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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15강 (1)
불교의 공부는 경전을 가지고 공부를 하던지, 또는 참선을 하던지, 또는 조사어록을 가지고 공부를 하던지 그것이 마음에 좀더 가까이 이렇게 다가서게 하려면 평소에 삶의 문제, 또는 인생의 문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정말 진실하게 관심을 가져본 그런 사람들, 또 그런 관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경전의 말씀이라든지 조사스님들의 말씀 같은 것이 빨리 와 닿습니다. 훨씬 빨리 다가섭니다.
너무 격식화되고 요식화된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부처님의 어떤 진실, 조사 스님들의 진실에 다가서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어록 같은 것을 보면 어떤 격식 또는 의식화 되어서 있지도 않은 형식, 이런데 얽매여 가지고서 본래의 진실을 망각한 그런 일 들이 많습니다. 사실은 사람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어떤 형식이나 제도, 어떤 높은 가르침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런 것을 통해서 엉뚱하게도 그런 것에 얽매여 가지고 그것이 인생의 진실인 것처럼 그렇게 잘못 보는 그런 폐단도 사실은 적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한 번 더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정말 처음부터 새롭고 진지하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는 그런 교훈들을 우리가 특히 임제록을 통해서 가까이에서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임제록에서의 원칙은 단순한 임제록이라고 해서 임제스님의 혼자만의 독특한 주장도 아니고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님의 사상에 그대로 들어맞고 입각한 것이고, 이것은 모든 깨달은 사람들의 지혜에 너무나도 잘 맞고 깨달음을 가장 잘 표현한
다시 말해서 인생의 궁극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으로서 접근한 경지를 가장 잘 표현한 그러한 한 예에 불과한 것이지 이것이 세상에 있지도 아니한 어떤 돌출한 임제스님만이 갖는 특별한 주위 주장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제록이 더욱 빛나는 것이고 또 많은 깨달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모든 부처님이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다 그 표현에 있어서 그분들의 깨달음을 아주 잘 표현했다고 이렇게 찬사를 받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를 하면 됩니다. 단순하게 임제스님만의 주장은 결코 아닌 것이죠. 만약에 그런 것이라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까닭도 없는 것입니다. 공인받아야 역사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이고 그게 시간이 오래 가면 전통이 되는 것이고, 전통이 깊은 것이 그게 전통적인 사상 이예요. 전통적인 것이 전통적이라고요. 전통적이지 못하면 역사를 통해서 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많은 비판과 어떤 검열을 받아가면서 살아남는 것은 말하자면 전통적인 사상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전통적인 것이고 전통적인 것이 곧 전통적인 그런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하는 그런 공식인 것이죠. 그래서 심등계의 어떤 위험성이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전통성이 없거든요. 전통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사상을 갖지 못했다하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거기는 거기대로 하나의 방편은 될 수가 있지만은 그게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서 다같이 공인받을 만한 그런 가르침은 되지 못한다. 하는 그런 것도 우리가 염두해 둘 필요가 있죠.
우리가 공부하는 조사스님의 깨달음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항상 우리 눈앞에 활달달하게, 활달달하다는 말을 아주 잘 씁니다. 활자는 살아있을 活자이고 달자는 고기가 헤엄칠 달자예요. 이걸 대개 발음하면 활달달이라고 하는데 활달달이라! 활발발 이라고 하는 것보다 활달달이라고 이렇게 되게 발음해주면 훨씬 맛이 나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앞에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활달달하게 전체 작용하는 거예요.
전체작용, 내가 글씨 쓸 때는 글씨 쓰는데 집중하고, 말할 때 말하는데 집중하고 들을 때 듣는데 집중하고 이게 전체 작용입니다. 그리고 활달달하게 아주 고기가 원기 왕성해 가지고 그냥 사정없이 꼬리치면서 자유자재하게 물속을 헤엄치는 그런 모습을 활달달이라고 해요. 우리가 어항 속에서 고기가 힘차게 헤엄치고 노는 모습을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거든요. 어쩌면 저렇게 자유롭게, 또 자유자재로 돌고 싶은 대로 돌고 저렇게 활달하게 생기있게 움직일까? 하는
우리는 앞에서 이렇게 활달달하게 전체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부분만 이렇게 작용하고 정신이 한쪽에 빼앗기고 부처라는 것이 그게 아닌데... 하고 우리 의식 속에 그동안 어떤 찌꺼기처럼 이렇게 고여 있는 그런 의식이 또 한쪽에 남아있고 글쎄 그건 그것대로 일리가 있는데~ 이러고 있으면 그게 활달달이 아니 예요. 전체작용도 아니 예요. 온몸 작용입니다. 온몸, 온 가슴으로 작용하는 것이죠.
