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깊이 알아야 할 것은 깨달아 밝고 즐겁게 사는 이 삶이 곧 불국정토라는 말에만 쫓아 이생만이 전부요,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비 지옥이 없고 이 육신의 삶이 끝난 뒤 내가 가야 할 곳이 다시없고, 무(無)로 멸해 버리는 것으로만 알아서 이생만 잘 살면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단견)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하거나 오도(誤導: 잘못되게 그릇 지도하여 이끌어 가면)하면 지옥 가기를 화살 같으리니 이런 변견(邊見) 즉 있다 없다 등 한편에 치우쳐 사로 잡혀 갖는 잘못된 소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는 지식만 가르치려고들 한다. 지식은 상대적인 것을 필요로 하므로 많이 알고 이해할 수록 더욱 자아에 애착하게 되어, 더 풍요롭고 편하게 내 잘 사는 데에만 급급하게 되게 되어, 상대를 만들고 세상을 복잡하고 이기적으로 살게 되는 경쟁의 무대로 만들어 가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참 지혜를 알려는 이는 드물고 절대지(智慧)를 지도하는 이는 귀하니 안타깝다.
절대지를 요달(了達: 理: 체: 정, 事: 차별상: 용을 의심할 것 없이 깨달아 통달)하여 계합하면 일체가 둘 아니며 모두가 참 나로 부터 임을 깨달아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는 보살도를 행하게 되므로 세상이 변화하여 다툼 없는 정토가 자연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 생각 어리석어 어두운 것이 미혹한 중생이요, 밝아서 슬기로우면 깨달은 부처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생각이 미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이 밝으면 佛이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근원에 이르렀을 때는 어떠한가?]
흙이 산을 받치고 있어도 그 산의 높이 모르고 물이 쉼없이 흘러도 스스로 그 흐름을 알지 못하니라
심(心)은 이름 붙여 부를 뿐 모양이 없어, 없이 있는 우주 근본 체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알 수 없는)한 묘하고 희유(불가사량)한 일체의 근본인 것으로 친히 계합(契合: 빈틈없이 꼭 들어맞아 합일)하지 않고는 이르를 수 없는 것이다.
늘 나와 함께 있어도 나(我)만 알 뿐, 나의 본성인 근원(본래 면목)을 모르고, 피상적으로만 알아서 거짓 내 마음을 마음, 마음하고 있으니 이 진여본성(眞如本性: 평등 보편하여 본래 상주불변하는 만유일체의 본 성품)인 법성인 즉 마음을 요달하려면 실천, 실수하여야만 한다. 즉 직접 몸소 닦아 체인(體認: 몸소 직접 이르러 인식하고 인증)하고 체달(體達: 사물의 진상을 직접 이르러)해서 통달(확철히 깨달아 아는)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마음을 마음이라는 명사(이름하여, 말하자면, 이를테면)로 쓰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이므로 여러가지 또 다른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경(經)은 즉 범어 sutra의 번역이며 진리를 설(말씀)한 글이므로, 길(徑)이니 가르침이다.
[진리를 설했다 하는 것은 꾸미거나 조작하고 만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 천연의 진리를 깨달은 바 있는 그대로를 삼켰다 토한 것과 같이 말씀하므로 "설해도 설함이 없다" 하는 것이며 진리를 설하여 근원(체)으로부터 나투고 작용한 일체의 참 이치를 가르침이니 즉 진리(理: 무위: 진제)를 사(事: 유위: 속제)인 차별문으로 설한 것이며, 또한 본체(자성)는 설하고 작용해도 동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法性: 변하지 않는 모든 일체 만유의 실상체)이요 본체(진여, 실상, 본래면목, 당체 등)인 법신불로 우주근본체이고, 삼세제불이 경마다 이 경 가운데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삼세제불이 나왔다고 하는 그 나온 곳은 경 가운데 어디인고?]
눈을 감고 뜨고 눈썹 치키고 내리는 것 모두가 참 부처의 출현이니 둥근 것은 둥근 것을 낳고 모난 것은 모난 것을 낳느니라
觀 自 在 菩 薩 行 深 관 자 재 보 살 행 심 관자재 보살이 깊이 행하여
관자재보살은 범어 avalokitesvara이며 지혜로 관조하여 자재하며 묘과를 얻은 관세음보살을 가리킨다. 보살은 ① 성불하기 위하여 인욕수행을 하여 51위의 수양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52위)를 이루기 직전에 오른 이 ② 지장보살님과 같이 대원력 보살로 부처님 되는 것을 유보하고 중생제도에 진력하는 보살 ③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부처(법신)의 응신보살 ④ 대승법의 수행으로 6바라밀다를 행하여 좋은 말과 행동으로 중생과 함께 하며 베푸는 현세의 보살행을 하는 이의 총칭임. 이 경의 경우는 ① 의 예로 봄이 옳다.
그러한 관음보살이 본원을 관조(觀照: 회광반조廻光返照: 스스로 돌이켜 본원의 자리를 비춰 보는 것이니 보는 나와 보이는 본체가 둘 아니게 되는 것)해서 깊이 행하여(行深) 이르러 둘 아니게 될 때의 경지이다.
[행심은 깊이 행한다는 말이니 즉 모든 의식과 사량 분별을 여의고 본래면목과 둘 아닌 데에 이르름이다. 따라서 깊은 참선 수행으로 내외명철한 정에 들어 온몸으로(육신이 아닌)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이때의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여러가지 이름 가운데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임의자재하게 관하는 보살).
