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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호
기획 1 수필세계 사랑방
예향 통영에서 행복을 꽃피우는
수필가 고동주 선생님
대담 : 이숙희(본지 발행인)
사진 : 김희자(수필가)
기록 : 강여울(본지 편집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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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은 생활 속의 꽃이다.
은은한 향기와 진실한 품격을 갖춘 서정적 이미지의 귀한 꽃이다.
그 꽃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의미가 있고,
철학이 있고, 기쁨과 슬픔과 아픔을 동반한 감동이 있다 .
―고동주 수필 「생활 속의 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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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봄을 부르는 바람이 달리는 차 안을 따스하게 데웠다. 이숙희 본지 발행인과 사진을 찍는 수필가 김희자, 그리고 필자 이렇게 세 여인이 오랜만에 만나 피우는 말꽃은 봄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말꽃 향기에 취해 통영에 도착했을 때는 마음이 하늘보다 맑게 개었다. 통영법원 앞에 홀로 서 계신 분을 보는 순간 고동주 선생님이라는 직감이 왔다. 곤색 양복 차림에 흰 와이셔츠, 청색 무늬 넥타이, 정갈한 차림에 꼿꼿한 자세의 선생님은 연세보다 십 년은 더 젊어 보였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 모습과 달리 선생님의 얼굴은 사진에서 본 모습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정겨웠다. 인사를 하고 나자 선생님은 곧바로 우리에게 배고프겠다고 밥부터 먹자며 앞장서 걸으셨다.
식당이 바로 앞이니 차를 두고 걸어가면 돼요.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눈도 즐거워야 할 것 같아서 식당을 바닷가로 택했어요.
법원 맞은편 언덕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흰 건물이 나타났다. 데바수스 영문 간판이 약간 서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출입문을 밀고 들어가니 조용한 음악이 물결처럼 홀을 적시고, 말간 통유리로 통영 바다와 섬들이 그림처럼 들어왔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눈이 즐거워진 우리 일행은 정말 좋아요! 하고 탄성을 지르며 선생님의 탁월한 선택에 찬사를 드렸다. 전망 좋은 창가에 자릴 잡고 앉자 선생님은 아가야! 하고 종업원을 불러 주문부터 하셨다.
김희자 씨가 카메라를 들자 선생님은 손을 들어 만류하며 사진은 나중에 더 좋은 곳에 가서 찍자며 앉으라고 했다. 필자는 아가야라는 말이 주는 정감에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가야는 아가씨라는 말보다 훨씬 정겹고 가족적인 사랑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선생님의 아가야라는 이 한마디에 모든 긴장이 사라지고 친정 아버지와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평안하였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시장기가 돌았다.
선생님의 저서를 보고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과 배고픈 젊은 시절을 겪으면서 많은 고생을 하셨지만 꿋꿋하고 청렴하게 큰일을 많이 하신 것에 감동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몸도 꼿꼿하고 연세보다 훨씬 젊게 보입니다. 지금도 학교에 근무하고 계시지요?
―예, 지금도 학교에 나가고 있어요. 내가 초대 민선 시장이 된 때 나이 육십이었어요. 보통 사람은 육십이면 거의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죠. 그러나 나는 남들이 물러나는 그 시기부터 시작해서 16년째 공직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건 정말 대단히 큰 축복이죠. 초대에 이어 2대까지 7년의 민선 시장 퇴임을 얼마 앞두고 학교(창신대 통영 캠퍼스)에서 제의가 들어와 학교를 책임지고 지금까지 9년째 근무하고 있어요. 여기서도 보일 거야. (손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의 한 건물을 가리킴) 저기 보이는 건물이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예요. 식사하고 저기 내 사무실에도 가 볼 건데 올해까지만 있게 되고 내년부터는 학교 사정에 의해서 정규 과정은 문을 닫게 됩니다.
스물여덟부터 시작한 48년의 공직 생활이 이제 내년부터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정년 될 나이에서 남들보다 16년이나 더 누렸는데, 또 무슨 아쉬움이 남았겠어요.