그런 전체 작용하는 인간, 그런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부처란 바로 우리 눈앞에 지금 당장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예요. 전력투구하는 것입니다. 전력투구! 전기생(典期生), 전기사(全期死)! 그러거든요. 전기생, 전기사, 온몸으로 전체로 죽고 전체로 사는 거예요. 100% 살아가는 것 입니다. 한반은 살고 한반은 안 살고 또 한 반은 마음이 가 있고 한반은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그러면 그게 아니 예요.
반은 앞으로 갈까? 반은 뒤로 갈까하면 그러면 그 동작이 어떻겠어요? 그건 활달달한 것이 못돼요. 팍 차고 나가도 제대로 나가질까 말까하는데 반은 뒤로 물러서고 반은 앞으로 나가고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게 전체작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기생, 전기사! 통째로 다~ 죽고 죽을 때 철저히 죽고, 통째로 다 사는 거죠. 그게 전체 작용입이다. 식사할 때 열심히 식사하고, 빨래할 때 열심히 힘껏 빨래하고, 그저 그 일에 완전 투여하는 거예요. 내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기도하면 기도, 간경하면 간경! 그게 활달달한 거죠.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아름답게 보여요. 그렇게 살 때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는 바로 그 이외에 그런 인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여러분들이 듣고 하는 이 인간! 바로 이 인간이야 말로 참 부처다. 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러면서 가능하면 전체 작용으로 전신 투여해서 우리는 전력투구라고 그러죠.
전력투구,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하는 그런 살아있는 그 삶! 그 살아 있는 그 삶의 전체작용 이외에 참 부처는 없다. 불성! 불성하는 것도 사람 사람의 일상적인 작용,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 이 시간까지 얼마나 많은 움직임이 있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작용이 있었어요?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신구의 삼업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온갖 작용을 펼쳐왔습니다. 그 한껏 펼쳐오고 있는 이 삶의 표현, 이것 이외의 참 부처는 없다하는 것입니다.
아주 너무나도 명확한 그런 직선적인 표현이죠. 부처님은 그렇게 직선적인 표현을 잘 안 합니다. 은근히 돌려서 하고 우리가 법화경에서 익히 우리가 공부했듯이 무슨 상불경 보살을 등장을 떡 시켜가지고 아~ 그분의 평소의 수행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사람들을 향해서 절을 한다. 예배를 한다. 경을 보는 일도 없고, 참선을 하는 일도 없다. 오로지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부처님처럼 예배를 하고 “당신은 부처요!” “끝내 부처를 이룰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예배를 올립니다.
이렇게 은근히 이해를 시킵니다. 지극히 감동적이죠. 그러면 거기서 눈치 빠른 사람은 퍼뜩 깨닫습니다. 그러나 둔한 사람들은 아이고! 저렇게 공경스럽고 저렇게 정성스럽게 하는 구나! 그런 정성과 어떤 공경의 태도 거기에 또 이제 감동을 하고 그 진의(眞意)는 또 얼른 파악을 못하거든요. 그 진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태도에 있는 게 아니 예요. 요는 지금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 인간! 그런 살아있는 인간 외에는 참부처가 없다. 하는 조사스님 가르침하고 똑 같은 사상이거든요. 하나도 틀리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는 바로 직선적으로 표현을 하고, 경은 어떤 사람을 등장 시켜가지고 그 사람이 사람에게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뭐냐?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전부 부처로 인가를 하잖습니까? 그 상불경 보살을 통해서 만민을 통해서 수기 준거예요. “그대는 부처다”라고 하는 것을 수기를 주는 거죠. 수기를 주는 그 이야기나 여기에서 지금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살아있는 내 자신! 내 자신 이외에 참 부처는 없다.
그 말이나 뜻은 똑 같아요. 그런 것을 우리가 항상 염두 해 두고 우리가 기도를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이렇게 해야 사도 (邪道)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잘못 허깨비를 만나지 않는 거지, 안 그러면 허깨비만 쫓아다니는 거죠. 정말 살아있는 부처는 온데 간 데 없고.
오늘은 10-5부터 할 차례입니다.
