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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박 춘 근
이 땅의 고절한 문학과 숭고한 문단을 위해 영원히 인격과 덕망 그리고 경륜에서 태어난 빛나는 작품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길 원로·중진·중견 문인의 문향(文香)과 족적이 오랫동안 살아 숨 쉰 곳… 한낱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이 품격(品格)과 위상(位相)을 고이 지녀온, 이름 하여 지난날 우리 문단사(文壇史)에 오래오래 기록될 문인의 사랑방이요, 살롱문학의 모체(母體), 이른바 명소(名所)라 부르며 보금자리인 그곳을 나는 늘 기억한다.
그토록 진실 된 문학의 숨결과 고매한 문향, 그 자리마다에 알알이 새겨진 그 흔적, 이제는 찬란한 역사가 되어 살아 숨 쉬는 곳, 지금도 늦지 않았으리… 지난날을 되새기며 그곳을 나는 찾아 나설 것이다.
금반, 문협(文協)에서 펴낸 ‘문단실록’을 읽어보니 특별히 나의 눈을 멈추게 한 제목의 글이 있었다. 임헌영선생의 ‘월계(月桂)’다방에 얽힌 의미 있는 글로서 어쩌면 등단연륜이 짧은 문인(文人)에게는 월계다방은 매우 생소한 이름이며 그곳이 어디에 존재했는가를 알기도 쉽지 않다.
현재의 위치로 보면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 앞 그 넓은 광장의 한 켠이라 하겠다. 지난 날, 5, 60년대 그 자리에는 아카데미극장이 넓게 자리 잡아있고 극장 1층에는 파리제과도 있었다. 연결된 건물 2층의 한곳이 월계다방이라 기억된다.
월계다방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기록으로 보아 가장 일찍 생긴, 이른바 한국최초의 다방으로서 다방의 역사는 이곳 월계다방으로부터 시작된다한들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1960년대 중반, 나는 김천에서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과 조계사에 용무 차 들렸다.
이때가 난생 처음으로 나의 조계사와 총무원 방문이라 하겠다. 당시 총무원에는 내 친구인 감찰과장 주천혜가 있었다. 그는 이 촌놈의 낯선 서울 길이었지만 제반업무의 안내와 처리로 조금도 어색함 없이 내 스스로 두려움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9월 하순, 긴긴 늦장마철이었다. 총무원에서 나는 승려시인 석지현과도 반갑게 조우했다. 감찰과장 주천혜는 출가이전 서울예전에서 주동원선생님의 지도로 연극영화연출을 공부한바 있고 졸업 후에는 충무로의 한 영화사에서 조연출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석지현스님은 조계종기관지 ‘불교신문’이 처음으로 공모한 신춘문예에 시조로 당선된 김원각과 함께 신행기(信行記)로 당선한바 있다.
석지현과 주천혜 그리고 영원한 문학도인 나, 이렇게 서로 상통하는바가 있어 우리 세 사람이 우연히 만났으니 어느새 의기가 더욱 충천하였다.
사실, 석지현과의 만남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석지현은 나의 고향땅 경산의 안흥사에서 오랫동안 수행, 정진하였고 그 다음은 큰절 팔공산 동화사의 대구시내 포교당인 보현사에서 지낸 그 시간이 훨씬 길었다.
가끔 나는 김천에서 대구의 보현사에 들릴 적마다 그 당시에도 문학수업에 열중한 석지현을 만나 그때마다 현대문학, 자유문학에 발표된 당시 유명한 문인들의 작품의 독후감과 감상을 주제로 밤늦게까지 이야길 나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석지현은 그동안 써둔 작품을 나와 동행(同行)한 김정휴스님에게 보여주었으며 자기작품에 대한 평(評)을 해줄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 조계사에서 우연히 만남은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어쩌면 문학에 열중한 동반의 입장에서 친한 사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란 생각이다.
