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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수필세계>2009년 하반기(겨울호) 신인상 발표
수필전문지 계간 《수필세계 2009년 하반기 신인상 공모에서 박월수 씨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되었다. 응모작은 작품 <새>를 포함하여 10편이다(참고 작품 포함).
계간 《수필세계》는 엄정한 심사와 소수의 역량있는 신인 배출로 그 권위가 수필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당선자 박월수 씨는 ‘수필문학’지 초회 추천을 받은 바 있고,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의 경력이 있다.
당선작과 심사평, 심사소감은 12월 10일에 발간된 겨울호에 수록되어 있으며, 시상식은 12월 11일(금) 대구 프린스 호텔에서 있을 예정이다. 수상자에게는 등단패와 한국문인협회 입회 자격, 그리고 당선 원고료 50만원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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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당선자
박월수(여 대구 월성동)
2004 수필문학 초회 추천
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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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
정목일(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
박양근(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학 영문학과 교수)
최원현(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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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하반기 신인상 심사평
수필에서의 문학적 상상력의 힘
박월수의 수필 <새> 외 4편
1.
문학은 창작이다. 창작은 상상에서 비롯된다. 시를 서정적 상상미학, 소설을 허구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한다면 수필은 관조적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수필의 글감이되 한계라 할 수 있는 체험을 어떻게 상상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수필에서의 상상은 시나 소설의 상상보다 훨씬 밀도가 높은 고도의 상상으로 작가의 심오한 철학적 의미까지 내밀하게 품는다. 입으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질 수 있는 무수한 말처럼 수필의 상상은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게 작가의 마음에서 독자의 마음으로 소리 없이 오간다. 그래서 수필에서의 상상은 시의 이미지보다 더 강하게 독자의 가슴 속을 파고든다. 한 방울 물이 바위를 뚫는 것 같은 소설이나 시의 질량과는 다른 힘, 그게 수필에서의 상상력이다.
수필세계 2009년 겨울호의 신인상 심사에서 최종심에 오른 네 명 중에 두 사람을 두고 깊은 논의가 있었다. 둘 다 기성작가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창작 및 작품 구성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 명만 등단시킨다는 원칙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박월수만 택한다.
2.
박월수는 수필에서의 상상력을 알고 있는 작가다. 그런 힘의 상상력을 가진 작가다. 그래서 사실을 상상으로 확대시켜 구체화 시킨다. 보는 것, 듣는 것도 상상의 리듬을 타게 한다.
땅에 사는 식물인 새, 그는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한다. 그래서 땅속으로 줄기를 키우고 마디를 짓는다. 나는 대신 바람과 한 통속으로 움직인다.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다.
예쁘장하게 생긴 미운 다섯 살 계집아이 같이 삐치기 잘하는 펌프, 그의 의인화엔 그의 체험이 분명 한 몫 했을 게다. 그래서 그것은 무리 없이 정겨운 동화가 된다.
박월수는 모든 것을 생명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의 눈은 늘 따뜻하다.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사랑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요 대화의 상대가 된다는 것이니 곧 서로 주고받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방적이지 않다. 동등해진다. 서로 눈높이고 가슴높이고 마음높이다. 그래서 아주 작은 목소리 아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말을 해도 다 듣고 얘기도 된다.
박월수는 <새>에서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해란 꼭 말로 안 해도 될 수 있다. 통하면 된다. 사랑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통한다. 수필은 바로 그런 글이다. 그런 문학이다. 그렇지만 그런 문학이 되려면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수필이 된다. 그래서 ‘사는 건 흔들리는 일이고 흔들리는 건 부러지지 않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부러지는 것보다 더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게 부러지지 않는 것이다. 박월수의 <새>는 그런 아픔과 고통의 산통 후에만 바람의 등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을 나누면 슬픔조차도 감미롭’지만 ‘바람의 맘을 이해하고 품기까지 바람의 흔적을 빌려 비명 같은 노래를 불’러야 했다, ‘무더기 산통이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바람의 등을 타고’ 훨훨 날아오를 새, 수필에서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박월수는 사물 내지 현상을 통해 사람의 내면에 숨겨있는 착한 심성을 깨워낸다.
<우물>에선 우물을 통한 가족애를 내보이면서 이해와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함지박만한 목단 꽃잎에 얼굴을 묻었다가 노란 꽃술을 코끝에 묻힌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그 꽃은 향기가 없다고 일러 주시던 어머니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젊고 예뻤다.’
꽃이라고 다 향기가 있는 건 아니다. 예쁘고 아름답다고 다 향기롭지도 않다. 향기도 너무 짙으면 역겹다. 그러나 향기가 없어도 향기로워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향기로워 보이는 것과 향기로운 것은 다르다. 어머니는 그걸 딸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데 어머니가 목단 꽃 같았다. 목단 꽃 같은 어머니에게선 향기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있다. 사랑이라는 향기, 사랑이란 아름다움이 어머니에겐 있었다. 그런 사랑이 있는 어머니는 늙지도 시들지도 않을 꽃이었다.
또한 등목의 추억만큼 어머니를 위한 속정 깊은 아버지의 배려가 있다. 그러나 추억이 담긴 우물이 펌프로 바뀌면서 변화가 온다. 재개발로 마을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인정도 움켜쥐기보다 베풀수록 더욱 깊어짐을 말없는 우물이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물은 가족 간의 사랑을 묶어주던 사랑의 끈이라는 의미화가 가능했다.‘두레박 끈을 길게 늘여 길은 물로 어머니가 진하게 타주시던 미숫가루 한 그릇이 목마르게 그립다.’그 그리움만큼 가족애도 깊을 수밖에 없다.
<메밀 베개>는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십수년 조명공사를 해 온 남편은 날마다 사다리를 탄다. 혼자서 수주 시공 결재까지 일인 삼역을 해내며 사다리의 빛이 바래고 삐걱거리기까지 일을 했다. 결국 하지정맥류 환자가 되기에 이른다.
박월순은 남편의 삶과 희생을 메밀에 비유한다. ‘알맹이가 빠져나간 암갈색 껍질을 펴보니 작고 앙증맞은 꽃잎 세 장을 붙여 놓은 모양이다.’ 그는 ‘하얗게 무리지어 피는 화사한 꽃에만 눈길을 줄줄 알았지 지금껏 한 번도 어두운 빛깔을 지닌 열매를 관심 있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제 몸은 묵과 냉면, 혈압약이 되고 그러고도 껍질은 남아 베갯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감내해야 하는 메밀처럼’ 남편도 그랬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메밀꽃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리 향기롭지 않은 꽃이었’듯 ‘정작 사다리 위에 있는 그(남편)의 거친 숨소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삶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힘든 것을 감내해야만 편안한 삶이 주어진다. <메밀 베개>는 그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청학(靑鶴)>은 12년 동안 사용해온 물걸레 청소기를 대신할 슬림형 청소기를 샀다. 그러나 처음엔 좋았는데 쓸수록 옛것만 못했다. 더욱이‘온갖 멋을 부린 새로 산 청소기는 가볍고 매끄러워 꼭 첩같이 생각되었다.’ 그런데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 ‘그가 만나는 여자는 새로 산 청소기 같은 여자였다.‘ 헌데 참을 수 없는 건 자신이었다. ‘투박하고 볼품도 없으면서 무겁기만 하던 옛날 청소기가 갈수록 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물걸레 청소기처럼 살아온 날들이 바보스러웠다.
앓아누웠다가 봄 구경으로 청학을 찾았다. 그러나 청학에선 청학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찾던 청학은 바로 내 가까이에, 내 맘속에 있었다.’
조강지처와 첩으로 묘사된 물걸레청소기와 슬림형청소기, 그리고 청학을 통해 꿈을 찾는 현대인에 대한 삶의 모순과 진정으로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작품이다.
<환상통>은 누구나 한 가지씩은 병을 앓고 있을 현대인에게 오빠의 환상통을 통해 메시지를 주는 작품이다.
