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홍군이 관심있어 하여 가장 깊게 공부하는 분야로.. 민속학 가운데 신종교, 신앙 부분의 좋은 글입니다.
민속신앙관광과 굿 체험
김 명 자(안동대 교수)
1. 민속신앙과 관광
1) 민속신앙이란 무엇인가
2) 민속신앙은 어떤 특성을 지닐까
3) 민속신앙은 관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2. 민속신앙의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가
1) 민속신앙의 여러 모습들
2) 마을에서는 어떤 신을 섬기는가
3) 마을 공동체신앙의 실천적 표상, 동제(마을고사 또는 마을굿)
4) 마을 공동체신앙은 어떠한 사회적 의의가 있을까
3. 무속의 굿은 어떤 것일까
1) 무당에는 어떤 유형이 있을까
2) 무당은 어떠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3)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는 무속의 굿
4) 우리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사고
4. 민속신앙은 우리 민족의 믿음의 표상이자 문화유산
1. 민속신앙과 관광
1) 민속신앙이란 무엇인가?
민속신앙은 민간층에서 전승되는 자연적인 신앙(또는 종교)을 일컫는다. 자연적이란 인위적이란 말과 대칭되는 용어로서 흔히 일컬어지는 제도종교가 인위적인 종교라면 민속신앙은 자연적 종교가 된다. 불교·기독교 등과 같은 세계종교, 또는 역사종교·보편종교로도 일컬어지는 제도종교를 인위적 종교로 보고, 이와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연종교라 하는 것이다. 민속신앙이라는 용어 이외에도 민간신앙·민속종교·민중신앙·민중종교 등으로도 일컫는다. 종전에는 고유신앙·토속종교·향토신앙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학문적인 합의 사항이 없는 까닭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즈음 민속신앙·민간신앙, 그리고 민속종교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민속신앙을 영어로 Folk Religion 또는 Folk Belief라고 한다.
기존에는 종교의 개념을 지극히 좁은 의미로 설정했다. 그래서 교조·교리·의례·교단·신도 등이 체계적인 형식을 갖춘 것을 종교라 했으므로, 민속신앙 또는 민속종교는 종교의 범주에서 이탈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민속신앙은 의례가 중심으로 위의 요소를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종교의 개념은 넓은 의미로 해석하고, 정의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인위적인 종교와 자연적인 종교로 구분하는 것도 이미 기존의 정의 기준을 어느 정도 해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민속신앙은 어떤 특성을 지닐까
민속신앙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면에서 논의되었지만 대체로 공통되고 있다. 보편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을 요약해 본다.
첫째, 민속신앙은 대개의 민속이 그렇듯이 신앙행위가 세대와 세대를 거쳐 구전(口傳. oral tradition)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제도 종교(흔히 기성종교 또는 역사종교라고도 한다)가 교조와 교리 및 교단과 신도 등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반면, 민속신앙은 그러한 체계가 없이 말을 매개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다.
둘째, 민속신앙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이 유일신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다신신앙(多神信仰)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중의 생활공간과 생활 자체를 통제 또는 수호하는 초자연적 존재가 하나의 신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능에 따라 여러 신이 존재한다.
셋째, 현세 구복성(求福性)을 들 수 있다. 즉 구원 동기가 항시 현실의 구체적인 삶의 위기에서 비롯되며 본인의 내적 수련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절차에 의한 의례를 행하면 신 또는 무언가 초월적인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구제된다고 믿는다. 대단히 공리적(功利的)인 셈이다. 그래서 구복적 동기에 맞으면 사회윤리나 합리적 사고에 관계없이 어떠한 신앙 형식도 수용, 변경시킨다.
넷째, 현세구복적이며 현세 이익적인 신앙이어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의례도 주술적인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흔히 민속신앙을 주술종교라고 하는데, 종교는 사실상 으레 주술성을 지닌다. 다만 민속신앙의 경우 주술성이 한층 강한데, 신앙의 동기가 현실의 어려움을 당장 풀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신앙 효과역시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신앙행위의 의미가 반감된다. 민중은 구체적인 생사화복(生死禍福)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복잡한 사고 과정을 거치거나 모호한 상징성을 많이 사용하기보다는 의례 효과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주술을 행함으로써 그 효과가 당장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다섯째, 다양한 신앙 형식이 복합되어 중층적인 신앙 현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오면서 여러 신앙 형식들이 퇴적, 융합된 것이 민간신앙이다. 특히 외래 종교와 상호 영향을 주고 받기도 했는데 무불습합(巫佛習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민속신앙이 많은 신앙 형식을 융합하여 중층적 현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까닭은 바로 현세 구복적인 주술종교라는 것도 한 요인이다. 즉 어떤 신앙 형식이든지 그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구복적 동기만 맞으면 필요한 부분들을 언제든지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의 신앙 형식 이전에 복받고 좋다고 하면 어떤 신앙행위도 부담없이 행한다.
여섯째, 민속신앙은 의례 중심의 종교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교리나 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앙 행위인 의례를 중시한다. 특히 주술 종교이기 때문에 현실의 생존적 이해 관계에서 복만 얻으면 그만이지 번거로운 교단이나 교리는 간과할 수 있다. 민중은 교리 체계나 교단과는 상관 없이 구복적 동기가 성취되면 되기 때문에 바로 직접적으로 현실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장(場)인 의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민중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민중의 신앙적 정서를 수용하는 의례뿐이라고 하겠다. 이는 의례의 형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들의 의례태도가 형식보다 '정성 지상주의'를 든다는 것은 바로 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형식이나 격식을 갖출만한 신앙의 지침서나 경전같은 것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민중은 오직 착실히 믿고 지극한 정성을 드리면 기원사항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형식보다는 정성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말은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끝으로 민속신앙의 전승 주체는 대체로 지역 공동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속신앙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각 지역 공동체에 의해 취사, 선택되기 때문에 나름대로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는 민간신앙이 생활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점과도 관련시킬 수 있다. 가정의 개별적인 신앙이나 마을 공동의 신앙이라도 어느 개인의 신앙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이 병이 나서 굿을 하는 경우에도 집 전체, 가족 모두를 위한 굿을 하게 된다. 마을처럼 큰 공동체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지만 역시 '공동체'가 주역이 된다. 지연이나 혈연을 중심으로 한 생활 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점에서 지연이나 혈연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폐쇄적인 면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윤리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절대적인 견해일 수는 없다.
3) 민속신앙이 관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종교의례, 또는 종교사원이 관광이 되는 예는 고대시대부터 이루어졌다.
서양의 경우 고대 이집트에서 신전순례(神殿巡禮)와 같은 관광이 존재했으며 희랍시대에는 체육·요양·종교 등의 동기에서 관광이 행해져 보다 본격적인 관광이 이루어졌다. 고대 올림픽 경기 관람이라든가 아폴로 신전과 제우스 大神에 순례한 사람은 신의 보호를 받는 '신성한 사람'으로 여겨 후대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불교행사를 구경한다든가 사찰을 순례하는 일이 흔했다. 특히 불교국이었던 고려시대에 팔관회는 국가차원의 세시의례로서 대대적으로 그 행사가 베풀어졌는데 이는 관광이라는 측면에서도 일익을 했다. 팔관회가 양경(兩京: 평양과 개성)에서 열린 반면 연등회는 향촌사회에서 고루 베풀어졌다. 국가적인 차원의 종교의례로서 보다는 민중적인 축제로서의 기능을 했으리라 보는데 이에 참가함은 물론 관람하는 사람들 역시 엄청났으리라 본다. 조선조는 유교국이었지만 연등회는 여전히 지속되어 만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오늘날에는 마을굿이 확대되어 '지역축제'로 전승되기도 한다. 강릉단오제· 은산별신제·남이장군당제 등은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이밖에도 각 종교마다 대중을 위한 행사를 베풀거나 종교사원을 공개하는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들이 관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찰관람, 인도의 사원관람, 그밖에 성지순례 등.