섬 소년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의 표정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오랜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냉철한 카리스마가 아니라 순수한 섬 소년의 밝은 미소와 사랑 많은 아버지의 두 얼굴이 겹쳐지는 친근한 표정이었다. 발행인과 선생님이 근황을 얘기하는 사이 선생님께서 즐겨 시켜 드신다는 해물덮밥이 나왔다. 시장기가 동한 필자가 부지런히 밥을 먹는 사이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이 발행인이 선생님의 간증 에세이 『영광의 물결』에서 받은 감동을 전하며 어릴 적 이야기와 고향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가끔 여섯 살 때 철이 다 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곡도라는 작은 섬이 내 고향인데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재혼을 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이십대였죠. 할아버지께서 어머니가 너무 젊어 나이가 아깝다며 억지로 시집을 보냈어요. 이웃 섬에 홀로된 남자에게 어머니가 시집을 가는데 내가 그때 뭘 알았겠어요. 할아버지와 숙부님께서 나를 잡았지만 나는 따라간다고 떼를 쓰며 어머니 손을 놓지 않았어요. 결국은 내가 이겨서 어머니를 따라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못 되더군요. 따져 보면 그 집에서 나를 좋게 볼 리 없잖아요. 여섯 살이지만 그 미운 눈치를 내가 알아 버린 거예요. 그래서 얼마 안 있어 어머니에게 다시 할아버지께 데려다 달라고 졸랐지요. 할아버지께 나를 떼어주고 어머니가 돌아서는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이제 내게 어머니는 없다 하고 어머니를 깨끗이 지워 버렸어요. 어머니가 언덕을 내려가면서 돌아보고 나를 부르는데도 나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께서 엄마 한 번 불러 봐라 했지만 끝까지 안 봤어요.
나의 외손자, 친손자가 다 작년에 여섯 살이었어요. 지금은 일곱 살인데 그 녀석들을 보면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나이에 나는 어째 그리 고집이 세고 눈치가 빨랐나 싶어요. 그 후로도 어머니가 가끔 나를 찾아온 적은 있었지만 나는 항상 쌀쌀맞았죠. 어머니라는 호칭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였어요. 집사람이 끈질기게 그러면 안 된다고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해서 마음을 풀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마음속에 어머니를 지워 버리고 홀로 서기를 배웠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숙부님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주셨지만 그때 다들 가난했잖아요. 당신 자식들 거두기도 힘든데 나까지 거두시자니 숙부님의 고생도 말로 다 못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민선 시장 취임식 때 숙부님께 꽃다발을 드린 거였군요.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던지요. 사람이 잘되면 끝까지 옛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숙부님께서 그 꽃다발을 받으며 얼마나 뿌듯하셨을까요.
―말은 않으셨지만 그동안의 고생이 다 사그라지는 느낌이셨을 거예요. 그때 육백여 명이 취임식장에 있었는데 제가 숙부님께 꽃다발을 드리기 전에 소개하다가 목이 메어 울먹했는데 그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울었어요. 숙부님께서 그 꽃다발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댁까지 고이 가지고 가셨어요.
숙모님은 숙부님과 달랐던 것이 아니라 열여섯에 시집을 왔으니 사회성이 부족하셨던 거예요. 원래 좋고 싫은 감정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분이었어요. 어릴 때는 싸늘하고 정이 없는 분이라고 나 혼자 오해를 했었어요. 그러나 당신 아이들에게도 나한테 하는 거하고 똑같이 하는 것을 보고 오해를 풀었죠. 숙부님은 돌아가시고 숙모님은 살아 계시는데 자주 찾아뵙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고향에 학교를 세우셨는데 그 학교가 지금도 있나요?
―아니, 그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이 발행인이 벌써 다 조사를 했나 보네. 이거 오늘 내가 얘기할 것도 없겠어. 알고 있는 것처럼 군에서 제대를 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가 학교를 세웠어요. 그때만 해도 섬에 43가구가 살았고, 학생이 60여 명이나 됐어요. 지금은 섬에 여섯 가구밖에 살고 있지 않아 공부할 학생이 없어요. 공부할 학생이 없으니 폐교가 될 수밖에.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고 있어서 내 젊은 날의 흔적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해요.