‘상처받은 이의 슬픔을 위로하는 일은 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더 많이 아파해야 한다는 걸 나는 이제 오빠를 보며 깨닫는다.’ 어쩌면 그것은 오빠의 아픔이기보다 작가 자신의 아픔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아내가 돌아온다면 그의 환상통도 끝이 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누구나 내놓고 말할 수 없는 환상통 한 가지씩은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슬쩍 자신을 포함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는 안다. 스스로 만들어버린 벽의 존재를, 그래서 그 벽 속에 갇혀서 누군가 갇힌 자신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결국 그는‘세상의 모든 벽은 자신이 만든 것’이기에‘스스로 허물어야’하며, 그게 안 되면‘뛰어넘든지’그것도 아니면‘깊이 스며들든지 간에’스스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월수의 수필들은 아픔 슬픔 고통을 내면에 품으면서도 그것이 절망으로 가라앉지 않고 스스로 헤어 나오는 방법의 치유를 택한다. 전체적으로 밝지 못한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게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삶의 근간을 억압하고 흔들고 있는 것들이 결국 내가 얼마큼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이겨내고 나다움을 지켜낼 수 있다는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수필에서의 문학적 상상력은 수필이 문학이게 하는 힘이다. 체험만으로 문학이 되긴 어렵다. 그 체험이 어떻게 상상과 화합하여 문학적 창조의 세계를 여느냐에 수필의 문학적 성패가 달려있다. 박월수는 체험을 상상화하고 상상의 영역을 체험 속에 확보하는 시도로 문학에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더욱 기대가 된다. 평에서 제외된 다섯 편도 수필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음도 간과할 수 없겠다.
좋은 수필가를 엄선하여 등단시키고자 하는《수필세계》의 뜻을 느낄 수 있어 수필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도 더욱 뿌듯한 마음이 된다. 좋은 수필가를 맞이하는 마음에 한없이 즐겁다. 박월수 수필가의 등단을 큰 박수로 환영한다.
(심사평/ 최원현)
신인상 응모작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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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새라고 다 날개를 지녔을까. 우도 섬의 소머리 오름에는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새가 산다. 날아가는 새는 바람의 등에 업혀 다니지만 이 언덕에 사는 새는 등줄기를 후려치는 바람 때문에 땅속으로 줄기를 키우고 마디를 짓는다. 나는 아직 땅에 사는 식물이 ‘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람과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새의 물결을 본다. 섬의 바람받이에 속하는 언덕을 향해 해풍은 쉼 없이 불어오고 새는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바람은 일정하게 부는 법을 몰라 수만 갈래의 방향으로 와서 뿌리째 새를 흔들고 벼랑으로 달려간다. 그런 바람에도 새는 제 아랫도리를 꺾이는 일 없이 유연하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할 뿐이다.
섬에 가득한 소금기가 몸에 척척 달라붙어 바람은 항상 몸이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래 날마다 바다 건너 뭍으로 가기를 꿈꾸었으리라. 그곳에 가면 해풍이 아니라 그저 바람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까. 소금기를 날려버린 바람이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 존재인가. 멀리 도약하기 위해 섬에서 가장 높은 이 곳 오름을 택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발등이 부르트도록 기를 쓰고 오른 언덕에는 한가로운 새가 있었다. 바람은 새에게 무거운 제 몸의 소금기를 털어냈다. 섬에서 산 녹록하지 않은 세월만큼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사나운 맹수처럼 자꾸만 비벼댔다. 바람이 이빨을 으르렁거릴수록 키 작은 새는 더욱 낮게 엎드렸다. 땅속 마디줄기를 붙잡고 악착스레 버텼다. 가벼워진 바람은 벼랑 끝으로 가서 힘차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번번이 바다에 빠지고는 해서 좀체 뭍으로 가 닿지는 못했다.
바람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날마다 헐떡이며 언덕을 올랐다. 새는 땅속 마디 줄기에 잔털을 키우며 바람의 횡포에도 거뜬하게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런 날이 거듭되면서 새는 바람이 오는 길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겼고 마음이 미리 마중을 했고 몸이 알아서 먼저 누웠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이다. 바람의 위안이 되어 주는 새처럼 뭍을 꿈꾸는 바람도 언젠가는 새의 마음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새에게 몸 비비던 그때 이미 한없이 가벼운 자유의 몸이 되었던 걸 바람은 미처 몰랐다.
내게도 그런 바람 닮은 남자가 있다. 예전에 그는 떡갈나무 잎을 흔드는 미풍이거나 고샅을 지나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남의 집 울타리 너머 핀 목련을 꺾어 와 내게 건네주던, 다리가 후들거려 혼이 났다고 말 할 때의 취기 가득한 그는 향기로운 바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어릴 적 먹던 바람사탕의 달콤한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곤 했다.
그토록 여린 그도 간절히 불어 가길 원하던 뭍이 있었다. 그 뭍에 자신의 깃발을 꽂고 승자의 나팔을 불기위해 아등바등 하던 때가 있었다. 깃발에 갈증 난 사람처럼 어둠속에서도 쉬지 않고 자맥질을 했지만 쉬이 나아가지 못했다. 거친 물살 속에서 그를 보호해 줄 어떤 도구도 그는 가진 것이 없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의 유영하는 몸짓은 물속의 것들에겐 어쩌면 좋은 먹이였는지 모른다.
그는 이 곳 저 곳에서 자신의 살점을 떼어먹혔다. 그럴 때면 그는 물속에서 아주 오래 나오질 않았다. 숨 쉬는 일마저 귀찮아 져서 아예 물 아래로 가라앉고 싶었는지 모른다. 제동장치가 필요치 않은 조각배라도 있었다면 어찌어찌 해 보았겠지만 그는 언제나 빈 손 이었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아버린 그는 언제부턴가 멎어있는 바람이 되었다. 그 속에 상처가 곪아 자라고 있는 걸 몰랐다.
그가 언제부턴가 낯선 빛깔을 하고 여기저기 나부끼기 시작했다. 덧난 상처는 모난 바람이 되어 면도날처럼 나를 헤집었다. 내가 한 가지 바람에만 집착했을 때 내 삶의 모든 마디에선 수시로 서걱대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환장할 돌풍도 바로 곁에서 불어갔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의 색깔과 갈래에 맞춰 적응하는 법을 익혀야했다. 세상에 상처받은 그가 치대고 할퀴고 후려쳐도 좋은 그의 새가 되어야 했다. 대궁이 비어있는 새처럼 속엣 것 다 비우고 날마다 그를 기다렸다. 내 속을 그의 푸념과 한숨으로 채워도 좋았다. 바람처럼 비틀거리며 떠도는 그가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내 안에 머물러 주었으면 했다.
사는 건 흔들리는 일이고 흔들리는 건 부러지지 않는다. 마음을 나누면 슬픔조차도 감미롭다.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통곡하느라 목이 쉬어 터질 필요도, 투신하느라 허리가 꺾일 필요도 없다. 그의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번져 내게로 가만히 불어오기를 나는 기다렸다.
그가 부는 법을 잊어버린 바람처럼 풀죽어 들어 온 새벽이었다. 등 돌려 누운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절뚝이며 벼랑 끝으로 간 그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날지 못하는 새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절감했다. 바람의 맘을 이해하고 품기까지 바람의 흔적을 빌려 비명 같은 노래를 불렀음도 알았다.
나는 눈 먼 바람 같은 그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든든한 바람벽이 되어주고 싶었다. 키만 멀쑥하고 야윈 그는 순한 아이처럼 내게 기대왔다. 나부끼다 지쳐 안주하고 싶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이미 내 울타리 안에서 눅눅해져 있었다.
언덕을 훑고 지나던 바람이 곁을 주었나 보다. 한 곳에 머무는 법을 모르던 바람이 새와 사랑을 나누었나 보다. 햇살마저 다사로운 날, 새는 한결 나긋하고 바람은 전에 없이 살랑이더니 소머리 오름에서는 무더기로 산통이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새가 피워 올린 꽃은 바람의 등을 타고 새처럼 훨훨 날아오를 걸 믿는다.
*새- '띠'라고 하는 벼과의 식물, 제주 방언
2. 우물
머지않아 헐리게 될 옛집을 둘러본다. 이미 퇴락해버린 흔적이 노을빛에 적막하다. 한때 이 집은 한 가족의 단란함을 앞세운 탈곡기 소리로 분주했었고, 마당 한 귀퉁이에 자랑처럼 높이 솟은 볏짚 단이 가장의 위상을 대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 이후 줄곧 비워 놓은 집은 급속히 허물어져 갔다. 지금은 뜰 한 쪽에 무거운 뚜껑이 덮인 채 버려진 듯한 우물만이 그 깊이만큼 많은 이 집의 내력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집과 덕산어른 댁, 그리고 양동할머니 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막다른 골목을 함께 쓰고 살았다. 깊은 샘을 가진 우리 집과 얕은 샘을 가진 양동할머니 댁 사이에 덕산 어른 댁이 있고 그 집만 우물이 없었다. 덕산 어른이 농사짓는 일 외에 평생을 두고 한 일은 샘을 파는 일이었다. 앞마당과 뒷마당 심지어는 부엌 안에까지 그 어른의 삽과 곡괭이가 지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팠다가 덮었던 곳을 또 파 보기를 수도 없이 했지만 희한하게도 그 집에선 물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덕산 어른이 병을 얻어 세상을 뜨시고 대를 이어 그 어른의 아들도 우물을 파기 시작했지만 허사로 그치고 말았다. 우물이 없는 그 집 아주머니는 날마다 양동할머니네로 가서 먹을 물을 긷고 빨래를 했다.