감찰과장 주천혜는 우리 두 사람에게 모처럼의 서울나들이가 보다 뜻 깊은 일정이 되게 하고자 억수장마 쏟아지는 그 소나기도 마다하지 않고 조계사 뒷문을 나서 숙명여고, 수송전기공고 그 샛길 따라 광화문네거리를 목표로 제법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석지현과 나, 주천혜가 빠른 걸음으로 그렇게 도착한 곳이 월계다방임을 비로소 알았다.
비닐우산을 받쳐 들었다한들 맥없이 우리 세 사람은 억수소나기, 그 장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쏟아 부은 물 폭탄에 옷은 온통 젖어들어 누가 보아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월계다방입구에서 대충 물기를 떨어내자… 주천혜는 우리 두 사람을 이곳 월계다방까지 비를 맞으면서도 오게 한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곳 월계다방은 우리 문단에서 인기 있는 이른바 40대의 저항적이며 젊고 역량 있는 사랑방으로서 날마다 김현, 남정현, 박충훈, 염재만들의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한자리에 모여 앉아 고절한 문학의 꽃을 더욱 아름답게 꽃피운 곳이라 했다.
지난날의 추억이건만 그때를 더듬어보니 다방은 매우 어두웠으며 미니 2층의 실내 구조에 김현선생 등 여럿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마중이라 바깥이 그리 밝지 않으니 월계다방의 실내가 개인 날보다는 더 어두웠던 것 같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이곳의 손님들이 번갈아 뿜어대는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그러니 실내는 어두울 수밖에 별도리가 있겠는가?
주천혜의 안내로 우리는 미니 2층에 자리한 김현 등 인기문인에게 이곳을 찾은 처음의 생각과는 달이 인사조차 드리지는 못하였으나 조용히 먼발치에 앉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커피만 마시고 일어섰다.
지금 되돌아보면 소나기에 흠뻑 젖은 몰골로서는 그들 선배문인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주천혜의 생각에는 다소 결례라 여긴 것도 같다.
아무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 세 사람은 이 월계다방에서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한 체 그냥 그대로 맥없이 일어서게 되었다. 그런들 조금도 마음이 서운하거나 또 다른 기분은 아니었다. 기회는 늘 있으니 맑고 밝은 날, 그런 좋은 날을 기약했다함이 더 솔직하고 옳은 표현일 것이다.
월계다방에 얽힌 지난날의 추억을 문단실록에서 임헌염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하나, 둘 차근차근 되새겨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찌 이 월계다방만이겠는가, 지금 일천한 등단 경륜의 문인들에게는 참으로 옛날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지난날 우리의 선배문인들의 고절한 정신이 소롯이 담겨진 이름 하여 문학의 산실은 시내 곳곳에 두루두루 자리 잡고 있다.
문인들이 수시로 문학기행을 한다. 그러면서도 가장 가까이에 존재한 서울시 내의 우리 선배문인 아니 현재 우리 문단의 원로(元老), 중진들의 숨결과 애환이 깃든 곳은, 어찌 한번도 찾아보려는 생각은 없고 아예 먼발치에서라도 지켜볼 조짐마저 없는지 정녕 그곳이 그리 존재 가치 없는 곳인가 하고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월계다방은 물론이려니와 지금처럼의 장엄한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되기 전에 그 자리에는 예총건물이 존재하였다. 1층에는 언제나 우리 문인을 비롯 이 땅의 유명한 문화예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저마다의 이상과 미래를 설계한 장소가 ‘석굴암’다방이다.
규모는 매우 작아도 석굴암에 모셔진 부처님의 형태를 본받아 입구에 세운 그 조각이 지금 생각해도 앙증스럽다는 느낌이다.
이 석굴암다방과 이웃한 곳에는 ‘성성(醒醒)다방’이 있었는데 이곳 역시 당시 우리사회의 문인과 문화예술을 이끌어 오신 유명인들의 사랑방이었고 6·25한국전쟁, 그 환도이후에 명동의 이름난 다방과 함께 활발한 ‘살롱문화’의 본산(本山)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왔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문화예술을 이끌어온 모체이며 보금자리였다.
