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위해 필요하다 싶은 것은 다 해봤어요. 50가지 방법이 있다면 49가지는 해본 것 같아요” 홍순재(가명·51)씨는 자폐 장애를 가진 19살된 아들이 있다. 아들이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말이 좀 늦은 것이려니” 생각하며 그냥 넘겼다. 다섯 살이 돼서야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자폐아에 대한 인식이 낮은 때였다.
의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지 않았다. 병원만 20여곳을 찾아 다녔다. 1년을 허비한 후 여섯 살이 돼서야 서울대병원에서 자폐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홍씨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복지관으로, 언어치료실로, 놀이치료실로, 한방병원으로 쫓아다녔다. 홍씨는 “돈도 돈이었지만 치료실 순례를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면서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를 한곳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진단부터 치료까지 한곳에서
▲ 발달장애 전문의원인 아이들세상의원 이현숙 원장이 심리운동실에서 자폐아동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 / photo 이경민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홍씨는 지난 3월부터 서울 서초동의 서초아동발달연구소를 다니고 있다. 이곳은 발달장애아를 위한 전문 의원이다. 발달장애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요긴한 민간 통합치료센터로는 국내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대학병원에도 통합치료센터가 없다 보니 이들 부모는 대부분 복지관이나 사설치료센터를 전전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시립어린이병원의 경우도 대기자가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차례가 돼도 1년만 이용할 수 있다. 1년이 되면 다시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마냥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아이들세상의원(원장 이현숙·55)이 운영하는 서초아동발달연구소는 심리·인지학습·언어·음악·미술·놀이·스노젤렌(Snoezelen·감각 경험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찾게 하는 프로그램)·감각치료 등을 한곳에서 받을 수 있는 소아 발달장애 통합치료센터다. 진단은 물론 필요한 치료를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병원과 치료실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 서초동 서울교대 인근의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서초아동발달연구소를 찾았다. 가기 전엔 사설치료실보다 조금 큰 규모겠거니 생각했다.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은 앞뒤가 길어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넓었다. 진료실로 사용하는 2층을 제외하곤 전 층이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다양한 치료실이다. 뇌 훈련을 시켜주는 뉴로피드백(Neurofeedback) 치료실, 감각치료를 도와주는 스노젤렌실, 무의식을 발산하게 해주는 모래놀이 치료실, 다양한 악기가 있는 음악 치료실 등 총 23개의 치료실이 층마다 자리잡고 있다.
▲ 음악치료실
스노젤렌실에 들어가 봤다. 시각적으로 반응을 잘 하지 않는 아이의 오감을 다양한 방법으로 자극하는 곳이다. 물침대가 놓여 있어 앉았더니 음악이 나오고 그에 따른 진동이 온몸에 전달됐다. 한쪽엔 몸을 푹 파묻고 싶은 큰 원형쿠션이 놓여 있다. 김진국(50) 사무장은 “발달장애아는 낯선 곳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기 때문에 병원이 아닌 일반 가정집처럼 꾸미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한 치료실엔 싱크대를 놓아 주방처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지하 1층엔 넓은 심리운동 치료실이 있다. 한 층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는 인공암벽·미끄럼틀·그네 등 각종 놀이기구가 있다. 움직임을 통해 자신감도 심어주고 환경적응도 도와주기 위한 치료 과정으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한다. 방마다 치료 도구로 쓰이는 장난감이 쌓여있어 병원이 아닌 놀이터 같았다. 꼭대기층인 5층엔 부모를 위한 세미나실과 카페가 있다. 아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부모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멋진 카페로 꾸몄다. 한쪽엔 아이들이 책을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놓았다. 지하 1층부터 둘러보면서 이렇게 좋은 시설을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만 하다가 꼭대기 5층에 들어선 순간, 한 층을 전부 부모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이현숙 원장이 궁금해졌다.