여름 한낮 들일을 나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어머니는 샘물을 퍼 올려 아버지의 등목을 해 드렸다. “어, 차갑다.” 하시면서도 연신 싱글거리시던 모습, 내가 끼얹은 물에 바지 뒤춤이 젖는다며 투덜대면서도 싫지 않아 하시던 몸짓을 아직 이 우물은 기억할 것이다. 텃밭의 상추를 뽑아 겉절이를 하고 시원한 샘물로 오이냉국을 만들어 점심상을 차려드리면 아버지는 우물 옆 평상에 앉아 특별할 것도 없는 그 음식을 드시곤 세상에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느 날 덕산어른 댁 아주머니가 우리 집 우물에 담가 두었던 수박을 꺼내러 오셨다가 아버지가 등목 하는걸 보시고 화들짝 놀라던 표정이 지금도 역력하다. 한참 자라서야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덕산어른이 왜 그토록 우물에 목말라 했는지, 또한 양동 할머니 댁에만 물을 길으러 가는 이유가 꼭 샘이 얕아 물을 긷기 쉬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아버지의 나뭇짐에 얹혀온 참꽃이 투박한 항아리에 꽂혀 샘가에서 환하게 웃던 풍경을 기억한다. 낮은 울타리너머로 저절로 눈에 띄었을 그런 정경은 일찍 남편을 잃은 아주머니의 마음에 외로움으로 쌓였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이 깊어지면 우리 집 우물 위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쇠 그물을 타고 포도 넝쿨이 뻗어나갔다. 어머니를 위한 속정 깊은 아버지의 배려일 터였지만 시원한 그늘 드리운 우물가에서 찬물에 발 담그고 앉아, 포도 알이 여물어 가는 걸 보는 즐거움은 늘 내 차지였다. 밤사이 포도넝쿨 위를 지나던 강아지만한 쥐 한 마리가 우물에 빠져 버린 날 아버지는 빌려온 양수기로 하루를 꼬박 샘을 펐다. 그날의 소동이후 우리 집에도 펌프란 걸 들여오게 되었다. 팔 아프게 두레박을 끌어올려야 하는 수고를 들어줄 신식 설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하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펌프는 미운 다섯 살 계집아이처럼 삐치길 잘해서 물을 긷고 돌아서면 금방 물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럴 땐 까무룩 삼켜버린 물 한 바가지를 부은 후 펌프질을 해야 했다. 이 마중물이 없어 우리 집에 우물을 두고 남의 집 물을 꾸러 가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힘이 달리는 어린 나는 펌프에 매달려 널을 뛰듯 물을 길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내가 마중물이 되어 기다리곤 했다. 이제는 물 긷기가 훨씬 수월해진 우리 집으로 덕산어른 댁 식구들이 오겠거니 하고……. 하지만 끝내 옆집 식구들은 우리 집으로 물을 길으러 오는 일이 없었다.
두레박에서 펌프로 한 단계 더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신 어머니는 우물 옆 빈터에다 꽃을 가꾸셨다. 목단과 덩굴장미, 달개비가 순서대로 피고 봉선화와 채송화도 흙 담 아래 나직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남박에 쌀을 씻던 어머니는 그 물을 꽃들에게 부어주고는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시곤 했다. 함지박만한 목단 꽃잎에 얼굴을 묻었다가 노란 꽃술을 코끝에 묻힌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그 꽃은 향기가 없다고 일러주시던 어머니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젊고 예뻤다.
큰 가뭄이 들던 해에는 온 동네사람들이 샘이 깊은 우리 집 우물물을 길어다 먹었다. 바닥이 보이도록 퍼내어도 이튿날 아침이 되면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곤 했는데 사람들은 고마운 우리 집 우물물이 달기도 하다며 입을 모았다. 사람사이의 인정도 움켜쥐기보다 베풀수록 더욱 깊어짐을 말없는 우물이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몇 해 후 우리 마을에도 수도가 들어오면서 덕산 아주머니 네의 물 걱정도 끝이 났다. 때맞춰 마을에 생겨나기 시작한 염색공장은 집집마다 거의 하나씩 있던 맑은 우물을 뿌옇게 오염시켰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소독 약 냄새를 참아가며 수돗물을 식수로 써야 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 못한 나는 알레르기와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고 집집마다 우물은 무거운 뚜껑이 덮인 채 제 할 일을 마감하여야 했다.
신령스런 기운이 스며있다고 믿어 언제나 정갈하게 다루던 우물, 길한 날을 기다려 첫새벽에 길은 물로 장을 담그고 술을 빚던, 덕산어른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셨던 우물이 이제는 우리들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더운 여름 날 우리 부모님의 정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었던 이 우물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동네 전체가 재개발이라는 명분에 밀려 본 모습을 잃어가더니 급기야 우리 집도 학교 부지로 내어 놓게 된 때문이다.
흙으로 입이 봉해져 흔적 없이 묻힐 우물을 내려다본다. 고른돌로 테두리를 쌓아올린 이끼 낀 우물 위로 꽃노을이 진다. 그 속에 바람 불어 비 오고 볕들고 달 기울던 많은 날을 백화등처럼 잔잔하게 꾸려가던 한 가족의 단란함이 빛이 바랜 채 펼쳐지고 있다. 두레박 끈을 길게 늘여 길은 물로 어머니가 진하게 타주시던 미숫가루 한 그릇이 목마르게 그립다.
3. 메밀 베개
가을볕에 베갯속을 말린다. 여름을 지나는 동안 눅눅해진 메밀껍질을 볕에 널었다. 먼 바이칼 호수와 아무르강에서 이곳까지 흘러왔다는 메밀은 그 힘든 여정만큼이나 가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꽃에는 꿀이 많아 벌꿀의 밀원이 되고 제 알맹이는 풍부한 먹을거리와 약재로 내어준다. 그러고도 할 일은 남아 껍질은 베갯속으로 쓰이는 이로운 식물이다.
남편은 메밀 베개를 유난히 좋아한다. 내가 혼수로 장만해 온 침대마저 누우면 등에서 땀이 난다는 이유로 몇 개월 만에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처럼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니 차가운 성질을 가진 메밀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처음 베개를 장만할 때 두어 됫박은 실히 될 것 같던 메밀껍질이 지금은 그 부피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남편은 자꾸 낮아지는 베개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나는 더 보충해줄 맘이 없다. 베개 높이와 건강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니 말이다.
대나무 채반에 널어놓은 메밀껍질은 가벼운 바람에도 이리저리 흩날린다. 게 중 하나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본다. 알맹이가 빠져나간 암갈색 껍질을 펴보니 작고 앙증맞은 꽃잎 세 장을 붙여 놓은 모양이다. 하얗게 무리지어 피는 화사한 꽃에만 눈길을 줄줄 알았지 지금껏 한 번도 어두운 빛깔을 지닌 열매를 관심 있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열매의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섭섭한 일이었을까. 성의를 다해 꽃피우는 일 못지않게 비바람 견디며 열매 맺는 일 또한 숨 가쁘게 힘에 부쳤을 것이다. 더구나 척박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라면 더욱더 그러했으리라. 마치 내 남편처럼.
날마다 사다리를 타야하는 남편은 잠자리에 누우면 늘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십 수 년 조명공사를 해 온 그는 사다리에 의지해 천정을 보는 시간이 땅을 짚고 선 시간보다 더 많았다. 몸의 균형을 잡느라 구부린 한 쪽 다리와는 다르게 힘을 주고 버틴 다리의 종아리에 어느 날부터인가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푸른 핏줄이 만들어 내는 무늬가 내를 그리고 강을 그리고 산맥을 만들었다. 뜰 안 가득 꽃들이 수런거리는 봄밤에도 사다리를 타고 들어 온 그의 몸에선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 깊이를 더 해 갔다. 그럴 때 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깨끗이 손질한 메밀 베개를 내어주고 그의 아픈 다리를 만져 주는 것뿐이었다.
