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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수필론
수필 창작과 수용의 문제점
허경자
최근 들어 탈장르적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문학 분야에서도 장르간의 혼용과 교류가 확대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필은 다양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장르이다. 시나 소설 그 어느 장르도 수필 속에 혼용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은 이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영상시대, 디지털시대를 맞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나갈 것인가, 또는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심하여야 한다. 이러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미래 한국의 수필문학이 나아갈 지향점을 찾을 수 있고 그 위상 정립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수필의 창작과 수용적 측면에서 발생되고 있는 문제점들을 찾아내고 이에 따른 반성적 성찰을 도모함으로써 한국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목표에 다가서 보고자 한다.
1. 창작 측면
창작의 측면에서 한국 수필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첫째 수필을 여기(餘技)로 창작하려는 태도, 둘째 문예지 증가에 따른 추천 제도의 남발, 셋째 수필가의 여성화, 고령화 문제, 넷째로 수필문학의 성(性)표현에 대한 창작의 한계 등이다.
수필은 시나 소설 등을 쓰는 다른 장르의 작가들이 여기로서 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수필이 전문성이 없는 다른 장르의 문인에 의해 창작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수많은 잡지와 문예지가 창간되면서 양적인 팽창은 이루어졌으나 질적 차원의 문제점을 오히려 증대시키고 있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통념과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는 왜곡된 인식 등도 수필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들의 창작 뒷이야기를 묶어 수필집 혹은 산문집이라는 표제를 붙여 출판하는 사례도 많았다. 문학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행해진 이러한 현상은 치열한 작가정신이나 전문성의 결여에서 오는 질적 저하는 물론 장르 폄하의 인식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단 현실에 대해서는 채수영의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열성으로 평론의 글을 썼던 사람들이 문학의 만년(?)에는 수필로 안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필의 속성이 무언으로 대답을 마련하는 예가 된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 주자는 양주동과 조연현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양주동은 향가 연구의 대업을 이룬 후에 소설을 쓰려는 열망에 좌절을 겪고 상당한 잡초에 정력을 투척했다. 물론 『인생잡기』나 『지성의 광장』 등 좋은 글이 없는 게 아니지만 그 자신의 유일한 소망인 소설을 쓰지 못한 결손을 수필 쪽에서 위안을 삼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연현은 한국 평론계의 중심에서 혁혁한 업적을 쌓았지만 『여백의 사상』이나 『불혹의 감상』 등을 발표한 이후 만년에는 주로 수필을 쓰는 데 만족하면서 문학의 길을 마감했다. 지금도 평론을 쓰다 수필 쪽에 안주한 몇 사람을 예로 할 수 있는 바 이런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 기이하거나 특이한 현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왜 평론을 중단하고 수필에 몸을 의탁하였는가에 있다. 평론을 위시해서 모든 문학은 기력(氣力)의 문학, 즉 에너지가 탄력으로 저장된 것이라야 한다. 이를 위해 정신적인 열정을 확보하면서 끝없는 도전의 자기 관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에 문학의 작업은 무한의 에너지 방출을 요구한다. 끝없는 탐구와 더불어 신선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새로운 글이 가능하다면 수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발상에서 평론을 접어 두고 한가한 여기로 수필을 택했을 경우 이들의 선택은 잘못일 수밖에 없다.1)
수필의 장르적 특성이나 고유한 창작 기법에 대한 깊은 인식도 없이 문인이면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소설이나 시를 창작하던 타장르의 작가들이 여기로 수필 창작에 끼여듦으로써 수필문단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수필 전문지를 비롯한 각종 문예지의 증가로 인한 무분별한 등단제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수필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수필』, 『에세이문학』(수필공원), 『월간에세이』, 『수필문학』 등 수필전문지의 창간과 복간이 이루어지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지역에서는 『전북수필』, 『영남수필』, 『경기수필』, 『제물포수필』, 『수필문예』 등 지역마다 동인들이 생겨나 수필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창작수필』, 『현대수필』, 『수필과 비평』, 『수필』, 『수필춘추』 등의 계간지나 격월간지들이 대거 등장하여 작품 발표의 장이 늘어나고, 평생교육이나 사회교육 차원에서 실시되는 대학의 문예강좌가 붐을 조성하면서 배출한 수필 동호인 수는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수필가들이 양산되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필가의 양산 현상은 수필문학의 저변 확대라는 긍정적 측면 외에도 수필가의 자질 시비를 초래하여 수필에 대한 인식을 저해하는 요소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수필가 김학, 정주환, 하길남 등이 그 사례를 들어 가며 지적한 바 있다.2)
