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은 2012년 9월의 호국인물로 고려장군 김경손 선조를 선정, 9월 6일 오후 2시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서 후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양행사를 가졌습니다.
현양행사가 열린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전쟁기념관의 모습입니다.
행사장에는 김경손 장군의 현양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고
국가보훈처와 경주김씨중앙종친회 그리고 후손 문중인 대안군후 문간공파에서 보내온 헌화용 화환이 모여 있습니다.
국민의례와 장군의 공적보고 등에 이어서 각계인사의 헌화 및 분향에 들어가
후손을 대표하여 김병호 前숭혜전참봉이 헌화하고
중앙종친회 총재를 대신하여 김학종 종무이사가 헌화한 다음
후손 각 문중별 헌화가 이어졌습니다.
장군에 대한 경례로 이날 행사를 마치고
경주에서 버스로 상경한 후손들이 기념촬영을 한 다음, 전쟁기념관 측에서 마련한 다과회에 참석, 장군의 공적을 기렸습니다.
**** 김경손 장군은 평장사(고려시대 정2품 관직) 김태서의 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온화하고 관대하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대담하면서도 지략이 있었다.
1231(고종 18)년 정주(靜州 : 現 평안북도 의주군) 분도장군(分道將軍)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전 40여일 만에 정주성에 이르자 장군은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문을 나서 분전, 격퇴했다.
같은 해 9월 3일, 몽고 대병력이 귀주성으로 밀어닥치자 김경손 장군은 결사대와 함께 성 밖으로 나아가 선두에 있던 적장을 쏘아 넘어뜨린 것을 시작으로 4~5차례에 걸쳐 적진을 타격했다. 장군은 몽고군이 혼란에 빠지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오게 해 일제히 공격했고 몽고군은 그 기세를 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후에도 서북지방의 군사적 요충지인 귀주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몽고군은 4개월에 걸쳐 끊임없이 공격해 왔으나 김경손 장군과 고려군의 불굴의 항쟁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70에 가까운 몽고의 한 장수가 ‘내가 소년시절부터 수십 년 간 전투에 참전했지만 이처럼 맹공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은 경우는 본적이 없다’고 감탄했을 만큼 장군과 고려군은 용맹했다.
김 장군은 몽고군을 물리친 전공을 인정받아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1237년(고종24) 전라도지휘사로 있을 때는 이연년의 난을 진압하여 그 공으로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1249년, 장군의 명망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꺼린 실권자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백령도로 유배당했고 2년 후인 1251년, 최항이 정적을 제거할 때 함께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