우리의 경우 집에서 섬기는 가신(家神)은 대체로 비의적(秘儀的)이어서 공개를 꺼린다. 그러나 박물관을 비롯하여 민속촌 등지에서 전시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박물관에 전시했을 경우 문화의 화석화라는 비판도 있지만 '문화관광'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상당하다.
2. 민속신앙의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가
1) 민속신앙의 여러 모습들
민속신앙의 종류는 다양하여 계절제를 비롯하여 가신신앙·마을신앙·무속신앙·점복신앙·예조·풍수신앙·독경신앙·영웅신앙·자연물신앙·사귀신앙·금기·주부(呪符)·주술·민간의료 등이 포함된다. 이렇게 민속신앙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이들을 삶의 층위를 기준으로 구분한다면, 크게 마을 단위의 공동체 신앙과 가정단위의 개별적인 신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민간신앙을 종류별로 간략하게 설명한 뒤 무속신앙과 마을 공동체 신앙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계절제는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풍요와 건강을 위해서 행하는 주기전승의례로서 흔히 세시풍속 또는 세시의례로 일컬어진다. 음력 정월부터 섣달까지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계절제는 시계성(時季性)과 주기성(週期性), 그리고 순환성(循環性)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또한 농경의례로서의 성격이 짙고 가신신신앙이나 마을신앙과도 깊은 관련성이 있다.
계절제에는 정월에 행해지는 신년제를 비롯하여 거의 다달이 있는 세시명절 또는 그에 버금하는 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이 포함되는데, 특히 정월에 집중되어 있다. 신년제는 세계적으로 행해지며 우리의 경우 음력 정월에 지내는 차례를 필두로 각종 점복과 고사 및 놀이가 행해진다.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제액초복(除厄招福)하여 인간생존에 필요한 풍요와 건강을 이루는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까닭은 일 년을 기간으로 획득한 풍요와 건강이 폐기된다는 의미가 있어서 주기적으로 재생시켜 생존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계절제는 재생적인 의미가 있다.
가신신앙은 가택의 요소마다 신이 존재하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고 그 신에게 정기적, 또는 필요에 따라 의례를 행하며 신앙하는 것이다. 가택신앙이라고도 하며, 집신신앙·집안신앙, 또는 가정신앙이라고도 한다. 가신으로는 집안의 으뜸신으로 일컬어지는 성주를 비롯하여 조상·삼신·조왕·터주·업신·용단지·철륭·칠성·측간신·문신·우마신 등으로 대단히 다양하다. 이들 가신들은 기능이 뒤섞여 있는 면도 있지만 저마다의 직능이 있어서 가족들을 위해 각기의 직능을 수행한다.
마을신앙은 동신신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을의 수호신을 마을제당, 또는 마을신당(神堂)에 모셔놓고 제액초복을 위해 해마다 주기적으로 동민들이 합동으로 제의를 지내며 신앙하는 것이다. 이 제의를 동제·동신제·또는 동고사라고 하며 요즘은 마을신앙이라는 용어에 맞추어 마을굿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경우에 따라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마을신을 대상으로 지내는 동제는 유교식 의례를 기준으로 지내거나 무당이 참여하여 당굿 형식으로 지낸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진 동신은 산신·서낭신·국수신·장군신·용신·부군신·수구매기를 비롯하여 장승과 솟대가 있다. 동제의 명칭은 이들 신격에 따라 붙여지는데, 이는 곧 그 마을 동제의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 마을신을 둘이나 셋까지 모시는 경우도 있다.
동제는 동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신앙하는 마을에서 공동단위로 행하는 대표적인 고사로, 정월 초에 하는 지역도 있고, 정월 대보름에도 한다. 그밖에 삼짇날이나 단오에 행하기도 한다. 동제에는 산고사·동고사·별신굿·용궁맞이·장승제 등 지역과 그 지역의 생업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치러진다. 또한 주민이 제관이 되어 행해지는 경우와 무당과 같은 전문적인 사제자가 참여하여 행해지는 굿 형태가 있다. 중부 지역의 도당굿, 서해안의 풍어제라든가 제주도에서 행해지던 입춘굿은 전문적인 사제자인 심방이 참여하여 하는 마을굿 형식의 대표로 들 수 있다. 내륙에서는 주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풍농제를 어촌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낸다. 별신굿만 하더라도 풍어제로서의 별신굿과 풍농제로서의 별신굿이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것은 지역의 생태적인 조건과 관련되기도 한다.
동제는 한 마을의 제액초복을 위한 것으로, 그 제의 방식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내용도 다양해진다. 유교식 가례 기준으로 할 경우 상당히 간소하지만, 유교식 의례를 행하면서 '마을굿' 형식을 수용할 경우 내용도 다양하지만, 각종 부대 행사가 따른다. 예를 들면 동제를 전후하여 줄다리기 행사를 할 수 있고, 동제를 앞두고 풍물패가 마을을 돌며 걸립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민속예능 행사가 베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동제의 기능을 종교적 기능·사회적 기능·경제적 기능·오락적 기능·예능적 기능을 비롯하여 관광의 기능으로까지 확대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여러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데, 대부분이 유가식의 제사를 지내지만 당굿으로 흐드러지게 한바탕 축제판을 벌이는 지역도 있다. 강릉 단오제와 은산 별신제는 이제 '현대축제'로까지 자리잡고 있다.
무속신앙은 무당을 주축으로 민간층에서 전승되고 있는 자연적 종교 현상이다. 무당의 유형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 강신무는 신병체험을 통해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며, 세습무는 혈통에 따라 가계계승으로 된 무당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전문적인 종교 사제자로서 존재의 영구지속을 희구하는 민중의 욕구를 실천화하는 제의 곧, 굿을 주관한다.
무속의 굿은 그 목적에 따라 무신제(巫神祭)와 가제(家祭) 및 동제(洞祭)로 나눌 수 있다. 무신제는 무당 자신을 위한 제의로 강신제(降神祭)와 축신제(祝神祭)가 있다. 강신제는 무당에게 내린 신을 받아서 무당이 되는 성무의식이고, 축신제는 해마다 신의 영력을 보강시켜 신통력을 강화시키는 제의다. 가제는 민가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위해서 하는 제의로, 생전제의(生前祭儀)와 사후제의(死後祭儀)로 나뉜다.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수호하는 동신에게 무당이 당굿형식으로 행하는 제의다
점복은 인간 운명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으로, 인간은 점복의 결과로 얻어진 미래사를 믿는다. 주로 전문 점복자에 의해 점복이 행해지지만, 점복의 범주를 확대시킬 경우 정초의 토정비결 보기, 정월 대보름날 달을 보고 운수를 점치는 달점, 입춘날 보리뿌리를 보고 점을 치는 그리고 농점(農占) 등 일반인이 행하는 것도 포함되는 수가 있다.
점복의 종류도 다양하여 신이 내린 신점자가 보는 신점(神占)을 비롯해 역학을 학습한 역학자가 보는 역리점, 상점(相占) 등이 있다. 또 신점과 역학점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점을 보는 사람을 점복자라 한다. 점복자에는 신점자·역학점자·상점자·풍수점자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들의 기능이 겹치기도 하다.
점복과 유사한 맥락에서 논의되는 것이 예조(豫兆)다. 예조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견하는 징조인데, 이는 전문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상식의 선에서 해득할 수 있다는 것이 점복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던가, 까마귀가 울면 불길한 일이 생기고, 밤에 거미가 내리면 근심이 생기며, 돼지꿈을 꾸면 복이 들어올 징조라든가, 소꿈을 꾸면 조상이 현몽한 것이라 하여 집안에 우환이 생길 징조라고 믿는 것 같은 것이다.