소규모 건축현장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기에 앞서 계약서를 먼저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사대금은 늘 후불제였다. 그런 관행은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어서 그의 종아리에 똬리를 튼 덩굴나무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건축업자의 파산이나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하여 물건 값과 인건비를 고스란히 날리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아무리 미수 금액이 많아도 받을 수 없는 돈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공사에 쓰인 자재비와 함께 일한 사람들의 수고비는 빚이 되어 상처받은 남편을 날마다 괴롭혔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당신은 남 좋은 일 참 많이도 했으니 적어도 지옥엔 안 갈 거다.’ 라는 너스레를 위로랍시고 떨었다.
작업현장에서의 일은 대부분 일몰과 함께 끝이 났다. 하지만 낡은 사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들어와 메밀 베개를 베고 편히 쉬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언제나 업자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공사를 수주하고 시공하고 결재를 받는 일까지 혼자서 뛰어야 하는 힘든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제 몸은 묵과 냉면, 혈압약이 되고 그러고도 껍질은 남아 베갯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감내 해야 하는 메밀처럼.
평소에 따뜻한 성품을 가진 남편이지만 가끔씩은 까칠하고 차가운 메밀을 닮아 있었다. 고단한 현장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게에서 맡아 놓은 동네 출장을 다시 나서야 했다. 그러다 지치고 힘이 들면 가게에 발목이 묶인 채 꼼짝할 수 없는 나를 향해 거친 말들을 내뱉곤 했다. 메밀껍질을 맨살에 부빌 때처럼 아리고 따가웠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미모사마냥 움츠러들고는 했는데 그의 덩굴진 종아리를 떠올리곤 안쓰러운 마음만 가득 쌓이곤 했다.
차가운 날씨에 손끝이 해어지고 발바닥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면 그는 미세한 틈으로 연고를 밀어 넣고 성냥불을 그어댔다. 그런 아픈 풍경을 볼 때마다 나는 메밀꽃 냄새를 맡곤 했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메밀꽃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리 향기롭지 않은 꽃이었다. 남편의 일도 그랬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 일은 무척 화려하게 내 눈에 비쳤다. 그가 얼마간 손을 움직이기만 하면 삭막한 실내가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밋밋하던 정원이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작 사다리위에 있는 그의 거친 숨소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해가 거듭되면서 그가 타는 사다리가 빛이 바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오래된 덩굴나무는 튼실하게 뿌리를 뻗어 나갔다. 그는 ‘하지정맥류’를 가진 환자가 된 것이다. 비 오는 날 전선을 만지면 손끝으로 저릿하게 전류가 흐른다고 했다. 무거운 조명등을 오래 달다 보면 뒷목이 뻣뻣해져 나중엔 감각이 없어질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사다리에 올라있는 동안은 오히려 익숙해서 편안하다며 웃었다. 비탈진 땅에서 가뭄에 목마르지 않고 충실히 열매 맺는 메밀처럼 그는 자신의 다리에 덩굴나무를 키우며 척박한 환경에서 버티는 법을 익혀왔던 것이다.
조물조물 빨아 널었던 속통이며 홑청이 보송하게 말랐다. 햇볕과 바람을 쐬어주어 한결 가슬가슬해진 메밀껍질을 속통에 넣어 여미고 홑청을 입힌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바느질을 한다. 촘촘하게 박음질 된 베게 홑청의 골진 자리마다 가족을 위해 애써 참아 온 그의 피곤과 시름이 녹아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쪽이 시리다. 속통 가장자리 둥근 베갯모에는 갖가지 문양이 수 놓였고 그 가운데 구름 위를 두루미 한 쌍이 다정히 날고 있다. 그의 잠도 이렇듯 아름답고 달콤했으면 좋겠다. 열이 많은 이의 몸을 식혀주는 메밀이 그러하듯 어두운 곳의 불을 밝히는 그의 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임을 알기에 메밀베개를 베고 누운 그의 잠도 참으로 편안할 걸 믿는다.
4. 청학(靑鶴)
봄은 바람과 내통하는 게 분명했다. 달빛으로 쌓은 성이라 이름 붙여진 내가 사는 마을에도 어김없이 바람은 불었다. 입술마저 파리해진 달이 몇 날을 그 바람에 떨고 나면 기척도 없던 봄은 눈앞에 와 있었다. 먼 산에 꽃 빛은 짙어지고 어디서 화전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 바람이 불어오기 전 오래 된 청소기를 바꾸었다. 연결대 하나가 부러지긴 했지만 어디 고장 난 곳 없이 잘 돌아갔다. 다만 너무 무거워서 청소를 할 때 마다 아픈 어깨가 더 아픈 게 문제였다.
신혼시절 처음 청소기를 살 땐 생각지도 않던 지출이라 많이 망설였다. 결혼 일 년 만에 좀 무리다 싶었지만 방 두 칸짜리 남의 집에서 거실 겸 주방이 딸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겨우 지난 때였다. 비질을 할 때 마다 일어나는 먼지가 갓난쟁이의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형편은 빠듯했지만 그와 나는 의논 끝에 최신형 물걸레 청소기를 할부로 구입했다. 그걸 무려 십이 년 동안이나 사용했다. 집안의 가구 대부분이 청소기에 부딪쳐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물건에도 마음이란 게 있는지 정이 들대로 들어서 완전히 고물이 되기 전에는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대형마트나 전자제품 상가를 지날 때면 새로 나온 슬림형 청소기가 자꾸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둘째아이를 낳은 후부터 산후풍이 생겼다. 목과 어깨가 날마다 아팠다. 무거운 걸 들 때 마다 통증이 더 심했다. 살림을 하고 아이를 기르고 가게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여서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그러니 가벼운 청소기를 바라보는 내 눈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끝내 모른 척 했다. 멀쩡한 걸 두고 새 물건을 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는 그가 당연한지도 몰랐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우연찮게도 전자제품 상품권이 생겼다. 나는 서둘러 슬림형 청소기를 구입했다. 지난 번 청소기에 비하면 부피도 절반에 가격도 절반이었다. 새로 산 청소기는 날씬하고 가벼워서 자꾸만 밀어보고 싶어졌다. 청소가 신이나니 시간도 반으로 준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껏 참고 살았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투박하고 볼품도 없으면서 무겁기만 하던 옛날 청소기가 갈수록 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모양내는 것도 모르고 묵묵히 먼지만 빨아들이는 청소기. 제 할 일에만 충실한 그것이 조강지처인 나를 닮은 것 같았다. 제 몸 어느 한 군데가 부러져도 본연의 의무에 한 치의 게으름도 없는 못생긴 청소기에 어쩔 수 없는 연민이 느껴지곤 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겨 넣어둔 창고 쪽으로 나도 모르게 눈길이 쏠렸다.
그와는 반대로 온갖 멋을 부린 새로 산 청소기는 가볍고 매끄러워서 꼭 첩 같이 생각되었다. 치장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긴 호스는 부드럽고 투명해서 절로 눈이 갔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입구는 작고 날렵해서 어지간한 가구 밑에도 쏙쏙 잘 들어갔다. 장애물을 만나면 끝이 반반씩 접어져서 불편을 덜어주었다. 마트에서 그 물건을 맨 먼저 보았을 때, 생긴 모양에 까무룩 반하고 접어지는 주둥이 때문에 두 번 반해서 다른 건 돌아보지도 않고 덜컥 사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그 물건을 쓰면 쓸수록 지난 번 청소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기계의 소음도 줄어들고 무게도 가벼운데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 되짚어 보았다. 투박한 옛날 청소기 보다 먼지를 흡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었다. 겉모양만 예쁜 청소기를 산 걸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제는 싫다고 물릴 수도 없었다.
그즈음, 남편에게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만나는 여자는 새로 산 청소기 같은 여자였다. 전화기 속의 그 여자는 간드러지는 위쪽지방 말씨를 쓰고 있었다. 전화 목소리에 나긋함과 젊음이 배어있었다. 그런 여자지만 남편이 그녀를 만나면서 편안하고 행복했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간 내가 본 그의 낯빛은 사는 일이 더 이상 환멸스러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며 툭하면 거칠게 행동했다. 말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습관처럼 굳어갔다. 그는 마치 오늘만 살고 말 것처럼 술을 마셨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그의 몹쓸 다감함을 떠올리며 힘든 그를 위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밖으로만 돌았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투박하고 못생긴 청소기처럼 살아온 날들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없는 자책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던 나는 결국엔 앓아누웠다. 부르지 않아도 봄은 왔지만 나는 폐허처럼 누워만 지냈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내일인 날의 연속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들으려고 켜놓은 텔레비전은 저 혼자 시끄러웠는데 문득 다가오는 한 마디가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꽃은 피고, 불어야 될 바람은 불고, 봄은 온다.’
