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 천
이원면은 지리적으로 태안반도 서북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은 아득한 수평선이 가물거리는 망망서해이고 동쪽은 대산. 팔봉면과 마주하는 내륙 깊게
파고든 가로림만(加露林灣)이 자리하고 있다.
태안읍을 남쪽으로 하여 폭이 좁아 들면서 길게 뻗어 있는 이원면은 굴곡진 산골짜기로 이루어져
천연적으로 넓게 형성된 평야가 별로 없는 예로부터 그렇게 풍요로운 지역은 아니었다.
육로론 획일적인 길이였기에 어쩌다 태안 장을 가려면 원북면을 거쳐 꼬박 왕복 8시간을 걸어야 하는
80리 길이어서 새벽 일찍 부터 서둘러 출발하여도 귀가하게 되면 밤중이 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더욱이 내리 만대에서는 포지리에 있는 초등학교 다니기에도 너무나 버거워 항상 책보를 둘러메고
쫓기듯 뛰던 열 살 안팎의 친구들의 초조하고 불안해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역사정이 이렇다 보니 육로로의 개척과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었고 그나마 택한 것이
바다와의 연결이었다.
바다와는 일찍부터 너무나 친숙해져 있기에 살을 매어 고기를 잡고 굴을 까고. 조개(바지락)를 캐어
생계를 유지 했었으니 말이다.
좀 앞선 사람들은 낚배(돛단 소형 목선)를 이용하여 먼 깊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거나
주남비(돛단 대형 목선)로 타 지역을 오가면서 무역업을 했다.
물론 대부분의 주민들은 원시적으로 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조선의 농민이었지만 바다를 옆에 끼고 사는
갯가 사람들에게 바다는 그들로 하여금 가장 많이 접촉을 하고 의지를 하는 천혜의 자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교통이 불편하다고 하여 체념하고 언제까지나 바다에 갇혀 살수는 없는 것이었다.
문명이 조금씩 발달되고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로의 갈망과 진출은 그들로선 큰 꿈이 아닐 수 없었다.
1945년 식민지 일제에서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자 자유로운 물결은 짓눌렸던 숨결들을 일제히
일으켰고 6.25를 겪으면서 서구문명은 목말랐던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기 시작 하였다.
무지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설움을 받았다고 결론지은 그들은 서로 다투어 학구열에 불타 논을 팔고
소를 팔아서 자식들을 도시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물론 이곳에도 진부한 서당이나 소학교가 있었지만 큰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미흡했고 또 시대조류에
맞지 않은 사고였기에 도시로의 갈구와 희망은 당시로서는 대세였다.
더구나 5.16이후 “잘 살아보자”는 구호아래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국민 소득이 올라가자
폭발적으로 도시로의 갈구와 팽창은 가속화 되었다.
-----가로림만 위성 사진-----
이곳에도 변함없는 바람은 불어왔다.
포장도 제대로 안된 길을 쫓아 육로로 진출하기란 너무나 난관이 가로막혔고 그래도 쉽게 길을
찾은 것이 어릴 적부터 친숙해진 바다로의 여정 이였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몰라도 옛날부터 산에 나무를 벌목하여 장작과 솔가지를 싣고
아니면 일 년 내내 피땀 흘려 추수한 농산물을 싣고 바람에 힘을 빌려 풍선으로 4.5일 지루한
무역을 도시로 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그만 무역업들이 점차 발판이 되고 인연이 되어 서산지방에선 제일 먼저 정기적으로
인천을 왕복하는 연락선이 개통되었다.
이것이 똑떼기(정기여객선)의 시초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로 추측되고 일본운수회사인
마루보시((丸星)에서 운영하지 안했나 싶다.
-----팔봉면.구도 선착장------
------청산리 나루터------
뚜----- 뱃고동을 울리며 통통 검은연기를 뿜어내면서 바다 위를 날렵하게 달려가는 똑떼기가
신비스러울 뿐 아니라 당시로선 획기적인 해상 교통수단이었다.
아침 9시. 인천을 출발하여 여흥과 풍도를 거쳐 내리에서 여객을 내리고 가로림만을 곧장 통과하여
청산리를 경유하여 구도에서 마무리를 짓는 행로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볼 때 항구로서는 근흥항이 유리한 조건이었는데 청산리 구도를 택한 것은
서산과 태안의 중간지점인 내륙 깊숙한 곳이고 조수간만의 조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기적인
시간에 출발과 도착이 용이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어떠한 여객선이 운항되였는지 알 수 없고 처음 열세 살의 나이로 1949년 필자가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인천 유학을 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이용한 여객선은 “만리환(萬里丸)” 이라는 배였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로 만든 기선이었는데 갑판 위에 큰 굴뚝에서 연기를 연신 뿜어내며 하얗게
물살을 가르며 나가던 것이 신기해 한참동안 앞 뱃머리에서 포말이 이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처음으로 조타실에서 둥글게 나무로 만들어진 큰 원의 손잡이가 달린 핸들을 보았고
옆에 장착된 방향을 가리키는 움직이는 대형 나침반을 보았다.