예조는 점복과의 구별이 때로는 모호하지만, 점복이 대체로 전문화된 직능자를 필요로 하며 미래사에 대해 적극적인 데 비해 예조는 반드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소극적이라 할 수 있다. 예조를 점복의 전단계로 보기도 한다.
풍수(風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약자로서 풍수신앙은 산수의 영기(靈氣)가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한다고 믿어 영기있는 지형을 찾아 묘자리와 집터를 잡는 것이다. 이는 지기(地氣)가 좋은 곳을 잡으므로써 발복한다는 신앙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묘자리를 잡는 것을 음택풍수, 집터를 잡는 것을 양택풍수라 한다. 또 마을이나 도읍지를 잡는 것을 양기풍수라 한다. 풍수를 지리 지술(地術)이라고도 하며,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지관·지사(地師)라 일컫는다. 풍수는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장풍·득수·방위를 중요시한다. 장풍은 산을 등져서 바람을 막아 산의 영기가 흩어지지 않는 자리여야 하고, 득수는 양의 천수(泉水)가 모여들어 영기가 흩어지지 않는 자리여야 한다. 방위는 음위와 양위를 가리는 자리여야 한다. 이러한 자리는 여성 인체의 음부나 유방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이는 다산과 풍요의 의미가 있다.
독경신앙은 독경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경문을 읽어 악귀를 몰아내고 복을 기원한다. 경문은 불교. 도교. 무속의 사고가 복합된 것으로, 신장(神將)의 위력으로 액을 막고, 잡귀를 물리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경문에는 신장경. 옥갑경. 옥추경·축귀경·해원경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독경의식의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독경문이 사용된다. 무당의 굿과는 달리 앉아서 경문을 낭송하므로 좌경(坐經), 또는 앉은 굿이라고 한다. 독경자를 경쟁이·경객(經客)·판수·법사(法師)·복사(卜師)·경사(經師)·신장(神將)·신객(神客)·술객(術客)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르는데,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 독경의식에는 정초에 가내의 평안을 위한 안택축원과 가을에 추수감사의 뜻으로 하는 고사축원, 치병을 위한 귀신잡이, 제액을 위한 동토잡이, 망인을 저승으로 보내는 길닦음과 액을 막는 홍수매기·살풀이 등이 있다.
영웅신앙은 영웅의 영혼을 신으로 신앙하는 것으로, 대개 마을신앙과 무속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신(人神) 가운데 조상신이 있지만, 영웅신은 조상의 신과는 다르다. 영웅신에는 왕신·장군신·대감신 등이 있는데, 보통의 인간과 다른, 뛰어난 인간의 영혼들이다. 그러나 왕이나 장군이라 해서 모두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조왕이라든가 불우하게 지낸 왕, 억울하게 숨진 왕, 유달리 큰 일을 한 인물이 신으로 좌정한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 나라를 잃은 불운한 신라 말의 김부대왕(경순왕)과 고려 말의 공민왕 영혼이 신으로 받들어진다. 장군으로는 역시 억울하게 숨진 최영 장군·임경업 장군·남이 장군, 그리고 신라를 통일한 김유신 장군 등의 영혼이 신으로 받들어진다. 이 밖에도 뒤주에서 숨진 조선조 영조 때의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비롯하여 단종과 단종비, 금성대군, 그리고 조선조 말 일본 낭인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명성황후가 무속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자연물 신앙은 나무·암석·강·산·바다 등 자연무생물과 구렁이·호랑이·말 등 동물, 까치·까마귀·꿩 등의 조류를 신성시하여 신앙하는 것이다. 산에 가서 산신제를 지내고 강이나 바다에 가서 용신제를 지내며 거목이나 암석 앞에 제를 지내면서 소원을 비는 것이 모두 자연물을 신격시하여 신앙하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 소는 조상이라 하고 호랑이는 산신, 말은 서낭, 돼지는 터주, 구렁이는 업 또는 지신, 개는 객귀의 상징이라 하여 이런 동물을 잡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자연물을 신성하게 보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속성 때문이다. 첫째 일상적인 것과 구별되면서, 둘째 쉽게 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성이다. 나무와 암석, 산의 경우 일반적인 것과 구별되어 절묘하고 큰 거목이나 큰 산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강이나 바다도 큰 강이나 큰 바다가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동물도 호랑이의 경우 다른 동물보다 강하고 험상궂으면서 의연한 속성을 지녔고 말이나 개의 경우는 영특한 속성을 지녔다. 구렁이는 일반적인 뱀보다 유난히 크고 까치는 다른 조류에 비해 영특한 속성을 지녔으며 까마귀는 온 몸이 검다는 특이한 선별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 나무의 경우 계절에 따라 잎이 피고 지는 생명의 순환을 통해 계속 반복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산이나 바다, 강, 암석, 해와 달 등 무생물도 영원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환경 속에서 사는 동물이나 조류는 생명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어서 영원한 생명체로 보는 그 존재의 영원성 때문이다.
사귀신앙은 인간을 방해하는 잡귀들을 신앙하여 그 잡귀들로부터 피해를 면하려는 것이다. 인간을 가해하는 사귀로서의 잡귀는 인간 사령으로 객귀·영산·상문(喪門) 등이 있고, 역신으로 손님 우두지신이 있다. 이밖에 처녀귀로 일컬어지는 손각씨[또는 왕신이라고도 한다], 총각귀인 몽달귀신, 도깨비 등이 포함된다.
인간 사령(死靈)은 객사했거나 횡사·옥사하면 원한이 맺혀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혼(浮魂)이 되어 이승에 떠돌며 인간을 괴롭힌다. 이들 악신계통의 원귀에 대해서는 대체로 특별한 신앙의식은 없고, 사귀의 피해로 인간이 병들면 그 사귀의 원한을 풀어 병을 고치기 위해 병굿을 하거나 사귀를 내쫓는 독경의식을 행한다. 인간을 가해하는 사귀로서의 잡귀는 인간 사령으로 객귀·영산·상문(喪門)·처녀귀(손각씨 또는 왕신)·총각귀(몽달귀신 또는 삼태귀신)·무사신(無嗣神)이 있고 역신으로 손님·우두지신이 있으며 이밖에 도깨비가 있다. 간혹 성정이 악한 귀신으로 알려진 처녀귀신을 왕신(王神)이라 일컬으며, 안방이나 대청의 선반에 왕신단지로 모셔놓고 그 안에 돈이나 옷감 쪽을 넣어 재물이 들고 나는 것을 일일이 고하고 빌며 위한다. 몽달귀신은 삼태귀신이라고도 하는데, 이 귀신은 산곡(山谷)에 서식하면서 산길을 가는 사람에게 덮쳐 병을 준다. 삼태귀신이 달라붙을 때에는 가마니나 멍석·삼태기 따위로 사람을 덮어씌우기 때문에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 도깨비를 악귀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사실상 도깨비는 악한 것만은 아니다. 장난을 좋아하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도깨비는 생산신이자 풍요의 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금기는 신성성을 위해, 부정(不淨)을 가리고,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신성공간인 제의 장소에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는 것이라든가, 해산 후에 황토를 펴고 금줄을 쳐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금기의 예다. 이 밖에 일상생활에도 금기가 있다. '밥 먹고 금방 누우면 소가 된다.', '날이 어두웠을 때 전곡을 내보내면 복이 나가 가난해진다.'든가 하는 것이 모두 금기로 지켜지는 민속이다.
