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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은 이곳에서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벼슬보다는 자녀의 훈육에 전념하여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선생의 손자 때부터는 조선의 조정에 벼슬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 태어났으니 조선의 백성이라는 이유에서다. 조선왕조의 정권이 안정되자 장손 이맹현은 세조 때 출사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니 나라에서 서울에 제택과 향사를 동생인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에게 맡겼으며, 후에 율간의 장자 이순이 김해로 이주하게 되자 그 또한 선대의 종택과 향사는 그 아우인 이무에게 맡겼다. 이후로 종택은 이무의 후손에 의해 지금까지 대대로 거주해 내려오고 있다고 전한다.
모은의 둘째 손자인 율간(栗澗)은 흥해부사와 낭양부사를 거쳐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로 특지된 인물이다. 고려동에는 그의 호를 딴 율간정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종택의 솟을대문 옆에는 별채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대문이 있는데 이곳을 들어서면 선생이 평소에 기거하였다는 자미정(紫薇亭)이 있다. 자미정의 왼편에는 경모당(景矛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오른쪽에는 우죽헌(友竹軒)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이 또 하나 있다.
이곳은 두문동에서 함께 남하하여 군북에 복거하였던 전서 조열과 합천의 만은 홍재와 더불어 담장 밖 자미단에 백일홍이 피면 그것을 바라보며 시화를 나누던 곳이라 한다. 자미정은 6.25때 공비의 잔당을 없애려는 아군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옛 주춧돌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자미정 주렴에는 선생이 지었다는 시구가 걸려 있다. 밤마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외로운 달을 맞이하고 해마다 구기자·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끝내 돌아봐도 요순시대 만날 수 없으니 소먹이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려 하네 패망한 고려의 백성으로 나라를 생각하며 고려동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선생의 평소 절개와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가를 듣고 사람들은 선생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옛날 은(殷)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채미가(採薇歌)와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穗歌)에 비하였다고 한다. 고려동의 종택까지 돌아보고 모은 선생의 충절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나오는 길에 고려동의 풍수를 살피기로 했다. 전설이야 자미화를 보고 터를 잡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에 불과하고 진사시에 급제한 선생이 풍수를 몰랐을 리가 없다. 무엇을 보고 이곳을 평생 은거지로 삼은 것일까. 고려동 장내마을의 진산은 자양산(紫陽山 401.8m)이다. 동으로 출맥하는 낙남정맥이 함안에 이르러 칠원면과 산인면을 경계 짓는 용맥하나를 서북으로 내려 보내는데 기복을 거듭하던 지맥이 솟구쳐 오른산이 자양산이다. 이 지맥은 장내마을의 청룡이 된다. 물결치듯 꿈틀거리는 완연함이 생기가 넘치는 모양이다. 다시 진산에서 서남으로 비스듬히 뻗어 내린 용맥이 백호를 이룬다. 백호는 준거한 모습이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는 가운데에 고려동이 자리 잡고 있다. 전형적인 와혈(窩穴)이다. 안산은 한 쪽으로 기울게 솟은 매봉이 되고 몇 개의 봉우리가 모여 주작을 이룬다. 안산의 모양이 혈을 배반하는 형국이다. 더구나 매봉의 낮은 과협 사이로 멀리 규봉(窺峰)이 보인다. 옥의 티다. 다행인 것은 마을 입구에서는 규봉이 보이지만 고려동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주산인 현무봉의 형상은 둥그런 금성산이다. 노적가리봉이라고도 하며 재물발복을 상징한다. 둥글고 후덕한 모양이 혈에 부드러운 지기를 내려보내고 있다.