10-5 돌아가 쉬는 곳
大德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하라 是諸佛之本源이요
대덕 이차식취농광영저인 시제불지본원
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
일체처 시도류 귀사처
是儞四大色身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脾胃肝膽도
이시사대색신 불해설법청법 비위간담
不解說法聽法하며 虛空도 不解說法聽法하나니
불해설법청법 허공 불해설법청법
是什麽가 解說法聽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한
시십마 해설법청법 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
是這箇가 解說法聽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시자개 해설법청법 약여시견득
便與祖佛不別이니라
편여조불불별
“대덕아!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모습[一切處]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地.水.火.風]로 된 이 육신은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비. 위. 간. 담(脾胃肝膽)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허공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그것은 그대들 눈앞에 역력하고 뚜렷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줄 안다면 곧 할아버지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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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德(대덕)아, 큰 덕을 가지신 이들이여!
여러분들 이외에 대덕이 또 없습니다. 뭐 부처님이시여! 라고 불러도 좋은데 조금 우호적인 표현으로 대덕아! 또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말은 대덕스님들 이시여! 진짜 학덕이 있고 수행이 깊고 하는 이들은 대덕스님! 이렇게 부를 때도 혹 있습니다. 여기서 대덕아! 하는 것은 임제스님이 모든 사람, 이 자리에 앉아서 법문 듣는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서두에는 내용의 심층 때문에 내용의 어떤 문제 때문에 서두는 읽지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보겠지만 부주, 말하자면 도지사예요. 도지사 왕상시라고 하는 사람이 이 법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임제스님의 어떤 법석을, 훌륭한 스님이라고 하니까 도지사인 부주라고 되어 있어요. 왕상시라고 하는 이가 말하자면 절을 마련하고 거기다가 이 스님이 교화를 펼 수 있도록 그렇게 여건을 조성한 것입니다.
부처님도 물론 그랬고, 부처님도 다른 이들이 다 그렇게 도와줬고, 그 다음에 선지식들도 거의 그렇게 했어요. 임제스님도 보면 부주왕상시가 그렇게 여건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법문이 행해지고 있죠. 그런데 거기에는 꼭 스님만 있는 것도 아니고 道에 관심 있는 사람은 거기에 다 있는 거죠. 승속을 가려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儞且識取弄光影底人하라
이차식취농광영저인
그대는, 또한 잘 알라. 야무지게 알아라. 하는 거예요. 취할 취(取)자까지 이렇게 붙이는 것은, 알아 취해라. 그 말이야. 그러면 야무지게 알라! 확실하게 알아라. 이 말이야. 무엇을? 농광영저인(弄光影底人),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 그림자는 광영이라는 말은 빛과 그림자가 아니고 그대로 그림자예요. 전부가... 이 몸뚱이입니다.
몸뚱이를 그림자라 그래요. 그러면 그림자를 농(弄), 희롱할 농(弄)자 이지만 조종하는 사람,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형을 우리가 인형극을 보고 있으면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죠. 그런데 위에서나 밑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봐야 돼! 그걸... 인형만 보고 있으면 정신 뺏기죠. 그래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을 자꾸 앞에서 안보이면 뒤에 돌아가서라도 봐야 돼. 어쨌든... 이 몸뚱이는 인형이야! 그림자야, 몸뚱이가 광영입니다. 그림자! 그림자는 조종하는 게 있다 구요.
조종하는 사람이. 우리가 어릴 때 손으로 그림자를 이렇게 개의 모양도 하고, 토끼의 모양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림자는 벽에 비추는 것이 있는 것이지만 그 그림자, 토끼를 만들고 개를 만드는 것은 손이라 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몸뚱이가 앉느냐, 서느냐, 말을 하느냐, 침묵을 하느냐 하는 것은 그 안에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 그게 농광영저인(弄光影底人)이라.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식취(識取), 잘 알라. 그 잘 알아야 돼요. 그림자를 잘 알아 가지고는 소용없어요. 또 그림자에 너무 관심을 기울여도 소용이 없어요. 그 안에 그림자를 조종하는 그 사람이 똘망똘망해야 그림자가 야무진 것이지 그림자만 자꾸 어떻게 바꾸려고 해봐야 그게 바뀌어 지는 게 아닙니다.
是諸佛之本源이요
시제불지본원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 그림자를 조종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제불의 본원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자리다. 모든 부처님이 바로 그 사람에게서 나왔다. 그 사람이 불모(佛母)야! 부처의 어머니야! 부처님의 근원자리라구요. 거기서 부처가 다 된 거예요. 그것 빼놓고 부처가 없다 이겁니다.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사람!
