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의자왕처럼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는 인물도 드물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가 삼천궁녀를 끼고 유흥을 즐기다 나라를 망쳤으며, 백제 최후의 날에 삼천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고 믿고 있다. '삼천궁녀'란 단어가 국어사전에까지 등록돼 있을 정도로, 또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궁녀사란 사당이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오해는 대단하다.
영토나 인구 측면에서 백제보다 훨씬 컸던 조선왕조에서도 궁녀 숫자는 700명을 넘지 못했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가장 적극적으로 궁녀를 모집한 영조 때도 궁녀 숫자는 최고 684명이었다. 중국 같은 나라에서도 삼천궁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황제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의미에서 '황제에게는 삼천 명의 후궁과 미인이 있다'는 말이 민간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런 사례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왕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피력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도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여인들은 삼천 명이 아니라 '왕의 처와 첩, 태자의 처와 첩'에 불과하다고 했다.
의자왕이 어느 정도의 유흥을 즐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적군을 최전방에서 방어하자'는 비주류 측의 의견을 무시하고 '적군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인 뒤 일망타진하자'는 주류 측의 의견을 채택한 것이 백제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백제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한 것은 이 같은 전략적 실패 때문이었다.
어찌 됐건 나라를 잃었으니 할 말은 없게 됐지만, 저세상에 있는 의자왕으로서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과도한 오해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저세상에 있는 '신라 ○○왕'을 보노라면 가슴속에서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 ○○왕'은 망국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유흥에 빠져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군사전략을 고심한 의자왕 자신과 비교할 때, '신라 ○○왕'은 그 같은 고민마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포석정. 사진 속의 구조물은 물에 술을 띄워놓고 놀던 곳이다. |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
| |
'신라 ○○왕'은 누구일까? 그가 경순왕일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신라 제56대 경순왕이 형식상으로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하는 군주를 실질적 의미의 '마지막 왕'이라고 할 때, 경순왕은 그런 왕은 아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경순왕을 왕위에 앉힌 것은 후백제 견훤이었다. 신라 수도 서라벌은 물론이고 왕궁까지 점령한 견훤이 경순왕을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훗날 왕건 대 견훤의 시소가 왕건 쪽으로 기울자 경순왕이 견훤 대신 왕건에게 나라를 바침으로써 신라가 정식으로 멸망하기는 했지만, 그의 등극 이전에 신라는 이미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신라의 멸망에 대한 실질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신라본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정해년 9월(927.9.29~10.28) 후백제 견훤이 신라 영천군(당시 고울부)을 침공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후백제를 당해낼 수 없었던 신라 측은 고려에 파병을 요청했다. 아래 내용은 그 직후의 상황이다.
"견훤은 (고려)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겨울 11월(927.11.27~12.26) 왕경을 기습했다. 왕과 비빈(왕후와 첩)과 왕족들은 포석정으로 놀러가 연회를 즐기면서 적군이 당도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후백제군이 왕경(도성)을 점령한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긴, 이 문제의 임금은 신라 제55대 경애왕이다. 이름은 박위응이다. 견훤이 서라벌을 이미 점령했는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유흥을 즐기고 있었으니, 신라군의 기강이 얼마나 해이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총사령관인 경애왕의 정신상태가 극도로 나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후백제군이 기습공격을 단행했기 때문에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포석정에 후백제군이 들이닥치기 2개월 전에 신라와 후백제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고,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고려에 파병을 요청했다. 후백제가 이미 침공한 상태에서, 그것도 고려의 구원군을 기다리는 상태에서 경애왕이 한가롭게 연회를 벌였던 것이다. 게다가 서라벌 주변에 경계병도 제대로 배치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이는 그가 평소에도 유흥에 깊이 빠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상황에서 파티를 벌였을 리도 없고 신하들도 그런 그를 제지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가 평소에도 그런 무책임한 행동을 했기에, 신하들이 아예 포기하고 그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사전략을 고민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의자왕은 싸우다가 망했지만, 경애왕은 놀다가 망했던 것이다.
|
▲ 경애왕릉.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에 있다. |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
| |
경애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군주의 품위를 철저히 망각했다. 갑작스레 출현한 후백제군을 보고 당황한 그는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그는 왕비 및 후궁들과 함께 몸을 숨겼다가 붙잡힌 뒤 견훤 앞으로 끌려갔다.
체포될 당시 그의 주변에 경비병이나 신하는 없고 여인들만 있었으니, 누가 봐도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인간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견훤은 현장에서 그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패전국 군주를 일단 살려두는 일반 관행을 따르지 않고 즉결처분을 시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신라 왕궁을 점령하고 경애왕 박위응을 죽인 견훤은 자신을 대신해 신라를 통치할 허수아비로 경순왕 김부를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망국의 책임은 경순왕이 아니라 경애왕이 져야 한다. 그것도 단순한 '망국의 책임'이 아니라 '유흥을 즐기다 나라를 망친 책임'을 그는 져야 한다. 만약 그가 신라왕이 아닌 백제나 고구려의 왕이었다면, 그의 사생활이 훨씬 더 적나라하게 폭로되었을 것이다.
학교나 군대에서 인원점검을 할 때, 맨 뒤에 있는 사람은 자기 번호를 외치고 잠간 뜸을 들인 뒤 "번호 끝!"하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경애왕이 "오십 오! ……… 번호 끝"하고 외쳤어야 한다. 그랬다면 우리는 그가 실질적인 신라 최후의 왕이라고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랬다면 경애왕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온갖 지탄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오십 오!"하고 잠간 뜸을 들이는 사이에 견훤이 허수아비 경순왕을 경애왕 뒤에 세우고, 그 경순왕이 "오십 육! ……… 번호 끝!" 하고 외치는 바람에 후세 사람들은 경애왕 대신 경순왕을 기억하게 되었다. 이로써 경애왕의 문제점이 묻혀 버리고 말았다.
경순왕 앞에 숨어서, 망국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경애왕. 신라 멸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의자왕이 뒤집어쓰고 있는 '한심한 임금'의 이미지를 감내해야 할 인물은 바로 그이다. 어쩌면 저세상에서 의자왕이 경애왕에게 "당신, 할 말 없소?"라며 양심선언을 촉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첫댓글 복사한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