수필과의 인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보는 바다는 잔잔한 물결이 홀 안에 흐르는 음악을 감상하듯 반짝거렸다. 밤에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별빛을 생각하는 듯 물결은 빛 부셨고, 고요히 수면에 몸을 얹은 갈매기들은 점점이 자신들이 무슨 꽃잎인 양 움직이지 않았다. 통영은 어디를 봐도 정감이 가고 아름답다. 지금까지 통영엔 세 번을 왔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세 번을 왔지만 마음속으로 다음에 또 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통영이 다시 찾고 싶은 도시가 된 데는 선생님의 공이 크다. 통영의 이름난 관광지는 거의 다 선생님께서 구상을 하고 설계를 한 것이라고 했다. 식사 중에 선생님께서는 역시 당신의 작품이라며 국내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타 보자며 표 네 장을 내보이셨다. 세 여인은 케이블카라는 말에 마음이 없는 날개를 퍼득이며 신바람에 젖었다.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의 차를 타고 선생님의 학장 사무실로 갔다.
주일이라 외동 건물인 학교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출입문을 열고 바다가 보이는 사무실로 우리를 인도했다. 선생님의 책상은 출입문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미니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탁자에 놓으며 알아서 마시라 하시고는 연분홍 책 보따리를 풀었다. 좋은수필사에서 펴낸 선생님의 선집 『밀물과 썰물』을 한 권씩 나눠 주시고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신 메모도 내게 건네주셨다.
―내가 문단에 나온 것은 늦었지만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난 초등학교 때부터라고 말해요. 초등학교 일학년 때, 선생님이 칠판에 책상이란 제목을 적어 놓고 짧은 글을 지어 보라고 했어요. 짧은 글이라서 아직도 기억을 하는데 커다란 고기가 입을 벌리고 책을 먹고 있습니다.라고 썼어요. 초등학교 일학년이 책상을 커다란 물고기라고 한 것이 놀라우셨던지 선생님께서 그것을 칠판에다 적어 반 아이들에게 읽어 주며 칭찬을 했어요. 상으로 그 시절엔 참으로 귀했던 운동화까지 주셨지요. 이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 칭찬의 힘으로 혼자서 조금씩 글을 써 보다 고등학교 때 『학원』이라는 잡지에 엄마라는 글을 보냈는데 입선도 아니고 선외가작으로 이름만 실렸어요. 그런데도 기분이 좋아서 삼 일 동안 밥을 옳게 못 먹었어요. 나도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를 해서 야간 대학을 다니고, 스물여덟 살부터 공직 생활을 했으니 글 쓸 틈이 없었어요.
말 그대로 60․70년대 공무원들 정말 힘들었어요. 잠잘 시간도 없었어요.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이 한창인 때라 밤 12시까지 근무하는 것은 예사고, 집에까지 일을 가져와 했어요.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어요. 그 당시 공무원들이 참으로 열심히 일했다는 것은 다들 좀 알아주어야 해요. 밤낮으로 일을 하니 글 쓸 틈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과장 진급을 하고 나니까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시간이 나서 보니까 내가 시를 쓰기에는 늦은 나이라 수필 쓰는 공부를 하기로 작정했어요. 우선 1979년도에 발행한 『한국 수필문학 대전집』 스무 권을 2년에 걸쳐 탐독을 했지요. 윤오영의 「방망이 깎는 노인」, 피천득의 「인연」, 오상순의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이희승의 「딸깍발이」, 이양하의 「나무」, 방정환의 「어린이 찬미」 등 좋은 수필은 수십 번씩 읽었어요.
다 읽고 나서는 장백일의 『수필 쓰는 법』을 보고 혼자 독학을 했지요. 이 책이 당시엔 유일한 이론서로 1981년도에 발행이 된 거죠. 지금 많이 나와 있는 이론서들은 다 90년대의 것인 줄 압니다.
