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에서 틴데일 신약 성경을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울시와 다른 사람들은 유럽에서 그 책들을 수색하기로 결정하였다. 1526년 2월에, 헨리 8세와 울시는 앤트워프의 여러 권력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든 틴데일 신약 성경 사본들을 찾아서 파괴시킬 것을 그들에게 당부하였다.
앤트워프의 마가렛 공주는 “특별히 그녀의 관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들을 준엄하게 고소하려는 의도로 그 나라 전역에서 이 책들을 수색하게 하였다”(Anderson, Annals of the English Biuble, I, p,124).
영국 국왕의 대리인인, 존 하켓은 여러 도시들에서 이러한 성경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자격으로 그는 앤트워프, 바로우, 질란드, 켄트, 브루게스, 브뤼셀, 루바이네, 그 외 여러 곳을 방문하며, 울시 추기경의 지시에 복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쇄업자들은 위협을 받았고, 최소한 한 사람, 크리스토퍼 엔드호벤(Christopher Endhoven)은 투옥되었다.
틴데일의 신약 사본들이 수입되기 전에, 그 사본들을 구입하여 무더기로 그것들을 파괴시키기 위해 영국에서 몇몇 카톨릭 지도자들에 의해 한 안(案)이 구상되었다.
그 무렵 틴데일이 엄청난 부채를 지고있을 때, 그 번역가에게 약간의 작업 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이미 언급되었던 한 주교, 커스버트 턴스톨이 이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턴스톨이 틴데일의 작품을 파괴하는데 혈안이 된 것을 알고, 어거스틴 패킹톤(Augustine Packington)이라는 이름의 한 진취적인 상인은, 그 주교가 앤트워프에 있을 때, 그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틴데일 신약의 전 인쇄물을 팔겠다고 제안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패킹톤은 그 계획에 대하여 틴데일에게 알려주었다. 그 후 그의 찬성을 받은 후에, 모든 것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었다. 턴스톨은 흥분하여 전량(全量)을 구매하여 그것들을 불태웠으나, 틴데일은 그 돈으로 자기 부채를 해결하고, 불태워진 것들보다 더 많은 사본을 찍었다.
1526-27년에 일련의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일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여주심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들로, 플란더스와 독일 배들이 영국 항구들로의 입항을 중단하였다. 유럽에 출판 업체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영국으로 밀반입되는 성경은 이 상선들에 실려서 들여와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 아래서 어떻게 성경이 그 땅으로 들어올 수 있겠는가?
1527년 봄, 파종기에 때 아닌 큰 비가 내렸고, 그 해의 가을까지 밀과 빵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모든 사람이 아사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오래지않아서, 얼마를 지불하여도 밀도 빵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으로 인해, 그 당국자들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밀과 다른 상품을 받아들여야 했고, 육신의 생명을 주는 밀에 영적 생명을 주는 성경이 섞여서 들어왔다!
앤더슨의 주석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특별하신 섭리의 자취들을 쉽게 간과하였으나, 그런 조건에, 그리고 그러한 시기에 책들이 도착하였다는 것은 침묵으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 그 빵이 부족하였기에 당연히 그 값이 상승하였고, 마침내 바닥이 나서, 생명의 빵이 들어올 수 있었다.”
1527년 12월에, 인쇄업자이자 영어 성경 밀반입자 중 하나였던, 존 레이몬드(John Raimond)가 체포되어 감옥에 던져졌다. 그는 앤트워프에서 “관주들과 목판 위에 판화로 장식되고, 각 장이 붉은 선으로 테두리 된” 아름다운 틴데일 신약 제 4 개정본을 인쇄하였다. 레이몬드는 영국으로 이 500권 사본을 밀반입하는 것을 직접 원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사랑은 투옥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1528-29년, 영국에서 박해들은 한층 심화되었다. 턴스톨은 2월부터 5월까지 “대 종교재판가” 석에 앉아서 수많은 사건들을 심문하였다. “턴스톨이 채택한 빈틈없고, 조직적인 방법에 따라 반대심문을 당하게 될 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뛰어나거나 또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추려낸 후, 효과적으로 그들을 위협함으로써,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색출했던 것으로 보인다”(Anderson, I, p.180).
틴데일이 런던에 체류하였던 몇 달 동안 그를 도와주었던 상인인 험프리 문머스가 박해받은 것도 이 심문 기간 동안이었다. 당국은 그의 소지품을 수색하였고, “그의 집에서 발견된 책 몇 권 때문에, 이교 혐의자로서” 그를 그 탑에 가두었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을 지지한 것, 주석이 달렸거나 또는 주석이 없는, 신약이 영어로 인쇄될 수 있도록 기부해준 것, 그 나라 안으로 그것을 들여온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만으로도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족하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고발당했다(D'Aubigne, V, p.386).
문머스는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몇 년 후 1537년 11월 16일에 그는 자연사하였고, 그 때 자신의 유언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는 세 명의 하나님의 말씀 설교자들을 위해 커다란 선물을 남긴 후, 자신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겼다. “나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성스런 고난의 공로를 힘입어, 나의 죄들이 순결하게 제거되고 사함 받았음을 나는 전심으로 믿는다.” 그는 자기 유산에서 로마의 미사를 위해서는 조금도 남겨두지 않았다.
아울러 1528년에 영국의 카톨릭 당국은 영어 신약성경을 인쇄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을 체포 중이던 대륙의 동료 박해자들과 연맹을 결성하였다. 크로스토퍼 엔드호벤은 자국어로 된 성경들을 인쇄하는 “이단”으로서 앤트워프에서 체포되었으나,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리챠드 하만(Richard Harman)과 그의 아내는 1528년 7월 12일에 투옥되었다. 죄명 중 하나는 그가 “한 독일 상인에게서 책들(주석이 달리지 않는 영어로 된 신약성경)을 받아서, 한 영국 운송 상인에게 그것들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7개월간 감옥에 감금되어있었고, 그들의 사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