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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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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활과 화살 스크랩 (20) 활. 궁시(弓矢) /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알로하 추천 0 조회 79 15.12.10 09: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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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활쏘기 그림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20) 활

 

한민족 최고의 장기, 궁시(弓矢)

 

우리 나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의 보유와 끊임없는 훈련이 나라를 지키는 요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전쟁에서는 병력 규모 외에도 전략과 전술, 충분한 물자의 조달, 훈련된 병사와 장수의 통솔력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 개개인에게 지급되어야 할 무기였다.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없는 전쟁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 나라는 무기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우수한 무기의 보유와 개발은 개인의 생명뿐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무기가 전황을 결정했던 사례는 역대 전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무기의 성능은 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사신들이 올 경우 그들이 구경하고자 했던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조선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관람하는 관사(觀?)요, 둘째는 형형색색의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인 관화(觀?), 셋째는 금수강산의 대명사인 금강산 관광이었다.

이 세 가지는 천하제일의 명기이자, 조선의 자랑이었다. 조선은 이들 관람을 국가 안보와 관련하여 엄격히 제한했기에 한 가지 구경만으로도 외국 사신들은 최고급 대우로 여겼다. 그 중에서도 관사와 관화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무기이자 호국병기였다. 이 군사무기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도 중시하였지만, 조선의 기술력은 그
들에 비해 분명히 한 차원 높은 위치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좋은 활을 만들었으며, 이를 사용한 명궁의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오늘날에도 비록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양궁에서 보여주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장기라 할 수 있는 활에 대해 몇번에 걸쳐 살펴보도록 한다.

 

각궁 힘의 비결은 무소뿔과 소 힘줄

 

활은 대나 나무를 반달모양으로 휘어서 두 끝에다 시위를 걸고 화살을 활 위에 걸어 당겼다 놓으면 줄의 탄력을 받아 화살이 튀어 나가는 원거리 무기 중의 대표적인 무기다. 전투무기이면서 사냥도구였던 활은 선사시대부터 화약병기가 출현한 이후까지도 사용해 온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장기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별칭이 활과 관련된 단어에서 나왔을 만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과 인연이 깊다. 고대 한민족의 별칭인 동이족의 이(夷)는 큰 활을 의미하는 대(大)자와 궁(弓)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다.

 

우리 나라 활의 전통은 고조선시대부터다. 중국 사서에 고조선에서 사용한 활을 단궁(檀弓)이라고 기록한 것이 있다. 박달나무로 만든 활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단군조선에서 만들고 사용한 활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궁의 실체는 합성궁인 각궁(角弓)인지, 아니면 박달나무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삼국시대의 활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활 쏘는 무사의 모습이라든가 기마 수렵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고구려의 맥궁(貊弓)은 중국 역사책인‘삼국지위지동이전’에“고구려에서 맥궁이라 불리는 좋은 활이 산출된다”고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의 활은 긴 활인 장궁과 짧은 활인 단궁으로 구별된다. 단궁은 말 위에서 쏘기에 적합한 기마용의 활로 길이가 1m를 넘지 않는다. 몸체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활이 굽는 부분에 짐승의 뼈를 얇게 다듬어서 덧붙여 탄력성을 높였다. 그래서 합성궁 혹은 각궁이라 부른다. 이런 각궁의 모양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의 수렵도에
그려진 활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뼈를 덧댄 부분에 끈을 돌린 마디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활은 만궁(灣弓) 중에서도 예맥 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과 만궁으로 구분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본래 굽은 활 채를 그 반대쪽으로 강하게 밀어 굽혀서 시위를 건 것으로서 시위를 벗기면 활 채는 시위를 걸었을 때의 굽은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굽어진다.

이 만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소뿔, 참나무, 소 힘줄, 실 등의 여러 재료를 복합해서 만든 각궁이었다. 독특한 기술로 제작한 각궁은 그 탄력성이 외국의 활에 비해 탁월하였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무소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듯 무소뿔을 구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활의 기본 재료로 사용한 것은 무소뿔을 활 채의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
겼을 때, 당시의 다른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소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 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무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궁은 활 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 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 준다. 이렇듯 각궁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그럼
에도 이들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한데다가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병종과 무기체계를 알 수 있는 안악3호분 행렬도. 우측 중앙부분에 수레를 호위하는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궁수가 활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있다.

