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편지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냇가의 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 수풀 드리워진 녹음(綠陰)을 기약하며 우리에게 또다시 봄은 시작됩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이야 무슨 생각을 가질 것이련마는, 지나치는 순간(瞬間)을 바라보는 내자신의 심정에는 언제나 새로움만이 남아집니다.
생활 자체에 파묻혀 자신의 위치조차를 망각하며 살다가도 불현듯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은 분명 하나의 경이(驚異)입니다. 경이로움으로 인하여 내 자신 모습들은 반추되고, 그리하여 잊혀진 자신의 바람들이 하나씩 생각되어질 때 내 자신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아, 그러나 요즘의 삶 - 이것은 진실로 바라던 나의 삶의 현실태이겠습니까? 기쁨과 더불어 슬픔조차도 떨구어 버려야 할 사문(沙門)의 가슴속에 어떤 외부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은, 결정코 자신 내면의 포기와 더블은 전면적 투신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인가요. 그럼에도 내 자신 영원히 채워지지 못할 마음 속 공간을 위해 의지적 작용으로서의 욕구(欲求)가 존재해 있다는 사실은, 어느 면에서는 바람직한 삶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II.
그날. 몹시도 바람 불고 고즈넉한 어둠이 내려 깔려오던 때, 그리고 아, 어떤 모를 힘에 이끌려 내딛게 되었던 산사(山寺)로의 첫걸음.
생각해 보면 벌써 오랜 시간(時間)이 지났습니다. 많은 이들의 생각이 변하였듯이, 많은 주변의 것들이 변하여 갔듯이 나 역시 많은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변화의 언저리에 놓인 채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분명 과거(過去)의 나이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는 채, 그럼에도 나는 그 '되어감 속에 놓여진 나'를 알아가며 오늘도 큰 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견적으로야 간혹 아주 간략한 책을 써서 출간했고 며칠 후에는 또 다른 책이 한 권 출판되기도 할 것이나, 그 모든 것은 나의 살아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던 나의 의지적 표현이었으며, 그 동안 내 자신 삶의 유일한 표면적 자취이기도 할 것입니다.
몇 달 전 통도사에서 거처를 이곳 서울로 옮긴 후 한가함 가운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간 특별한 목적과 계획도 없는 채 우연히 인도(印度)를 포함한 몇몇 나라를 돌아보기도 하였고, 다음달 20일 쯤에는 또다시 인도에로 몇 년간의 여행을 떠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도라는 광활한 대지는 나를 부르고 있는 건가요. 들을 표시할 울타리도 없으며, 숲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은 여인들이 그 짐을 시장에 가져갈 오솔길도 없는 나라. 모래밭의 몇 조각 노란 풀 더미와 지혜로운 늙은 새 한 쌍이 둥우리 친 오직 나무 하나 뿐인 테판다르 사막이 있는 나라 인도는....
그러나 떠남을 결심하고 떠남을 행하고자 하는 자에겐 떠남만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운 들녘의 땅을 떠나 막막한 대지에로 나아가는 침묵의 여행자에게 모든 대지의 광활함은, 사막의 차가움은, 그리고 무더위 속의 상념들은 떠난다는 의미 자체의 의미성을 아주 서서히 알려 주리라 생각도 됩니다.
III.
범접할 수 없는 영역(靈域)에 신화의 울타리를 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에 미리서부터 체념을 배워서는 안될 것임을 알기도 하였습니다. '공(空)한' 소식을 접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언제나 철학적 표현으로서의 매개(媒介, Vermittelung)의 측면이 내재되어 있음을 생각하곤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매개자(媒介者)의 출현을 나는 목메어 기다려 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사실 언제나 마음속에는 {유리알유희(Das Glasperlenspel)}의 영원한 고향, '카스탈리엔'을 꿈꾸어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리알유희'의 명수(名手) 크네히트. 아, 나의 상념 속에서 '카스탈리엔'은 꿈의 본처가 되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곳의 핵심부, 신비에 가려진 미지의 장소에 다가서기 위해 오늘도 나는 신비의 꿈을 꿉니다.
그럼에도 나의 가슴속에 역사성(歷史性)의 메아리는 지워지지 않기도 합니다. 현재의 공동적(共同的) 삶에 의거한 주체적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Hic) 그리고(et) 여기에(Nunc)' 존재하는 나. 아, 시간과 공간의 영속성 속에, 현재의 공통적 삶 속에서조차 주체적 미래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역사와 마주한 개개인의 책무(責務)라 할 수 있다면, 역사의 시간적 연속성을 살아가는 채 모든 순간은 삶의 진실한 현실로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IV.
보람 되이 살고 있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한 순간의 삶 속에는 침묵(沈默)이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침묵이란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 그리하여 진정으로 침묵할 수 있는 인간만이 참다운 순간에 침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마음 가득 타인의 행복을 그리는 것은, 자신 삶의 반추적 의미이자 자신 삶에의 무의식적 투영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가끔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고마웠던 삶의 그림자로서 생각될 것입니다. 이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시성(詩聖) 타고르(R. Tagore)의 시편을 인용하며 경쾌한 헤어짐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안녕(安寧)을 노래했으니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밤이 우리를 찾지 않을 때
그 기나긴 밤조차 잊기 위하여...."
THEN finish the last song and let us leave.
Forget this night when the night is no more.
안녕.
'91.3.30.
- 1991년 월간지 <현대불교>에 실었던 글임.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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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 시간들 ,, 그 속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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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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