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이번 주부터 캄보디아의 사법체계와 국가기구 현황 및 인권상황에 대한 전반적 고찰을 담은 기사를 6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아래 글은 법의 지배 (Rule of Law)에 관한 아시아헌장 기초를 목적으로 2월 홍콩에서 열린 워크샵에서 발표된 주제문이다.
캄보디아 최근세사 상황 및 헌법

라오 몽 하이 박사 (사진: UPI)
캄보디아의 최근세 역사
캄보디아의 법치주의에 관한 국가 기구들과 그 기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캄보디아의 최근세사를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한 때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본토의 대부분 지배했던 제국이었다. 인도문화의 영향 및 그로 인한 문명화가 이러한 캄보디아 지배권 형성의 촉매제 역할을 했고, 법률 역시 마누법전(Manu-shastra)에 기초한 인도식 법률체제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의 지배권은 14세기부터 계속하여 감소했는데, 반면 베트남과 태국의 세력이 점차로 증대되어 갔다.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태국의 공동 종주권 하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부터 캄보디아는 베트남, 라오스와 함께 프랑스 제국의 식민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1920년대 초에 프랑스는 자국의 나폴레옹 법전에 기초한 형법과 민법을 캄보디아에 도입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와 같은 캄보디아 관습 중 일부는 이 새로운 법전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후로, 소송절차법 및 여타 다른 법들도 순차적으로 도입되었다. 여전히 프랑스 통치 아래 놓여 있었지만, 1947년 캄보디아는 절대왕정체제에서 다당제 민주주의 정부를 기초로 한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그 헌법은 또한 캄보디아인들의 기본권 및 자유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캄보디아에서는 사실상 두 가지 사법체계만이 작용했는데, 하나는 프랑스인 및 여타 외국인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캄보디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원체제는 1953년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주권을 회복해서야 비로소 폐지되었다.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캄보디아는 법치주의의 기본요소들을 수용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법전과 법규들도 개정되었지만, 프랑스적 민법체계는 크메르 루즈 정권이 권력을 획득해 무법지대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게 되는 1975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대로 작용되었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통치기간 동안) 단 하나의 법인 헌법만을 제정했고, 이마저도 본인들조차 지키려 하지 않았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식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국유화했다. 사유재산이나, 화폐, 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 전체가 시민들이 가혹한 규율 아래 마치 노예와 같이 강제노동을 하는 거대한 수용소로 변해버렸다. 당의 관리들로부터 행실이 바르지 못하거나 규칙에서 벗어난 행동, 또는 도둑들이나 게으름을 피웠다고 지적된 사람들은 혹독한 징계와 굶주림, 수감, 고문을 받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1979년 베트남 군대가 잔악무도한 크메르 루즈 정권을 축출한 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라는 새로운 공산주의 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가 이에 저항하면서 캄보디아는 다시 내전에 빠져들었다. 베트남 군대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은 점차 캄보디아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해나갔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는 베트남-소비에트식 모델에 기초한 사법체계를 도입했다. 법원이 설치되고 판사들도 임명되었다. 1982년에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공산주의 정권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했는데, 1951년 설립된 맑스-레닌주의 정당인 "캄푸치아(또는 크메르) 인민혁명당"의 지배독점(이 당이 정부 기관들을 완전히 지배했다), 생산요소의 집단화, 사유재산의 폐지 그리고 사회생활의 통제가 그 골자였다.
1989년에는 1982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헌법이 채택되었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은 일정 정도의 자유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였으며, 이전보다 공산주의 색깔이 보다 완화된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으로 국명도 개칭했다. 집단농장 구성원들에게 나누어 준 토지의 사유권이 헌법상 인정되었다. 다른 생산요소들에 대한 사유권도 인정되었다. 국영기업들은 사유화가 진행 중이다.
1982년 헌법 채택 후 정부는 가정법, 계약법, 토지법과 같은 많은 법률 혹은 법령들을 성공적으로 제정하였다. 그러나 형사사건이나 민사사건을 위한 소송절차 규정에 관한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판사와 검사들은 대개 교육을 위해 베트남으로 보내졌다. 학생들은 계속 법학과에 진학했고, 일부는 소비에트 블럭권 국가(주로 구 소련)로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공산주의 시절에 법학 공부란 학생들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학생들은 다른 학과의 진학에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원은 공산주의 정부의 한 부분으로, 판사들은 법원의 등급에 따라 지방 도지사 혹은 장관들보다도 힘이 미약했다. 경찰 역시 법원보다 우월했다. 사람들은 재판 없이도 수년 간 수감되거나 즉결심판을 통해 투옥될 수도 있었다.
