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교회에 부임하면서 계속 우리 교회의 표어를 "나누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참 좋은 표어였습니다. 그 표어를 정한 뒤 우리 교회는 나누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힘써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나누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하지 않던 많은 부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웃교회를 돕는일,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 복지원 선교, 경찰서 선교등 많은 곳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장학금도 주었습니다. 노인들에게 식사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모습 속에서 나누려는 의식은 많이 흐려진 것 같습니다. 해 오던 것이니까 조금 하는 정도지 나누는 마음을 가지고 하려는 의식은 없어 보입니다. "나도 힘든데 어떻게 나보다 나아 보이는 남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빠져 하던 일마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그런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위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위치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다 보니 여러 이유를 대면서 나누어야 할 일을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복받아 잘 먹고 잘 살자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목표만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런 모습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믿은지 10년이 넘으신 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 속에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를 헛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1.영광스러운 일(31-32)
여러분은 어떤때 영광스럽다고 말하거나 생각하십니까? 보통 사람들이 아주 귀하고 높은 분을 만날 때 "만나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초라한 자신이 높은 분을 만나서 자신도 좀 높아 진 것 같아서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영광스럽다는 말을 할 때는 자신이 높아질 때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위치나 신분이 귀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높아질 때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상황적으로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예수님은 지금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하고 있는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누가 예수님을 높였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칭송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는 바로 유다가 나간 후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나머지 예수님의 열한제자와 예수님만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나갔다고 하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유다로 하여금 자신을 배신하게 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주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른 척하고는 나갔습니다. 그가 나간 것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유대의 관원들에게 넘겨 주기 위한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이제 주님의 상황이 확정적으로 불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가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유다가 나감으로해서 급속도로 주님의 십자가의 형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은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도 주님 때문에 영광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32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분명 십자가를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이땅에 오시기 위해서 스스로 벗으신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실 것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로 가는 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고통,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은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 속에서 왕자가 거지가 되어서 살다가 많은 고초를 당하다가 다시 왕자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하늘로, 아버지의 나라 영광으로 돌아가시는 것은 바로 주님 자신에게 영광이었고,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보내신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사실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듯 사태를 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어 군병들에게 주님께서 잡힘, 가야바의 뜰에서와 빌라도와 헤롯에게 당하는 수모와 골고다 언덕길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든 것이 영광의 길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 쓰인 동사는 이미 일어난 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로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계획이 미래에 일어날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꼭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나타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광을 받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본질이 들어났다는 말입니다. 계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계란이 계란으로만 있어가지고는 본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미닭이 21동안 품고 있은 다음에 계란 안에 있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와야 본질을 찾는 것입니다.
계란이 계란 그대로 있으면 그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계란 그대로 있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날 수 없습니다. 계란이 어미닭의 품속에 21동안 죽은 듯이 지내야 하고 끝에는 자기를 보호하고 있던 껍질을 깨고 나올 때 그는 병아리가 되어 걸을 수 있고 삐악삐악 거릴 수 있고 날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은 고통입니다. 수모요 치욕이요 아픔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남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그럴뿐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대표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에게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 주는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는 사건은 대속과 새언약의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 모든 일을 행하도록 하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본질이 드러날려면 죽어야 합니다. 자궁에서 난 나의 이 모양 가지고는 관습으로 되어진 이 모습가지고는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죽게되면 생각이 죽고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죽으면 우주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보낸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서로 사랑하라
그런 말씀을 하신 다음 주님은 "소자들아"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라고 말씀하시면서 한량없는 인자하심으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어머니가 주님을 잃어 버렸다가 성전에서 찾으시고 주님을 부르는 데 사용했던 호칭이었습니다.
위험에 빠질뻔한 아이를 부르는, 작은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필요를 가지고 부르는 호칭입니다. 제자들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배신을 앞에 두고 마음이 상하셨지만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이지만 분명 영광을 받고 영광의 자리로 옮겨 갈 것을 확신했기에 제자들을 둘러 보시면 말씀하십니다. 33절을 읽겠습니다. 지금 주님은 잠시 동안은 함께 있겠지만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으려니와 나의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8: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했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제자들이 올 수 없는 곳에 자신이 곧 가시리라는 사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혼자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는 주님과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곧 예수님이 십자가가에서 죽으신다고 해서 내가 자동적으로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은(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신자 유다는 떠나갔지만 이 작은 11명의 제자들은 아직 주님과 함께 있었고 주님은 이들에게 모든 계명을 하나로 요약한 이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이 될 사람입니다. 제자는 선생을 따라 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선생이신 예수를 따라 가고자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라가는 길을 가장 요약해서 명확하게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새 계명이 아닙니다. 모세 시대의 율법에도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고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 자신의 계명을 새로운 것이라고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이 '새'라는 단어는 활기를 잃은 사물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신선한 무엇인가를 뜻합니다. 주님게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이 지시하는 것은 "---를 보고"라는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을 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같은 모습이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연속되는 일련의 과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정리하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그 영감에 있어서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을 보고 너희에게 대한 나의 사랑에 영감을 받아 서로 사랑하여라' 그렇게 한 결과 주님과 동일한 본질의 특성을 가진 우리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셔서 인류를 향한 사랑을 보여 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보고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까? 많은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신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위엄을 벗어 던지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즉 종의 형상을 입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보여 주려하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심, 자기를 버리심, 자기를 부인하심의 상징입니다. 그러한 것을 보여주시고는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그 일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목적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주목을 끄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으로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외워서 하고 있는 신앙고백으로 되는 것입니까? 교인이라고 하는 딱지로서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부르고 봉사하는 것으로서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만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이 가신 길 영광의 길 곧 새로운 언약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터툴리안 교부는 초대교회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는 세상이 얼마나 그들을, 혹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못하는가를 재는 척도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제자됨의 마지막 표시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제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이 없다면 주님의 뒤를 따라 영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전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 수를 한명 늘어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영생의 길을 가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 교회에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교인들 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의 사람들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서로 사랑해야 하고 형제들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전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단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표준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보여주신 모습대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셔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모습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낮은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듯이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사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가 되어서 예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고 이렇게 행함으로 영광을 받게 되고 하나님도 나 때문에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의 표어가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나누는 것은 그 다음이지 않겠습니까? 컴퓨터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드웨어가 있어야 소프트웨어가 돌아갑니다.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가 있어도 하드웨어가 없다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서로 사랑하라"는 우리 교회의 하드웨어가 되어야 합니다.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본이 서지 않으면 이 기초가 서지 않으면 그 어떤 것을 세운다 하여도 무너지고 어떤 노력을 하여도 성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