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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돈 안 가져왔다고 또래 집단폭행…무서운 중학생들
SBS
기사입력2018.03.22 오후 9:02
최종수정2018.03.22 오후 9:04

<앵커>
경기 구리시에서 중학생 한 명이 또래 학생 8명으로부터 집단폭행 당했습니다. 돈을 안 가져왔다며 코뼈와 이가 부러질 정도로 마구 때린 겁니다.
박찬근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달아나는 한 남학생을 한 무리의 학생들이 뒤쫓습니다. 이내 붙잡힌 학생은 목이 졸린 채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가해학생 8명은 피해학생을 붙잡아 이곳 골목길로 끌고 온 뒤 때리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가해 학생들은 피해 학생을 다시 인근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벽에 세워둔 채 번갈아 가며 발로 차고 팔꿈치로 얼굴도 가격 했습니다.
폭행은 20분 넘게 이어졌습니다. 이틀 전 이렇게 폭행을 당한 이 중학생은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가 됐습니다. 앞니가 부러졌고 코뼈가 주저앉았습니다.
[피해학생 : 코 왼쪽에 있는 뼈가 찌그러졌대요. 숨 쉬는데 잘 안 쉬어져요. (이가 아파서) 밥 같은 건 못 먹고 죽만 먹고 있어요.]
피해학생은 지난달부터 알게 된 가해학생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돈 상납을 요구받았다고 말합니다. 할당 금액을 못 채우자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겁니다.
이번이 두 번째 폭행이었고 가해학생들은 신고 못 하게 휴대전화도 빼앗았습니다.
[피해 학생 : 5만 원을 모으라고 했는데 모으지 않고 도망갔다고 때렸어요.]
경찰은 집단 구타한 중학생 8명을 강도상해 혐의로 입건했습니다.
[일부 가해학생 학교장 : (다른 건으로) 징계를 받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게 행동을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저희도 골치가 아프고.]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는 가해학생 가운데 폭행을 주도한 학생을 포함한 2명은 여전히 소재 파악이 안 돼 피해학생은 보복당할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영상편집 : 오영택, VJ : 노재민)
박찬근 기자(geu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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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학교 폭력 문제
2-4-1. 여중생 집단 폭력 동영상 사건
지난해(2006년) 12월 22일 인터넷에 유포된 여중생 집단 폭력 동영상은 한국의 학교와 교육에 대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학교 주변에서 폭력의 난무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런 폭력의 장면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유포시켰다는 것이 새롭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필자도 그 동영상을 다시 찾아서 보았었다. 폭력의 정도는 그렇게 심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문제는 그런 불의한 행동을 스스로 촬영까지 하여 인터넷에까지 올렸다는 사실이다. 피해 여학생을 때리고 협박한 언행은 장난이 아니라 가히 범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는 이제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자 소굴이 되어 간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피해 여학생은 시종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를 빌었으나 가해자/범인들은 용서가 없었다. 무엇이 잘못인지 간에 그렇게 동급생을 집단적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인격을 짓밟는 행동은 분명 범죄적이다. 그리고 범죄자들은 그들의 악행을 숨기기는 커녕 버젓이 세상에 공개한 것이 그들의 큰 잘못을 증명하고 있었다. 비록 15세밖에 안 되는 어린 사람들인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서 범죄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범행을 비난하기 보다는 그 집단적-사회적인 조건들과 선행 요소를 살펴보는 일이다. 범죄에는 개인적-사회적 책임과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번 어린 학생들의 경우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욱 문제가 된다.
범인들의 그런 엽기적인 행위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필자의 관점은 그런 부분적인 사건의 원인 규명보다는 좀 거시적으로 현재 이 나라에 만연한 학교 폭력의 정체와 원인 그리고 대책을 규명해 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범죄의 자기표현”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벌써 2004년부터 청소년 범죄가 스스로를 즐겨 표현하고 있었다. 즉 인터넷 사진이나 동영상 문화가 범람하면서 이런 일탈현상의 자기긍정이 자꾸 나타나고 있다. 이는 또한 인터넷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들의 범행을 공개하는 아이들의 큰 문제는 전혀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교육적 파탄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 적신호를 아이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부단히 보내고 있는 데 정작 그들의 양육과 교육의 책임이 있는 성인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단지 ‘청소년 문화가 성인문화 혹은 대중문화를 모방해서 그렇다’, ‘교육자들이 책임을 져야한다’, 혹은 ‘학교 경찰(school police)을 설치한다’ 등의 표피적인 설명과 대안 외에 근본적인 통찰력과 대안이 없다.