1991년 마침내 캄보디아의 지루했던 내전이 끝났다. 오랜 기간 진행된 평화협상의 과정 끝에, 분쟁 중이던 정파들이 5개 강대국을 포함한 18개국 대표단과 함께 파리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가했고, 이 회의에서 두 개의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이 협정들은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의 18개월 동안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로 명명된 유엔평화유지군 활동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다.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는 평화유지와 치안담당, 그리고 보통선거를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파리평화협정(Agreement on a Comprehensive Political Settlement of Cambodia)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인권이 존중되고 법치주의에 의해 운영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게 되어있다. 그 협정은 강조하기를, 캄보디아의 최근의 비극적 역사로 인해 인권을 보호하고 과거의 정책들과 관행으로의 회귀를 막기 위한 ‘특별조치’들이 요구되었다(전문 마지막 구절)고 강조하고 있다. 관련 국제협정이 구체화되어감에 따라, 회의 참가자들은 무엇보다도 캄보디아 내의 기본권과 인권을 준수하고 존중하는 데 자신들이 헌신할 것을 제안했다.
캄보디아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존중하고 모든 관련 국제인권조약에 충실하며, 인권보호 및 그 증진을 위한 활동을 통해 캄보디아 시민 모두의 인권을 지원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과도기구 기간이 끝난 후에는 유엔인권위원회가 캄보디아의 인권상황을 세밀히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국제사회 또한 이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고 발전하는 데 지원하겠다고 서약한 점 역시 언급해두어야만 할 것이다. 인권 보호를 위한 독립적인 사법부를 세울 것이란 약속 역시 지켜졌다.
이 협정들에 따라 "캄보디아 국가최고평의회"(SNC)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캄보디아국(SOC), 크메르 루즈,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P), 푼신펙당 등 네 분쟁 정파들로 구성되었다. 과도기구 기간동안, 국가최고평의회는 캄보디아 주권의 실체였다. 국가최고평의회는 국가행정의 다섯 가지 중요한 영역인 외교, 국방, 재정, 안보, 정보에 직접적인 통치권을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에 위임했다.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는 현존하던 캄보디아 법률 중 필요한 것들을 찾았고, 법치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1992년 국가최고평의회로 하여금 형법과 과도기간 중 소송절차법을 제정토록 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는 "과도행정기 동안 캄보디아 내 사법제도, 형법, 소송절차와 관련한 규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법률은 일반적으로 "UNTAC 법률"로 알려져 있다. 다음 해, 국가최고평의회는 형사절차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법률을 'SOC법률'이라 부르고 있다.
다른 활동들과 병행하여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는 인권의식 고양을 위한 대규모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 목적 및 여타 활동들을 위해 과도행정기구는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했다. 이 일에 참여하고자 인권단체들과 자유언론이 탄생했다. 1993년 5월 헌법제정권을 가진 의회 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뤄졌다.
그러나, 두 번째로 강력한 분쟁 정파인 크메르 루즈가 평화정착 절차에서 빠져나가면서, 국제연합 과도정부와의 협력을 중단하고 선거를 보이콧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20개 정당들 중 4개 정당이 의석을 차지했다. 푼신펙당이 58석,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이끄는 개혁된 캄보디아국(SOC)이 51석을 차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사실상 국가 전 지역에서 행정과 안보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정파였다. 1993년 9월 의회는 헌법을 제정한 후 국회로 전환했다. 푼신펙당과 캄보디아 인민당이 연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과도행정기구는 모든 업무를 마치고 작은 팀만을 남긴 채 캄보디아를 떠났다. 인권관련 문제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엔인권센터에 넘겨졌는데, 이 센터는 프놈펜에 지부를 개설했다. 또한 캄보디아 인권을 위해 유엔 사무총장의 특별사절이 임명되었다. 이 소개글을 끝마치기 전에, 캄보디아는 혼자서 재건을 하도록 내버려진 것이 아니란 점을 첨언해야만 할 것이다. 과도행정기구 이후, 파리평화협정 조인국 및 여타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캄보디아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매년 총 미화 50억 달러의 원조를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최근까지도 법치주의는 개발이나 재건이라는 영역만큼 많은 관심과 원조를 받지는 못했다.
