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이 연구는 연구 주제를 세 가지로 세분화하였다. 셸링의 자연철학과 맑스의 자연 개념을 영향사적으로 관점에서 규명하는 것, 맑스의 초기저작으로부터 후기저작에 이르기까지 자연개념에 대한 맑스적 고찰의 변이와 추이를 구성하는 것, 맑스자연개념에 대한 엥겔스의 구성의 공과를 정확하게 가르는 것이 그것이다. 세 가지 연구주제 중 본 연구는 연구의 범위를 첫 번째와 두 번째에 국한하고, 세 번째 연구주제는 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하여 세부연구 항목에서 제외하였다. 엥겔스의 자연개념이 맑스의 그것과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실증적인 자연과학의 성과에 경도된 엥겔스의 자연개념이 맑스의 사상에 내재된 철학적 고찰로부터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따라서 연구자는 본 연구의 범위를 셸링의 자연철학과 맑스의 자연개념의 공명 가능성을 타진하고, 맑스를 근대적 반생태주의 철학자로 지목하는 그릇된 통념을 교정하는 것으로 본 연구의 주제를 제한하였다. 이상의 연구주제 아래 본 연구가 현재까지 잠정적으로 획득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맑스가 자연 개념을 명시적으로 주제화하고 있는 저작은 그의 초기 저작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n 1844)에서일 뿐이며, 그 이후의 저작에서 맑스는 자연개념을 중심적인 분석대상으로서 주제화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초기저작으로부터 후기저작으로 이행하면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언급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점이 맑스가 자연에 대해 관심을 거두었다는 것을 입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이것이 맑스를 근대적 반생태주의자로 지목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맑스에게 자연개념이 그의 초기저작부터 후기저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관심사였다는 점, 더 나아가 초기 철학적 지평으로부터 후기의 정치경제학적 지평으로 맑스의 문제의식이 변화됨으로써 자연개념이 어떻게 정초되고 변화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초기저작에서 후기저작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맑스에게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이원적인 대립 구도 속에서 전자에 의한 후자의 지배와 이용을 정당화는 기계론적 자연관에 의해 정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자연의 공존적이고 공생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유기적 자연관에 의해 정초되고 있다. 특히 이 후자의 경우, 즉 유기체적 자연관의 철학적 단초를 맑스는 독일관념론의 이론적 흐름 가운데 셸링의 자연철학적 기획으로부터 마련하고 있다(M. Frank; 1975, 233쪽 이하/Schmied-Korwarzik;1981, 27쪽 이하).이에 우리는 먼저 셸링의 자연철학의 핵심적 내용을 개관한 후, 셸링의 자연 이해가 맑스의 자연개념과 갖는 동근원성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① 셸링의 유기적 자연관-생명으로서의 나와 자연
셸링은 인간과 자연, 주관과 객관, 자유와 필연성의 동일성의 확립을 통한 양자의 화해라는 의도 아래 그의 자연철학을 기획한다. 인간과 자연의 발생적, 유기적 연관성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기 위한 셸링 자연철학의 주된 물음은 “자연과정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어떻게 우리의 표상 안에, 즉 우리의 정신 안에 있을 수 있는가?”(F.W.J.Schelling; 1980, 354)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철학의 단적인 출발점은 나, 곧 정신으로서의 자아다. 이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철학의 출발점이다. 문제는 이 절대적으로 명증한 철학적 단초로서의 정신에 어떻게 외부사물에 대한 표상이 현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셸링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제시되어 온 인식론적 반영이론이나, 피히테류의 실천론적인 관념론도 적절치 않은 것으로 거부한다. 전자의 경우 자율적 정신으로서의 자아, 철학적인 단초로서의 우리의 정신이 객관 속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 우리 정신 속에 표상된 외적 현존으로서의 자연이 자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전자도 후자도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정초하지 못한다.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셸링은 철학적으로 스피노자(B.d.Spinoza)와 라이프니츠(Leibniz)의 철학적 기획에 주목한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에 의해 양분된 이원적 세계를 그들 사유의 일원론적 체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셸링 자연철학의 의도를 선취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자연표상의 ‘연속의 필연성을 우리의 자연으로부터, 그러는 한 유한한 정신의 일반으로부터 도출’(IPN, 359쪽 참조)한 유일한 체계다. 