무엇이 몸뚱이를 조종하는지 그건 아무도 몰라. 다 알 것 같으면서도 가만히 찾아 들어가 보면 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모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요. 그 참 묘한 거야. 틀림없이 잡힐 듯 잡힐듯 해! 막연하게 생각해 보면 틀림없이 잡힐듯 하고 바로 옆에 있는 것 같고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진지하게 한번 찾아보면 그 놈이 안 잡힌다고요. 또 그렇다고 멀리 떠나가서 안 잡히는 것이 아니고
천만에 그런 것이 아니야. 항상 가까이 있어. 항상 가까이 있으면서도 잡으려고 하면 그게 잡히지 않아.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식취(識取)하라.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그 놈을 잘 알아야 된다. 그 놈은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야. 본원이야.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되면
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
일체처 시도류 귀사처
일체처, 갖가지 삶의 모습입니다. 일체라고 하는 것은 뭐야? 밥 먹고, 똥 누고, 빨래하고, 무슨 청소하고, 일 하고, 가고, 오고, 무슨 온갖 우리의 하루의 삶의 작용! 그게 일체처 예요. 착의끽반(着衣喫飯)! 옷 입고 밥 먹고, 그게 뭐라고? 그게 우리들의 도류(道流), 도 닦는 여러분들~ 인생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 도류라고 하니까 꼭 무슨 전문적으로 도를 닦는 그런 사람이라고 알면 안돼요.
알고 보면 전부가 전문적으로 도 닦는 사람이네.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이지 뭐 다른 겁니까? 도 닦네~ 하고 간판 걸어놓고 도 닦는 사람들, 결국 하나의 인생길을 가는 것이지 다른 게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 예요. 길을 가는 방법이 조금씩 그저 다를 뿐이야. 세속에 사는 사람도 똑 같고 전부 집집마다 다 다르거든요. 그렇게 다르듯이 다른 것 없다 구요. 그렇게 차이가 날 뿐이지. 역시 인생의 가는 길은 똑 같아요.
내가 늘 말하죠. 모든 사람은 다 구도자다. 다 도류다. 하는 것입니다. 도류의 귀사처라, 돌아갈 집이라! 돌아길 집이 뭐야? 최종목표다 이 말이야. 어디가 그렇다고요? 어디가 우리가 돌아갈 최종 목표라고? 예? 그걸 모르면 곤란하지 여기는 누가 제불의 본원이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주어하고 술어도 몰라요? 일체처 (一切處)가 할 때, 가 가 주어(主語)표시 아니 예요. 가, 아이고~ 참! 일체처가 시도류의 귀사처니라, 아이~ 이 문장 제일 간단하고 글자 몇 자 안되는데 어디까지 가고 있어? 아이고~ 국어부터 가르쳐야 될려나? 하하하하하~
일체처가 그렇다 그 말이여. 일체처가 여러분들이 돌아가 쉴 곳이며 돌아가 쉴 곳이 성불할 곳이고, 해탈할 곳이고, 열반할 곳이고, 극락 좋아하는 사람 극락이고, 천당 좋아하는 사람 천당이고, 해탈 좋아하는 사람 해탈이고, 성불 좋아하는 사람 성불이고, 대통령 좋아하는 사람이면 대통령 자리야. 그 자리가... 어디가 그렇다 구요? 일체처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일체처가 뭐라고 했지요? 살아가는 삶! 전부여. 밥 먹고, 옷 입고, 이렇게 말 하고, 주고 받는 대화하고, 웃을 일 있으면 웃고, 성낼 일 있으면 성내고 하는 바로 그 자리 그 순간순간, 그 자리가 바로 성불의 자리다 이거야. 극락자리고, 천당자리고, 돌아가 쉴 곳이다. 표현이 얼마나 근사해요. 돌아가 쉴 곳이다! 너무나도 다리가 아프니까, 나그네 노릇을 오래 했어. 피곤해! 얼른 집에 돌아가서 다리 뻗고 좀 쉬고 싶다 이거야.
나그네에게는 그보다도 마음에 간절한 게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저 얼른 집에 돌아가서 다리 좀 쭉 뻗고 목욕하고 좀 쉬었으면 하는 그곳. 그게 극락이고 그것 보다 더 바라는 바가 없다고요. 그게 귀사처야. 참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이것도 걸망지고 나그네 생활을 많이 해보아야 이 맛을 아는데 알려는가 모르지?