악한 일을 숨기는 것도 옳지 않지만 드러내는 것은 정말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이중적 악행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과 양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키운 가정과 학교의 책임은 어디까지 인지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2-4-2. 왕따와 폭력의 원인 = 입시경쟁, 성적 경쟁
언론에서 이미 발표한 것처럼 학교 폭력의 질과 양은 점차 보편적인 추세를 띠고 있다, 즉 남학생에서 여학생으로 그리고 고학년에서 저학년으로 폭넓게 퍼져가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체로 성인들의 폭력이나 영화 혹은 오락을 보면서 아이들이 폭력을 학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TV나 영화 혹은 인터넷 게임이 온통 폭력으로 칠갑을 하고 있고 있으니 이를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이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또 그런 가상세계를 떠나 현실도 그렇다. 특히 최근 유명한 탤런트 신혼부부의 경우 남편이 결혼 전부터 상습적으로 정혼자를 폭행해 왔고 임신한 부인의 배를 발로차서 아이가 떨어졌다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이를 보면 자라나는 아이들, 학생들이 과연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커갈 것인지 걱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언론이나 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은 한국의 경우 학교폭력이 거의 항상 동료들 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미국이나 독일의 학교폭력과 한국의 그것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서구의 학교폭력은 대부분 학교에 불만을 가진 학생이 교사와 학생, 다시 말해 교육여건 자체를 그 아이들은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사나 학생들에 대해서 무차별적인 총기난사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 혹은 일본의 경우 대개는 학생들 가운데서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 일어난다. 이는 달리 말해서 학생들 간의 폭력이라고 해야 한다.
폭력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한 피해 학생들이 다시 가해자로 탈바꿈하는 폭력의 악순환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가출 여중생을 유인해 성매매를 강요한 뒤 돈을 가로챈 1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그들 역시 죄의식이 희미한 상태이다. 그리고 청소년 간의 성폭행 빈도 역시 만만찮다. 필자가 아는 한 초등학생은 한 남자 중학생에게 동성애적 성폭행을 단한 뒤 정신이 이상한 상태가 되었었다.
한마디로 해서 이런 청소년 비행들은 모두 청소년들의 죄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이 만든 결과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개인보다는 사회에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왕따 카페에 올려진 사진 (2004.10)
인터넷에 같은 반 친구를 집단 따돌림하고 폭행하는 사진과 글을 모아놓은 ‘왕따카페’가 등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겁에 질린 왕따 피해자 J군이 같은 반 학생들에게 팔과 다리를 잡힌 채 학교 뒷동산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런 학교 폭력은 왕따에 수반되어 극심한 인간성의 파탄을 초래한다.
그러면 문제는 왜 청소년들이 죄와 악에 대한 인식이 없냐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경우가 최소한 5%는 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피해를 당한 학생의 비율이 초ㆍ중ㆍ고 평균하여 15%에 해당한다.
위에서 다양한 유형의 청소년 범죄의 형태가 고발되었다. 그리고 서구의 학교 폭력과 한국 혹은 일본의 그것이 다른 것은 청소년 간의 범죄가 주종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런 근본적인 이유로 필자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육의 입시제도에서 찾는다. 다 알다시피 아이들은 치열한 입시 경쟁, 성적 경쟁으로 내몰린다. 그런 와중에서 경쟁에 흥미를 잃는 아이들은 대개 학교, 즉 교사와 동급생으로부터 소외된다. 부모들 역시 그런 풍조를 더욱 조장한다. 자식에게 공부 못하는 친구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강요한다.
소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괴롭히고 싶어 한다. 이런 와중에서 왕따, 금품갈취, 폭력 등의 비인간적인 일이 발생한다. 교사들 역시 이런 일에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필자가 아는 한 고등학교 교사는 아이들이 일진(폭력 두목)에게 당하지 않도록 기도만 한다고 했다. 극심한 공부 경쟁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분석할 수도 있지만 이정도만 하면 독자들에게 이해가 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학교에서 자기 공간을 발견할 수 없는 아이들 중에서 의지력과 자부심이 강한 아이들은 폭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존엄성에 대한 자기평가와 객관적인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즉 자기들에 대한 학교 측의 평가에 만족할 수 없다. 교실 부적응의 형태는 폭력을 제외하고도 아주 다양하다. 그 유형별 분석은 다른 기회로 미룬다.