찌르릉 찌르릉 소리를 울리며 기관실에 통보하는 놋쇠로 만든 빛나는 속력조절 기어장치도 보았다.
또한 동력으로 가는 여객선도 비행기 처럼 프로펠라의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간다는 것을 실제로 보고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웠던지 그때의 어린마음은 정말 벅차올랐던 것 같다.
------멀리서 본 오지-----
시원스레 탁 트인 바다멀리 수평선을 가르며 이상을 펼치고 꿈을 실현시키고 싶은 욕망은
모든 젊은이의 소망이다.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이원면은 어느 지역보다도 육로로의 교통수단이 열악하여 자아성취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요원한 악조건이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교통이 용이한 똑떼기에 몸을 싫은 것이다.
당시의 농촌사정은 궁핍하고 빈한한 실정이었으나 모두의 꿈이 도시로 향했고 또한 국가의 정책이
산업화 공업국으로의 전환이었으니 이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행복과 욕망이 일치하였던 것이다.
한참 온 나라가 들썩이며 잘 살아 보겠다고 꿈틀댈 때 농촌의 젊은이들은 모두 큰 희망을 품고 도시로 향했다.
학구의 열의를 불태워 학교로 또는 산업의 현장인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태안과 서산을 경유하여 육로로의 진출도 가능했지만 교통이 워낙 불편한지라 대부분
똑떼기에 몸을 실어 포부를 펼쳤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자동차 공장이 설립되어 갖가지 자동차가 홍수처럼 생산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가장
쉽게 이용하고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 바다로의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뱃길은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는데 오랫동안 계속해서 다녔던 똑떼기(여객선)로는
은하호. 충남호를 비롯하여 칠복호. 태안호. 화양호. 보영호. 보성호 등이 생각나고 6.25.전쟁 당시
구도항에 머물러 있다 공중폭격에 파손된 “예산환“이 기억이 난다.
접안한 나루터로는 인천을 출발하여 여흥과 풍도는 항상 경유했고 황금산목을 들어서면서
오지와 내리. 고파도. 밤섬. 그리고 청산리를 거쳐 종착지인 구도에 닿았는데 때로는 도내 에서도 손님과
화물을 싫고 내렸었다.
1970년도 후반까지만 해도 이 나루터들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해주는 해상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
분주하고 각광을 받으면서 영화를 누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골마을까지 도로건설이 너무나 잘되고 육상교통이 원활하여 항로가 폐쇄되면서
옛 나루터의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던 추억만 간직하게 되었다.
------당산리.밤섬 나루터의 모습------
인천은 언제나 이곳에서는 동경의 세계였다.
그만큼 꿈에 그리고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에 똑떼기(여객선)에 몸을 실 는다는 것은 출세와
직결되고 성공의 지름길로 여겼던 것이다.
정보매체가 별로 없고 외부와의 통신이 신속하지 않아 문화발전이 한참 더디게 전파되었던
이곳은 정말 벽지 속의 오지로 존속되어 왔다.
그렇기에 인천과 시골을 똑떼기(여객선)로 드나들면서 무수한 일화가 피어나고
인연이 설 켜지고 추억이 엮어졌다.
심한풍랑을 만나 뱃속 오물까지 토하고 고생한 경험은 흔히 겪는 일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한입의 먹을 양식도 덜으려고 부모를 떠나 가정부(당시는 식모)로 이끌려가는 어린 소녀의 애처로운
모습도 보였고 청운의 꿈을 품고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결연히 정든 고향을 뒤로하는 대망을 안은
젊은이도 있었다.
뱃고동 울리는 갑판난간에서 아스라이 맞닿은 수평선을 보며 꿈같은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그림 같은
낭만이 있는가 하면 심한 가정불화로 원한에 맺혀 등을 돌리고 새 삶을 설계하는 엉뚱한 부부의
갈등의사연도 서려 있다.
또한 오랫동안 운행했던 똑떼기의 역사에는 엄청난 불행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초창기인 1930년대 해룡환이 심한 운무로 길을 잃고 헤매다 물속에 숨겨진 황금산 연안의 돗단여에
좌초하여 승객과 승무원 거의가 사망하고 겨우 6명만 생존한 일이 있었고
또 1970년대에 밤섬 나루터에서 인원초과로 노후된 나룻배가 전복되어 주위에 거주하시는
여러 어른들이 애통하게도 물속의 원혼이 된 일이 있었다.
작은 마을에 평화를 깨뜨린 이 엄청난 조난사건은 전국을 들끓게 중앙언론매체가 집중 보도하였고
열악한 농촌해상 항로의취약점에 대해 보강과 시정을 촉구 한바 있었는데 그때의 충격과 비통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산천초목이 다 슬픔에 잠겼던 밤섬나루터에는 지금도 몇몇 조그만 배가 옛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정박해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웠다.
이처럼 이원면과 똑떼기(여객선)는 무한한 인연으로 우리의 슬픔과 기쁨이 서려있고
삶의 애환이 담긴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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