세종문화회관의 신축으로 그 터전이 크게 넓어지자 어쩔 수 없이 예총건물도 그 신축계획에 포함되어 결국은 헐어지게 되었다.
예총이 헐려지고 예총의 기능을 종로1가 인사동입구에 위치한 옛 종로구청 자리에 새 터전과 새 보금자리로 잡았다.
예총이 인사동 입구인 옛 종로구청청사로 옮겨감에 따라 이와 함께 광화문의 예총건물의 석굴암, 성성다방의 그 터전에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문화예술인, 특히 당시 우리의 선배문인들의 근거지, 그 보금자리도 이곳으로 옮겨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 디즈니·비로봉다방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 시대의 터전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갔다.
중앙6대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는 새내기들은 누구하나 예외 없이 등단 이후 최소한 근 6개월여는 문단의 선배님들을 찾아뵙고 또 신인으로서 인사를 드리고자 위에 열거한 디즈니, 비로봉을 비롯… 알려진 곳을 빠짐없이 찾아 나섰다.
이러한 경향은 그 당시 우리 문인, 문학, 문단의 관례였으며 어찌 보면 의미 있는 미담으로서 불문율 같은 관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을지로1가 네거리에는 아폴로다방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시인이요, 평론가인 원형갑선생 등 중진, 중견의 문인들의 자리였다.
나도 그곳을 찾아 1972년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목련’으로 시조로 당선한 벗 김원각과 함께 인사 드린 적이 있다.
문단 초년생 신인들이 낮에는 낮 시간대로 찾아뵙는 곳이 있고 또 해가 저물고 밤 시간이 되면 그때에는 다방이 아닌 가벼운 생맥주집이나 YMCA옆 골목에 위치한 주머니가 가벼운 막걸리 집에서 선배문인들을 찾아뵈었다.
유명한 곳으로서는 언제나 장안의 멋쟁이 문인들의 모인 자리로서 종로구청 앞의 흑산도가 있었으며 이곳은 전북 장수출신의 시인 권일송선생님께서 마련한 문인들의 만남의 광장이라 함이 옳다.
권일송선생은 이 흑산도에 이어 종로회관을 오픈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원래 교육자이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선생님과는 이런저런 사업이 성격과도 맞지도 않고 또한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자세히는 모르나…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제방의 문인이 모여 시끌벅적하였으나 모인 사람만큼 수익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말씀은 그때 그곳을 자주 찾아간 원로, 중진문인들의 후일담이라는 것도 나의 기억중 하나이다.
긴 세월만큼 이런저런 사연도 많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위에 열거한 우리 문인들의 보금자리요, 사랑방인 석굴암, 성성, 디즈니, 비로봉다방은 물론 아폴로다방 등 시내 이곳저곳에 위치한 이른바 명소(名所)에서 문단의 어른들을 많이 뵙게 되고 때로는 벗인 등단신인과 함께 모시는 영광은 더욱 잊을 수 없다.
특히, 디즈니다방에서 봬 온 ‘고향의 봄’을 쓰신 이원수선생은 나의 결혼식 주례선생님으로 모신 그 일은 평생 두고 잊을 수 없는 나의 영광이요, 자랑이다.
주례이신 이원수선생님께는 결혼식 그날부터 지금까지 송구함을 면할 수가 없다. 그때는 정부에서 강력하게 서정쇄신을 시행할 때이다. 결혼 첩정장도 보낼 수 없고 식장에서 하객에게 일상적인 식사마저도 제공하는 것을 매우 엄격히 제한하였다.