그리고 이는 꼭 공부 못하는 아이들 중에서만 폭력 범죄인이 발행한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 잘 생긴 아이들 그리고 잘 사는 아이들도 폭력의 유혹에 노출된다. 그리고 이런 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으로서 교실 부적응 외에 다른 요인은 주입식/객관식 수업과 평가에 있다.
주입식, 객관식 공부와 평가는 학생들의 주체적 사고력을 키우지 못한다. 그리고 개념 이해와 그에 대한 주체적인 서술이 아니라 오직 문제풀이만을 중점적으로 취급하는 학원식, 참고서식의 교육은 인간의 내면성을 파멸시킨다. 이런 교육과 학습은 인간의 자유능력을 말소하고 노예적인 순응만을 강요한다. 암기와 유형별 문제 풀이는 사유와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이런 것은 인간의 이론적, 실천적 능력을 약화시킨다.
사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죄와 유혹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는 주변 상황을 주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법과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로크(J. Locke)에 의하면 자유란 법을 지키는 능력이다. 법이나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성인(成人)이 아니다. 우리 교육은 이처럼 건전한 성인, 책임 있는 성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교육이다. 자율보다는 타율이 입시지옥에서는 유리하다. 그런 아이들이 성적이 좋다. 설령 자율적으로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그 지적, 도덕적 능력은 연마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공부한 것들은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거의 송두리째 잊어버린다. 그러니 대학교수들은 요즘 대학생들의 실력이 일천하다고 나무란다.
2-4-3. 학교폭력 해결과 전망
위의 분석에서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청소년 폭력과 범죄의 문제는 결국 잘못된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시 바삐 이 노예적인 교육을 바꾸어야 한다. 학벌주의, 출세주의에서 발생하는 교육의 폭력화, 비인간화는 청소년들의 정신을 좀 먹고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이는 개성과 창의성의 손목, 발목을 비틀어 놓는다. 공중파 TV에서 전국적으로 하루 종일 학교수업이 흘러나오는 나라, 거의 모든 신문에서 논술과 공부가 두어 장 씩 찍혀서 나오는 나라의 교육 현실은 어둡기만 하다.
12-02 : 대구 한 중학생의 자살에 관하여
교육평론 원고
저자 안재오
제목 : 대구 한 중학생의 자살에 관하여
1. 서론
대구의 한 중학생이 어떤 사악한 학우들의 지속적인 협박과 돈과 물건 갈취,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 학생이 생을 마감하기 전 쓴 유서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어린 영혼의 외롭고도 절절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이 땅에 아직 얼마나 더 많은 학교 교육의 희생자들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이 거짓교육의 슬픔이 끝날 것인지 심히 염려가 된다. 언제인가? 누구인가? 이런 아이들의 질곡과 멍에를 풀어줄 그 날은? 한국의 교육을 개혁하려고 하는 필자의 입장에 이번의 학생 자살사건은 다시금 교육 혁명의 당위성과 시간적 긴급성을
일깨워준다. 자기 아들을 잃은 비통한 아버지의 심정에서 이번 사안과 학교폭력, 왕따 등의 교육 소외 현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2. 본론
◎ 김군의 유서를 통해본 악동들의 소행
김군의 유서를 보면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잘 나와 있다.
자살한 김모(14·대구 수성구)의 유서
같은 반 학생들의 시달림을 견디다 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중학생 김모군이 남기고 간 편지에는 부모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이 절절히 묻어났다. (조선 2011-12-23)
다음은 김군의 유서의 요약이다. 더 이상 어떤 해석이나 분석이 필요 없는 한국의 교육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해야 할 명문이다. 이런 학생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더라면 훌륭한 문학가나 학자가 되어 자신과 사회를 빛낼 그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대구의 중학생 김군의 죽음은 전태일의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한국의 교육운동에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이 한국의 노동운동의 큰 기폭제가 되었다면 김군의 죽음은 교육운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될 것이다.