문학에는 치열한 작가 정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 더욱이 작가의 체험을 근간으로 하는 수필은 철학적 깊이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문학적 향기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문예지는 인맥을 형성하려는 과다한 경쟁으로 옥석을 가리지 않고 추천을 남발하고 있다. 또한 15매 안팎으로 이루어지는 수필의 짧은 분량은 소설보다 창작이 용이하다는 선입견을 제공하여 치열한 문장 수련을 거치지 않은 이들이 잡문을 양산하는 사태가 발생되었다. 게다가 인간을 투시하며 그로부터 깊은 사색의 진통과 고뇌로 삶을 탐구하는 수필가보다는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저급한 독자와의 야합을 꾀하는 수필가의 등장도 우려해야 할 상황이다. 작가의 신변 기록을 수필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창작의 치열성을 외면한 채 수필 창작을 신변잡기를 얽어내는 것쯤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만연한 게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수필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으면서도 수필가의 자질 시비를 낳는 주요인이 되고 있으며 질 낮은 수필집으로 인하여 수필의 문학성 유무의 시비가 늘고 있다.
셋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여성수필가의 편중 현상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점차 생활이 편리해지면서 삶의 여유가 많아지면서 수필 창작을 하나의 여가 활용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추세가 강해졌다. 그리고 각종 문화센터의 수필 강좌가 연이어 개설됨으로써 전업주부들을 위시한 여성들의 참여도가 높아지게 되었으나 이는 수필 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긍정적인 효과와 수필문단의 여성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수필문단의 여성화는 본격수필의 창작보다는 신변잡기의 양산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3)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성차별의 문제로 오인될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전문적인 창작 수업의 결여에서 오는 문제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수필가의 여성화와 더불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수필가의 고령화 현상이다. 흔히 수필을 40대 이후의 중년의 문학이라고 여기는 선입견도 수필의 발전을 가로막는 측면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수필이 40대 이후의 원숙한 삶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함유한다. 이러한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마치 40대의 나이가 지나야만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수필가들의 고령화 현상을 부추기고 있는 데 있다. 다양한 계층의 작가들이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과감한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수필가들의 계층 또한 다양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들이 수필작가로 육성될 수 있어야 수필의 미래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논의되어야 할 점은 수필에서의 성담론의 허용 범주에 대한 것이다. 유교적 도덕주의에 젖어 있던 한국 사회는 성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해 오다가 1990년대에 들어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소설의 경우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 봐』는 음란물로 분류되어 처벌되는 사태에 이르렀고,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나 신현림의 『세기말 블루스』와 같은 시집에서는 과감한 성담론뿐 아니라 자기의 몸을 찍은 누드 사진까지 수록하는 파격적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성이 남성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점을 선언하면서 성담론을 통하여 현대사회의 양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학 속에 녹아 있는 성 이야기를 통하여 그 동안 은폐되고 억압, 금기시되어 온 성담론을 대중과 함께 공유하는 의도 외에도 한국 사회가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엄숙주의를 과시하면서도 그 이면엔 도덕적 일탈과 쾌락주의에 빠지게 되는 세기말적 유혹을 고발하고 있다.4)
수필문학에서는 성을 어디까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성의 표현에 있어서 기존의 수필문학은 시나 소설 같은 장르와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수필이 자신의 체험을 인격적으로 형상화하여 고백하는 것이라는 본질에 기인한다. 수필에 적용되는 모든 소재가 작가 자신의 경험의 소산임을 상기할 때 자칫 윤리적 왜곡이나 인격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격조 있는 문장과 어휘로 자신의 체험을 걸러서 표현해야 하는 수필 속에서는 성적 담론의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때 수필작품에서 성에 대한 수용은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수필에서의 성은 소재를 어떻게 형상화하여 품격 있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소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어디까지가 예술적 표현이고 어디까지가 외설이냐의 진단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작가의 양심과 독자의 예술적 감흥의 문제로 남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필은 작가가 체험한 것을 품격 있는 언어로 고백하는 장르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수필 속에 등장하는 성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변화가 수필문학의 발전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범주 내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2. 수용 측면