그렇게 독학으로 수필을 습작하기 시작했고 1982년 경남일보 독자문예란에 투고하여 글이 실린 것을 계기로 경남일보에서 칼럼 청탁이 왔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1983년부터 칼럼을 썼지요. 그러고 나니까 부산일보에서도 칼럼 청탁이 왔고, 계속해서 경남신문 테마 에세이난에 작품을 발표하고, 국제신문, 경남매일신문 등에도 계속 칼럼을 썼어요.
칼럼을 쓸 때는 신이 났는데 문학인들 모임에만 가면 무면허 운전을 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더군요. 그전에는 등단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게 아니데요. 나도 등단을 해야겠다 싶어 준비를 했지요. 1987년 한국수필 초회 추천을 받았어요. 초회는 쉽지만 마지막 추천 완료는 쉽지 않다고 해 심혈을 기울여 「동백의 씨」를 썼어요. 이 작품을 정목일 부장에게 검토해 봐 달라고 보냈는데 한동안 답이 없었어요. 어찌된 것인가 했는데 이게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이 된 거야. 처음엔 기분이 이상했어요. 신춘문예는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거든요. 그런데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연락이 오고 야단이 난 거야. 시상식 때는 아예 잔치 분위기였어요. 사람이 참 간사하지 그러니 기분이 좋데요. 그렇게 등단을 하고 한국수필에는 「그 아픈 이야기」로 추천 완료를 했지요.
책은 1988년 『파도에 실려 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2권을 냈어요. 내가 무슨 능력이 대단해서 이렇게 많은 책을 냈겠어요. 어쩌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네요. 이번에 좋은수필사에서 내 준 선집 『밀물과 썰물』도 출판사에서 고맙게 내 준 것이지만, 재직 시절 나온 책도 거의 다 출판사에서 계약출판을 해 줬어요. 시장 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발행한 책 중에 5쇄까지 나간 책은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인데 이 책은 시장 재직 시의 스피치 모음집입니다.
아름다운 통영
선생님은 다정다감하게 이야기를 하셨는데 필자는 자꾸만 마음이 바빴다. 선생님의 책과 예상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은 메모까지 받았으니 오늘의 목적은 달성된 듯 횡재를 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케이블카가 자꾸만 눈에 어른거려 필자는 다니면서 얘기를 하자며 밖으로 나가기를 재촉했다. 날씨마저 우리를 응원했다. 봄 마중을 나온 느낌이 들도록 햇살이 감미롭게 통영 하늘을 데웠다. 사람의 느낌은 다 비슷비슷한지 통영은 가는 곳마다 봄 마중하는 사람들로 넘쳤다. 통영대교를 지났다.
선생님, 체구는 자그마하신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이 통영대교도 선생님의 작품이 맞지요? 어떤 계기로 통영 비전을 설계하셨는지요?
―통영대교도 내 작품이 맞아요. 나도 그 많은 일을 내가 다 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한산면사무소에 말단으로 근무를 했는데 군청에서 군수가 나를 불러들였어요. 군수가 전 계장들에게 통영을 아름답게 하는 비전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두 달을 기다려 자료들을 받았지만 맘에 드는 것이 없었던가 봐요. 나를 부르더니 『지역개발 입문』이라는 책 한 권을 주면서 참고해서 예산에 관계없이 맘대로 아름다운 통영의 비전을 연구해 보라고 했어요. 그 숙제를 받는 순간 나는 어렵다는 생각보다 감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직원을 군청으로 불러들인 것만도 감사한데 이렇게 엄청난 일을 맡기니 더 고마웠지요. 그래서 두 달 동안 수십 장의 지도를 놓고 내 맘껏 구상을 하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어요.