김군의 악(惡)한 친구들은 김군의 집에 강제적으로 들어 와서는 매일 라면을 마음대로 먹거나 심지어 가져가고 쌀국수나, 용가리, 만두, 스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간식등도 매일 먹거나 가져갔다. 그들은 또한 억지로 김군에게 컴퓨터 게임을 강요하여 김군은 매일 컴퓨터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게임에 쓴다고 김군의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김군의 등수는 떨어지고, 2학기에는 그 악동들이 김군에게 돈이 부족하다면서 억지로 노동을 하게 시켰다. 그들은 또한 김군에게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매일 김군의 집에 가서 때렸다. 나중에는 다른 애까지 불러 김군을 괴롭혔다.
악동들이 김군에게 부과한 세금은(게임레벨) 점점 더 늘고, 때리는 양도 늘었다. 또 그들은 수업시간에는 공부하지 말고, 시험문제는 다 찍으라고 했고, 물로 고문하고, 모욕을 하고, 단소로 때리고, 심지어 김군의 가족까지 욕하고, 문제집을 공부 못하도록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몰래 때리고, 온갖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는 등 그런 짓을 했다.
이렇게 악행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그 종말을 향하여 전진한다. 김군은 그들에게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부모나 형제 그리고 선생님에게도 그 사실은 알리지 못하고 홀로 고통을 받아 삼켰다.
12월 19일, 그들은 김군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다.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김군을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김군을 구타했다. 또 그들은 김군의 몸에 칼자국을 내려고 했고,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 김군의 가족들을 욕했다. 이에 그동안 벌레처럼 짓밟히기만 했던 김군도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라디오 선을 뽑아 김군의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를 김군의 어머니. 그녀는 아들이 타인의 강압에 의해서 물건을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김군을 무지하게 혼냈다. 아마도 그녀는 아들이 성적도 떨어지고 이상한 짓, 예를 들면 새 옷을 사달라고 하는 등의 요구를 자꾸 하니까 아이를 닦달한 것 같다.
이처럼 대구의 김군은 친구들의 괴롭힘과 부모의 비난이라는 안팎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 폭력과 죄악의 원인에 대해서 -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성
요즘은 학교 폭력의 질과 양은 점차 보편적인 추세를 띠고 있다, 즉 남학생에서 여학생으로 그리고 고학년에서 저학년으로 폭넓게 퍼져가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체로 성인들의 폭력이나 영화 혹은 오락을 보면서 아이들이 폭력을 학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TV나 영화 혹은 인터넷 게임이 온통 폭력으로 칠갑을 하고 있고 있으니 이를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이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
폭력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한 피해 학생들이 다시 가해자로 탈바꿈하는 폭력의 악순환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가출 여중생을 유인해 성매매를 강요한 뒤 돈을 가로챈 1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그들 역시 죄의식이 희미한 상태이다. 그리고 청소년 간의 성폭행 빈도 역시 만만찮다. 필자가 아는 한 초등학생은 한 남자 중학생에게 동성애적 성폭행을 단한 뒤 정신이 이상한 상태가 되었었다.
한마디로 해서 이런 청소년 비행들은 모두 청소년들의 죄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이 만든 결과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개인보다는 사회에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안재오저 『한국교육비판』82쪽)
그러나 이번 대구 사건의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 학생들의 가정환경이 도리어 좋은 집이었고 또 가해자들도 평소에는 전혀 폭력과는 무관한 애들이라는 점이 더욱 충격을 주었다. 조선일보 12월 27일자에 의하면 가해자 두 학생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김군이 남긴 유서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충격적 폭행·가혹행위 사실이 밝혀진 두 가해 중학생은 평소 너무나도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게 주변 진술이다.