스피노자는 자연과 자유, 인간과 자연의 이원적 대립과 분리를 ‘우리의 자연(본성)안에 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내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IPN, 359쪽 참조)함으로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표상되는 외부 자연의 현존 및 작용을 자연의 이념, 즉 자연의 자기산출 및 변양을 통해 설명하고, 더 나아가 이 산출과 변양의 표상 내 현존을 자연의 이념으로 통해 정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셸링은 스피노자가 자연의 산출과 변양 및 그 현존을 “우리 자신의 자연으로부터 설명하는 대신 우리 외부의 무한자의 이념”(IPN, 360쪽)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자연과 자유의 화해를 정초하는데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자연의 변양 및 현존, 그리고 그것의 우리 표상 내 현존은 셸링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에 의해서, 달리 말해서 자연으로서 현존하는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만 설명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시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철학자는 셸링에 의하면 라이프니츠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우리 밖의 무한자를 통해 정초하려한 자연과 자유의 통일을 개체를 통해, 즉 ‘근원적으로 실제적이며 그 자체 현실적이라고 간주한 표상하는 존재’(IPN, 362쪽)로서의 모나드를 통해 철학적으로 정초하고자 한다. 라이프니츠의 철학 체계 안에서 자연의 변양을 산출하는 적극적인 활동과 그것의 산출물로서의 자연은 오직 개체로서의 자연, 표상하는 정신 안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를 철학적으로 능가한다. 그러나 셸링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기획이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신의) 예정조화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다시 한 번 양자의 동일성을 정당하게 정초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양자의 동일성은 셸링에 의하면 오직 ‘우리의 공통된 자연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연에 있어서의 이러한 일치를 예정조화에 의해 설명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정조화라는 말은 오직 그러한 일치가 발견된다는 사실만을 말할 뿐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가를 설명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IPN, 362쪽 참조).
셸링은 그의 유기체적 자연관을 통해 초월적 무한자를 통해 우리 정신과 자연의 현존 및 변양의 일원적 체계를 논증하려 한 스피노자의 기획과 신의 예정조화를 통해 양자의 동일성을 논증하려한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기획과 단절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유기적 자연의 영역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말해 자연이 유기적이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기계론적 자연관의 결함을 명료하게 가시화할 수 있으며,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철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셸링의 논증을 우리는 두 단계로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유기체란 “자기 산출적이면서 자족적이고 자립적이다[……] 모든 유기적 산물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적이며[……]어떤 개별적 부분도 그 전체 안에서가 아니면 발생할 수가 없”다.(IPN, 364쪽). 따라서 유기적 존재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 실제적이면서 나의 개입이 없어도 그 자체적으로 존립해 있다. 유기체의 자립성, 유기체에서의 각 지절(Glieder)과 전체와의 연관성, 다시 말해 유기체라는 개념은 유기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내에 존립해 있다. 셸링은 이에 대해 ‘전체의 부분에 대한 그리고 부분의 전체에 대한 필연적 연관이 있는 곳에만 개념이 존재’(IPN, 365쪽)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셸링은 그가 자연철학적 기획의 서두에 두었던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정신으로서의 나, 표상하고 의식하는 자로서의 나는 어떻게 유기체에 대한 표상을 지니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내 속에 존재하는 유기체의 표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와 관련하여 셸링은 “우리는 이런 자연 이해의 근거가 인간 정신 자체 안에 놓여 있다고 추정해 볼만 하다”(IPN, 371쪽)고 언급한다. 