군수가 면사무소의 말단 직원인 나를 왜 불렀나 궁금하죠? 당시만 해도 너무 못살던 때라 미국에서 보내 주는 구호 물자를 관청에서 배급해 줬어요. 그런데 이미 준 집에 또 주는가 하면 한 번도 못 받는 집이 있는 등 체계적인 질서가 없어서 불평불만이 많았어요. 내가 군부대에서 카드 행정을 배웠거든요. 그 카드를 활용하여 배급을 하고부터는 골고루 배급이 이뤄지면서 불평불만도 사라진 거죠. 그때부터 카드의 효율성에 대한 소문이 사방으로 퍼진 거지요. 그래서 말단 직원인 내가 경남 각 시․군의 배급 담당자 교육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니까 군수가 나를 찍은 거지요. 군청의 서른 명이 넘는 계장에게 다 시켜도 못했다는 과제를 내게 주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지금 타러 가는 케이블카도 그때 구상된 거예요. 그때 내가 구상을 하고 설계한 비전을 역대 단체장들이 더러 이루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내가 시장을 하면서 거의 다 손을 대게 되었어요. 통제영 복원도 그 당시는 현실적으로 되리라곤 생각도 못한 것인데 곧 완공이 됩니다.
내가 시장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그때 내가 한 구상을 연차적으로 해 오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참 많아요. 물론 더러 실패한 것도 있어요. 밀감 농장을 구상한 것은 기후가 맞지 않아 실패했어요. 여기서 가까운 곳에 바다 목장이 있는데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가자는 말도 그 계획에 처음 등장한 거예요. 자원을 길러야지 잡기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양식업을 시작하게 된 거지요.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를 닦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러나 그때 반대한다고 그냥 눌러앉았으면 통영이 이만큼 발전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타러 가는 케이블카도 반대가 엄청났어요. 지금 개장을 한 지 삼 년째인데 투자한 돈이 다 회수되었다고 해요. 어떤 공사든지 개장한 지 삼 년 만에 공사비가 회수된다면 그건 대박이라고 해요.
선생님의 대박이라는 말 때문인지 몇 미터 간격으로 쉬지 않고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를 보는 순간 그것들이 선생님이 만든 통영의 복 주머니란 생각이 들었다. 매표소에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방송으로 대기자들을 차례대로 순번을 호명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주신 표는 VIP 표이기도 했지만 선생님을 본 직원은 깍듯이 인사를 하며 곧장 승차를 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먼저 복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행운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공중을 미끄러져 가는 아찔한 현기증에 선생님의 팔을 잡았다.
선생님께서 그 당시 해 놓은 구상은 미륵산에서 섬으로 내려가는 해상 케이블카도 같이 설계했었다고 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며 미리 설계도를 손으로 그려 보이셨지만 현기증 때문에 각인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산과 바다를 연결하는 케이블카는 상상만으로도 환상적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미륵산 정상까지 이백여 미터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통영 시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선생님께 시장 한 번 더 하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선생님은 한결 반듯하고 겸손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셨다. 어떤 권위 의식도 없이 그저 모범적이면서도 자상한 참 좋은 아버지 모습이었다. 오곡도가 어디냐고 묻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나란히 앉은 두 개의 섬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섬 하나를 가리켰다. 참 신기해. 저 작은 섬에서 어떻게 내가 태어났을까. 하시며 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선생님의 얼굴에 언뜻 쓸쓸함이 스치는 듯했다. 분위기를 바꾸듯 선생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륵산 정상에서 선생님께 인사를 한 등산객은 배낭에서 배를 꺼내 깎았다. 우리는 달고 시원한 배 한 조각씩을 먹으며 새로운 추억 하나를 몸에 기록했다.
봄기운이 가득한 햇살과 바람, 바다와 아름다운 섬들이 가슴에 진공청소기를 들이대는 것 같았다. 세 여인은 통영에 와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간다고 즐거워했고, 선생님은 세 미녀와 함께해서 즐겁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백 프로 진실이라고 믿기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소풍을 나온 아이들처럼 선생님께서 힘들지 않냐고 몇 번이나 묻는 계단도 미끄럼틀처럼 신나기만 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통영은 고층 아파트마저도 밝고 환했다. 흰색 벽에 오렌지색 지붕으로 통일된 아파트의 색채도 선생님이 재직 때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 찾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통영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마음엔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았다.
