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철제 2층 침대가 삐걱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침대가 흔들리니 다들 불안한지 밤새 헛기침을 해댔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7km. 문득 중세의 성당 기사단이 지었다는 팔각 성당 에우나테Eunate에 들를까 싶다. 에우나테에 가면 한참을 돌아가는 셈이라 갈림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고민 끝에 가보기로 한다. 땅만 보고 걷다가 너무 많은 걸 놓치면 아까우니까.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저만치 성당이 보였는데 걷다보니 눈앞이 어질거리면서 구토가 치민다. 땡볕 아래 한참을 쉬지 못한 때문인가보다.
나바라주Navarra State의 자랑 에우나테Eunate 성당. 관광 포스터에 꼭 있다.
대리석을 끼워놓은 창문. 돌 던져도 안깨지겠다.
비틀비틀하면서 가까스로 에우나테에 도착하니 초등학생들이 체험학습 와있다. 그렇잖아도 막 선생님이 멀리서 온 순례자들과 그들을 지켜주던 성당 기사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진짜로 '멀리서' 온 순례자가 비틀비틀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구경났다. 사방에서 플래쉬가 터졌다. 내 평생 이런 플래쉬 세례를 언제 또 받아본단 말인가. 이 학교 아이들 앨범 속에 내 사진 한 장씩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지친 순례자의 표본'으로.
에우나테 성모님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 싶었더니 우리 절에서 본 관세음보살하고 닮았다. 발그레한 볼에 신비로운 표정까지, 관세음보살이 여기까지 파견 나오셨나 싶다. 신기하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유리가 없던 시절이라 대리석을 얇게 갈아 창문에 끼운 것도 재미있었다. 예전에 로도스 여행할 때 본 중세 성채에서도 저런 창문이 있었다.
성모님이랑 관세음보살님은 어쩌면 자매가 아닐까?
에우나테에서 잠깐 쉬고 다음 마을 오바노스Obanos로 넘어간다. 포도밭에서 일하던 농부 아저씨들이 동양인 순례자가 신기해 자꾸만 말을 건다. "스페인 말 못해요!"란 말을 스페인 말로 했더니 농부 아저씨들이 갸우뚱한다. '안녕Hola!', '잘 가세요Buen Camino'와 더불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말이 '스페인 말 못해요!No abla Español!'다.
오바노스는 왕비가 되기를 거부하고 수녀가 된 여동생을 홧김에 죽인 오빠가 참회하면서 평생 수도생활을 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는 바보들이 많다.
사람들이 '오바노스의 비극 남매'라고 부르는, 그닥 재미있지는 않은 전설.
오바노스 가는 길에 유채꽃이 한창이다. 내가 자란 거제도도 지금 유채꽃이 한창일텐데. 유채꽃 향기를 코랑 가슴이랑 뱃속으로 깊이깊이 들이마시며 행복에 겨웠다.
킁킁킁, 아! 이 비릿한 풀냄새-
오늘의 화두는 '무엇을 버릴까.'
배낭 무게를 좀 줄여야 하는데 옷을 버리자니 아침 저녁으론 아직 춥고 비옷을 버리자니 비올 때가 염려되고 무엇을 버려야 내가 좀 편해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속에서 당장 "걱정을 버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그러면 되겠구나. 무거우면 무거운대로, 걱정하지 말고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오늘은 까미노를 시작한 이래 두 발로 가장 많이 걸었다. 그동안은 트레킹폴을 거의 목발처럼 의지해 걷느라 '네 발'로 걸었다. 오늘은 스틱에 좀 덜 의존하기로 하고 느려도 두 발로 걸으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어떤 면에선 걷는 게 훨씬 편했다. 두 발로 걸으니 팔도 덜 아프고 오히려 속도도 더 빨라졌다. 아, 이래서 인간이 두 발로 걷게 되었구나, 새삼스럽게 두 발로 걷는 게 고마워졌다. 아, 날마다 이렇게 가면 점점 더 튼튼해지겠지? 기분이 좋다. 기대된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아치와 물그림자가 동그라미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라는데 사진이 영~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는 '왕비님의 다리'란 뜻인데 어느 왕비가 지어준 아름다운 다리로 유명한 마을이다. 수퍼에 장을 보러 갔다가 어쩌다 보니 혼자 먹기 너무 많은 재료를 샀다. 마침 일본에서 온 마코토 아저씨에게 같이 먹자고 하니 일행이 있다고 한다. 결국 스페인 사람 알랭, 아일랜드 사람 프랭크, 프랑스 사람 쟝 삐에르와 소년 삐에르, 레네, 기, 나까지 여덟이 한 식탁에 둘러앉았다. 사람들은 내 파스타가 정말 맛있다며 조리법을 궁금해했다. 내 파스타는 '그때 그때 달라요' 조리법이라고 하니 저마다 자기만의 조리법 한 가지씩을 털어놓는다. 할아버지들이 만든 또르띠야와 샐러드, 빵과 와인이 곁들여진 근사한 식탁이었다.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한국 전쟁'이 대부분이었다. 프랭크와 나는 남북 아일랜드와 남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왜 우리는 같은 형제들인데 서로 죽이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프랭크는 아일랜드에서 살 수 없어 지금은 영국에 살고 있지만 자기 뿌리는 아일랜드라고, 자신은 아이리쉬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오카리나로 프랭크에게 '대니보이Danny Boy'를 불어드렸다. 프랭크는 아일랜드 민요와 우리 동요가 비슷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우리에게 비슷한 아픔이 있기 때문일거란 생각이 든다. 나이와 국적을 떠난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꿈을 이야기하는,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식당에서 뜸을 뜨는데 할아버지들이 하나 둘 몰려든다. 동양식 치료법Oriental Therapy이라고 하니까 다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할아버지들이 앞다투어 나도 떠달라고 하시는 바람에 줄을 세워야 했다. 알랭 할아버지 어깨에 뜸을 떠드리다 등에 난 털을 좀 태웠는데 할아버지들이 아이처럼 호들갑스럽게 "알랭! 니 등이 불타고 있어! 니 등에 구멍났어!" 하고 알랭 할아버지를 놀려댔다.
프랭크 말로는 까미노에 가져와선 안될 세 가지가 있는데 휴대전화, 책, 카메라란다. 때로 카메라가 없으면 걷는 데 훨씬 집중할 수 있을텐데 싶다가도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러고보니 오늘 저녁 사진이 없네. 술 안마신다고 아무리 말해도 와인은 프랑스 우유라며 억지로 권하는 할아버지들 꼬임에 넘어간 탓이다. 취해서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까미노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다. 걸음은 느리지만, 순례자 놀이는 젤로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왕비님 다리 입구에서 본 새벽 하늘.
첫댓글 무엇을 버려야 내가 좀 편해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속에서 당장 "걱정을 버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그러면 되겠구나. 무거우면 무거운대로, 걱정하지 말고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한다...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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