나는 느닷없이 봄 구경이 하고 싶었다. 간신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꾸역꾸역 물에 말은 밥을 먹고 억지 기운을 차렸다. 어설프나마 채비를 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하늘은 눈이 시리고 햇빛은 몽롱했다. 고속도로 어디쯤에서 청학이란 이정표와 맞닥뜨렸다. ‘청학’ 언젠가 내가 꿈꾸었던 적 있는 이상향이었다.
청학엘 가면 푸른 학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람의 얼굴을 닮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영물. 파란 바위와 검은 골짜기를 지나 가끔씩 내려와 물을 마신다는 깊은 연못엘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여덟 개나 된다는 청학의 날개 하나를 빌려 타고 나도 하늘을 날아보면 어떨까. 말 안하고도 살 수 있는 청학의 등에 올라타면 숨쉬기도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묻고 또 물어 찾아간 청학연못에서 나는 푸른 학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흰 옷 입은 도인들이 사는 조용한 골짜기에서 내가 본 건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순간도 제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여서 꽃을 깨우고 계곡물을 흔들었다. 바람이 저렇듯 쉼 없이 불어가면 어느 사이엔가 봄꽃은 시들고 계절은 지나갈 터였다. 죽을 만큼 아픈 상처도 바람결에 아물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상상속의 청학이 내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나고 보면 그때 본 바람은 청학에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나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또 졌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찾던 청학은 바로 내 가까이에, 내 맘 속에 있었다.
5. 환상통
세상의 모든 벽은 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절실하게 넘어야 할 장애물이라면 거기에 깊게 스미어 벽이 저절로 무너지게 하는 법도 있다. 유우니 사막의 소금기둥이 빗물로 인해 녹아내리는 것처럼.
내게는 손가락이 모자라는 오빠가 있다. 그는 지금 환상통을 앓고 있다. 예리한 칼끝에 그의 손은 난자당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나간 손가락 마디를 날카로운 바늘로 쉴 새 없이 찔러댄다. 그는 어른이면서 아이처럼 아파한다. 그럴 때 마다 술을 마시고 물멀미를 하듯 비틀거렸다.
알콜병동으로 그를 면회하러 갔다. 병동 입구에는 안으로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문이 버티고 있었다. 묵직한 무엇이 가슴을 짓눌렀다. 신분 확인이 끝나고 흰 가운을 입은 건장한 남자는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역한 크레졸 냄새가 온 몸을 휙 하고 덮쳤다. 이 속에서 그가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조금 넓은 복도에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탁구를 치고 있었지만 그들 무리 속에 숫기 없는 그는 없었다. 상담실로 안내되었다. 남자 간호사는 내게 간단한 질문과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는 그를 데리러 갔다.
잠시 후 언제나처럼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그가 나타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오빠로서 동생에게 보여줘서는 안 될 장면을 들킨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이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나른해 보이던 그는 갑자기 간절한 눈빛을 한 채 내게 말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여기서 하루 빨리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필요한건 없느냐 물으니 그는 또 아이처럼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다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한 쪽 손은 여전히 바지주머니 속에 단단히 감추어져 있었다.
그가 왼손을 바지주머니 속에 숨기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는 섬유공장이 즐비했고 그는 그곳에서 직물기계를 수리하는 일을 했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었으므로 자부심도 가득했다. 고장 난 베틀수리가 끝나고 고운천이 짜여 나오는 걸 볼 때면 뿌듯함이 밀려든다고 했다. 그런 그가 야근을 하던 어느 날 잠깐의 실수로 움직이는 베틀에 손을 넣었다. 미처 스위치를 내리지 않은 것이다. 그 후로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곤 그의 왼손은 늘 주머니 속에 똬리를 틀었다.
그는 갈수록 말 수가 줄어들었고 안으로 숨으려고만 했다. 우리 가족은 그를 향한 번뇌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여기저기 다리를 놓아 그의 짝을 찾아주려 애썼다. 마침내 그는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숨기고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 그에게도 더디게 가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눈을 흘기는 날이 찾아왔다. 물기 없던 입술에 윤기가 돌고 기름때로 얼룩진 오른손에 숨겨놓은 왼손을 포개어 자꾸만 비벼 씻었다. 우리 모두는 아이처럼 여린 그가 서울까투리마냥 넉살 좋은 여자를 만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 역시 참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였다.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쯤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의 왼쪽 주머니에 숨은 손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녀의 절망은 너무도 컸고 여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처럼 보였다. 우리는 한없는 미안함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섭섭함도 가졌다.
오래 고민하던 그녀는 오빠와의 결혼을 결정했다. 기뻐하는 가족과는 달리 이미 상처받은 그의 마음속엔 어쩔 수 없는 앙금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그의 치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법을 그녀는 몰랐다. 신혼 여행길에서 남편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아내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벽을 쌓고 있었다. 상처받은 이의 슬픔을 위로하는 일은 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더 많이 아파해야 한다는 걸 나는 이제 오빠를 보며 깨닫는다. 비를 맞는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일보다 함께 비를 맞는 편이 더 큰 위안이 되듯이 말이다. 이미 높은 벽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그를 밖으로 불러내는 일조차 그녀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지 못한 채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시간이 흘러 그는 다니던 공장의 주인이 되었다. 여전히 아내 앞에서조차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모습은 그대로였다. 기계를 돌보는 그의 곁에서 그녀는 베 짜는 일을 도왔다. 지켜보는 가족들은 씨실과 날실이 부지런히 움직여 한 두루마리의 완성된 천을 만들 듯 그들의 가정도 촘촘하게 수놓아 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툭하면 멈추는 그들 공장의 낡은 직물기계처럼 둘 사이엔 뭉툭한 씨줄과 뾰족한 날줄이 얽혀 쉼 없이 끊어지고 찢겨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부터 불안하게 시작한 두 사람의 결합은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기도 전에 끝이 났다. 마음에 쌓은 높은 벽을 허물지 못했던 그들은 사업실패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숨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의 환상통은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불행을 모자라는 손가락 탓으로 여기며 거칠어져 갔다.
병동의 굳게 닫힌 문과 크레졸 냄새에 익숙해진 때문인지 그는 그곳 생활에 순응해 갔다. 돈을 부쳐 달라는 전화도 뜸해졌다. 가끔씩 식사 시간에 면회를 가면 식판을 들고 얌전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를 볼 때도 있었다. 상담사는 그가 병실의 조장을 맡아 활달하게 지내고 있으며 병원내의 자질구레한 일을 해서 용돈을 충당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런 얼마 후 그는 타의에 의해 실려 들어간 수용시설의 높은 벽을 뚫고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한 손은 바지주머니에 꽂힌 채였지만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퇴원 하는 날, 나는 그가 반듯하게 걷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 구두를 선물했다.
그의 환상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아내가 돌아온다면 그의 환상통도 끝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이미 벽속에 갇혀 본 그는 스스로 벽을 허무는 법도 익혔을 걸 믿는다. 지금껏 숨기고만 있었던 왼손을 당당히 내어놓고 그녀에게 깊이 스며들기를 또한 소망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놓고 말 할 수 없는 환상통 한가지씩은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만든 벽속에 갇혀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한 부분을 누군가 어루만져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벽은 자신이 만든 것이므로 스스로 허물어야 한다. 뛰어넘든지 혹은 깊이 스며들든지 간에 말이다.
참고 작품
6. 장구섬
장구리는 남해의 작은 마을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앞 바다엔 장구를 닮은 섬이 있어 사람들은 그 섬을 장구섬이라 부른다. 한 해가 저물 즈음이면 마을 앞 장구섬까지 바닷길이 열리고 동네 아낙들은 물 빠진 갯벌에서 굴을 딴다. 한 평 혹은 두 평 남짓 지키미 돌로 구획을 정해 놓은 밭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들의 유산이다.
해질녘이면 바구니가득 따 모은 굴을 상인에게 실어주고 돈을 손에 쥔다. 바닷물에 설렁설렁 굴을 헹굴 적에 굵고 실한 것들은 아껴두었다가 아들네로, 딸네로 보낸다. 돈을 좀 덜 만져도 자식들이 굴을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면 배가 부르다며 아낙들은 굴 껍질처럼 투박하게 웃는다.