베푸는 삶의 기쁨
여기서 바라보면 선생님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거의 없겠어요.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오래 공직에 계셨지만 양심의 메아리란 창구까지 만들어 놓고 청렴하게 시정을 이끄셨으니 밑에 일하는 직원들은 무척이나 힘들었겠어요. 그 당시엔 힘들었지만 한 명도 비리나 부정에 연루된 사람이 없으니 오히려 감사한 것인가요.
―아니 얼마나 내 밑을 팠으면 그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재직할 때는 어떠한 부조리 사건으로도 구속되는 직원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뇌물은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그 썩은 돈을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향기로운 돈으로 변경시키면 됩니다. 뇌물을 양심의 메아리라는 불우 이웃 돕기 창구에 입금하고 뇌물 준 자 명의로 성금 영수증을 발행하면 연말 정산 때 세금에서 공제되니까 당사자는 피해가 없고, 불우한 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모인 돈으로 독거 노인 오백 세대 정도를 도와줬어요.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렇게 베풀어 준 것 때문이었는지 돈이 없어도 선거를 하니까 시장이 되더라고요. 내가 무슨 돈이 있어 선거 운동을 하겠어요. 그런데도 시장이 된 걸 보면 그렇게 베푼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내무과장 재직 시에도 정부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시켜 비밀리에 공무원 청렴도 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조사 결과 전국에서 깨끗한 단체로 우리 통영이 두 번이나 전국 일등을 했어요. 나는 내 실력으로 쉽게 진급을 못할 줄 알았는데 그 일 때문에 국장으로 특진이 됐어요.
내가 시장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 마산에서 기획실장과 도시국장을 몇 년 하다가 진주시에서 사회산업국장을 했어요. 그리고 여기 와서 부군수 4년, 시로 통합되면서 부시장을 또 4년, 이렇게 8년 동안 튼튼하게 표밭을 다졌으니 인물이야 형편없지만 나를 당할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나는 시장 퇴임식을 할 때도 커다란 마침표를 찍는 심정으로 특별하게 하고 싶었어요. 글을 쓸 때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어 마무리를 하듯이 퇴임식 때도 그렇게 마침표를 찍는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퇴임식 때 필수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공적 발표를 안 했어요. 사회자에게 공적 발표를 할 수 없는 이유만 밝히고 공적 발표는 못 하게 했지요. 내가 시장으로 있으면서 이룬 업적이 어디 나 혼자 힘으로 가당키나 한가요. 수많은 도움이 있었기에 이룩한 것이고 따라서 함께 한 것이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므로 나의 공적으로 발표할 수 없잖아요. 어떤 퇴임식에 가 보면 공적 자랑뿐일 때도 있지요.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자랑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나도 지금 자랑 비슷한 것을 하고 있지만 (웃음) 사람들은 실패담은 좋아해도 자랑하는 건 별로거든요. 아마 공적 소개 없는 퇴임식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시장 탈의실을 기도실로 정해 놓고 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신앙이 깊으신데 언제부터 믿음을 갖기 시작하셨습니까?
―신앙은 군에 있을 때 갖기 시작했어요. 휴가나 외출을 나와도 갈 곳이 없어 피난처로 간 것인데 그곳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발견한 거지요. 시장실 앞에 조그만 방을 기도 공간으로 만들어 놓고 업무를 시작하기 전, 오 분 정도 꼭 기도를 했어요. 시장이 되면 아침부터 접견을 하려는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려요. 그렇지만 그 오 분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용히 기도를 하며 기도의 힘을 받아 하루 업무를 시작했어요. 이런 일은 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기도를 하고 일을 하니까 기적적인 일도 많았어요. 1997년도 IMF가 와 다른 지방에선 하던 일도 중단을 할 정도였는데 우리가 추진하던 통영대교는 멈추지 않고 완공할 수 있었어요.