주부(呪符)는 흔히 부적(符籍)이라고 한다. 이는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칠 수 있는 주력(呪力)을 가진 글자를 일컫는다. 부적의 형태는 한지에다 붉은 색으로 소망하는 내용의 글씨를 여러 개 쓴 것으로 중 또는 독경자가 쓴 것과 무당이 쓴 것이 있다. 무당이 쓴 것은 신력(神力)으로 내린 것이라 하여 각별히 '부적을 내린다'고 한다. 무당이 부적을 내릴 때에는, 이른 새벽과 같은 특별한 시간에 목욕재계한다. 이를테면 신성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주부(呪符)는 그 목적에 따라 달리 사용되기 때문에 종류도 호신주부·축귀주부·제액주부·동토주부(動土呪符)·행운주부·순산주부(順産呪符)·치병주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주술(呪術)은 주력에 의해 인간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민간층에서는 주술이라는 용어보다 방법 또는 예방이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쓰고 방술(方術)이나 술법(術法)이라고도 한다. 양밥이나 사막잡기·삼잡기 등이 주술의 예다. 양밥의 예로 다음을 들 수 있다. 눈다래끼가 난 사람이 삼거리 한복판에 돌을 놓고 그 위에 자신의 눈썹을 뽑아놓은 다음 돌을 올려놓는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에 그 돌이 채이면 다래끼가 그 사람에게 옮겨간다고 믿는다. 이밖에 눈다래끼가 위 눈썹에 나면 지평(地平), 아랫눈썹에 나면 천평(天平)이라는 글자를 양손의 엄지 손톱에 먹으로 써 놓으면 낫는다고도 한다. 그 해에 제웅직성이 든 사람이 정월 대보름에 제웅이라는 짚인형을 만들어 인형의 뱃속에 생년월일시를 쓴 종이와 동전·떡 따위를 넣어 삼거리에 버리는 것도 양밥의 예가 된다. 손등에 난 무사막을 잡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한다. 먹을 찍은 붓을 무사막에다 찍고 이를 다시 참외에 찍어가며 하나 둘 센 다음, 그 참외를 시궁창에 묻는다. 이것이 썩으면 손등의 무사막이 참외가 썩는 것과 함께 없어진다고 믿는다. 삼잡기는 눈에 난 삼을 잡는 것이다. 삼이 난 사람의 모습을 벽에 그리고, 환자의 생년월일시와 이름을 쓰거나 또는 종이에 그려 벽에 붙인 후 송곳으로 그림 속에 있는 '눈'을 찍고, 해가 떠 오를 때 침 세 번을 뱉으면, 삼이 없어진다고 믿는다.
민간에서는 음력 정월이나 2월의 닭날에 장을 담그는 풍속이 있다. 그러면 장맛이 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까닭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닭날의 한자어, 곧 유일(酉日)의 유(酉) 자와 장(醬)의 한자어 속에 있는 유(酉) 자를 관련시키는 주술적인 사고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황금가지》를 쓴 프레이저는 주술의 원리로 접촉, 또는 감염의 원리와 유사의 원리를 들었다.
민간의료는 전문화된 의학에 의하지 않고 일반인 스스로 그들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는 것이다. 민간의료는 병이 났을 때 경험적인 방법이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스스로 만든 약으로 치료하는 것과 영력(靈力)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특히 후자에 비중을 두게 된다. 민속약, 또는 민간약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전자이고, 객귀물리기·병굿 등은 후자에 해당된다. 민속약으로는 동물·식물·광물이 두루 사용된다. 나이든 환자들이 많이 찾는 온천욕도 민간의료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세종대왕이 안질을 고치기 위해 온천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신앙 치료에는 병굿을 비롯하여 삼잡기·사막잡기에 이르기까지 병을 퇴치하기 위한 각종 방법이 포함된다.
2) 마을에서는 어떤 신을 섬기는가
마을신앙은 마을에서 수호하는 신을 마을 신당에 모셔놓고 제액초복(除厄超福)을 위해 해마다 마을공동체 단위로 의례를 행하며 신앙하는 것이다. 그 동안 동신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근래 들어 마을신앙이라는 용어가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마을신을 모신 곳은 동신당·동제당·신당·당·당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를 마을신앙이라는 표현과 맞추어 마을신당이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올리는 제의를 동신제. 동제. 동고사 등으로 일컫는다. 경우에 따라 마을제사, 또는 마을굿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마을신당에 모셔져 있는 마을신은 하나의 신일 수도 있지만, 10위 또는 20위인 경우가 있다. 여러 신이 모셔져 있는 경우는 주로 무당에 의해서 당굿이 행해지는 지역에 해당되는데, 주신(主神)을 중심으로 여러 신들이 모셔져 있다. 예를 들어 서낭당 안에 주신인 서낭신을 중심으로 그 밖에 지신·산신·장군신 등의 신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유가식 동제를 행하는 마을신당에도 마을신이 둘이나 셋이 모셔져 있는 경우가 있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상·중·하당의 삼당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은 산을 등지고 남향해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뒷산 턱에 산신을 모신 산신당이 있고,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 길 옆에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으며, 그 옆에 장승이나 솟대가 있는 것이 동신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다. 그러나 요즘은 이 삼당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마을신당은 본래 동민들이 신앙하는 신격의 명칭을 따라 산신을 신앙하면 산신당, 서낭을 신앙하면 서낭당이라고 한다. 신당 안에는 신이름을 쓴 위패 하나를 모시거나 또는 위패도 없이 동신당만 있던 것이 뒷날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이 커지면서 주 신상 이외에 다른 여러 신상들이 부수되는 것이 상례이다. 당나무만 있는 마을신당이나 당나무 밑에 자연석 제단만 있는 마을신당에는 나무로 간소하게 만든 위패조차 없다. 이와 같은 당나무 밑에 당집을 지어놓고 격식을 갖추게 되면, 마을신의 이름을 쓴 위패를 안치한다. 또 여기서 더 발전하여 신상(神像)을 모시기도 한다. 주신(主神) 하나만 그린 신상을 모신 경우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이 확장, 강화되는 데에 따라 다른 신상들이 부수된다.
마을신은 크게 자연신 계통과 인신(人神) 계통으로 구분된다. 전자에는 천신(天神)·산신·산신령·칠성신·지신·서낭신·용신·국사신·도당신·토지신·사해용신 등이 있으며, 후자에는 단군신·공민왕신·태조대왕신·김유신장군신·최영장군신·남이장군신·임경업장군신·부군신·송씨부인신[단종비]·각씨신·애기씨신 등이 있다. 이밖에 도교계통의 옥황상제라던가 노인신도 있다.
마을신은 다양하지만, 그 신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한 인태(人態)로 현현하면서 주민들을 보살펴 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밖에서 들어오는 잡귀와 액살·재앙 등을 막아 마을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준다고 믿는다.
마을신당의 형태는 당나무만 있는 것을 그냥 당(堂)이라 부르는 신수(神樹) 형태, 이와같은 신수 밑에 장방형의 자연석으로 된 제단이 있는 형태, 신수와 그 옆에 돌무더기 형태, 신수 밑에 한 칸 정도의 당집이 있는 형태, 그리고 신수가 있거나 또는 신수가 없이 당집보다 건물이 큰 전각 형태 등이 있다.
마을신당은 신앙하는 마을신에 따라 성격과 명칭이 결정되기 때문에 마을신의 종류와 일치하는데, 지역적인 특징이 보이기도 한다. 국수당과 산신당, 서낭당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마을신당이다. 특히 중부지역에서는 이 세 종류의 동신당이 한 마을에 복합되어 있다. 마을의 배후 높은 산정에 국수당이 있고, 그 산 중턱에 산신당이 있으며,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에 서낭당이 있으면서 그 옆에 장승과 솟대가 함께 있는 예가 많았다. 근래에는 국수당과 장승·솟대가 점차 사라져 산신당과 서낭당만 남아있는 마을들이 많다.