남편과 함께 조명사업을 할 때였다. 큰 공사를 하나 맡아하게 되었는데 마무리를 한지 오랜 시일이 지났지만 돈이 나오질 않았다. 자금이 한 곳에 묶이니 자질구레한 작은 공사를 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우선 물건을 가져오는 업체에서 제동을 걸었다. 밀린 물건 값을 갚기 전에는 더 이상 물건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일은 해야 하는데 물건이 없으니 낭패였다. 애가 탄 남편은 연거푸 담배만 피워 물고 나는 풀죽은 남편을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시장엘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와 거래처를 찾아갔다. 번듯한 건물은 보기에도 위압적이었다. 작업복 차림의 사장은 배달할 물건을 운반하는 중이었다. 그는 조명 도매로 꽤 큰돈을 벌었다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여전히 일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여러 대의 차에 물건을 나누어 싣느라 직원들의 움직임도 바빠 보였다. 창고 안에 가득 쌓인 물건들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지금껏 우리는 거래처와의 신용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모아둔 돈이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적금을 깨서 해결하고 저 물건을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부도를 맞아 우리는 오랫동안 무일푼이었다. 사무실에도 물건이 든 상자로 가득해서 어디에 서서 기다려야 할지 나는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한참 후에 일을 끝내고 들어 온 사장의 얼굴엔 반갑잖은 기색이 역력했다.
다 식은 찻잔을 들고 서서 나는 매달리듯 말을 했다. 이번에 우리가 공사를 해 준 업체는 탄탄하기로 소문난 곳이라는 걸 누누이 강조했다. 그런 만큼 거래처에 손해를 입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입술이 바짝 말라 식은 차를 한 입 마셨다. 속이 서늘해 왔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자신은 사업을 하면서 세워둔 원칙이란 게 있는데 아직 한 번도 그 원칙을 어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변에 원칙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여럿 보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다 망하더라고 했다. 갑자기 그가 명절마다 보내와서 맛있게 먹었던 곶감이 속에서 치밀고 올라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돌아서 나오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커다란 상실감을 짊어지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어디를 어떻게 헤매다 무슨 정신으로 그곳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젠가 한번 와 본적 있는 장구리를 지나고 있었다. 장구섬 너머로 막 해가 지는 중이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중에도 지는 해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루의 고단함을 이끌고 뭍을 향해 쪽배를 저어 오는 노파의 얼굴에 발갛게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따뜻하고도 평온한 그 빛이 내게도 가만히 번져왔다.
일몰이 아름다운 건 내일에 대한 희망 때문이라고 어떤 이가 그랬다. 하늘과 바다를 함께 물들이고 사라지는 해는 영영 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힘차게 떠오르기 위해 잠시 우리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영원히 빛이 드는 세상도 없고 암흑만 연속인 나라도 없다. 한 쪽이 밝으면 다른 쪽은 어둡기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조금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는 해가 내게 말 걸어왔다. 무엇이든 움켜쥐려고만 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게 분명하다. 내가 겪은 아픔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 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다.
해지는 풍광에 결코 한 번 젖어본 적 없을 것 같은 그 사장을 떠올렸다. 마음에 햇살마루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채 바삐 살고 있는 사람, 두껍고 큰 손에 박힌 굳은 살 보다 더 딱딱한 심장을 가졌을 사람, 다 낡아 털털거리는 소리가 나는 그의 트럭보다 더 악착스레 자신을 부려먹는 사람. 늘어나는 금고의 부피에 행복의 부피를 견주며 살아갈 그 사장이 갑자기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신 까치놀이 잘게 부서지는 장구섬 앞에서 나는 어둠 뒤에 찾아올 밝음을 보았다. 해 빠진 바다에 서러웠던 마음을 헹궈냈다. 멀리 포구에 정박해 둔 배들이 찰랑이는 물살에 내 맘처럼 씻기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입김이 나고 손이 시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밤은 깊은데 때 아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과 상의해 힘든 조명사업을 정리했다. 미수금이 가득 적힌 장부는 불면의 밤만 가져다 줄 뿐이므로 흔적조차 없앴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그리 아까울 것도 없었다. 줄 건 주어야 했으므로 서둘러 거래처의 빚을 갚았다. 날마다 속에서 올라오던 신물이 비로소 멈춘 것 같았다.
힘들었던 지난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떼먹힌 돈 생각에 잠 못 들던 밤도 사라지고 모든 걸 잊고 살 즈음 거래처 사장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 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답게 구릿빛 피부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졌었다. 겉으로는 젊고 건강해 보였다. 그보다 그의 건강을 더 챙기는 젊은 아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던 나이의 꼭 반을 살고 갔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쓰러졌다고 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여서 죽음은 정해진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사는 일이 그처럼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다는 걸 나보다 많이 가진 그는 몰랐다.
장구섬으로 해가진다. 굴 따는 아낙들이 비로소 허리를 편다. 사는 일이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막막할 때 나는, 해지는 풍광이 따뜻한 장구리에 간다.
7. 시간의 풍경
할단새를 기억한다. 눈 덮인 킬리만자로에 산다는 전설속의 새. 밤새 추위에 떨면서 아침이 되면 둥지를 트리라 마음먹지만 햇살이 비치면 그 따스함에 모든 걸 잊고 만다는 망각의 새.
서른아홉의 끝에서 나는 원인이 빤한 우울을 앓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던 젊은 날 그토록 갈망했던 마흔이 문 앞에 와 있었지만 바라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무채색의 내가 희미하게 눈 떠 있을 뿐이었다. 꿈마저 망각한 채 멎어있는 나를 흔들어 깨울 무언가가 참으로 절실했다.
그 무렵 지인을 통해 한라산 사진을 주로 찍는다는 사진가를 알게 되었다. 틈만 나면 그 분의 홈을 들락거렸다. 사진을 향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고 고난의 기록과도 같은 산행일기는 읽을수록 매료되었다. 여행을 즐기는 내게 그의 사진들은 또 다른 신세계로 다가왔다.
모처럼의 여행에서 남녘에 나다니는 봄빛과 섬진강을 따라 흩어지는 매화 꽃잎을 보며 두고 오기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저녁이었을 게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제법 무게 나가는 카메라를 떡하니 사들이고 말았다. 찬거리를 사러나간 시장에서 간 고등어 한 손과 소국 한 다발을 앞에 두고도 한참을 망설이곤 하던 나로서는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꾸물대지 않았다. 시간은 멎어있는 게 아니란 걸 자꾸만 부피를 키워가는 나이가 말해주고 있었다.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의 터전마저 뭍에서 섬으로 옮길 정도로 사진을 사랑하는 그분은 기꺼이 나의 사부가 되어주었다. 집안일을 모두 끝낸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사부님의 사진 강의가 빽빽하게 올라와 있었다. 꼼꼼하게 공부하고 숙제까지 마치면 창밖이 뿌옇게 밝아오는 날도 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으므로 약간의 긴장과 피곤이 섞인 그 시간이 소름 돋도록 좋았다.
카메라를 옆에 끼고 사는 날이 늘어났다. 틈만 나면 습지의 안개와 강나루의 일몰을 담으러 나섰다. 노을이 번지는 키 큰 미루나무 주변과 강가 보리밭을 서성거렸다. 주부의 부재 뒤에 찾아올 가족의 불편을 덜기 위해 몇 배로 부지런을 떨어야 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므로 투덜거림이란 녀석은 맨 발로 도망가고 뒤꿈치도 보이지 않았다.
적정노출과 셔터스피드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지만 실전에서는 항상 헤매곤 했다. 디지털카메라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포토샵을 통한 후작업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피사체를 보는 카메라아이 라든가 구도 잡기는 갈수록 어려웠다. 노출이 모자라거나 색감이 맞지 않는 사진을 숙제로 제출한 날은 어김없이 사부님의 질책이 날아들었다. 그러면서 함께 묻혀오는 한 마디. "설거지 끝나면 전화하세요!" 더딘 걸음으로 따라 오는 제자에게 언제든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준비를 하고 계신 사부님을 위해서라도 처음의 열정만은 간직해야 했다.
그저 스쳐 지나던 풍경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바람이 다니는 길이 보였다. 언덕의 억새밭에도, 강가 보리밭에도, 하늘을 지나는 구름에게도 바람의 길이 있었다. 낯선 바람을 만나는 일이 나를 들뜨게 했다. 들판을 수놓은 키 작은 꽃들의 이마며 그물을 끌어 올리는 어부의 억센 팔뚝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포구에 나란히 정박해 둔 코발트블루의 어선들이 이국에서 만난 엽서마냥 반가운 악수를 청해 올 때나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엿 파는 총각의 질펀한 사투리를 들을 때면 두 온 가족이 눈물겹도록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 풍경들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뭍의 소음들이 귀를 어지럽히면 섬으로 찾아들었다. 단조로움만 있고 잡다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곳, 그런 곳에서 몇 달 혹은 며칠이라도 발목이 묶여 버렸으면 했다.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태풍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섬에 들 때 마다 바다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고 나는 예정대로 섬을 떠나와야만 했다. 한번쯤 짙은 해무 속에 길을 잃고 싶었으나 아직 그 작은 소망도 이루어 진적 없다.