다시 말해 유기적 자연에 대해 그것을 유기적인 것으로서 표상하는 내가 곧 유기적인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유기적 자연의 객관성을 확증함과 동시에 그것이 나의 표상이 되는, 나의 정신 속에 현존하는 발생근거를 추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기적 자연의 객관적 존립근거를 유기적 존재로서의 유한한 나의 정신 속에서 찾고, 동시에 나를 이 유기적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셸링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이라는 양항의 동일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더 이상 무한자를 우리의 외부의 존재로서 필요로 하지 않을 것’(IPN, 370쪽 참조)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셸링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 자신이 자연과 동일한 것인 한,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이해하듯, 생동적인 자연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나는 어떻게 자연의 보편적 생명이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단계적인 전개를 통해 자유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나를, 그리고 나와 더불어 모든 이념적인 것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자마자, 나에게는 죽은 객체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게 되며, 나는 어떻게 나의 외부에 생명이 가능한 것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IPN, 371쪽)
나와 나의 외부의 자연의 동일성은 이제 셸링에게서 생(Leben) 혹은 생명으로서 규정된다. 유기체가 그 자신 안에 자신의 개념으로서의 생명을 담지하듯이, 나는 나 자신 속에 나의 생명을 의식하며 그것을 담지한다. 유한한 정신으로, 유한한 자연으로 존재하는 나의 본질은 내가 나를 그것으로 의식하는 생명이며, 이것은 곧 유기적 자연의 생명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생명으로 표상하지 않는 순간 나는 죽어버린 객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듯이, 자연 역시 그것을 수학적으로 추상화하고 양적으로 분할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자 마자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고유한 현존과 변양이기를 정지한다. 이 때문에 셸링의 자연철학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추상화하는 근대적 자연이해 및 인간과 자연의 발생적 연관을 그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기계론적 자연이해와 근본적으로 단절한다. 셸링에 의하면 ‘우리는 자연을 원인과 결과의 계열에 입각한 기계론을 통해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자연으로서의 정신 혹은 정신으로서의 자연은 그 자신의 현존을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만 마련하는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유기적 생명’(IPN, 361쪽)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셸링은 실제적인 것(das Reale)와 이념적인 것(das Ideelle)의 동일성을 확증한다. 자연에 대한 철학적 기획이란, 이념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와는 반대로 실제적인 것을 이념적인 것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 초월철학의 과제가 된다. 이 때문에 셸링에게 자연철학과 초월철학은 동일한 철학적 기획의 양면이며, 양자는 단 하나의 학문으로 간주된다.
이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동일철학으로서의 셸링의 자연철학은 한편으로는 자연을 그 자체 유기적인 생명으로서 정초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을 자기산출 행위(Akt)이자 생산(das Proucieren)으로 정초한다. 우리에게 표상되는 객체로서의 자연은 생산물임과 동시에 자기를 산출하고 생산하는 생산자다. 셸링은 이것을 “우리가 객체 전체를 단지 생산물로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것으로서 정립하는 한 그것은 우리에 대해 자연으로 고양된다”(EESN, 284쪽)고 서술한다. 더 나아가 “단순한 생산물로서의 자연(natura naturata)을 객체로서의 자연이라고 부르고 생산성으로서의 자연(natura naturans)를 주체로서의 자연”이라고 규정한 후, 전자를 경험의 대상으로, 후자를 이론의 대상으로 정립한다. 그러나 자연이 자기 산출의 원인이자 결과인 한 객체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자연은 동일한 것으로서 정립된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셸링의 자연철학적 기획이 맑스의 자연 이해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자연을 하나의 유기적 생명으로서, 또한 우리의 정신을 유한한 자연으로서 규정하는 셸링의 자연 이해는 자연과 인간을 가르면서도 자연을 비유기적 신체로, 인간을 유기적 자연으로 규정하는 맑스의 자연이해를 선취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하에서 맑스의 자연개념이 초기저작으로부터 정치경제학적인 저작에 이르기까지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주제화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셸링의 자연철학과의 영향사적 관점 속에서 맑스의 자연개념을 재정립해보고자 한다.