호남지역에는 당산(堂山)이라 일컫는 마을신당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당산은 산신을 신앙하는 산신당의 변형 형태로 보인다. 영남 동해안 지역에는 골매기당, 서해안 지역은 임장군당[임경업장군], 제주도는 본향당, 서울과 경기도는 부군당이 집중되어 있다. 골매기당은 그 골[곡=谷] 마을을 수호해 주는 터신과 방어신을 신앙하고, 임장군당은 풍어 전설에 기반을 둔 어업시조 신앙으로, 부군당은 지역수호와 풍요 신앙으로, 본향당은 근원 상징 신앙으로 각기 그 성격을 드러낸다.
서낭당은 산신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명칭이 유사한 성황(城隍)이 있는데, 이들은 애초와 다른 것이었으나 복합되어 오늘날에는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서낭신앙은 우리 고유의 신앙인 반면 성황신앙(城隍信仰)은 중국의 성지신앙(城池信仰), 즉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성의 외곽에 해자(垓字)를 파서 그 파낸 흙을 해자 밖에 쌓은 흙더미에 방어적 의미를 부여해 신앙하는 것이다. 중국의 이 신앙이 고려 문종 때 들어왔다고 하는데, 한국 재래의 서낭신앙과 성황신앙의 구성내용과 그 명칭이 비슷한 관계로 서낭을 성황이라 일컫는 것이라 본다. 오래된 옛 읍지(邑誌)의 시묘조(祀廟條)에는, 반드시 국사단·여제단·성황당이 있어서 관 주도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의 성황단제는 중국식의 성황신앙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 전승되는 서낭신앙은 그 성황과는 관계가 없다.
마을신앙의 보편적인 형태는 국수당·신당·서낭당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신당신앙이 한국의 마을신앙의 기본적 형태로 한 마을에서 신앙되면서 여기에 장승과 솟대신앙이 추가, 복합된 것으로 본다. 마을신앙의 발전 단계로 본다면, 먼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국수당을 마련해 천상의 신을 지상에 모셔 마을을 보살펴 주게 하였다. 이 후 그와 같은 산 전체가 신성하게 여겨지면서 신격이 형성되어 산신을 신앙하게 되었고, 다음에는 이와 같은 산신을 동구에 모시는 서낭신앙이 형성되어 밖으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와 액운 등을 막아내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천상의 신이 최초로 지상에 내려와 정착하는 단계가 국수당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산신당, 그리고 서낭당 신앙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상신이 하강하는 산꼭대기는 단군신화의 신단수, 가락국기의 구지봉에서도 신화로 말해주고 있다.
3) 마을 공동체신앙의 실천적 표상, 동제(마을고사 또는 마을굿)
동제는 마을신앙을 실천적으로 표상화한 것이다. 농촌에서는 농사의 풍년 기원과 재해의 방지, 어촌에서는 풍어의 기원과 해상 사고의 방지에 주 목적이 있다.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은 농촌도 어촌도 아니어서 이와 같은 풍년이나 풍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재와 질병 없이 마을 전체가 평안하여 마을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빌면서, 또 생업과 관련하여 시장 주변의 주민들은 상업이 잘되기 위해서 동제를 지내기도 한다. 도시 지역 이외에 농촌과 어촌에서는 요즘도 예전과 변함없이 풍년과 풍어, 건강과 마을의 평안을 위해 동제를 지낸다.
동제의 시기는 음력 정초에 택일하여 정월 초이틀이나 사흘에 하는 마을이 있고, 대보름 첫 시간, 즉 자정에 하는 마을도 있다. 이밖에도 군왕(君王)이나 장군 등 인신을 동신으로 모신 동신당에서는 그 해당 인물의 탄신일이나 기일에 제를 올리므로, 시기가 다를 수 있다. 동제는 산고사·동고사·별신굿·장승제·용궁맞이·풍어제·배서낭굿 등 그 지역의 생태적인 조건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치러진다. 그 제의 방법 역시 마을 사람이 제관이 되어 행해지는 경우와 무당과 같은 전문적인 사제자가 참여하여 행해지는 굿 형태가 있다. 중부지역의 도당굿, 서해안의 풍어제는 무당이 주재하고, 그 밖에 제주도의 당굿 역시 전문적인 사제자인 심방이 주재한다. 내륙에서는 주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풍농제를, 어촌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낸다. 별신굿만 하더라도 풍어제로서의 별신굿과 풍농제로서의 별신굿이 각기 있다.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동제는 당제와 당굿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당제는 마을에서 동회를 열어 제관을 선출하여 동신당에 제를 올리는 것이고, 당굿은 대대적인 동제로 무당을 불러다 굿으로 동신에게 제의를 올리는 것이다. 당제는 초헌과 아헌·종헌의 삼헌과 독축으로 유가의 제례에 준한다. 당굿은 재래의 무속제의인데, 당굿으로 동제를 올리는 동신당에도 먼저 당제부터 지내고, 당굿을 하여 유가식과 무속이 복합된 이중제의의 형식이 된다.
실상 동제는 의례를 주재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 지역마다 형태가 다양하다. 호남 지방에서는 유교식 제례의 형태와 유사한 의례가 일반적이다. 우리 나라 중·북부 지방에서는 무당이 주재하는 굿이 일반적이며 제주도에서도 심방이 주재하는 당굿이 일반적이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무당굿을 하는 마을과 유교식 의례를 하는 마을이 섞여 있다.
동제는 마을의 생태적인 조건과 직결되기 때문에 의례의 형태가 달라지긴 하지만, 대부분의 의례들이 다양한 형태들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북 위도의 당제의 경우, 원당제와 용왕제로 나뉘는데, 원당제는 남성 중심이며 무녀가 굿을 하는 데 비해 용왕제는 여성이 중심이 되고 띠배 보내기 등의 바다에 대한 의례가 포함된다. 전남 완도에서는 남성 중심, 마을 유지 중심의 유교식 당제 후에 마을 사람들 전체가 바닷가에서 간단히 상을 차리고 용왕을 흠향시키는 도제(島祭)를 행한다. 서울, 경기 지역의 도당굿의 경우 마을 유지들이 제관이 되어 제례를 치른 후에 주재자가 무당으로 바뀌고, 의식도 굿으로 전환된다. 제주도의 포제와 당굿도 비슷한 경우이다. 포제는 남성의 유교식 제례인데 비해 당굿은 심방이 주재하는 굿이다. 그래서 명칭도 명칭도 호남지방에서는 '제', '당산제', '당제'라고 하는 반면, 중부지방에서는 '도당굿', 제주지방에서는 '당굿'이라는 말이 쓰인다.
동제를 지낼 때는 제를 지내기 3일 또는 7일이나, 15일 전에 마을에서 대동회를 열어 제관을 뽑는다. 제관은 정결하고 나이가 많은 마을의 원로로 생기복덕을 가려서 2∼4명을 뽑는다. 간략하게 지내는 당제에서는 제관을 한 사람만 뽑는 예도 있으나, 제관은 대체로 제주 1명, 집사 1명, 축관 1명으로 모두 3명을 뽑는다. 2명의 제관을 뽑을 때는 제주 1명과 집사 1명을 선출하여 제주가 축관까지 겸하게 한다. 제관들은 뽑힌 그 날부터 곧 금기에 들어가 집밖의 출입을 제한하고 언행을 조심한다. 어류와 육류를 먹지 않고 술과 담배를 금하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면서 부부가 한 방에 들지 않으며 출입문 밖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외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한편, 제관의 선출이 끝난 즉시 마을의 원로들이 동제당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잡인들의 출입을 막는다. 마을 입구에도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이 있는 다른 마을의 사람들이나 다른 곳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제한한다. 선출된 제관들은 자기 집에 금줄을 치기 전에 먼저 동신당부터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기도 한다. 제주의 집을 도가(都家), 또는 당주(堂主)라 부르기도 하는데, 제수(祭需)는 제주집에서 장만하여 집사가 운반한다. 제비(祭費)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추렴한다.