1993년 헌법
지금의 캄보디아 헌법은 매우 간략하다. 1993년 9월 처음 "제헌헌법"이 공표되었을 때는 고작 139개의 간략한 조항밖에 없었다. 이후 1999년 "개정헌법"은 158개 조항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 상원이 만들어졌다. 2004년 교착상태를 깨고 새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2003년 총선 결과, 헌법에서 규정한 정부구성 요건인 3분의 2 이상의 득표를 한 정당이 없었다. 오랜 교착상태는 푼신펙당이 여당인 캄보디아 인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200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두 정당의 지도부는 국회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기 위한 타협을 맺었으며, 이 때 국회가 "추가적인 헌법안"을 채택토록 했다. 이 법안은 기존 헌법의 개정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993년 헌법이 채택한 분리투표 방식을 취하지 않고 일관된 지도부 구성을 위한 "일괄투표"(package vote)를 채택하는 내용이었다. 이전 헌법(1999년)에 따르면 국회는 3분의 2 이상의 득표를 통해 먼저 대통령과 두 명의 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선출된 3인이 만장일치로 총리를 지명하는데, 사후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다. 여기서 선출된 총리가 국회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헌법안은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여, 총리와 국회의장이 자신들의 지위를 손쉽게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추가적인 헌법안을 채택함으로써 불합리함이 야기되었다. 이 추가 헌법안은 헌법절차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 개정이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헌법개정 절차를 위해서는 완전한 국회가 필요했는데, 당시엔 국회지도부가 아직 다 구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추가적 헌법안을 또 다른 헌법으로 보아, 이에 대한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이를 독재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 보고 있다. 1993년 헌법이 추가적 헌법안과 합치된다고 해도, 이는 헌법이라기보다는 기본적 원칙의 해설일뿐이다. 따라서 이 헌법안은 해석 및 그 상세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제41조를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사회의 좋은 전통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 어떠한 (표현,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정보) 원문은 "크메르 시민은 표현,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누구라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좋은 전통에 영향을 미치거나, 공공의 법률 및 질서 및 국가안보를 파괴하면서까지 이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다. 언론의 권한은 법률로서 정해진다"(Khmer citizens shall have freedom of expression, press, publication and assembly. No one shall exercise this right to infringe upon the rights of others, to affect the good traditions of the society, to violate public law and order and national security. The regime of the media shall be determined by law.)라고 되어 있음.
하지만 "좋은 전통"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 20조에 의하면 "국왕은 총리와 각료회의의 국가업무에 대한 보고들을 들을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공청회를 개최하도록 허가해야 한다."(The King shall grant an audience twice a month to the Prime Minister and the Council of Ministers to hear their reports on the State of the Nation.)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공청회에 참가할 사람을 찾는 일은 누가 책임지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제41조는 또한 "언론체제는 법률에 의해 결정된다"(The regime of the media shall be determined by law.)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언론법" 제12조는 "국가안보와 정치적 안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보"의 출판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헌법은 "국가안보"에 영향을 끼치는 표현과 언론, 집회와 출판의 자유를 금지하고 있지만, "정치적 안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렇다면 "정치적 안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헌법은 파리평화협약에 따라 지켜야 할 의무사항을 이행하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발전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헌법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법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이다. 헌법은 "유엔 헌장, 세계인권선언 및 인권과 여성권, 아동권과 관련된 국제협약과 규약들에 명시된 인권"을 인정하고 보호한다 (제31조).
헌법에서 사법권의 독립과 함께 권력은 엄밀히 분리되어 있다. 판사들과 검찰은 행정부로부터 독립된다. 최고 법률기관이자 국왕이 주재하는 최고사법위원회(SCM)가 임명과 징계의 권한을 가진다. 다른 헌법적 기구는 국회 및 상원의 양원이다. 국회는 정기적으로 총선을 통해 선출되며, 이렇게 구성된 의회가 정부를 구성한다. 법치주의는 기본권과 자유의 원칙이 헌법을 통해 보장될 때 더욱 견고해 지는데, 이들 기본권과 자유의 원칙에는 무죄추정의 원칙, 고문으로 획득한 증거의 무효화, 심증이 아닌 합리적 증거를 통한 유죄판결, 캄보디아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국왕과 법원의 명백한 책임이 포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