사람이 그리울 땐 시골 장을 찾아 나섰다. 자꾸만 사라져가는 우리네 정겨운 모습들이 그 곳에 있었다.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의 흙 묻은 손, 그 얼굴에 번지는 함박웃음, 대장장이의 뺨을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 오일장에서 모처럼 만난 동무와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 오래보아도 질리지 않는 따듯함이 그곳에 있었다.
꼽아 보면 여러 해 동안 맘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길을 헤매고 다녔다. 일곱 번 색이 변한다고 이름 붙여진 서해 갯벌 칠면초가 내 맘 같아 보일 때도 있었고 폐 염전의 적막이 꽃보다 살가울 때도 있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여행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지금의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동해의 일출을 찍기로 한 날, 잠을 아껴 먼 길을 달려가 손 시린 것도 잊고 셔터를 누른다. 어느새 훌쩍 철이 들어 기다림을 아는 내가 한껏 성숙해진 나를 만난다.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오메가는 볼 수 없고 여명만을 찍고 돌아서야 할 때 사진가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이 자연이라는 걸 또한 배우게 된다.
출사에서 돌아와 내가 찍은 사진들을 모니터에 띄우면 상처를 지니고도 여전히 푸른 나무가 있고 볼 때 마다 다른 일출과 일몰의 장엄함이 있다. 그런 자연에게서 나는 생명력을 느끼고 기운을 얻는다. 그 속에 몰입하는 동안 자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사진은 영원한 시간의 풍경이기에 다만 한 컷을 노출할 때에도 그리움을 볼 줄 알아야 한다.'던 어느 사진 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날마다 그리움이 가득 담긴 내 삶의 풍경화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8. 봄동
위장병이 도졌다. 질기도록 날 따라다니는 친구 같은 병이다. 한동안 내 속에 조용히 침잠해 있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둘 참이었다. 아는 척 했다간 귀찮은 일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그 중에 목젖을 넘어 세상 밖을 기웃거리는 위산이란 녀석은 적이 날 긴장하게 하고 등이 따끔거리게도 하니 좋을 게 없다. 음식을 삼킴과 동시에 명치가 아파오면 어쩔 수 없이 동네 의원에 앉아 내 순서를 기다리는 일도 성가시긴 마찬가지다. 내시경을 확인한 의사는 늘 같은 소견을 내어놓는다.
“약간의 위염과 식도염 증상이 있습니다. 음식을 한 번에 쉰 번쯤 씹어 드시고 밀가루 음식이나 카페인이 든 커피와 술은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위에 가장 해롭습니다.”
무채색뿐인 겨울 풍경 끝에서 나는 식욕을 잃고 끝 모를 나른함에 묻혀 지내는 중이었다. 찬바람이 부는 으스름 녘에 시장을 지나다가 해남에서 왔다는 봄동을 만났을 때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땅 끝이라는 이름이 주는 그 막막함 앞에서 나는 희한하게도 입맛이 살아나고 있었다. 반가운 소포를 받아들 듯 주소가 땅 끝이라 쓰인 초록의 봄동을 한 바구니 샀다. 땅 끝까지 등 떠밀리어 온 바람이 바다에 빠지기 전 머문 흔적을 만져 보았다. 오돌토돌한 돌기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제 속살을 훤하게 드러낸 봄동이 바람과 몸 비빈 자국이었다. 온실 속에 피는 꽃이 그러하듯 멎어있는 것들은 다 연약하다. 흔들리며 견디는 것들은 소금기 가득한 바람에도 제 몸을 섞을 줄 안다. 거칠게 살찌울 줄 안다.
그 봄동 탓이었다. 매운바람과 여린 햇살을 함께 버무려 질깃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봄동 겉절이 한 접시를 아귀가 미어지게 포식한 후부터였다.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반갑잖은 친구가 날 찾아왔다. 나는 다시 처방에 따라 약을 먹고 잡다한 간식과 애인 같은 커피와 가끔씩 즐기는 술을 한동안 끊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잃어버린 식욕을 찾은 날 저녁 봄동에게서 듣던 살가운 바람소리는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위산으로 하여 등이 따끔거리고 명치가 아파오면서 귀 거칠고 덤거칠게 되었다.
단조로운 유동식만으로 버티는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났다. 수시로 나를 갉아먹던 위산이란 놈이 제자리를 찾아갔는지 거짓말처럼 속이 편안해졌다. 주방 구석에 풀죽어 늘어진 봄동이 마치 나와 함께 앓고 난 것처럼 핼쑥해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냉수에 담가두었더니 금방 생기가 돌았다. 나는 또다시 잃었던 입맛이 살아나고 있었다. 서둘러 투박한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싱싱해진 이파리를 뚝뚝 찢어 넣었다. 펄펄 끓는 봄동 된장국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내게도 풀 빛 봄물이 들것 같았다.
겨우내 웅크리고 산 내 몸에 더디게 오는 봄을 불러들이는 일은 늘 이렇듯 요란하다.
9. 불통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또래 아이 하나가 꽃무늬 코고무신을 신고 골목에 놀러 나왔다. 처음 보는 꽃고무신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보아 온 신발 중에 가장 예뻤다. 나도 당장에 신고 싶어 한걸음에 집에 와서는 막무가내로 어른들을 졸랐다. 닷새 마다 돌아오는 장이 서려면 아직 이틀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어른들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나븐들에 있는 시장 초입에는 장날이 아니라도 문을 여는 신발전이 있다고 고집 센 내가 우긴 탓이었다. 부득불 아버지는 조그만 나를 앞세우고 신발전에 가야만 했다.
종종걸음을 치며 신발전까지 가는 동안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새 신발을 진열해놓은 툇마루를 훑어보니 유난히 예쁜 꽃무늬 코고무신만 눈에 들어왔다. 얼른 신어 보았다. 뒤꿈치가 좀 끼는 듯 했지만 발에 잘 맞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장날에 팔 물건을 아직 들여 놓지 않아 코고무신은 이것 한 켤레 밖에 없다는 주인의 말을 이미 들은 터였다. 신발이 작다고 대답하면 꼼짝없이 이틀을 더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새 신을 신고 싶어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이틀이란 시간은 그때의 나에겐 너무나 긴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꼭 끼는 새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갈 때와는 달리 콧노래 대신 신음 소리가 배어나왔다. 걸을수록 뒤꿈치가 쓰라려 와도 꾹 참았다. 집에 다다라 댓돌 위에 신을 벗으니 양쪽 뒤꿈치는 발갛게 부풀었고 물집이 터진 자리는 찐득한 진물이 흘러내렸다. 흐르는 진물마냥 너무 아파 울고 싶었지만 또 꾹 참았다. 신발을 돌려주자고 그럴까봐 겁이 났다. 옥도정기가 상처에 닿으니 이제는 정말이지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치 아렸지만 끝까지 참았다. 그때 잠깐 올려다 본 아버지의 얼굴은 내 뒤꿈치보다 더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딸의 고집을 눈치 챈 아버지는 새로운 신발이 나오기 바쁘게 사다 주셨다. 그 시절 시골 읍내에서는 구경조차 쉽지 않은 목이 긴 농구화며 멀쩡한 신발에 구멍이 숭숭 뚫린 펀치샌들은 동네 아이들의 입을 헤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아셨을까? 고집을 부리면 무엇이든 안 통하는 것이 없다는 엉뚱한 논리를 당신의 고명딸이 품게 되었다는 걸.
나보다 세 살 위의 오빠는 유년시절의 내게는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온갖 종류의 연이나 썰매를 반나절 만에 뚝딱 만들어 내는 솜씨는 굉장했다. 그런 오빠지만 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나와는 놀아주지 않았다. 늘 나를 떼어놓고 또래들과 사라지고는 했다. 그예 지친 나는 오빠를 곯려주기로 마음먹고 잘못을 할 때 마다 조목조목 기억해 두었다가 틈만 나면 아버지께 일러바쳤다. 된통 혼나는 오빠를 보며 나는 겁도 없이 키득거리고는 했다.
어느 해 여름 오빠가 또래들과 물놀이를 간다고 했다. 나도 따라간다고 부득부득 우겼다. 데려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오빠가 결국엔 지고 말았다. 어른들 앞이라 어쩔 수 없이 그리한 것이다.