동신당에는 마을에서 선출되어 금기를 마친 제관들만 가서 제를 지내고 그 밖에는 아무도 동신당에 가서는 안된다. 동민들은 제관 외의 다른 사람들이 동신당에 가면 부정을 타서 동신제가 무효화되고, 도리어 마을에 화를 입는다고 한다. 유가식 제례로 하는 경우 제 당일이면 제관들이 서낭당 앞에서 제물을 차리고 촛불을 밝힌 다음, 초헌·아헌·종헌·독축·소지 올리기·음복의 순서로 당제를 마친다. 이상은 유가식 제례 방법이다. 무당을 데려다 당굿을 할 때에도 이와 같은 절차의 당제를 지내고 나서 행한다. .
오늘날에는 당제도 많이 세속화되어 예전과 달리 참여자들을 폭넓게 하는 경우도 있고, 장승제의 경우는 외부인도 참관이 허락되기도 한다. 이렇게 허락을 한다해도 계란과 같은 음식은 먹지 못하게 한다든지 나름의 금기가 있다.
4) 마을 공동체신앙은 어떠한 사회적 의의가 있을까
마을공동체신앙은 그 목적이 지역의 생태와 생업에 따라 달라졌다고 하지만 어느 마을에서든지 자신의 생업이 잘 될 것과 마을의 안녕을 빈다. 그래서 동제가 무사하게 이루어지도록 마을 사람 모두 부정을 가리고 금기를 지키며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설정한다. 이는 원초적인 신앙심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동제는 신앙적인 의의가 있다.
다음으로 심적유대와 단합을 이루는 매개체로서의 의의를 들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합동으로 제비를 추렴하고 그 마을을 수호해주는 마을신에게 제를 올리는데 이 때 동민들이 함께 부정을 가리며 금기하면서 함께 잘 되기를 빈다. 금기를 어기면 부정이 들어 병이 돌고 마을이 피해를 입는다고 한다. 제비의 추렴에도 정성을 쏟는다. 그래서 동제의 금기와 참여 마을 사람들의 심적 유대와 단합을 촉진시키면서 소속감을 공고하게 하는 등의 계기가 된다. 셋째, 정통성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그 의의를 들 수 있다. 아울러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다. 동제는 오랜 역사를 지켜온 것이다. 공동운명체라는 자기 소속감을 다시 확인시켜 과거 조상들이 살아온 본(本)을 이어간다. 이같은 본은 마을의 구심점이 되어서 생활모습을 그대로 이어 사회변동 속에서도 한 가닥 제동구실을 하므로서 마을의 전통이 사회적 전통성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의의가 있다. 어느 지역이나 동제를 지내기 전과 지낸 후에 대동회를 연다. 동제 전에 동회에서 마을 사람들이 협의하여 제관을 선출하고 제의비용을 결정하여 마을 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된 민주적 방식으로 동제를 지낸다. 또 동제가 끝나면 이튿날 아침에 당주 집에 모여 동제에 차렸던 제물을 고루 나누어 먹고 제비를 결산해 수입과 지출을 명확히 밝힌다. 여분이 있으면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적립하거나 마을 공동의 경비로 쓴다. 그래서 동제의 이와 같은 절차는 예부터 전해오는 한국의 전통적인 대동의결의 민주적 기구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무당이 참여해서 행하는 당굿은 오늘날 현대 축제로 전개되어 강릉단오제나 은산별신제 같은 것은 경제적 의의와 관광적인 의의까지 확대되었다. 오늘날 축제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행해지는 많은 민속행사들이 애초에는 지역의 신앙의례였던 동제가 기반이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3. 무속의 굿은 어떤 것일까
1) 무당에는 어떤 유형이 있을까
무속은 무당을 주축으로 민간층에서 전승되는 종교다. 무속의 주체가 되는 무당은 신을 부르고 춤으로서 몰아의 경지에 들어가 신탁(神託)을 통해 반신반인(半神半人), 곧 인간이면서 또한 신이기도 한 존재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소망하는 내용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의사를 알아내어 인간에게 제시해주는 영매자로서의 구실을 한다.
무당은 신을 섬기며 굿을 전문으로 하는 사제자다. 문헌에는 여자 무당을 무(巫), 남자 무당은 격(覡)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는 여무를 무당, 무녀라고 하며 남무를 박수라고도 하지만, 통칭해서 무 또는 무당이라고 한다.
무는 신명을 다하여 춤을 추는 사람으로 춤을 통해 신을 접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공(工) 자의 양 측에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한 무(巫)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은 신(神)을 뜻하고 땅은 인간을 뜻한다. 또한 공(工)이라는 글자는 재주를 뜻하기도 하여 무당은 신을 부르는 재주, 굿을 하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옛날의 무당과 오늘날의 무당이 같지는 않지만, 무는 고대 부족국가 때부터 군(君)인 동시에 신과의 교섭자로서의 자리에 있었고 그 활동은 초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무당은 보통 인간이 미칠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매자로서 점을 쳐서 인간의 앞 일을 예언하는가 하면 굿을 해서 병을 고치는 등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구실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당이 신과 이야기하고 신과 만나며 신의 세계를 여행한다고 믿기도 한다.
무당의 유형은 신이 내려서 되는 강신무와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 무당이 되는 세습무로 나누어진다. 이를 다시 성격별로 세분하면 무당형. 단골형. 심방형. 명두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각기 특성을 지닌다.
무당형은 중. 북부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무당과 박수가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강신체험에 의해 영력을 획득한 무당으로 강신한 몸주신을 모신 신단이 있다. 무당이 한 신만 모시는 것은 아니지만 몸주신은 그가 섬기는 주신을 일컫는다. 무당형은 영력에 의해 점을 칠 수 있으며 또한 가무로 정통굿을 한다.
단골형은 호남과 영남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 무당을 호남에서는 단골, 영남에서는 무당이라고 한다. 이들 단골형은 혈통에 따라 사제권이 세습되고 단골판이란 일정한 관할 지역이 있어서 그 지역에서만 굿을 할 수 있다. 단골판도 혈통에 따라 세습되며 비록 신을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굿 학습을 거친 무당이어서 정통굿을 주관할 수 있다. 그러나 강신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통력이 없고 신을 모시는 신단을 갖추고 있지 않다.
심방형은 제주도의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단골형과 마찬가지로 무당이 되는 권한을 혈통에 의해 이어받는다. 반면 무당형처럼 영험력을 중요시하므로 그들의 성격은 무당형과 단골형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심방형은 무당형처럼 영력을 중시하고 신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나 무당형처럼 신이 직접 몸에 내리지 않아 제의(굿)에서 무점구를 가지고 점을 쳐서 이 무점구(명도·천문·상잔)를 통해 점을 치고 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역시 정통굿을 하는 무당이다.
명두형은 어린아이가 숨져서 영(靈)이 된, 곧 사아령(死兒靈)이 강신된 무당이다. 여자 아이의 영이 내린 무당을 명두, 남자아이의 영이 내린 무당을 동자, 또는 태주라고 한다. 명두형은 전국적으로 있으나 남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점을 주로 하는데 영을 부르면 입에서 새소리가 난다. 영이 오면 무당 자신도 숨진 아이와 같은 연령의 어린애와 같은 표정을 짓고 말씨 또한 그렇게 된다. 입에서 새소리가 난다하여 새탄이 무당이라고도 한다.