동반자
―결혼은 장모님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때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요즘에 들어 생각하면 잘한 것 같아요. 내가 생일상을 한 번도 받아 본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생일상을 차려 깜짝 쇼를 해 주셨으니 그 감동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 감동 때문에 우리 부부는 서로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요. 내가 자랑하는 사람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자랑 한 번 해야겠어요.
집사람이 칠순이라 올해는 생일을 좀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집사람과 결혼을 한 것도 바로 장모님이 마련한 생일상 때문이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 줄까 한 달 전부터 고민을 해 가며 준비를 했지요.
식당에 스물네 명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를 해서 깜짝 쇼를 했지요. 칠순 축하 예배가 끝난 다음 사회자도 필요 없이 내가 일어서서 특별 순서가 있다고 말하고 「동반자」라는 편지 형식의 글을 읽었어요. 집사람이 스물세 살에 시집을 왔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생한 이야기들을 쭈욱 적은 것인데 그 글을 읽는 동안 집사람이 감동해서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그다음에 감사패 전달을 했어요. 한 달 전부터 백옥을 구해서 새긴 거였어요. 나는 수없이 많은 감사패를 받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내조한 집사람은 처음으로 받는 것이니 기분이 어땠겠어요? 그것도 내용을 직접 읽어 주라는 관중들의 요구에 의해서 그렇게 했지요. 그러고도 내가 또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하니까 사람들이 그만큼 했으면 됐지 또 뭐가 있다는 거야 하고 웅성거렸어요. 미리 준비했던 장미 백 송이를 또 집사람에게 줬지요. 그랬더니 여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남자들은 인상이 약간 근심 어린 표정이었어요. 집사람은 그날 내가 준 그 모든 것들을 잘 보이는 TV 곁에 두고 날마다 보는 것 같았어요. 마르면 버릴 줄 알았던 장미도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벽에 걸려 있습니다.
선생님의 자랑에 세 여인은 탄성을 질렀다. 이 발행인은 예전에는 자랑하는 사람들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랑할 만한 사람이 자랑하더군요. 자랑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말에 필자와 김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선생님께는 함께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주일의 귀한 시간을 우리와 함께하느라 다른 약속을 취소하고, 국내에서 제일 긴 통영의 복 주머니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통영을 가슴에 담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셨다. 지난해 출간한 선생님의 수필집 『행복이 꽃피는 바다』, 그 제목처럼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꽃 피울 수 있게 하는 바다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면 내 능력은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며칠 있으면 내가 쓴 기도시집이 나와요. 그 시집을 들고 다니며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싶어요. 내가 공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법원에서 조정위원 위촉을 했어요. 조정위원으로 5년 동안 수백 쌍의 이혼 부부와 상담을 하면서 안타까울 때가 참 많았어요. 요즘 젊은 부부는 높은 지적 능력은 가지고 있어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혼이 두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식에게까지 상처가 대물림되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나면 다니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려고 해요.
나는 혼수는 말할 것도 없고 결혼 예복도 없이 해져서 누빈 바지를 입고 결혼식을 했어요. 그렇게 예물도 없이 결혼을 했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살았기에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잖아요. 살아 보니까 사람이 받으려고만 하면 만족할 수가 없지만 형편대로 베풀고 배려하며 살면 만족이 돼요. 나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내 형편대로 베풀 때가 가장 기분이 좋고 행복해요.
다시 수필로
―문단에서 가까이 지내는 이는 경남에 정목일, 신일수 씨가 있고, 대구에는 김규련, 이숙희(크게 웃음)가 있고, 서울에 계신 윤재천 선생님은 존경하고, 최원현 씨랑은 친형제처럼 지내요. 친동생도 그런 동생은 드물어요.