신이 난 나는 높다란 방천으로 제일 먼저 뛰어갔다. 방천 아래에는 보가 있고 보를 쌓아놓은 아래는 물이 꽤 깊었다. 동네에서 제법 큰 아이들은 여름 한낮을 그곳에서 놀았다. 오빠는 또래들과 물놀이를 하느라 헤엄칠 줄을 모르는 나를 못 본체했다. 둑 위에 혼자 앉아 구경만 하던 나는 심심해져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모르는 척 놀이에 빠져있던 오빠가 어느 순간 화난 얼굴을 하고 둑 위로 올라왔다.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오더니 나를 번쩍 들어 물속으로 내동댕이 쳐버렸다. 귓속에선 비행기라도 지나가는 냥 ‘우웅’ 거리는 소리가 나고 내 몸은 끝 모를 바닥으로 빨려들어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동네 아이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방천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모두가 나를 보고 비웃는 듯 내려다보았다.
물에서 놀던 아이들이 귀속에 들어간 물을 털어내느라 '강물이 많나, 바닷물이 많나'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었다.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오빠는 내게 씩씩거리며 주먹다짐을 했다. 나는 고분고분 머리를 조아렸다.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한 것이다.
물속에 거꾸로 내동댕이쳐져 보고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싶어 안달했을 때처럼 세상일은 끝까지 우긴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오빠에게 나는 고집불통의 귀찮은 혹이었다. 오빠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이 놀아달라고 보챘던 일이 어린마음에도 몹시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내 고집만 부리다간 결국 내가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남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셈이다.
지금도 불쑥불쑥 내 고집을 피우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땐 나로 인해 일그러졌던 아버지의 얼굴과 어릴 적 물 속에 던져진 후 들었던 ‘우웅’ 소리를 떠올린다. 자연히 빳빳하던 고개가 수그러들고 한 발 물러나서 본질을 바라보게 된다. 고집이란 말 뒤엔 언제나 불통이란 말이 따라오듯이 한 쪽의 생각만 강요해서는 결코 서로의 마음이 통할 수 없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가운데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걸 어릴 적 추억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10. 달의 등
내가 사는 곳은 대구의 서쪽 끝이다. 달의 등을 뜻하는 이곳을 태어나고 지금껏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유년의 기억 속에 달의 등은 조용한 소읍이었다. 나지막한 집들과 너른 들을 둘러친 앞산 줄기가 전부였다. 밤이 되면 앞산 마루에 뜬 달이 평평하게 생긴 소읍을 고루 비추었다. 달의 등짝처럼 펑퍼짐한 마을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디서부터 인사할 채비를 해야 할 지 항상 헛갈렸다. 거치적거릴 것 없이 훤하다는 것이 주는 불편함은 늘 같은 곳으로 귀결되고는 했다. 앞 서 걷는 이의 뒤통수가 눈에 익은 사람이면 숫기 없는 나는 가던 걸음을 늦추어야 했다.
그 속에서 자라던 유년을 떠올리면 항상 아버지가 있다. 내가 아홉 살이 될 무렵 날마다 조금씩 허리가 한 쪽으로 기울었다. 자꾸만 기우는 허리 탓에 나도 모르게 한 손은 허리를 짚고 다녔다. 만날 보는 아버지는 그런 딸이 멋을 부린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잖게 여겼다. 어느 날 부터인가 달등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 쪽으로 기운 허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띈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 손을 붙들고 날마다 대구를 오갔다. 이른 봄에 시작된 병원 나들이는 그 봄이 저물 때 까지 이어졌다. 달의 등짝을 닮은 소읍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지내던 나는 더 넓은 도시의 경이로움에 흠뻑 빠졌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온갖 종류의 간판들은 신기했다, 갈수록 등이 아파왔지만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고장 난 시계처럼 한 쪽으로 기운 허리가 열두 시 십오 분을 지나고 있었다. 병이 깊어 식욕을 잃은 나는 뼈만 남았고 딸의 병명을 모르는 아버지의 시름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나는 더 이상 도시 나들이에 들뜨지 않게 되었다.
병은 소문을 내야 낫는다고 했다. 달등 마을 사람들은 부러 내 이야길 흘리고 다녔다. 떠돌던 소문은 앞산 자락의 오디가 익을 즈음 내 병을 낫게 해 줄 병원을 찾아주었다. 아버지의 골 깊은 주름이 펴진 것도 잠시였다. 여기저기 살펴보던 의사는 내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꼽추가 될 수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개울가에 살고 있는 등 굽은 아주머니가 생각나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얼핏 훔쳐 본 아버지의 얼굴은 타작마당에서 막걸리 두어 잔을 걸친 후처럼 꽃도미 빛깔을 하고 있었다.
힘들게 속을 다 비우는 관장을 하고 전신 엑스레이를 찍을 때였다. 겁먹은 내 곁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턱까지 떨며 차가운 기계 위에 엎드릴 때 아버지는 딱 한마디를 하셨다. “참아라.” 그 말엔 온갖 힘든 것도 이겨내야 할 당연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리고 모로 눕고 바로 눕고 수없이 많은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서 곁에 있는 아버지덕분에 든든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이 꼽추가 될 뻔 했다는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팥알 크기의 곪은 상처가 등뼈를 갉아 먹는 중이라고 했다. 달의 등짝을 닮은 동네가 나를 훤히 드러내 놓지 않았다면 팥알만 한 상처는 콩알만 해 지고 결국 내 뼈는 삭아 내렸을 터였다. 곱사등이가 될 뻔한 나를 구한 건 펑퍼짐해서 마뜩잖았던 달등 마을과 어린 내 눈에 한 없이 높고 멀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등이었다.
평생을 농군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논에 모를 내지 못한 적이 그때였다. 나는 무던히도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하루에 한 번 맞는 주사는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눈 질끈 감고나면 이미 주사 바늘은 빠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끼니때 마다 먹어야 하는 한 움큼의 알약은 무척 곤혹스러웠다. 아버지가 아무리 박하사탕을 들고 기다려도 물을 삼키고 나면 입 안 가득 알약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눈은 점점 커졌고 하는 수 없이 잘게 씹어서 삼키곤 했는데 그 쓴 맛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아버지 몰래 약을 버리다가 들킨 날은 안 죽을 만큼 혼이 났다. 그 약이 거의 뼈만 남은 나를 지탱해 줄 영양제와 칼슘이란 걸 알았어도 철없던 내게는 안중에 없었다.
한 번은 병원에서 내 몸의 치수를 재어갔다. 달등 마을에 장이 서던 날 어머니를 따라가 편물 옷을 맞추어 본 경험이 있어 나는 은근히 기대가 컸었다. 몇 날 후 병원에서는 희한한 옷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입히려고 했다. 굽은 등을 바르게 고정시켜주는 의료기구라고 했다. 어린 나는 갑자기 한 번 입으면 영원히 벗지 못할 것 같은 아득한 예감이 들었다. 입지 않으려고 우겼다. 얼마나 울면서 앙버티었는지 앙상한 팔에 멍이 들었다. 잠결에도 훌쩍거리다가 한옥으로 지어진 병실 밖 마당에서 땅 꺼질듯 이어지는 한숨소리를 들었다. 살그머니 내다보니 허름한 달빛에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이튿날 나는 두 말 않고 그 옷을 입었다. 어깨에 걸치고 양쪽 사타구니에 가죽 끈을 묶는 방식이어서 혼자서는 입을 수 없었다. 멀미를 하는 어머니 대신에 늘 곁에 있던 아버지가 거들어 주었다.
달등 마을로 돌아가 뛰놀고 싶어 몸살을 앓을 즈음 내 등의 상처도 아물었다. 병원을 나서는 내게 의사는 꼭 세 해 동안은 의료용 옷을 입어야 된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도대체 그 옷을 입고는 딱지를 칠 수도, 말 타기를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자주 그 옷을 벗어놓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아버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자라는 아이의 몸을 억지로 묶어 둘 수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나를 자전거에 태운 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곤 했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서 학교에 다니는 나를 친구들은 몹시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등이 지금에서야 간절히 생각 키운다. 혹시라도 딸의 등에 남아 있을 팥알 크기의 상처를 때워 주기 위해 쫀득한 수구레편을 특히 잘 만드셨던 아버지는 몇 해 전 달등 마을을 등지셨다.
달의 등을 닮은 이곳을 지금껏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건 아마 내 속에 잠재된 아버지의 등에 대한 따스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계간 수필세계 2009년 겨울호 수록)
박월수
수필문학 초회 추천(2004)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2009)
첫댓글 박월수 수필가님의 작품 중, 신춘문예작품을 읽은 바 있는데, 여기서 신인문학상 수상작품을 보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물뫼 선생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좋은 글로 만나 뵙겠습니다.
박선생님 작품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한줄기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더 좋은 수필 쓰도록 애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