정통굿은 적어도 5명 이상의 무당이 참여한다. 명두형은 정통굿을 하지 못하므로 점을 쳐서 굿할 날을 받았을 때에는 큰 무당과 결탁하여 굿을 하기도 한다.
무당형과 명두형은 강신에 의한 영통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강신무 계통이며 단골형과 심방형은 사제권이 제도적으로 세습화되는 세습무 계통으로 구분된다. 무당의 유형을 넷으로 나눌 수 있지만 무당형이라도 뒤늦게 사아령이 강신되고 명두형이라도 다른 신을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신을 몸주신으로 모시며 영통술을 어느 신에게 주로 의뢰하는가에 따라 무당의 성격이 결정된다. 강신무의 경우 무당형과 명두형이 복합될 수도 있다.
(1) 신병(神病)을 체험하는 강신무(降神巫)
무당은 신을 체험한 사람이다. 신은 하늘에서 하강하므로 강신체험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습무는 강신체험을 하지 않았으나 무당이 되었다. 강신무와 세습무는 이처럼 차이가 있지만 애초에는 같은 계통이었다. 이러한 간격은 지역적. 사회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후대에 생긴 것이다. 세습무는 비록 강신체험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제의(굿)를 비롯한 무속의 양태는 강신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강신무는 신병이라는 불가사의한 병을 앓게 된다. 신병은 꿈이나 외적 충격에 의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까닭없이 우연히 시름시름 앓게 시작한다. 그 증세는 실로 다양하다. 신체상의 고통에서부터 정신상태의 불안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질환증세가 나타난다. 식욕부진. 소화불량. 편두통을 비롯한 편증. 혈변. 하혈 등 온갖 증세가 장기간 계속되고 정신이 혼미하여 안정이 되지 않는다. 꿈이 많아지고 꿈 속에서 신과 접촉하는가 하면 꿈과 생시의 구분이 흐려지며 이 상태에서 생시에도 신의 허상. 환각. 환청을 체험한다. 이런 증세가 심해지면 미쳐서 집을 뛰쳐나가 산이나 들. 거리를 헤매며 중얼거린다. 이른바 미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신이상의 질환으로 돌입하는 예도 있으나 대부분 신체의 질환으로부터 정신질환으로 옮겨간다.
신병은 의약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며 몸에 실린 신을 받아 내림굿을 해서 무당이 되어야 낫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내림굿을 해서 이런 증세가 나앗다고하여 무당을 그만두면 이 증세가 재발하므로 무당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이는 신이 시키는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병은 일반 정신병과 달리 종교성을 지닌다. 신병을 체험하면서 무당이 될 수 있는 영력(靈力)을 획득하여 신권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식 무당이 되려면 큰 무당에게 내림굿을 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무제의(巫祭儀)를 치르게 된다. 내림굿을 해준 무당을 선생으로 그를 따라다니며 굿 기능을 익히고 점차 무당으로 독립한다. 선생 무당이 여자면 신어머니, 남자면 신아버지로 모시며 신계조직(神系組織)이 성립된다. 무당이 되면 무복(巫服)과 무신도(巫神圖)를 비롯하여 각종 무구(巫具)를 장만하는데 큰 무당일수록 이런 것들이 다양하다. 무장비들은 마음대로 장만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계시대로 차근차근 장만한다.
신의 계시를 받아서 무당이 쓰는 방울. 제금. 신칼. 무신도. 무복 등의 성물(聖物)을 땅 속에서 발견하는 예가 종종 있다. 성물을 발견하기 전에는 대개 현몽이 있는데 신이 지시한 곳에 가서 땅을 파보니 무구가 나왔다는 사례는 흔하다. 또는 강신자가 산을 헤매다 우연히 발견하는 수도 있고 무작정 발이 닿는 곳으로 달려가 무구가 묻혀있는 곳을 찾는 경우도 있다.
원래 무당이 쓰던 물건은 대를 물리거나,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불에 태우든지 땅에 묻는 것이 관례이므로 이렇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성물의 습득은 미궁의 험한 길을 통과하거나 감추어진 신기(神器)를 찾는 시험, 말하자면 한 차원에서 또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종교적 통과제의(通過祭儀)의 의미가 있다. 신병을 앓고 신비한 체험을 하며 성물을 습득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통해 범속한 세속의 인간이 신권자(神權者)로 새롭게 재생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바로 무당이다.
(2) 혈통따라 계승되는 세습무(世襲巫)
신이 내리는 신병을 체험하여 영통력을 얻는 강신무와는 달리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서 사제권이 세습되는 무당이 세습무다. 이와같은 무당은 호남지역과 영남지역 등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세습무는 사제권의 소유자와 무계혼으로 결합한 뒤 학습을 통해 무당이 된다. 사제권은 父를 따라 계승되지만 굿은 여자가 하므로 여자가 사제권을 소유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이 단골무당이 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혼인을 하게 되면 남자의 어머니인 시어머니 단골이 며느리를 굿판에 데리고 다니면서 굿 기능을 가르쳐 완전한 무당을 만든다. 호남의 단골에게는 각각 단골판이라는 일정한 관할구역이 있다. 단골판 안에서 제의나 사제권은 단골판의 소유권과 함께 혈통을 따라 대대로 세습되고 이 사제권의 계승에 따라 단골이 된다. 단골판 안에는 다른 단골이 들어가 굿을 할 수 없으며 남의 단골구역을 침범해서 굿을 하다가 들키게되면 그 관할구역의 주민인 단골에게 무구를 빼앗기고 심한 매를 맞는 등 무당 상호간의 규제가 엄하다. 단골무가 다른 곳을 이사갈 떄에는 단골판을 팔고 새로 이사간 곳에서 굿을 할 수 있는 단골판을 사야 굿을 할 수 있다. 또 사정이 있어서 단골무당이 굿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단골에게 단골판을 전세로 놓는다. 오늘날 세습무는 드물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세습무가 있고 그밖에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특히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세습무는 급격하게 단절되었다. 과거, 무당은 무당끼리 혼인하여 가계를 계승하였으나 봉건사회 붕괴 후 신분제도가 해체되고 직업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무당이 아니어도 된다. 세습무의 경우 무당을 하지 않고 다른 생업을 택할 수 있다. 전혀 색다른 것을 할 수도 있겠으나 소리나 춤과 같은 예능계통의 길을 택한 경우도 적지 않다.
2) 무당은 어떠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오늘날 무당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전통문화의 측면에서 볼 때다. 이를테면 춤·노래·악기연주 등 예능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물론 아직도 무당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고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서 무(巫)의 자리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고대 부족국가에서 무당은 제의를 주관하고 정치를 하는 군(君)의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분화되어 제정(祭政)이 분리되면서 무는 사제의 구실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무의 기능으로 사제의 기능 . 치병. 예언, 그리고 유희적 기능을 들 수 있다.
사제기능은 무의 원래 기능으로서 무는 각종 거국적인 치제(治祭)에 공적 주술사로서 관여하는 동시에 개인의 무사(巫事)에 이르기까지 사적 주술사로서도 관여하였다.
치병의 기능은 이미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적 주술사로서도 관여하였다. 치병의 기능은 이미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에도 병굿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유리왕이 병에 걸렸을 때 무당의 말을 듣고 그대로 병이 나앗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 고구려 유리왕 19년 8월, 교시(제사 희생용 돼지)가 달아나니 왕이 탁리와 사비라는 신하로 하여금 쫓게 하였는데 장옥택중에 이르러 발견하고 칼로 그 돼지의 다리를 끊었다. 왕이 듣고 노하여 '제천할 희생을 어찌 함부로 상하게 하느냐'며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이 병이 나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저주하는 까닭이라 하였다. 왕은 사지를 보내 이를 사과하였더니 병이 곧 나앗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동서활인원은 무당이 소속되어 구병활둥을 하던 곳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곳이다.