② 맑스의 자연개념-사회적 실천을 통해 매개된 비유기적 신체로서의 자연
맑스의 자연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맑스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유적존재(Gattungswesen)로서 파악하는 맑스의 관점은 그의 자연관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스 초기의 문제의식을 지배하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인간을 ‘유적존재’로 규정하는 철학적 관점을 맑스는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로부터 계승한다. 인간학적 유물론 혹은 자연주의적 유물론의 기반에 서 있는 포이에르바하에게서 인간을 유적존재로 격상시키는 가장 본질적인 매개는 감각(Sinn)이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외적 자연과 관계하며 나 이외의 타인과 관계한다. 감각은 포이에르바하에게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된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감각적 유물론을 수용하면서도,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 실천(Praxis)의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맑스에 의하면 인간은 감각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자연과 관계하고 자연을 변형한다. 이 변형된 자연은 다시 인간 실천의 산물로서 인간 자신과 동일하면서도 구별되어 정립된다. 때문에 자연은 인간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객체 혹은 타자가 아니라 인간과 동일한 인간의 자기타자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감각 또한 그 자체로 실천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Gattung)로서 표상하고 사유하는 것은 그의 감각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상호 매개하는 그 자신의 실천 때문에 가능하며, 그 때문에 실천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매개의 중심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상호관계의 핵심적 계기다. 인간이 유적 존재라는 것은 단순히 감각을 통해 자연과 관계하는 존재하는 정태적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의 실천을 통해 감각적 존재로서의 자기제한을 철폐하고 이를 통해 관계적이면서 보편적 존재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뜻한다.
맑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의 유적존재이거니와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를, 다른 사물들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그가 생동적인 유로서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그가 보편적인, 그에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맑스에게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보편성을 자연과 자기 자신에서 확증하는 존재이며, 유적존재로서 인간을 정립하는 본질적 계기가 곧 인간과 자연의 지속적인 상호매개활동으로서의 실천이자 노동이다.
이런 점에서 맑스에게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은 우선 실천적 행위주체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을 실천적인 존재로, 능동적인 행위자로 정립했다고 해서, 그가 자연을 인간에 대한 종속범주로 격하시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 없이는, 감성적인 외부세계가 없이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기”(ÖpM,512쪽) 때문이며, 이는 곧 인간의 절대적인 자연 의존성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있어야만 하는 인간의 신체”(ÖpM,516쪽)이기 때문이다. 맑스의 이와 같은 단언 속에서 우리는 맑스가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사고는 근대적 자연관을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동근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자연으로부터 그의 생활수단의 취한다. 이러한 인간의 활동은 인간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활동으로 현상하지만, 이로부터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을 변형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인간이 그의 실천적 행위를 가하는 자연은 인간에게 이미 인간 자신의 실천적 활동을 통해 매개된 것으로서만 주어지며,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작용으로서의 실천 또한 그 앞에 매개된 자연으로 현상하는 자연활동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생존의 수단과 생활 수단을 제공하는 자연은 그 자체로 인간의 실천적 행위와 분리되어서 현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맑스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연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이외의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이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ÖpM,516쪽)라고 서술한다.
앞서 셸링이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 및 동근원성을 유한한 자연으로서의 우리 정신과 우리 앞에 객체로서 현상하는 자연을 관통하는 생명으로부터 찾고 있는 것처럼 맑스 역시 양자의 동근원성을 인간의 생명활동에서 찾고 있다. 인간의 생명 활동은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인 자연의 활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본질적 근거는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자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자연은, 그 자체가 인간의 생명활동의 산물로서 인간의 실천적 활동과 매개되어 있는 우리 자신의 객관적 모습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맑스는 맑스는 이 양자의 동근원성을 실천에서, 즉 인간과 자연이라는 양자를 동시적으로 걸머쥐고 있는 실천으로부터 찾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 때문에 인간이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한다는 것은 자연을 전체적으로 재생산한다는 것과 동일하지만, 이 자연의 전체적인 재생산은 곧 자연의 일부로서의 우리 인간 자신의 전체적인 재생산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인간의 실천적 활동성을 자연의 자기산출작용으로, 자연의 변형과 가공 속에서 인간의 자기 변형을 정립하는 맑스에게 인간과 자연은 셸링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호 분리되어 이원론적으로 마주서지 않는다. ‘인간을 직접적인 자연존재로, 더 나아가 활동적인 자연존재’(ÖpM,578쪽 참조)로 이해하는 맑스의 정의는 생산된 객체로서의 자연과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자연을 동일하게 놓고 있는 셸링의 자연이해와 공명한다. 이런 점에서 셸링의 자연이해는 맑스의 유물론적 자연이해의 직접적인 철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맑스의 자연이해가 셸링과 갈라지는 근원적인 분기점은 어디에 있을까?