안채의 담장 뒤쪽에 주산에서 내려온 용맥이 뚜렷이 나타나고 이는 정확하게 안채로 들어갔음이 확인된다. 진혈처에 택지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려동의 외당수는 멀리 익산 쪽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신산천이 검암천을 만나 마을 앞 벌판을 적시고 다시 함안천과 합류하여 남강으로 흘러드는데 그 모양이 마을을 감싸는 궁수를 이루어 마을에 풍요를 안겨주는 길수이다. 내당수는 고려동의 동쪽에서 자미단을 지나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서편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며 흐르는 물줄기가 솟을대문 바로 앞에서 만나 합수되어 마을을 빠져나간다. 두물머리 명당으로 부자가 많이 나는 행주형국이다.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부근에서 마을의 형국을 정면으로 잡아보니 풍수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다. 청룡과 백호 사이로 내려온 내룡은 닭의 머리가 되어 장내마을에 이르러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고려동은 내룡의 끝자락에서 백호쪽으로 기울어 자리를 잡았다. 봉황이든 금계이든 포란형의 국세에서는 날개죽지 쪽이 혈처가 된다. 이는 새가 알을 품을 때 날개깃을 모아 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른쪽은 새가 날아오를 때 먼저 훼를 치는 쪽이 아닌가. 그런데 종택의 좌향을 보면 남향이 아니고 서쪽으로 약간 기울은 남서향이다.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풍수언에 간좌곤향은 부자가 많이 나는 좌향법이다. 이렇게 좌향을 틀어 배치하고 위치마저 마을의 안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앉힌 종택에서는 안산이 매봉이 아니고 백호자락이 된다. 고려동의 종택이 마을의 안산을 마주하지 않고 안쪽으로 돌아앉은 것은 정면에 있는 매봉을 피하기 위함이다. 매는 닭의 천적이다. 따라서 금계포란형에서는 매가 병아리를 채어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병아리는 사람에게는 후손이 된다. 모은 선생은 고려동 축조 당시에 이런 풍수형국을 이미 간파하고 혈처를 배반하는 모양의 안산인 매봉을 피하여 종택의 좌향을 잡았던 것이다. 모은선생이 풍수의 고수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더 있다. 선생이 평소에 기거하였던 자미정의 뒤뜰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일반적으로 연못은 집의 앞에 조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원칙을 어기고 특이하게도 자미정의 연못은 뒤뜰에 있다. 이것은 매봉으로부터 혈을 보호하기 위한 비보책이다. 명당 앞에 고이는 연못의 물은 재물을 뜻하며 고인 물의 양만큼 재물이 쌓인다는 풍수언이 있다. 따라서 후손들의 양식이 매봉에게 탈취당하지 않게 하려면 집 뒤에 숨기는 것이 제일이다. 이것이 자미정의 연못이 뒤뜰에 조성하게 된 이유이다. 이렇게 기발한 풍수비보책은 풍수의 고수가 아니면 구사할 수 없지 않겠는가? 자미정 뒤뜰의 연못은 네모지게 만들었다. 그 안에 조성한 섬도 네모난 모양이다. 전통가옥에서 정원을 꾸밀 때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못에 섬을 만드는 것은 신선사상에서 유래하는데 섬은 신선이 사는 곳을 상징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따라서 네모난 연못은 땅을 나타내고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 즉 땅 위에 우주를 담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네모난 섬을 꾸미는 경우도 있다.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 정원에도 네모난 연못에 네모난 섬을 조성해 놓았다. 이럴 경우의 의미는 네모난 땅 안에 또 다른 땅을 담았으니 하늘이 아닌 땅 중의 땅, 즉 이 땅위의 이상세계를 구현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조선왕국 속의 고려성지, 즉 고려동학을 뜻하는 것이다. 풍수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모은의 숨은 정신이 살며시 엿보이는 순간이다. 물질문명이 절정에 다다라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불사하는 현시대에서, 삶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망해버린 고려왕조에 고집스레 절개를 지켰던 모은 선생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을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고 가르친다면 현실을 무시한 구시대의 고리타분한 말이라 무시할 것인가. 이 시대의 절개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고려동 유적지를 떠나온다. |
첫댓글 불사이군(不事二君) ===== 연꽃이 넘 이쁩니다.===고려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