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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극좌파가 본
–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비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언론매체에 담았던 것들이라 제 글들은 종종 시사성을 띱니다. 그러나 보니 다른 동물들도 그런데 우리도 이래야 하지 않느냐는 식의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되도록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때로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8쪽)
시사성을 띤다고 해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만약
게다가
그러나 이런 유사성을 보고 우리네 정치 성향이 개미 사회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개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진화의 역사를 걸어온 곤충의 일종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87쪽)
우리네 정치 성향이 개미 사회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냥 과학적 오류지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니다. 즉 개미와 인간이 계통학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오류(과학적 오류)를 범한 것이지 개미나 인간에 대한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오류(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다.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이 다음과 같은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호주제가 만일 부계로 이어지는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라면 생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대단히 어렵다. 자연계의 그 어느 동물 사회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부계란 찾을 수 없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06쪽)
호주제에 대한
남자가 연상의 여인을 원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기엔 그리 쉽지 않은 현상이다. 여자가 나이 어린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렵다. 정확한 통계자료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상의 여인을 흠모하는 남자들의 나이가 대부분 어린 걸 보면 결국 수태적령기의 여인을 찾는 듯싶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6쪽)
어떤 한 남자가 연상의 여인을 원하는 것은 진화 생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남자가 전체적으로 연상의 여자를 원한다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자의 키가 여자보다 크다는 명제는 “모든 남자의 키가 모든 여자의 키보다 크다”를 뜻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남자의 키가 클 뿐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연하의 여인을 원한다는 명제는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뿐이다.
문화적인 요소들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인간 세계와 달리 동물 세계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암컷들에게 선택권이 있기 때문에 수컷들이 배우자를 고르는 현상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그 성과가 적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6쪽)
침팬지와 달리 인간은 자식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암컷이든 수컷이든 짝을 고를 때 까다로워지는 이유는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거의 병적으로 깡마른 여자를 선호하는 요즘 남자들과는 달리 몰몬귀뚜라미 수컷들은 뚱뚱한 암컷을 더 좋아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21쪽)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요즘 남자들이 거의 병적으로 깡마른 여자를 선호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여자들이 남자들의 취향보다는 더 마른 체형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것은 여러 조사에서 드러났다. 같은 체형을 보았을 때 남자들은 뚱뚱하지 않다고 보는데도 불고하고 여자들은 뚱뚱하다고 판단한다. 또한 남자들이 주로 볼 것 같은 속옷 패션쇼의 모델은 여자들이 주로 볼 것 같은 겉옷 패션쇼의 모델보다 더 살이 쪘다.
여성이 경제력이 향상되고 사회적 지위가 오르면 더 이상 물질 제공자로서의 강한 남성을 원할 이유가 없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72쪽)
이것은 완전히 문화 결정론적 설명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홍적세(사냥-채집 사회)에 설계된 현대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음식이 풍부한 현대 산업국에서는 지방, 소금, 설탕에 대한 선호가 오히려 손해지만 인간은 여전히 맥도날드에서 대접하는 지방, 소금, 설탕 덩어리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설계되었던 과거에는 지방, 소금, 설탕이 훨씬 귀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경제력이 향상되더라도, 또한 현재에는 육체적인 싸움이 별로 없더라도 지위 높은 남자, 키 큰 남자에 대한 여성의 선호는 남아 있다. 이것이 진화론의 논리다. 유전자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유전자 풀이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세대가 필요하다.
종교가 스스로 모래판에 내려와 과학을 붙들고 씨름을 하려 할 때 나는 참 서글프다. 과학은 이른바 형이하학이지만 종교는 형이상학 중에도 으뜸이 아니던가. 과학은 모든 걸 증명해야 하는 멍에를 지고 있지만 종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믿음은 증명보다 훨씬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64쪽)
종교가 형이상학의 으뜸이라고? 종교가 과학에 맞설 때에도 최악이지만
종교는 형이상학에서도 최악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훌륭한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만큼 태평성대가 없었다. 자비롭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맡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군왕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체계가 없다는 사실은 정치학자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98쪽)
농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게 썼다. 군왕정치를 옹호하는 이런 말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몇 마디만 하겠다.
“자비롭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맡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군왕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체계가 없다”라는 말은 “인종주의와 반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나찌보다 더 좋은 사람들도 없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군왕정치나 군사독재와
같은 독재체제는 선출에서의 민주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더 훌륭한 사람을 뽑을 수 없다. 과거에 군주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영어는 배워서 나쁠 것 없고,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차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49쪽)
우리 스스로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쟁을 하지 않으면 결코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02쪽)
영어 배우는 것도 좋고, 깨끗한 경쟁도 좋다. 하지만
또한 깨끗한 경쟁을 해야만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도 말도 안 된다. 미국이 여러 면에서 세계를 제패한 것이 깨끗한 경쟁 때문인가? 그들의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나?