보살은 여기에서는 성불하기 위해 인욕 수행을 하여 51위의 수양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를 이루기 직전에 오른 이니 여래의 체험으로 봄이 옳다. 그러나 진여문에서 보면 나의 참면목의 행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깊이 알아야 할 것은 깨달아 밝고 즐겁게 사는 이 삶이 곧 불국정토라는 말에만 쫓아 이생만이 전부요,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비 지옥이 없고 이 육신의 삶이 끝난 뒤 내가 가야 할 곳이 다시없고, 무(無)로 멸해 버리는 것으로만 알아서 이생만 잘 살면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단견)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하거나 오도(誤導: 잘못되게 그릇 지도하여 이끌어 가면)하면 지옥 가기를 화살 같으리니 이런 변견(邊見) 즉 있다 없다 등 한편에 치우쳐 사로 잡혀 갖는 잘못된 소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는 지식만 가르치려고들 한다. 지식은 상대적인 것을 필요로 하므로 많이 알고 이해할 수록 더욱 자아에 애착하게 되어, 더 풍요롭고 편하게 내 잘 사는 데에만 급급하게 되게 되어, 상대를 만들고 세상을 복잡하고 이기적으로 살게 되는 경쟁의 무대로 만들어 가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참 지혜를 알려는 이는 드물고 절대지(智慧)를 지도하는 이는 귀하니 안타깝다.
절대지를 요달(了達: 理: 체: 정, 事: 차별상: 용을 의심할 것 없이 깨달아 통달)하여 계합하면 일체가 둘 아니며 모두가 참 나로 부터 임을 깨달아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는 보살도를 행하게 되므로 세상이 변화하여 다툼 없는 정토가 자연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 생각 어리석어 어두운 것이 미혹한 중생이요, 밝아서 슬기로우면 깨달은 부처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생각이 미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이 밝으면 佛이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근원에 이르렀을 때는 어떠한가?]
흙이 산을 받치고 있어도 그 산의 높이 모르고 물이 쉼없이 흘러도 스스로 그 흐름을 알지 못하니라
심(心)은 이름 붙여 부를 뿐 모양이 없어, 없이 있는 우주 근본 체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알 수 없는)한 묘하고 희유(불가사량)한 일체의 근본인 것으로 친히 계합(契合: 빈틈없이 꼭 들어맞아 합일)하지 않고는 이르를 수 없는 것이다.
늘 나와 함께 있어도 나(我)만 알 뿐, 나의 본성인 근원(본래 면목)을 모르고, 피상적으로만 알아서 거짓 내 마음을 마음, 마음하고 있으니 이 진여본성(眞如本性: 평등 보편하여 본래 상주불변하는 만유일체의 본 성품)인 법성인 즉 마음을 요달하려면 실천, 실수하여야만 한다. 즉 직접 몸소 닦아 체인(體認: 몸소 직접 이르러 인식하고 인증)하고 체달(體達: 사물의 진상을 직접 이르러)해서 통달(확철히 깨달아 아는)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마음을 마음이라는 명사(이름하여, 말하자면, 이를테면)로 쓰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이므로 여러가지 또 다른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경(經)은 즉 범어 sutra의 번역이며 진리를 설(말씀)한 글이므로, 길(徑)이니 가르침이다.
[진리를 설했다 하는 것은 꾸미거나 조작하고 만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 천연의 진리를 깨달은 바 있는 그대로를 삼켰다 토한 것과 같이 말씀하므로 "설해도 설함이 없다" 하는 것이며 진리를 설하여 근원(체)으로부터 나투고 작용한 일체의 참 이치를 가르침이니 즉 진리(理: 무위: 진제)를 사(事: 유위: 속제)인 차별문으로 설한 것이며, 또한 본체(자성)는 설하고 작용해도 동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法性: 변하지 않는 모든 일체 만유의 실상체)이요 본체(진여, 실상, 본래면목, 당체 등)인 법신불로 우주근본체이고, 삼세제불이 경마다 이 경 가운데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삼세제불이 나왔다고 하는 그 나온 곳은 경 가운데 어디인고?]
눈을 감고 뜨고 눈썹 치키고 내리는 것 모두가 참 부처의 출현이니 둥근 것은 둥근 것을 낳고 모난 것은 모난 것을 낳느니라
觀 自 在 菩 薩 行 深 관 자 재 보 살 행 심 관자재 보살이 깊이 행하여
관자재보살은 범어 avalokitesvara이며 지혜로 관조하여 자재하며 묘과를 얻은 관세음보살을 가리킨다. 보살은 ① 성불하기 위하여 인욕수행을 하여 51위의 수양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52위)를 이루기 직전에 오른 이 ② 지장보살님과 같이 대원력 보살로 부처님 되는 것을 유보하고 중생제도에 진력하는 보살 ③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부처(법신)의 응신보살 ④ 대승법의 수행으로 6바라밀다를 행하여 좋은 말과 행동으로 중생과 함께 하며 베푸는 현세의 보살행을 하는 이의 총칭임. 이 경의 경우는 ① 의 예로 봄이 옳다.
그러한 관음보살이 본원을 관조(觀照: 회광반조廻光返照: 스스로 돌이켜 본원의 자리를 비춰 보는 것이니 보는 나와 보이는 본체가 둘 아니게 되는 것)해서 깊이 행하여(行深) 이르러 둘 아니게 될 때의 경지이다.
[행심은 깊이 행한다는 말이니 즉 모든 의식과 사량 분별을 여의고 본래면목과 둘 아닌 데에 이르름이다. 따라서 깊은 참선 수행으로 내외명철한 정에 들어 온몸으로(육신이 아닌)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이때의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여러가지 이름 가운데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임의자재하게 관하는 보살).
보살은 여기에서는 성불하기 위해 인욕 수행을 하여 51위의 수양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를 이루기 직전에 오른 이니 여래의 체험으로 봄이 옳다. 그러나 진여문에서 보면 나의 참면목의 행이기도 한 것이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