그 옛날에 차도 없고 걸망지고 투덜투덜 걸어서 여기서 저기 금강산이나 묘향산까지 올라 가려면 한달씩 걸려가지고 올라 가는데 쉬고 싶을 때 아~ 이제는 다 왔다. 하고 쉬고 싶은 그 자리!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귀사처라는 글자 석자가...
그런데 그렇게 멀리 고생해서 가서 쉬는 곳이 아니라 일체처가 그렇다 이 말이야. 바로 걸어가고, 출발하고, 모든 것이 그렇다.
是儞四大色身도 不解說法聽法하며
이시사대색신 불해설법청법
이것은 그대들의 사대색신, 지수화풍(地水火風),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땅의 요소, 이 네 가지 요소로 우리의 몸뚱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대색신이라고 그래요. 그것도 뭐라고? 불해설법청법이여, 설법하고 청법할 줄 모른다. 알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데 이게 사대색신이 하는 게 아니야.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있지만, 청법하고 있죠. 이 청법도 여러분들의 사대색신이 하는 게 아니야. 그것도 불해설법청법이여! 설법하거나 청법할 줄 모른다. 이 말이야. 불해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걸 못한다. 이 말입니다. 설법할 줄도 모르고 청법할 줄도 모른다.
脾胃肝膽도不解說法聽法하며
비위간담 불해설청법
비위간담, 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설법하고 청법하는 그 주체가 못돼.
虛空도 不解說法聽法하나
허공 불해설법청법
그러면 저 텅 빈 허공이 하느냐? 아니다 이거야. 허공도 불해설법청법이다. 이것이 유명한 법문입니다. 이건 내가 49제 법문할 때 아주 단골로 쓰는 법문인데 여기 나와 있네. 설법하고 청법할 줄 몰라.
是什麽가 解說法聽法고
시십마 해설법청법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하고 청법할 줄 아는고? 이 말이야. 야~ 큰 문제입니다. 다 물었어요. 이것 다 대답해야 되는데 이것... 여기서 지금 한 마디 척 나와야 되는데.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한
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
그대, 이(儞)자는 항상 그대,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바로 눈앞에 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한, 역력해! 분명해! 역역이라는 말은 역력하다. 꿈에 본 게 역력하다 그러죠. 환하다 이 말이야. 그렇게 환하면서 어떻게? 일개형단(一箇形段)도 없어. 물일개형단도 없으면서 외롭게 밝아! 홀로 밝아! 물일(勿一)이라! 한 개의 형체도 없으면서, 손톱만한 어떤 형체도 없으면서 그러나 이것뿐이야. 또
고명이라는 말은 이것뿐이다 이 말입니다. 외로울 孤자 아닙니까? 이것만이 이 세상을 환히 밝히고 있어. 그게 고명이야. 저기 자그마한 별이 하늘 높이 떠가지고 외롭게 비추고 있는~ 그런 고명이 아니고, 별이 외롭고, 달이 외롭고, 그런 외로운 게 아니 예요. 이것뿐이야. 온 우주에 이 하나뿐이라! 이거 밝은 것 지금, 형체는 없으면서 요것만 밝고 있는 그게 고명입니다. 이 고명이라는 말을 그렇게 알아야 돼요. 외로울 고(孤)자이지만, 하나니까 외롭죠. 한 개의 형체도 없으면서 홀로 밝은! 그렇게 하세요. 홀로 밝은!
是這箇가 解說法聽法이
시자개 해설법청법
이것이 비로소 이해하고 할 줄 안다. 그런 능력이 있다. 무슨 능력이? 설법, 청법하는 능력이 있다. 참! 기가 막히죠. 이렇게 분명하게 정말 선문에 맛을 들여 놓으면 경(經) 보고 싶지가 않아요. 유교 서적 보다가 도교서적 보면은 유교서적이 별로 맛이 없고, 도교서적 보다가 경을 보면 또 도교서적이 또 별로 맛이 없어요. 불교서적도 경을 보다가 선문을 보면 경이 별로 너절해! 그 궁극적인 뜻은 같은데, 그 표현이 너무 너절하고 완만해!