프랑스 사람들은 1주일에 서른다섯 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OECD 국가 중 우리 나라의 노동 시간이 가장 길어 단연 일등을 차지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게으름은 아름답다’, 302쪽)
한국의 과도한 노동 시간을 비판한 좋은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자 정치인으로는 보기 드문 지성이었던 미테랑도 고령화에 관한 한 결정적인 오수를 두고 말았다. 그는 1983년 실업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췄다. 일본이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 정부는 안이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편 것이다. 실패학의 개념을 제대로 도입하지 못한 나머지 1998년 프랑스 정부는 또다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은 38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여 세상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실질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령화의 악영향을 경험하고 있는 프랑스는 이미 2000년 현재 근로자 2명이 퇴직자 1명을 부양하고 있다. 2020년에는 근로자와 퇴직자의 비율이 1대1이 되며 그로 인한 연금재정의 적자 규모가 500억 유로(약 63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뒤늦은 대처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던 프랑스는 드디어 2003년 7월 연금개혁을 단행했다. 상처뿐인 훈장이지만 이제야 진정한 창조적 실패를 활용하기 시작한 셈이다.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46쪽)
프랑스의 35시간 노동이 게으름을 찬양하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에서는 좋은 현상으로 인용되고 있지만 노령화를 걱정하는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에서는 나쁜 현상으로 인용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늑대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늘 으르렁거리며 싸우지만 서로 부상을 입히는 일은 있을지언정 동종끼리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도 너무 쉽게 죽인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05쪽)
동물은 선한데 인간은 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단 선택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우선 늑대나 호랑이가 동종을 죽이는 비율과 인간이 동종을 죽이는 비율이 과학적으로 비교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적어도 동물이나 야만인(고상한 야만인)을 이런 식으로 미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자의 유아 살해는 인간보다 훨씬 많다.
정찰벌들은 거짓 공약을 남발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금방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39쪽)
정찰벌들은 거짓 공약을 남발할 이유가 없다. 단수배수성(haplodiploidy, 반배수성)이라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벌이나 개미는 자기 군체에 거의 무제한적으로 이타적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남을 속일 필요가 없다.
6월 6일은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현충일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주검 앞에 우리 모두 머리 숙이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65쪽)
그 순국 선열에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남한 또는 미국 정부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도 있다.
자연계에서 이처럼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킬 줄 아는 동물은 인간과 개미 그리고 꿀벌뿐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95쪽)
콘라트 로렌쯔의 『공격성에 관하여』라는 책에는 전쟁을 벌이는 쥐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마치 영국 버킹엄 궁전의 보초들이나 우리 덕수궁 수문장들의 교대 의식처럼 갈매기 부부의 교대 의식도 굉장하다. 바다에 나가거든 이러이러한 곳들을 뒤져보라는 둥, 새끼들을 돌볼 때는 이러저러한 점들을 특별히 유의하라는 둥, 그런 얘기도 많겠지만 명확하게 서로의 임무를 교대할 시간임을 알리는 기능이 더 크다고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32쪽)
인간과 같은 음성 언어가 없는 갈매기가 “바다에 나가거든 이러이러한 곳들을 뒤져보라는 둥, 새끼들을 돌볼 때는 이러저러한 점들을 특별히 유의하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농담이었나? 그렇다면 동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전문 생물학자가 왜 대중들에게 이런 헷갈리는 농담을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포유류가 그 옛날 물 속에 살던 동물로부터 진화되었기 때문에 수중분만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라는 주장이지만 그건 까마득한 옛 조상 때 일이다. 인간은 그런 수생동물이 뭍으로 올라온 후 여러 종들을 거쳐 태어난 동물이다. 그런 뭍의 동물에게 갑자기 물로 돌아가라는 것은 조금 억지스런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68쪽)
수중 분만이 좋은지 나쁜지는 산부인과 전문가들이 따져야 할 문제다. 단지 우리가 뭍으로 올라온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수중 분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증 유발 유전자’를 찾는 작업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코올 중독증이 병적인 문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랜 옛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83쪽)
알코올 중독증이 병적인 문제가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코올 중독증 유발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 코카인 사용이 백 년 밖에 안 되었다 하더라도 코카인 중독증 유발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
알코올 중독증 유발 유전자(genes for alcoholism)라는 말은 어떤 유전자가 대립 유전자(allele)에 비해 알코올 중독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큼을 뜻할 뿐이다.
