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행촌수필문학회 옥천 문학기행 지난 11월13일(토) 전북 전주 행촌수필문학회 수필가 40여 명이 정지용문학관, 육영수여사 생가, 장계 시문학공원, 표충사(중봉 조헌손생묘소)일대 돌아보고 산수가 어우러진 청정의 고장의 문향과 충절을 흠뻑 맛보고 갔다. 행촌수필문학회는 120여 명의 수필가로 구성되어 년 2회 “행촌수필”이란 동인지를 발간한다. 특히 회원의 3분의1인 40여 명이 한 권 이상의 개인 수필집을 낼 정도로 문단에서 활동도 활발하다. 회원들은 이번 문학 기행을 통하여 정지용선생의 생가지로만 생각했던 우리 고장을 둘러보고 대청호반의 수려한 경관과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활동한 충절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다. * 행촌수필 문학회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김학교수(전 국제펜클럽 부이사장)가 지도, 현 회장은 고재흠임. 기행 후 회원의 한 사람인 김길남 수필가는 다음과 같은 수필 한 편을 보내왔다. * 김길남 수필가 약력 전주사범 졸업 전주화산초등학교 교장 으로 퇴직 전국서예협회 문인화초대작가 나라와 겨레를 지키려고 김 길 남 조국이 침략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하나는 전선으로 달려가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두려워 어떻게든지 뒤로 빠지려 할 것이다. 용감한 사람은 나아가 싸울 것이고 비겁한 사람은 도망칠 것이다. 오늘은 목숨 바쳐 싸운 애국자를 만나려고 충청북도 옥천의 표충사를 찾았다. 행촌수필문학회 가을 문학기행의 일원이 되어 충청북도 옥천을 방문했다. 정지용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방문한 뒤 중봉 조헌선생 묘소인 표충사를 찾았다. 모셔진 영정을 뵈오니 눈빛이 빛나고 풍기는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의기가 그만했으니 왜병을 무찌르고 여러 차례 대승했을 게 아닌가. 나약한 선비는 무서워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숨어 꼼작도 못했을 텐데 조헌 선생은 의병을 모아 전투에 임했으니 얼마나 강건한 분인가. 중봉 조헌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강하고 성격이 온순했다고 한다. 그러나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바로잡으려는 곧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있을 때 임금님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보고 옳지 못함을 극간하다가 파면을 당했다. 그 뒤부터 바른말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일신상의 안전을 꾀하고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려면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할 텐데 임금에게도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으니 그 기개를 알만하다.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인데 임금이 불공을 드리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것을 보고도 다른 신하들은 말 한마디 못하는데 하급 벼슬아치가 감히 극간을 했다. 그만큼 옳고 그름은 기어이 가리고 마는 선생이다. 임금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었지만 중봉선생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학문을 연구하고 바른 길을 걸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도요토미의 사신이 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말하니 조정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사신을 죽이라는 소를 올렸다. 1591년에는 대궐 앞에 나아가 일본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는 청을 했으나 들어 주지 않으므로 옥천으로 돌아와 스스로 병정을 양성하는 등 대비를 했다. 드디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길목을 차단하는 등 공이 많았다. 순찰사 윤선각이 자기는 공이 없는데 중봉이 공을 세우니 방해 공작을 하여 의병이 흩어져 버렸다. 다시 홍성지방으로 옮겨 의병을 모았다. 승장 영규와 힘을 합해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때 금산의 적이 충청도를 장악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를 공략하자고 권율에게 전했으나 다음으로 미루자는 전갈을 들었다. 이 낌새를 알고 왜군이 역습하자 700명의 의병과 함께 금산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이기기도 했다. 워낙 많은 병력에 밀려 모두 순사하였다. 시신을 모아 묻으니 이게 칠백의총이다. 중봉의 유해는 따로 표충사에 묻혔다. 이번에는 불리하니 다음을 기약하자고 권율 장군이 권했으나 나라가 위태로운데 내 목숨이 소중한가 하고 금산전투에 임해 장렬히 전사하니 그 애국심이 거룩하다. 아마도 이런 정신으로 온 국민이 싸웠더라면 나라가 왜군의 발 뿌리에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중봉선생 같았더라면 우리 병사들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게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어디로 숨어버리고 스스로 일어선 의병들이 왜군을 무찔렀다. 그 의병장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조헌 선생을 임진 4충신이라 한다. 돌아가신 훗날 중봉 선생에게는 문열(文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또 문묘에 배향되어 임금도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어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중봉 조헌 선생하면 의병장이고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혔다고만 알았었다. 이번에 표충사를 참배하고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바른 면모를 알 수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해준 해설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 만약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중봉 선생 같이 일어서지는 못할 것 같다. 나는 살아야지 하고 나서지 못할 게다. 혹시 죽음이 무서워 숨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애국심이 복받쳐 오르는 사안이 생긴다면 분연히 일어설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중봉 선생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중봉 선생의 애국심을 본받고 싶을 뿐이다. 자기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누구나 제 생명은 본능적으로 지키려 한다. 그런데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 많았다. 자기 목숨보다 나라의 운명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애국지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을 것이다. 어느덧 서산에 해가 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