소홀히 대한 나의 이러한 무례와 결례를 조금이나마 씻어보고자 나는 그때 디즈니에 매일 나오시는 선생님을 찾아뵙고 내가 속한 단체에서 충남도교육위원회와 공동 주최로 대전고교에서 개최한 행사에 특별초청강사로 모시고자 말씀드렸으나 선생님께서는 거절하시었다. 그 이유인즉 내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신다 했다. 선생님은 오랜 지병인 구강암치료를 더 늦출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저녁나절 쓸쓸히 그곳을 나섰다. 그 이후 선생님께서는 구강암수술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후배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소천(召天)하셨다.
어찌 나만일까. 많은 문인들이 이곳저곳, 이른바 문단인사께서 한자리에서 함께 즐겨온 그때 그날의 얽히고설킨 고절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니 그만큼 그 자리가 소중하고 오랜 기간 뇌리에 남아있음이 아니련가?
6, 70년대 문인들의 보금자리요 사랑방을 대충 함께 살펴보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보금자리도 많이 변천하였다. 그 이후에는 시인통신, 시인과 갤러리는 물론 제일카페, 시인과 화가, 순풍에 돛을 달고 등이 문인들이 저마다 부담 없이 찾은 곳이었다.
지금은 이곳도 모두 사라졌다. 문인들 서로 쉽게 만나고 주머니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연유로 없어졌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운영의 문제라 여긴다.
항상 내 옆에 있을 때에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 앞에서 그 흔한 것들마저 없어지면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아마 사람마다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다 해도 우리가 쉬이 동료, 선배, 원로님들을 정중하게 만나 뵐 수 있었던 그곳들이 없어지고 점점 멀리 사라진 지금은 나름대로 모두가 아쉽고 내내 서운함도 같은 감정이라 여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종로1가 피맛골에서 자리를 옮겨 지금도 존재하는 ‘소문난 집’ 하나 남아있으니 문인에게는 지난날의 추억을 가다듬을 수 있고 또 소중한 인연을 이곳에서 이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한들 소박한 피맛골 그 장소에서… 지금은 고층빌딩, 지하2층에 위치한 소문난 집도… 소박한 옛것, 그 정취를 아무리 찾으려 해도 그때 그 맛, 그 정서, 그 추억은 없는 것 같고 또한 저마다의 생각 또한 아닌 거 같다.
월계다방을 비롯 디즈니, 비로봉은 몰론 문인들의 사랑방인 광화문 조선일보사 옆 조흥은행 지점의 지하 초원다방, 그 이웃 건물에 존재한 청화, 새문안, 아리랑, 무궁화 다방 등에서 언제나 봬온 우리 문단의 고명한 원로, 중진, 중견을 비롯 동료문인들의 그때 그 모습을 나는 50여년이 지난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되새겨본다.
그때는 모두 한결 같이 열정적이었고 동지애로 똘똘 뭉친 그 모습과 그 정경이 새삼 다가온다.
지금도 생각하면 나는 그때 문인들 모임에 말석에 앉아 익힌 그분들의 고절한 정신과 숭엄한 문학의 미래를 향한 그 자세를 잊지 않고자 가슴에 되새겨본다.
그 모두가 나에게는 교훈이며 사표였다. 지금도 그때에 보고 배운 나의 문학적 정신과 이해, 문인으로서의 최소한의 품격과 위상… 그 초심을 옹골차고 한결 같이 지녀갈 것이라 새삼 다짐한다.
무릇 말하면 무엇하리… 50여년 반세기가 지난 일이건만 어쩌면 그곳은 나만의 추억을 지닌 역사의 장소가 아니라 대부분 문인들이 기억하는 절절한 사랑방이며 문학을 위한 문향(文香)이 깃든 문인들의 위대한 역사의 산실이기도 하다.
좋은 날 하루를 잡아서… 50여 년 전 그때 그날의 고절함을 다시 고이 모아서 설령 지금은 헐리고 없어지고 그 자리, 그 흔적을 못 찾는다 해도 한사람의 제사장(祭司長)이 되듯 엄숙하게 답사하리라 다짐한다.
한번, 두 번, 수십 번 번갈아 생각해도 그곳이 나에게는 잊을 수 없고 언제나 문학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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