물론 이런 유전자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낙태밖에 없어 보이지만(다운증후군이 있는 태아를 낙태하듯이)
또 그런 크고 작은 절멸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지구의 생물 다양성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그 옛날 비록 하찮은 단세포생물로 시작했을망정 지구의 생명은 끊임없이 분화를 계속하여 이렇듯 엄청난 다양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몇 번씩 큰 감소를 겪긴 했어도 현재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생물들이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52쪽)
공룡이 ‘지배했던’ 옛날에 비해 과연 지구에 생물 다양성이 더 증가했을까? 나는 아직 그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한 연구를 본 적이 없다. 현재에 과연 몇 개의 종이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물학자는 수백만 종에서 수억 종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의 대답을 내놓고 있다. 이런 생물학자들이 공룡 시대에 과연 몇 개의 종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합의된 대답을 내늫을 것 같지 않다.
같은 정당의 동료이긴 해도 결승전에 나가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제도적 모순이 그들을 비열하게 만든다. 평생을 살며 저지른 온갖 잘못들이 시시콜콜 다 드러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치명적인 과거가 드러나 정치 생명이 끊기기도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264쪽)
문제는 오히려 부패한 정치인들이 퇴출되지 않는 데 있다.
첫댓글 한 학자의 글을, 별로 굳어보이지도 않은 학자의 글을, 굳이 대목대목 짚어서 논파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더구나 운영자님처럼 매우 굳고 날카로운 학자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논리적 정합성을 완벽하게 갖춘 저술은 심지어 철학에 있어서도 별로 많지 않습디다. 물론 그래서 완벽을 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운영자님 같은 분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바는 아닌 듯 싶어서 말씀 드립니다. 혹 인민에의 오도를 막기 위해 쓰시더라도 "전문 생물학자가 왜 대중들에게 이런 헷갈리는 농담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표현하게 되면 오히려 설득력이 감해진다고 봅니다.
최재천 교수는 한국의 진화심리학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책, TV, 대학교 등에서)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발언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진화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제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최재천 교수에 대한 비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교수의 글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만큼 강력한 비판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말입니다.
빛(지혜)이 있기만 하면 어둠(무지)은 사라지니 빛이 굳이 어둠을 나무랄 필요까지는 없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인간이 암컷이든 수컷이든 짝을 고를 때 까다로워지는 이유는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고 하셨는데, 남성이 유일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결혼대상자처럼)와 치마만 두르면 모두 탐하는 경우 사이에는 문화적 요인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다고 일컬어지는 수컷의 속성에도 과연 투자를 많이해야 하는 까다로운 고려가 따를까요? 즉 '까다로운 짝고르기'와 암컷을 취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처절한 욕망 사이에는 일정한 골짜기가 있지는 않을까요?
남자가 단기 짝짓기(하룻밤 정사)와 장기 짝짓기(결혼)에서 사용하는 전략의 차이가 있죠. 남자가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은 결혼할 때 뿐입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인간의 까다로운 선택 행위인 결혼이 동물들의 짝짓기와 단지 전략상 차이 뿐이라는 설명으로만 가능하겠냐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단기짝짓기와 장기짝짓기가 구분되고 또 전략적 차이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진화심리학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 근본적 차별이 없다는 전제 없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 눈으로 보기에는 남성들이 엄청난 투자를 해서(=진지하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탐욕만을 부리면서 결혼을 합디다만....제 경우로 말하자면 돌이킬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서 받아들였고. 님의 추론은 인간이나 동물을 일률화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런 유전자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낙태밖에 없어 보이지만(다운증후군이 있는 태아를 낙태하듯이)"라고 썼는데 생각해 보니 알코올 중독 유전자를 찾아내면 그 지식을 다른 식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즉 다른 사람에 비해 선천적으로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 쉬운 사람)에게 술을 조심하라고 경고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지식을 이용해 알코올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 보험 가입을 못하도록 할 수도 있겠죠.
답변 같지는 않습니다만, 고맙습니다. <짧은 글>에도 여쭌 게 있습니다.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인간의 짝짓기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버스의 <마음의 기원>에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책을 읽었을 때는 비판적인 사고를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생물학적 관점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죠. 끄덕끄덕 거리면서 읽었는데, 지금 이덕하님의 비판의 글을 보며 또 끄덕끄덕···. 그저 제 무지가 창피할 뿐입니다.
최재천교수님은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 아니던가요?그 분은 철저하게 인간을 동물학적으로만 볼 수 밖에 없어요.비판의 여지가 있어도 그 분 노선은 그런거죠. 동물행동학자들 책을 보면 합의가 있는 이론이 아니라, 개인적 해석이 많은거 같아요.반증과 억지 여지가 있어도 그들은 그렇게 해석하는거죠. 다치바나 다카시가 책을 모두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그저 이 분은 이렇게 보는구나 라고 생각하면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