수용 측면에서 한국 수필문학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든다면 첫째로 수필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전반적인 이해 부족, 둘째로 수필평론의 양적, 질적 수준에서의 미흡함, 셋째로 독자 계층의 불균형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수필문학에 대한 독자 계층의 이해 부족의 문제는 문단에서 주변문학으로 전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문학 장르와는 대조적으로 중앙의 대형 일간지에서 수필가 지망생들에게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폐쇄시켜 버린 것이 단적인 예가 된다. 1970년대 한국일보와 조선일보가 신춘문예에 수필을 신설하였으나 한국일보는 13회로 중단하였고, 조선일보는 2회 시행 끝에 폐지하고 말았다. 수필이 시와 소설 장르처럼 신춘문예를 통하여 양질의 수필가를 배출해 왔다면 문학의 위상 또한 한층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학상 시상에서 수필이 배제되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전의 왜곡된 인식과 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둘째, 수필작품이 급속하게 양적으로 팽창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하여 이를 비평해 주는 수필평론이 보기 드문 현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수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5) 수필문학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수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더 이상의 논의의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60년대를 거치며 차츰 논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필문학에 대한 연구나 관심 또한 수필 전문 평론가들의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평자들이 여기로 쓴 평론이 대부분이었다. 즉 수필을 창작하고 수필을 전공하는 논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수필문학론이라기보다는 다른 장르에 관심을 둔 이들이 서구의 문학이론을 소개하거나 적용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비평가들의 근거 없는 작품 평가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객관적이고 체계적 이론의 바탕이 없는 비평은 그 존재적 의미를 인정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작가나 작품에 심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아무런 판단 기준이나 근거 없이 무조건 특정 작가나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비평가로서의 바른 태도가 아니므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비평에 어떠한 규범이 있어 그를 추종하면 되는 것이 아닌 만큼 비평은 창작 이상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수필의 경우 체계적 이론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평의 어려움은 더욱 크다고 하겠다.6)
따라서 수필문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수필 인구의 저변 확대나 질 좋은 수필의 창작만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수필평론이 제자리를 잡아 수필에 대한 바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야 한다. 1990년대에 들어 수필 전문지의 창간과 수필집의 대량 생산으로 수필문학이 번성기를 맞고 있으나, 수필평론은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다. 수필평론을 하는 비평가의 수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평론가의 이론적 무장도 점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수필 전문지는 수필에 대한 평론의 정착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젊고 유능한 평론가들을 발굴하고 이들로 하여금 참신한 평론을 쓸 수 있도록 수필 전문지의 편집인들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수필평론을 시평이나 소설평의 여기 정도로 여기는 기존 평자들의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바람직한 수필평론의 기준이나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창작 경험에만 의존하고 있는 세태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비평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충실한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적극적인 자세로 작품을 감상하고 이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밝힘으로써 독자에게 이해의 편의를 제공함을 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윤재천은 수필비평의 대표 격으로 지칭되는 오늘의 ‘월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해결방안으로 아래의 네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 수필에 대한 나름의 세계가 확고한 필자를 선정하고 필자는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보다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내용으로 진지하게 설명하려는 겸허함이 글에서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하겠다.
둘째, 분량의 문제로 충분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지면이 제공되어 진지한 비평이 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하루빨리 서구 이론에서 벗어나 우리 나름의 이론적 체계와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넷째, 천편일률적으로 신변잡기에 매달리고 있는 수필의 현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7)
위의 대목은 한국 수필비평가들이 새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서구의 문학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비평 방식과 이론으로부터 하루빨리 탈피하는 것도 한국 비평계가 안고 있는 중대한 과제의 하나이다. 자생적 이론의 개발도 없이 무조건 서구 이론을 폄하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수필 비평 발전의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로 거론되어야 할 한국 수필문학의 문제점은 편협한 독자층이다. 수필을 향유하는 계층은 창작과정에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화되지 못하고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표현매체의 변화로 인터넷을 통한 문학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수필계에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 방안도 찾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연령이 다른 문학에 비해 고령화되다 보니 표현 매체에 따른 변화의 수용도 신속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세대에 맞는 작품 소재나 주제의 선정 또한 쉽지 않다. 수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