고교 때부터 꿈꾸던 일
5층 카페에서 마주 앉은 이 원장은 “돈도 안되는 일을 왜 하느냐며 주변에서 다들 뜯어말렸어요”라고 수줍게 말하며 웃었다. 이 원장이 발달장애 전문병원을 구상한 것은 오래됐다. 고등학교 때 문과였던 이 원장은 특수교육과를 가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화여대 의대에 진학했다. 소아청소년과를 전공하면서 발달장애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과 수원에서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언젠가는 발달장애아를 위한 병원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0여년 전 마음속 구상을 염두에 두고 이 건물을 샀다. ‘제대로 사고를 쳐보자’는 생각으로 2004년 마흔여덟에 언어청각학 박사과정에도 도전했다. 2005년 수십 년 꿈을 실천에 옮기려고 건물 내 세입자를 전부 내보냈다. 그런데 덜컥 겁이 났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났다. 주변의 만류를 핑계로 슬그머니 주저앉았다가 5년 만에 다시 용기를 냈다. 리모델링과 시설을 갖추는 데만 15억원을 들였다. 이 원장은 “병원이 잘될까 하는 걱정보다는 소명처럼 여겼던 일을 마침내 해냈기 때문에 여한이 없다”며 “애초에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흑자가 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굴러만 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은 병원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대출을 받아 직원 월급을 주는 형편이라고 했다. 수원에서 하던 병원을 정리하고 강릉에 내려가 남의 병원에서 일하는 남편 장석균씨 월급까지 이곳에 쏟아붓고 있다. 이 원장은 “주변에서 다들 언제 문을 닫나 보고 있대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 평형·균형 감각을 키워주는 감각통합실
“빨리 발견해야 치료도 빠르다”
이 원장은 “발달장애는 무엇보다 조기진단이 중요하다. 치료를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해야 효과도 빠르다. 1년이 늦어지면 치료기간은 몇 년이 뒤처지게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자폐아의 경우 2세 미만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다. 어렸을 때는 보통 아이와 비슷하다가 커갈수록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부모가 놓치기 쉽다. 부모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뒤늦게 병원을 찾기도 한다. 홍순재씨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한테 이상징후가 많았는데 그땐 내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병원 가기를 미뤘던 것 같다”면서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아이한테 더 많은 것을 해줬을 텐데…”라며 후회했다.
이 원장은 조기진단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 3월 22일 세계 최대 자폐센터가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 병원과 연계해 세미나를 개최했다. 자폐치료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의 힐러리 크루거 아동발달센터장을 초청해 ‘6개월 미만의 뇌성마비와 자폐 조기진단’에 대한 강연을 열었다. 처음엔 병원 5층에 있는 50여석 규모의 세미나실에서 진행할 계획이었는데 신청자가 300명 가까이 몰리는 바람에 급히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크루거 박사는 강연에서 “자폐증 유병률이 세계적으로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50명당 1명꼴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실제 그룹 실험을 해 보니 조기치료를 받은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의 예후(豫後·병이 나은 후의 경과)에 많은 차이를 보였다. 조기진단 도구와 기준을 계속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강연이 끝난 후 이 병원을 찾은 크루거 박사는 병원 시설에 감탄하면서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의 조기진단·치료 프로그램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줬다.
▲ 스노젤렌실
이 원장은 “필라델피아 프로그램의 경우 치료사가 1 대 1로 붙어 집중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너무 비싸다”면서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펀드를 조성해서 부모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적자투성이 병원 걱정보다 발달장애아와 부모 걱정을 앞세우는 이 원장은 조기진단을 위해 부모들을 위한 다양한 세미나도 계획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센터의 자폐 조기진단 차트
다음 23가지 항목 중 3가지에 해당하면 자폐 스펙트럼의 관찰 대상이 되고 12가지 이상에서 ‘상당히 있다’ 또는 ‘아주 심하다’로 체크되면 자폐 스펙트럼으로 의심되므로 전문가 상담이 필요하다. 자폐 스펙트럼은 자폐증의 여러 가지 유형을 아우르는 용어다.
1. 까꿍놀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 2. 옹알이가 거의 없다. 3. 안아주어도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며 얼굴이나 목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 4. 잠을 불규칙하게 자거나 자주 깬다. 5. 부모나 다른 사람들과 눈을 잘 맞추지 않는다. 6. 이유 없이 갑자기 웃거나 운다. 7. 혼자 놀기를 좋아하며 놀이에서도 단순한 행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8. 놀이를 할 때 주의집중에 어려움을 겪거나 집중 시간이 매우 짧다. 9. 관심있는 물건이나 대상을 보여주어도 달라고 요구하거나, 가져오거나, 가리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10. 말하기가 뚜렷하게 늦으며 몸짓이나 흉내내기로 이를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11.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며 말을 반복하거나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 12.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13. 특정 물건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14. 어떤 자극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면 특정한 자극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15. 배변훈련에 어려움을 겪는다. 16. 특정 분야(단어 외우기, 광고선전문구 등)에서 특출한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17. 말은 할 줄 알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를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18. 다른 사람의 동작을 잘 따라하지 못한다. 19. 얼굴이 무표정하다. 20. 인형·의사놀이 등 상징적인 놀이를 하지 않는다. 21. 기술모방(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기 등)에 어려움이 있다. 22. 주의집중을 시도하기 어렵고 반응이 없다. 23. 촉각과 후각 등 감각기능에 이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