성적은 35명쯤 되는 학급에서 15∼20등가량 했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고, 헤어스타일도 불량 학생들과는 달리 평범했다. 학교에서 벌을 받은 기록도 없다. 해당 학교 관계자는 "복도에서 무릎 꿇고 벌 받은 적 한번 없었고, 부모조차 '우리 애가 정말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며 믿지 못할 만큼 조용한 아이들이었다"며 "겉으로는 평범했기 때문에 학교와 가정에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고 제어하지 못해 일이 커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생활기록부에 서군은 '활동적이지 않고 조용함', 우군은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과 집중력이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올 3월과 9월에 있은 교내 학교폭력 위험 진단 조사에서도 둘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구교육청은 “두 학생의 출신 초등학교에도 확인해 봤는데 모두 문제를 일으킨 적 없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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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번 사건을 보고 필자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죄악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죄인들의 주변환경이나 과거 행적을 볼 때,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성, 기독교에서는 원죄(original sin)라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죄악성 밖에는 다른 설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원죄는 과거의 죄악이 없는 깨끗한 사람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러니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와서 한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평범한 두 학생이 어느새 악마가 되어 친구를 고문하고 몸에 칼자국을 내려 했고 그들은 라디오 선을 뽑아 김군의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의 원죄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인간의 숨겨진 근원적인 죄악성 때문에 과거에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범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죄악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원죄란 달리 말해서 죄악이 발생할 가능성을 말한다. 죄의 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범죄는 발생하지 않는다. 범죄의 계기를 크게 외부 환경적 요인과 심리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환경적 요인은 가난이나 폭력 혹은 마약 등의 외부 환경을 말하고 심리적 요인은 유혹, 질투나 지배욕 혹은 외로움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 학교 폭력의 현실적 여건
인간의 근원적 죄악성이나 원죄 등은 종교의 대상으로 접어두고 여기서는 현실적인 범죄, 특히 학교범죄의 시대적, 구조적인 특성을 파헤치는데 집중하자.
대부분의 언론은 한국의 지나친 입시위주, 경쟁위주의 교육 혹은 인성교육의 부재 등을 왕따, 학교폭력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필자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경쟁위주의 교육이 어떻게 그렇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필자의 저서 『한국교육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마디로 해서 이런 청소년 비행들은 모두 청소년들의 죄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이 만든 결과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개인보다는 사회에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왜 청소년들이 죄와 악에 대한 인식이 없냐는 것이다.
(...)
그런 근본적인 이유로 필자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육의 입시제도에서 찾는다. 다 알다시피 아이들은 치열한 입시 경쟁, 성적 경쟁으로 내몰린다. 그런 와중에서 경쟁에 흥미를 잃는 아이들은 대개 학교, 즉 교사와 동급생으로부터 소외된다. 부모들 역시 그런 풍조를 더욱 조장한다. 자식에게 공부 못하는 친구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강요한다.
소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괴롭히고 싶어 한다. 이런 와중에서 왕따, 금품갈취, 폭력 등의 비인간적인 일이 발생한다. 교사들 역시 이런 일에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안재오저 『한국교육비판』82쪽)
그런데 이번 사건의 경우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특히 두 가해자 중학생은 평소 너무나도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성적도 중간 정도였고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고, 헤어스타일도 불량 학생들과는 달리 평범했다. 학교에서 벌을 받은 기록도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필자의 이전의 학설이 완전히 옳다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나 요즘 공부를 잘하는 애들도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 사고를 친다는 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오히려 가해자들의 죄의식 없음이 문제라고 본다. 문제는 왜 청소년들이 죄와 악에 대한 인식이 없냐는 것이다. 왜 그들은 친구를 괴롭히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병적인 지배욕을 보였을까?
유치원이나 어린 시절 누가 다른 애를 때리면 어른들은 흔히 그 애를 다시 때리면서 “너는 안 아파?” 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 애는 “아파요” 라고 외친다. 그 다음 선생님은 “다시 그렇게 할래?” 하곤 물으셨다. 그러면 그 악동은 “다시는 안 그럴께요.” 라고 한다.
이처럼 개별적인 도덕적 상황 하에서 문답식으로 아이들의 공감력을 형성시켜 도덕성을 높이는 것이 아직도 도덕 교육의 가장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도덕의 근본이다. 이를 흔히 도덕의 황금률이라고 한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이를 “기소불욕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 즉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는 뜻으로, 자기 스스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도덕의 근본원리이다.
한국의 학교나 가정에서 이런 상황별 문답식 교육이 안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즉 다들 너무 바빠 그런 시간을 아이들을 위하여 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어떤 도덕적 행동 하나를 두고 교사나 부모가 아이와 같이 분석하고 판단해 줄 여유와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는 진도나가기 바쁘고 학생들의 수는 너무 많다.
집에서는 부모들은 맞벌이 한다고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다.