 

수성전 중심의 전투방식이 활 발달 유도

 

이렇게 우리 나라의 활이 우수한 이유는 우선 사계절이 뚜렷하여 탄력성 있는 활대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널리 산재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서 기마전과 수성전이 널리 유행한 데 있다. 삼국시대의 전투방식은 보병과 기병이 합동전술을 펼치는 보기전이 기본이다. 물
론 기본적인 전투는 보병이 전담하였으나, 승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결국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기병의 몫이었다. 이런 까닭에 말을 타면서 전투를 치르는 기사가 중시되었고, 그에 부응하여 기사용의 활, 즉 단궁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한편, 삼국의 전투는 산성을 공취하고, 이를 방어하는 수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성전에서는 단병접전보다는 원거리 공격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원거리 공격에 적합한 병기는 장궁이었고, 이는 다시 활쏘기[弓術]과 활의 발달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게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고구려의 활은 맥궁(貊弓), 호궁(好弓), 각궁(角弓) 등으로 불리며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제 역시 고구려 활에 맞먹을 정도의 활을 보유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근초고왕이 각궁의 화살을 일본 사신에게 선물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당나라가 탐내던 신라의 천균노(千鈞弩) 역시 우수한 활이 있었기에 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삼국시대에는 관리의 등용 수단으로 활쏘기가 널리 활용되었는데, 신라는 778년(원성왕 4)에 유학을 중심으로 한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를 등용하기 이전에는 말 타고 활쏘는 기사를 가장 중요한 인재등용의 척도로 삼았다. 또 고구려의 경당에서도 기사를 가르쳤으며, 이후의 무인 선발시험에서도 궁술을 기본적인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한편, ‘삼국사기’를 보면 군왕의 기질로 기사를 부각하고 있는데, 이 역시 삼국시대에 기사를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시하였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바보 온달이 3월 3일 고구려 평원왕이 연 사냥행사에서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는 등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등용되었다는 이야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사를 중시하는 데는 활쏘기와 말타기가 전투능력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덕흥리 고분벽화의 마사희 장면은 기사를 통한 인재등용을 잘 보여준다. 이 마사희에서는 말을 탄 4명의 무인과 평복 차림의 인물 3명이 등장하고 있고 표적은 5개다. 그림의 오른 쪽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 외에도 마장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에‘사희주기인(사희를 기록하는 것을 주재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말 탄 무인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 마사희는 단순한 활쏘기가 아니라 기사술을 평가기준으로 삼아 무관을 선발하던 장면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용총에 그려진 수렵도 장면. 활의 형태는 만궁이면서 단궁이며, 화살은 촉이 굵고 앞부분이 둥글게 묘사되어 있어 명적임을 알 수 있다.

 

덕흥리고분에 그려진 마사희 장면

 

삼국시대 최강 고구려군의 기본무기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른데 기병용은 보통 80cm, 보병용은 120~127cm 정도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꿰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의 활은 많은 문헌 기록과 벽화에도 불구하고 실물 유물이 매우 희귀한 편이다. 활이 나무와 뼈, 힘줄 등 쉽게 부패되는 유기 물질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다만 1933년 평양에서 발굴된 벽돌무덤 안에서 발견된 골제의 활에서 당시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이 무덤은 353년에 축조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발견된 활은 무려 1600여 년 전의 고구려 활인 것이다. 활은 세월이 흐른 만큼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뼛조각 형태로 발견됐다. 조사 결과 뼛조각은 소의 갈비뼈로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또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이런 각궁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장면이 수십 곳에 그려져 있는데, 앞이 편편한 도끼날 촉을 끼운 화살로도 호랑이의 두개골을 관통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동명왕릉 부근 12호분에서 수습된 척추뼈에는 화살촉이 그대로 관통한 채로 남아 있어 고구려 활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의 활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한데는 화살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 화살은 소모품으로, 대량으로 발사할 경우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화살의 궤도를 정확하게 유지하면서도 파괴력을 높이도록 화살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길이와 무게의 화살을 제
작했다.

 

 

만주의 집안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화살촉으로 청동에 도금을 했다.

 

궁시장 유영기 씨가 복원한 고구려 화살로 북한 장성리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을 토대로 복원했다.

 

삼국시대의 명적(전쟁기념관 소장)

 

평양의 고산동 7호 무덤의 화살촉은 도끼날식(끌날식)으로 불리는데 밑이 좁고 끝으로 가면서 점차로 벌어지고 그 끝의 날이 직선 형태다. 도끼날식 화살촉의 두께는 끝이 예리하고 뿌리 부분의 무게는 12g, 촉의 평면의 면적은 19㎠인데 이런 도끼날식 화살촉은 고구려 초기무덤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 화살의 장점은 평면이 거의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날아가므로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화살 뒤쪽에는 큰 날개가 달려 있으므로 이 화살은 앞뒤에 각각 날개를 갖고 있는 비행체라고 볼 수 있다. 이는현대비행기에서 앞뒤에 날개를 갖고 있는 이른바 오리형 비행체와 유사한데 이런 구조는 앞뒤 날개에 각각 양력이 생기면서 원거리 비행이 가능하다.