무당이 미래사를 예견한 예언의 기능 역시 고대 국가 때부터 있어왔으며 유희적 기능은 상고시대부터 발휘되었다. 굿을 하는 무당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도약하고 공수를 한다. 이것이 제삼자의 눈에는 일종의 유희로 반영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굿에서 무당만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굿에 참여한 사람들도 함께 신바람이 나서 어울린다. 유희적 기능이 절정에 달하는 것인데 후대에 올수록 굿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유희적 본능은 점차 노골화하여 마침내 굿은 놀이이며 풀이로 변하였다. 무감이란 바로 굿을 보는 관중들이 춤추며 신명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를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제액(除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는 무속의 굿
오늘날과 같이 합리적인 사고가 팽배하기 이전,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행복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픈 일, 그밖에 좋지않은 일도 신(神)적인 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굿을 했다. 주로 언짢은 일이 있을 때 굿을 했지만 운수가 대통해도 굿을 해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사의 여러 문제를 굿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요즘도 사람들은 일이 잘 안되고 우환이 생기는 등 좋지않은 일이 생기면 최후의 수단으로 당이나 점복자가 찾아가서 점을 친다. 점괘에 따라 가볍게 비손을 하는 수도 있지만 크게 굿을 하기도 한다. 굿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 크게 무신제(巫神祭) 가신제(家神祭) 동제(洞祭)로 나눌 수 있다.
무신제는 무당을 위한 굿으로 여기에는 신병체험을 거친 무당이 정식무당이 되기 위한 내림굿 또는 신굿, 무당의 영력(靈力)을 강화하기 위한 대택굿 또는 꽃맞이굿 등이 포함된다. 무당을 그만둘 때 신에게 고하는 하직굿도 무신제에 해당된다. 가신제는 집안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위해 하는 굿이다. 여기에는 생전제의(生前祭儀)로 육아를 비는 삼신받이 불도맞이 칠성굿, 병이 났을 때에 하는 병굿 환자굿 푸닥거리 광인굿 등을 비롯하여 행운과 풍년을 비는 재수굿 축원굿 성주굿 등이 있다. 사후제의(死後祭儀)로는 상가를 정화하고 죽은 이의 저승길을 닦아주는 자리걷이 집가심 오구굿 지노귀새남 등이 있다.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마을신에게 올리는 제의다. 마을 공동의 풍요와 행운을 기원한다. 동제는 마을 사람들이 제관이 되어 제의를 지내는 수도 있지만 무당굿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당굿 도당굿 서낭굿 부군당굿 별신굿 풍어굿 등이 있다.
이처럼 많은 종류의 굿이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불행한 일을 멀리 하고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려는 데에 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행하는 굿은 죽은 사람이 저세상에 가서도 행복하게 영생할 것을 기원하며, 아울러 살아있는 사람도 복록을 얻어 행복하게 살고자 소망을 빈다. 바로 무속적인 사고가 굿을 통해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4) 우리 심성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무속사고
무속은 한국의 긴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생활기반을 이루어왔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속담에도 무당과 무속에 대한 내용이 많은 것은 바로 무속이 일상생활 속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무당 제 굿 못하고 중 제 머리 깍지 못한다. 또는 소경 저 죽을 날 모른다.
큰 무당이 있으면 작은 무당이 춤을 못춘다.
양반집에서 무당 난다.
굿 해먹고 난 집같다.
떡 본 김에 굿한다
굿하고 싶어도 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싫어 못한다 "
이처럼 우리의 일상사에서 무속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사실상 다른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도 위기에 직면해서는 무속에 의존하곤 했다. 무당은 한국인에게 근원적 문제에 대해 일정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구송하는 무가(巫歌) 속에는 이 세상,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인간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무속은 윤리가 없고 무당은 사리사욕에 빠져있다는 등 부정적인 시각에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부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무당도 있고 또 무속 자체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속사고(巫俗思考)에 의하면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승의 삶은 순간적이며 저승의 삶은 영원하다. 이승에서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일 뿐 영혼은 저승으로 가서 영생을 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이승에서 좋지않은 일을 하면 저승에 가서도 벌을 받기 때문에 사람은 현세에서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 무속이 현세 이익적이고 지나치게 주술적이라하지만 이처럼 윤리성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서양인 선교사 헐버트는 우리의 종교심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 한국인들의 종교는 여러 종교가 혼합되었으며 그렇게 혼합된 것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요소를 취하면서도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멸시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했을 때에는 영혼숭배자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이가를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에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그가 고난에 처하여 어떤 신앙에 경배한다면 그때야말로 그의 진지한 신앙심이 나타날 것이다".
여기 영혼숭배란 무속을 일컫는데, 이처럼 한국인은 여러 종교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삶의 위기에 이르러서는 무속에 의존하며 이 때문에 무속은 갖은 탄압과 멸시 속에서도 존재해왔던 것이다. 개인의 문제를 떠나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도 다른 종교보다 무속이 그 역할을 맡아 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불교 사찰이나 교회가 마을공동의 평안을 위한 특별한 불공이나 예배를 드리는데 소홀하므로 일부지역에서는 여전히 무당이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무속사고는 우리 몸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정신이 아니다. 남의 일을 나의 일처럼 돌보는 마음, 곧 미분적인 심성은 무속사고의 주축을 이룬다.
서양 선교사의 말처럼 다른 종교라하여 멸시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도 바로 미분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분적인 심성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개체 분화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칫 합리성을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미분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기적이고 남의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하지않는, 인심이 각박한 사람이 많은 오늘날이야말로 미분적인 심성의 강점을 살려야 할 때라고 본다.
4. 민속신앙은 우리 민족의 믿음의 표상이자 문화유산
민속신앙은 역사종교처럼 체계화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신의 뜻은 바꾸어 말하면 자연의 순리다. 그 나라의 민속신앙은 그 나라의 원형적인 사고의 표출이자 민족의 자존심이다. 민속신앙에 등장하는 신을 잡스러운 귀신 따위로 매도하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다.
사회변화가 극심한 오늘날 민속신앙은 전통사회와는 달라진 면이 많다. 그러나 서둘러 사라졌다거나 단절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문화변동에 따라 민속신앙의 양태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도 민속신앙을 철저하게 섬기는 마을이나 가정도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섬겼으나 오늘날에는 이런 민속이 단절된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지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구론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논의해 왔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현장에서 전승되어 그것을 실용화하고 음미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택적이어서 전반적인 현실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물관의 작업, 그리고 관광화는 그래서도 필요하다. 지난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는 문화의 박제화, 특히 전통문화의 박제화 내지는 화석화에 대해 많은 비판과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2천년대를 전후하여 이러한 문제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10월 31일 영양군 일월산에서 팔도굿 경진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이러한 굿대회가 열린 것도 관심거리인데 여기에는 무속인을 비롯하여 일반 관중 등 2천5백여명이 참여했다. 굿은 기본적으로 종교의례지만 그 속에는 음악 ·무용·미술·연극 등 종합예술이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신명'이 담겨있다. 이 신명은 우리 믿음과 생활의 표상일 수도 있다. 신관념이 해체된 것이 아니라 신관념이 변화하듯이 굿 체험을 통해 비록 믿음을 갖는 것은 선택적이라 하더라도 신명풀이는 공유할 수 있으리라 본다. 민속신앙관광은 그래서 가능하며 앞으로 그 폭도 확장시켜야할 숙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