아이들의 폭력화는 주입식, 암기식, 객관식 공부를 주로 하는 한국적인 교육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정답의 산출만을 강조하는 평가제도가 문제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 내에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또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시험제도와 관련이 깊다. 이런 교육과 학습은 인간의 자유능력을 말소하고 노예적인 순응만을 강요한다. 암기와 유형별 문제 풀이 외에 하는 것이 없는 학교교육은 자연히 아이들의 사유와 판단력의 향상시켜 주지 못한다. 이런 교육적 환경은 인간의 이론적, 실천적 능력을 약화시킨다. 한국의 교육은 인간의 자율성, 주체성, 도덕성 보다는 순응능력만을 강요한다.
◎ 진학교육을 줄이고 실업 교육을 강화시키면서 인성 교육, 도덕성 교육을 더 시켜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문제는 학교에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있고 그들에게 모두 어려운 수학, 영어, 국어 등을 많이 가르치느라고 학교는 바쁘다. 이런 어려운 영어, 수학, 국어, 과학, 사회 그리고 기타 과목을 획일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확일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이고 아이들의 인성과 도덕성을 마비시킨다.
문제의 해결책은 필자가 평소 주장하는 실업교육의 강화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현재 초등학교 졸업자는 거의 모두 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이들을 어떻게 직업교육으로 유도할 수 있으면 인성교육의 여건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특히나 실업, 직업 교육은 현장 학습을 중시한다. 현장에서의 상사나 선배들과의 만남은 인격적 성숙을 가져온다. 요는 현재의 대량 학습은 학교폭력과 왕따를 필연적으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 담임기간 연장을 제안
특히나 담임들의 학생들에 대한 부족한 관심과 행동지도는 이런 불미한 사건을 많이 양산시키는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서 필자의 제안은 담임의 기간을 현행의 1년에서 2년 또는 3년으로 연장해 보자는 말을 하고 싶다. 현실에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하나의 아이디어로 제출하고 싶다. 필자의 독일 교육체험에서 보면 그곳에서는 초등학교 4년을 한 담임에게서 배우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 같으면 너무 한 담임을 오래 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 아이의 정신적, 도덕적, 감성적 관찰자 그리고 교육자로서 그만한 기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사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죄와 유혹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는 주변 상황을 주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법과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로크(J. Locke)에 의하면 자유란 법을 지키는 능력이다. 법이나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성인(成人)이 아니다. 우리 교육은 이처럼 건전한 성인, 책임 있는 성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교육이다. 자율보다는 타율이 입시지옥에서는 유리하다. 그런 아이들이 성적이 좋다. 설령 자율적으로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그 지적, 도덕적 능력은 연마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공부한 것들은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거의 송두리째 잊어버린다. 그러니 대학교수들은 요즘 대학생들의 실력이 일천하다고 나무란다.
3. 결론
현행의 한국 교육은 학생들의 지적, 도덕적, 정서적 능력을 키울 수 없다. 중학생들의 빈번한 학교폭력, 왕따 현상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생과 자녀 간의 대화부족, 도덕적 행동의 분석을 통한 판단력, 공감능력의 부족으로 발생한다. “기소불욕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 즉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는 도덕의 기본원칙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저지른 하나하나의 행위를 교육자와 아이가 같이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통해서 체화된다. 그러나 현행의 획일적인 진학교육은 대량의 학습을 요구하고 학교나 교사 그리고 학생들을 모두 혹사시킨다. 그 해결책의 핵심은 직업교육의 활성화에 있다고 본다.
첫댓글 교육 독립 연구소
단독] 돈 안 가져왔다고 또래 집단폭행…무서운 중학생들

작성자:안재오작성시간:19:08 조회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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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돈 안 가져왔다고 또래 집단폭행…무서운 중학생들
SBS
기사입력2018.03.22 오후 9:02
최종수정2018.03.22 오후 9:04

<앵커>
경기 구리시에서 중학생 한 명이 또래 학생 8명으로부터 집단폭행 당했습니다. 돈을 안 가져왔다며 코뼈와 이가 부러질 정도로 마구 때린 겁니다.
박찬근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달아나는 한 남학생을 한 무리의 학생들이 뒤쫓습니다. 이내 붙잡힌 학생은 목이 졸린 채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가해학생 8명은 피해학생을 붙잡아 이곳 골목길로 끌고 온 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