후배 문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선적으로 기본에 충실하라는 거예요. 가끔씩 수필을 심사할 때가 있는데 내용은 좋은데 문장이 안되는 글이 너무 많아요. 문장은 글을 쓰는 사람의 기본인데 그 기본도 없이 글을 쓰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라고 봐요. 기본을 갖추고 난 다음에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으로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 다시 말하면 치열한 내면의 여과 과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즘 수필이 경험의 문학이라고 삶의 기록처럼 쓴 글들이 많은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해요. 수필이라면 삶에서 우러나온 감동이라든가, 삶을 성찰할 수 있는 메시지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해요. 아무 의미 없는 글은 쓸 필요가 없잖아요. 의미 있는 글을 쓰되 마지막으로 마무리에 심혈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앞에 아무리 좋은 말로 감동적인 경험의 의미를 형상화했다 해도 마무리가 좋지 못하면 완성도가 떨어져 글의 맛이 반감되거든요.
문단의 문제점은 수필을 아직도 문학적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첫째 원인은 등단자가 너무 많아요. 등단이 그만큼 쉬워진 때문이 아닐까? 전국적으로 수필 전문지만 해도 20여 개나 되는데 등단자를 어디 한두 명만 뽑습니까? 그러니 글이 숙성되기도 전에 등단을 시키는 일이 많을 수밖에요. 수필 인구는 늘어나지만 정작 수필의 위상은 더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해요. 지금 일간 신문 신춘문예에 수필을 공모하는 데가 몇이나 됩니까. 수필이 제대로 대우받고 발전을 하려면 각 신문사에서 신춘문예에 수필을 포함해야 해요.
수필세계는 7년 동안 등단 작가 수가 타 수필지의 일 년 등단자 수와 비슷하니 그만큼 상업성에 물들지 않고 순수를 지켜 온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봐요. 대신 그만큼 구독자가 많아야 할 텐데……. 우선 나부터 책값을 줄 테니 이번 호 나오면 서른 권을 보내 줘요.
선생님께서 책값을 주신다는 말에 발행인과 필자는 이구동성으로 고맙습니다.를 외쳤다. 수필세계가 금년 2월에 출판사 등록을 한 것은 재정적 어려움을 메울 수 있을까 해서라는 말을 주간으로부터 얼핏 들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통영법원 앞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어 바람 끝이 약간 서늘했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한 번 더 찍고 차에 올랐다. 선생님께서는 돌아서는 우리 차의 백미러 속에 그대로 서 계셨다. 식당에서 아가야! 하고 직원을 불러서 행복 꽃봉오리를 맺게 하신, 바다처럼 맘 넓고 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 발행인이 운전하는 차가 통영을 빠져나오자 어둠이 순식간에 대지를 삼켰지만 필자의 마음은 초롱초롱 눈을 뜨고 아가야! 하고 부르는 선생님의 그 목소리 속을 보고, 또 들여다봤다.
▨ 고동주(高銅柱) 연보
경남 통영에서 태어남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백의 씨」 당선(1988)
『한국수필』에 「그 아픈 이야기」로 천료(1988)
1989년 수향수필 동인회 회장
1991년 한국수필추천작가회 회장
1991년 한국수필문학회 이사
1995년 민선 1기 통영시장
1998년 민선 2기 통영시장
2005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2009년 창신대학 통영 캠퍼스 담당 학장
2009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경남지역위원회 회장
2009년 한국수필가협회 수석 부이사장 (현)
수상
1984년 근정포장
1995년 제3회 신아문학상
1998년 제16회 한국수필문학상(한국수필가협회)
2002년 수필문학상 대상(한국수필문학회)
2003년 제17회 예총예술문화상(문인부문)
2009년 제4회 황의순 문학상(수필과 비평사)
수필집
파도에 실려 온 이야기(1988. 교음사)
하얀 침묵 푸른 미소(1992. 교음사 )―해외기행 에세이집
사랑바라기(1994. 월간 에세이)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 아무도 모릅니다(1998. 문학풍경)
동백의 씨(2001. 교음사)
겨울 열매(2008. 선우미디어)
영광의 물결(2008. 크리스찬서적)
행복이 꽃피는 바다(2010. 개미)
밀물과 썰물(2010. 좋은수필사)
자서전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2002. 한국문화사)
문학이론서
수필의 맛과 향기(2006. 진실한사람들)
시집
새벽을 여는 묵상기도(2011. 도서출판 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