 

물론 고구려가 도끼날식 활촉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도끼날식은 상처를 크게 낼 수는 있지만 송곳처럼 끝이 뾰족한 활촉에 비해 상처를 깊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명중률에서도 끝이 뾰족한 활촉보다 못하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가야의 화살촉 역시 끝이 넓적하거나 둘 혹은 세 가닥으로 갈라진 화살촉을 사용했다. 이 화살촉은 화살이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현대의 총열에 강선을 넣어 총알이 회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적들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때는 도끼날식 활촉을 사용하고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좁은 활촉을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화살 뒤쪽에 큰 날개를 다는 것은, 화살이 구조상 날아가면서 자연적으로 회전하므로 이것을 더욱 빠르게 회전시키기 위해 깃을 사용하는 것이다.

 

 

궁시장 유영기 씨가 복원한 백제 화살

 

궁시장 유영기 씨가 복원한 신라 화살

 

 

전투개시 신호 ‘명적’, 유럽에선‘악마의 화살’로 불려

 

고구려의 화살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명적(鳴鏑)이다. 화살촉 나래 아래에 뼈로 만든 구슬 모양에 소리 내는 작은 구멍을 뚫은 울림통이 붙어 있어 날아갈 때 울려 소리가 나는데, 수렵이나 전투시 무리를 흩어지게 하거나 모으는데 사용하는 일종의 신호 화살이다.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를 비롯하여 약수리와 덕흥리 고분벽화에서도 보인다. 고구려에서 동물을 사냥할 때 명적을 사용한 것은 소리가 크게 나므로 동물들을 사냥할 때 소리를 통해서 동물을 한 방향으로 몰아 잡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명적은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 수단으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효시’ 라고도 한다. 만약에 적들이 전투 중 이 명적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두려움에 휩싸여 전의가 꺾이고 말 것이다. 오늘날 어떤 일의 시작을 일컫는 말로 흔히‘효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현재 경산남도 양산 부부총과 일본의 정창원에 유물이 전해오고 있으며, 시베리아에서도 같은 종류의 화살이 발견되고 있다. 명적은 몽골군의 서방원정으로 인해 유럽에 전해졌는데, 당시 유럽인들은 이 때 처음으로 명적을 접했기 때문에 명적의 날카로운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이를‘악마의 화살'이라 불렀다고 한다.

 

약수리고분에 그려진 수렵도 장면

 

한편 그 당시의 화살촉은 대부분 철촉으로 철을 두드려서 형체를 만드는 단조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촉머리가 매우 강인하다. 일반적으로 수차례 반복 사용하는 연습용의 화살촉은 강철로 만드는데 비해 소모적인 전투용 화살촉은 그것보다는 강도가 떨어지는 철을 사용하였다.

철촉의 일반적인 형태는 독사머리 모양의 촉머리에 긴 목이 있는 슴베가 붙어 있다. 후대로 갈수록 목이 점차로 길어지면서 전체길이가 길어진다. 화살촉 길이의 증가는 활의 사거리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만큼 활의 탄력이 강해지고, 사거리도 길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통 화살촉의 길이는 4세기까지는 대략 5cm 정도, 5세기에는 10cm 정도, 6~7세기에는 15cm 정도가 일반적이다. 형태는 5세기까지는 도자형, 독사머리형, 마름모형, 도끼날형, 끌형, 삼익형, 역자형, 동검형 등 매우 다양한 편이었으나 6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초장경하각형이라고 불리는 목이 매우 길고 촉머리가 보트 모양으로 생긴 철촉으로 통일된다. 이로써 철촉 생산이 표준화, 규격화되고 있음을 알 수있다.

 

덕흥리고분에 그려진 수렵도 장면

 

백제금동향로에 조각된 기사 모습

 

‘등자’ 이용, 고급 기마술 ‘파르티안 기사법’ 가능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궁수가 안장에 앉은 채 상체만 뒤로 틀어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다. 이런 자세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하는데, 무용총과 덕흥리 벽화고분의 수렵도 등 고구려 벽화고분의 수렵도 곳곳에서 확인되고, 백제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마수렵인물상과 경주 사정리에서 발견된 수렵 문전에서도 보인다. 특히 백제금동향로의 수렵 인물상은 백제의 수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일본 정창원 소장의 은제 선조수렵문은 일본 문화에 미친 백제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 기마술로 기원전 2세기 이란의 북동부에서 로마와 대적하여 크게 위세를 떨친 파르티아에서 시작된 기술이며, 실크로드를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진 후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는데,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 기술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 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
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이 기술 덕분에 기병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등자’ 라는 획기적인 장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일이다.

 

결국 이 기사법은 말타기와 활쏘기가 결합한 복합무예로서 고도의 숙련과 기예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기마전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삼국시대의 전장에서 기사법은 중요한 전투 수행능력이었다.

 

고구려가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강력한 무기체계를 들 수 있는데, 바로 한민족의 장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또한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고, 이들 무기체계를 극대화한 개마무사를 적극 활용한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글 | 박재광 _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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