윤명의 사위인 동시에 김방경의 외손서였으며, 자기 대에 와서 고려후기 명문가였던 원주원씨, 남양홍씨, 죽산박씨, 청주한씨 가문에 자녀를 혼취(婚娶)시킬 수 있었다.
여말선초의 왕조교체기에 진의 말자(末子) 천리(天利)의 차자 무(務)가 처부 안동김씨 김서린(金瑞麟)을 따라 장자 탄지(坦之)를 제외한 세 아들 숭지(崇之) ․ 정지(貞之) ․ 효지(孝之)와 함께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안동으로 내려온 3형제 가운데 숭지는 회(淮)와 간(澗) 형제를 두었고, 회는 효원(孝源)과 효로(孝盧) 형제를 두었지만 정지와 효지 형제 및 간과 효원이 무후(無後)함으로써 이 가계는 효로→연(緣)과 수(綏) 형제로 이어졌다. 김효로가 광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이며, 연은 후조당(後凋堂) 부필(富弼) ․ 읍청정(挹淸亭) 부의(富儀) 형제를, 수는 산남(山南) 부인(富仁) ․ 양정당(養正堂) 부신(富信) ․ 설월당(雪月堂) 부륜(富倫) 등 3형제를 두었다.
2) 의성김씨와의 혼인50)
충렬공의 차자 흔의 아들 승고의 사위가 의성김씨 김태권이다. 김태권의 가계는 김공우(金公祐)→용비(龍庇)→의(宜)→서지(瑞芝)→태권(台權)→거두(居斗)→천(洊)→영명(永命)으로 이어지는데, 의성현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기가(起家)하여 무신집권 말기에 무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김태권의 아들 거두가 김방경의 4대손서인 동시에 안동권씨 권한공(權漢功)의 외손서로서 처음 안동에 거주하였고, 손자 영명은 위에서 살펴본 광산김씨 김무의 맏사위였다. 김영명은 한계(漢啓)와 한철(漢哲) 형제를 두었고, 한계의 가계가 만근(萬謹)→예범(禮範)→진(璡)으로 이어지며 진(璡)은 약봉(藥峰) 극일(克一) ․ 귀봉(龜峰) 수일(守一) ․ 운암(雲巖) 명일(明一) ․ 학봉(鶴峰) 성일(誠一) ․ 남악(南嶽) 복일(復一) 등 5형제를 두었다.
3) 청주정씨 영남파와의 혼인
김방경의 삼자 순의 맏사위가 정책이다. 정책은 충렬왕 31년 찬성사로 과거를 주관하였던 청주정씨 정해(鄭瑎)51)의 아들이고, 이때 순의 아들 영돈이 급제하여 정해와 좌주 ․ 문생관계를 맺게 되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안동과 예천지역에 정착한 청주정씨의 선대(先代) 세계(世系)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2) 즉 정의(鄭顗)→현(儇)→해(瑎)→책(忄責)→오(䫨)→침(賝)→의룡(義龍)→약(若)→보문(普文)으로 이어진다. 보문의 5대조 정책이 김방경의 손서가 되면서 그 장자인 정오계는 외향을 따라 안동에 낙향하고, 차자 정포(鄭誧)계는 기호지방에 분포하였다. 정오의 4대손 보문은 위에서 살펴본 광산김씨 김무의 둘째 사위였을 뿐만 아니라 진보현의 호장을 세습하다가 여말의 이석(李碩) ․ 자수(子脩) 부자 대에 와서 비로소 잡과(雜科)와 전공(戰功)으로 이족(吏族)에서 사족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거주지도 본관에서 인읍(隣邑)인 안동부 속현 풍산현 하리(下里)로 옮겨간 자수의 손자 정(禎)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보문의 장자 인로(仁老) 계는 현손 사성(士誠) ․ 사신(士信) 형제 대에 와서 가세가 번창하였고, 차자 원로(元老)의 증손이 약포(藥圃) 탁(琢)이다.
기호지방에 분포하였던 정포의 6대손 응상(應祥)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사위가 됨으로써 성주에 정착하였고, 그 손자가 한강(寒岡) 구(逑)이다.
4) 영천이씨 예안파와의 혼인53)
영천이씨 예안파는 농암 이현보(李賢甫)의 고조 이헌(李軒)이 예안현 분천리(汾川里)에 복거(卜居)하면서부터 그곳이 세거지가 되었는데, 이현보의 외조 권겸(權謙)의 선조 권천(權闡)이 김방경의 매서(妹壻)였다고 하며, 이현보의 사위가 광산김씨 김부인(金富仁)이다.
충렬공 김방경이 안동에서 생장하였고, 출사 후에는 선영을 보살피기 위해 한때 고향에 내려가 옛 친구들과 어울린 적도 있으며, 그의 매서 강빈(姜份)과 권천이 안동의 토성이족에서 출사하였음 및 안동에 세거지를 마련한 성씨들과의 혼인관계 등을 통해서 김방경의 가문은 안동출신의 인사를 중앙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본관지에 강력한 사회적 ․ 경제적 기반을 보유함으로서 그들과 인척관계에 있던 타읍출신의 안동이주를 촉진시켰던 것이다54) 라는 지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방경의 후예들과 혼인관계를 가졌던 성씨들 역시 안동에 세거지를 마련한 여타 성씨들 예컨대 풍산류씨 하회파, 전주류씨 안동파, 고성이씨, 흥해배씨, 영양남씨, 진주하씨 안동파, 봉화금씨 예안파, 재령이씨 영해파 등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