잘 알려진 것처럼, 맑스가 자연개념을 주제화하고 있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관계가 어떻게 전도되어 현상하는가를 주제화하고 있다. 국민경제학에 대한 맑스의 주석, 소외된 노동에 대한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의 맑스의 서술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생산양식이 인간적 자연존재이자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어떻게 변형하고, 이 결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소외된 모습으로 현상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에 반해 자본(Das Kapital)으로 집약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저작들은 인간과 자연의 왜곡된 관계의 근원을 자본의 운동법칙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해명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인 관계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적시한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초기저작과 후기저작은 자연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견지한 채, 인간과 자연의 동근원성,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 혹은 그것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해도 좋다. 셸링의 자연철학이 맑스의 자연관에 대한 철학적 전사를 이룬다면, 맑스는 셸링의 유기적 자연관을 사회․역사적 지평으로 끌고와 역사 운동의 특정 국면 아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정립되는가를 총체적으로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맑스의 자연 개념이 그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후기저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주제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 후기 저작은 자연개념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주제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맑스의 발전된 문제틀 내에서 새롭게 정초되고 이해된다는 것이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저작들은 경제학 철학 초고에 제시된 맑스의 자연이해를 토대로 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자연지배와 자연착취를 가속화하는지를 폭로 분석하고 있다.
모든 것을 교환의 법칙아래 종속시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맑스에 의하면 소외된 관계, 소외된 인간이 현상하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노동의 생산물, 그리고 유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며, 향유하기보다는 박탈당한다. 이 세계에서 자연은 인간의 유용성과 효율성을 위한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맑스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의 현실성의 박탈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획득은 소외로, 외화로 나타난다.”(ÖpM,512쪽).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현을 확증하고, 자연의 자기 실현을 그 자신의 자기 확증으로 간주하기보다, 자연을 인간 욕구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간주하게 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다시금 인간을 인간의 수단이자 도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통일은 자본의 목적이 관철되는 맹목적인 법칙 아래 떨어지고, 이로부터 인간은 자연과 철저하게 분리된다. 이 때문에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자연을 인간에 의해 정복되고 이용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자연관은 이러한 소외된 세계에 대한 이론적 표현인 셈이다.
이러한 소외된 세계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한 순수한 대상으로 되며, 유용성의 순수한 사태가 된다. 자연은 위력(Macht) 그 자체로서 인식되기를 중지한다. 자연의 자립적 법칙에 대한 이론적 인식은 그 자체 단지 인간의 욕구를 위한, 다시 말해 소비의 대상으로서든 생산의 수단으로서든 인간의 욕구 아래 내던져진 간지(List)로서만 현상한다.” 맑스에 의하면 가치증식과 이윤의 무한 증대를 추구하는 자본의 운동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이고 기술적 착취체계를 보편화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파괴 또한 전면화한다. 자연 착취의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보편화는 직접적으로 삶의 토대를 자연에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 자연의 일부인 인간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파괴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자연으로부터 가치증식과 이윤증대의 직접적인 토대를 발견하는 자본의 운동은 역으로 자본이 그 운동의 직접적 출발점이자 토대가 되는 자연에 대한 파괴를 불러오다는 점에서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맑스가 자본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본의 운동과정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은 따라서 어떻게 자본이 상품으로부터 화폐와 자본으로 이행해 가는가에 대한 단순한 정치경제학적 분석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에 의한 자연파괴 및 이로 인한 삶의 토대 파괴를 생태학적인 자연이해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맑스가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제시하고 있는 테제,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인 관계의 회복 및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 복귀를 함의하는 테제, 즉 “이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한다”(ÖpM, 536쪽)는 테제는 자본에서 제시된 다음과 같은 테제,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연가정의 필연성에 따라 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즉 부정의 부정인 것이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만들어낸다”는 테제와 공명한다. 자본주의의 획득물을 기초로 한 개인적 소유의 사회는 맑스가 초기 저작에서 지적했던 완성된 인간주의이자 자연주의로서의 공산주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이 사회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더 나아가 ‘자연을 인간의 현실적 자연’(ÖpM, 543쪽)으로 이해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의미하는 것에는 특별한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맑스의 자연관은 따라서 정치경제학적으로 재구성되고 변형된 셸링의 자연철학이라고 규정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