아주 그냥 가파르고 급경사가 돼야 그게 재미가 있거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야 그게 등산하는 맛이 있고 그렇다 구요. 내려 올 때도 그냥 가파르고 가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비탈이 심해야 등산하는 맛이 있거든, 완만하면 별로 재미가 없다 구요. 이 조사스님 말씀하고 부처님의 그 표현을 비유하자면 그렇습니다. 그 봉우리는 같아요. 봉우리는 같은데 그 오르내리는 코스가 그렇게 달라.
부처님은 완만하게 누구나 올라갈 수 있어. 올라 가다가 쉬지 않고.. 그런데 이 조사스님들은 그게 아니야. 올라가면 냅다 올라가야 돼! 어디 쉬려니까 발붙일 곳도 없어요. 잘못하면 미끄러지니까, 이렇게 아주 분명하게 밝혀 놨잖습니까? 그대 사대색신도 불해설청법(是儞四大色身 不解說法聽法)이라, 설법하고 청법할 줄을 몰라. 비장, 위장, 간, 쓸개, 이것도 설법하고 청법할 줄을 몰라. 또 허공도 설법하고 청법할 줄을 알지를 못하나니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하고 청법할 줄을 아는가?
그대는 눈앞에서 역력하면서 그러면서도 하나의 형체도 없는 홀로 밝은 이것이 비로소 설법하고 청법할 줄을 안다. 홀로 밝음, 눈앞에 바로 여기 있어요. 항상 멀리 떠나 있는 게 절대 아닙니다. 항상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참! 천하에 불교 공부하기 만큼 좋은 게 없어요. 무슨 도구가 필요하나? 무슨 건물이 필요하나? 앉을 방석이 필요하나?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고, 눕고 싶으면 눕고, 어디에서도 이 놈의 것은 항상 따라다니니까.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便與祖佛不別이니라
편여조불불별
곧 조사인 부처와 더불어 다르지 않아. 부처인 조사! 조사인 부처! 조불이라고 늘 이렇게 말하죠. 이게 선문에서 쓰는 아주 특수 용어입니다. 부처 佛자 보다도 더 고급 용어이고 조사라고 하는 글자보다도 더 고급 용어가 조불이야. 그 하나하나가 다 최고의 경지를 표현한 말인데 그 최고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 더블로 됐잖아. 조불! 언젠가 설명을 드렸지만 그 조불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 똑 같다. 이 말이야. 바로 여러분들이! 요것만 제대로 알면, 위의 것 설명한 것 이것 제대로 알고 이해하면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여여선당에서 하신 법문테잎이 없어서 부득이 문수원에서 하신 법문을 녹취하여 올려드립니다. 본문의 문장이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고 또 큰스님께서 강의하신 내용도 너무나 상세하고 광범위해서 단락을 나누어 올려드릴까 합니다.....감사합니다._()()()_
이차식취농광영저인(이且識取弄光影底人) 하라 시제불지본원 (是諸佛之本源) 이요 일체처 (一切處) 가 시도류 (是道流) 의 귀사처 (歸舍處) 니라 사대색신 (四大色身) 도 불해설법청법 (不解說法聽法) 하며 허공 (虛空) 도 불해설법청법 (不解說法聽法) 하나니 해설 이제 빚의 그림자를 희롱하는 정체를 알아내어라 이는모두 부처님의 본원이며 모든곳이 도를배우는 이들이돌아갈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로된 몸은 법을 말하고 들을줄 모르며 오장 육부도 법을 말하고 들을줄 모르며 허공도 법을 말하고 들을줄 모른다 ,,일윤월님,,,수고하셧습니다,,_()()()_,,
脾胃肝膽도不解說法聽法하며 虛空도 不解說法聽法하나 是什?가 解說法聽法고….비위간담, 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설법하고 청 법 하는 그 주체가 못돼. 저 텅 빈 허공도 설법하고 청 법할 줄 몰라,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하고 청 법할 줄 아는고?.. 눈앞에서 역력하면서 그러면서도 하나의 형체도 없는 홀로 밝은 이것이 비로소 설법하고 청법할 줄을 안다.... 一輪月님! 감사드립니다... _()()()_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신구의 삼업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온갖 작용을 펼쳐왔습니다. 그 한껏 펼쳐오고 있는 이 삶의 표현, 이것 이외의 참 부처는 없다하는 것입니다_()()()_
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모든 삶의 모습[一切處 = 着衣喫飯]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니라...一輪月님 수고하셨습니다..._()()()_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감사 합니다._()()()_
나무 관세음보살 ~ 나무 관세음보살 ~ 나무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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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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