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언론매체 사전(1815-1945)>: 자료의 바다를 떠다니는 배를 엮다.
0. 단언컨대!
2013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유행어 중 하나는 ‘단언컨대’일 것이다. “단언컨대!”, 나는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한다. 나의 ‘책읽기’는 읽는다기보다는 ‘훑어보기’에 가깝다. 천성이 꼼꼼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해 봤지만, 그것도 타당한 자기 합리화는 아닌 것 같다. 내 분야 일을 할 때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꼼꼼함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검토하는 텍스트 데이터의 생김새와 분석하고자 하는 방법론을 검토해 보고 현재 방법론을 적용했을 때 앞으로의 연구에서 예상되는 부작용이 미리 예측되고 그러한 예측이 실제 현실이 되는 것을 수시로 경험해 보기 때문이다. 또 수천 만건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데이터에 내재된 오류나 데이터 분석에 적용한 소프트웨어 분석 시스템의 오류를 실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보지도 않고 찾아내어 보고서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천성이 꼼꼼하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책읽기’에서만 ‘꼼꼼함’이 부족한 것 같다. ‘꼼꼼한’ 책읽기를 하지 못하는 내가, 편찬 과정에 엄청난 ‘꼼꼼함’이 요구되는 사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것도 무려 1,63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사전에 대해서 말이다.
“단언컨대!”, 내 입으로는 이 사전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이 엄청난 작업 뒤에 숨어 있는 노고와 그물처럼 얽혀 버리는 편찬 작업의 어려움과 가치, 그리고 사전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잠재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서 풀어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책의 내용을 엮어서 훑어보기로 했다. 여러 자료의 ‘입’을 빌려서, 한 권의 책(사전)에 대한 ‘성긴 그물망 같은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기로 했다.
1. ‘사전’과 ‘사전’
우리가 ‘사전’이라고 부르는 명칭은 두 가지를 지시한다. 언어학에서는 이처럼 ‘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 어휘를 ‘동음이의어’라고 부른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사전’을 다음 두 가지로 정의한다.
사전22(辭典) 「명사」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최근에는 콤팩트디스크 따위와 같이 종이가 아닌 저장 매체에 내용을 담아서 만들기도 한다. (비) 말광, 사림05(辭林), 사서14(辭書), 어전07(語典).
사전12(事典) 「명사」
여러 가지 사항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고 그 각각에 해설을 붙인 책. 최근에는 콤팩트디스크 따위와 같이 종이가 아닌 저장 매체에 내용을 담아서 만들기도 한다.
<동아시아 언론매체 사전(1815-1945)>은 ‘사전22’가 아닌 ‘사전12’이다. 이 사전(이하 ‘동/언/사’)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815년부터 1945년까지 동아시아 한/중/일 3국에서 발행된 언론매체를 중심으로 1,822여 종에 대한 해제와 서지정보를 달아놓았다. ‘동/언/사’의 편찬 취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언론매체’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사소통을 매개하고 여론과 정체성 형성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이후 “각국의 국민국가 건설과 근대화 과정 속에서 각이한 민족적, 국민적, 계급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언론매체들이 어떤 주제와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탐구하려는 여러 노력 중 한 국면을 이루는 주춧돌이 된다.
설명을 위해 사전에 올리는 항목을 표제항(entry)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표제항으로 등록하는 행위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표제항(표제어)으로 등재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동/언/사’ 표제항을 훑어보다가 개인적 관심사에 의해서 몇몇 표제항 항목으로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그 중 하나가, ‘시베리아와 인접 국가들에 관한 역사-통계정보 자료집(Сборник историко-статистических сведений Сибири и сопредельных ей странах)’이라는 매체이다.
이 매체는 1875년 1월 1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된 매체로, 시베리아와 인근 지역에 관한 역사, 통계 자료집이다. 이 매체의 출간 목적을 ‘동/언/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시 미개척지이며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들리는 풍문조차도 왜곡되어 있던 시베리아 지역을 사실적으로 알리고자 창간한 잡지이다.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은 1858년 아이훈조약과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아무르ㆍ우수리 지역이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동/언/사』, 786쪽)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나의 개인적 관심은 몇 가지 이유에서 출발한다. 우선 그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한인들이 언제, 어떤 연유로 그곳으로 이주해 가고 정착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물론, 이 사항에 대해서는 역사ㆍ사회ㆍ방언 연구 분야에서 많은 조사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또한, 그 당시 타자의 눈에 비친 한인(조선인)들은 어떤 모습의 이미지로 투영되어 있을까 하는 점이다. ‘동/언/사’에서는 이 매체의 창간호에 실린 두 편의 조선 관련 논문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한 편이 바긴(В. Вагин)의 「아무르지역의 조선인들(Корейцы на Амуре)」이라는 논문이며, 이 논문에서는 그 당시 우수리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근면하여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에 매우유익한 존재이며, 겸손하고 ‘충성스러움’까지 갖고 있어 그들을 관대하게 포용한다면 극동지역에 러시아에 우호적인 집단을 건설할 수 있을 것
(『동/언/사』, 787쪽)
이런 유형의 정보는 「데르수 우잘라」에서 묘사됐던 조선인의 모습을 접했을 때만큼이나 나의 호기심을 충분히 채워주며, 앎의 영역을 확대해 주고 있다. (*블라디미르 아르셰니예프 지음, 김욱 옮김, 2005, 「데르수 우잘라」, 갈라파고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언/사’를 뒤적이면서 ‘변태’ 관련 항목이 있는지를 찾아본다. 「변태성욕(變態性慾)」과 「변태심리(變態心理)」라는 두 매체가 발견된다. 「변태심리」는 1917년, 그리고 「변태성욕」은 「변태심리」를 계승하여 1922년에 일본정신의학회에서 발행한 잡지라는 설명이 읽는다. ‘가십거리를 발견한 것같은 마음’으로 어떤 내용의 잡지일까를 확인하기 위해 표제항의 풀이를 읽다가, 나의 기대에 반하는 설명을 읽는다. 「변태심리」의 설립취지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설립취의」에서 나카무라는 당시의 일본 의학계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고, 오직 생리적(生理的) 요법만을 연구하기 때문에 정신적 요법을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나카무라는 ‘정신의학(精神醫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용어는 메이지(明治) 이래 일본 의학계가 사용하고 있던 ‘정신병학(精神病學)’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즉 정신병학이 정신병을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하였다면, 정신의학은 육체나 물질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인간 일반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했다.
(『동/언/사』 597-598쪽)
풀이에 의하면, 이 잡지는 “일본정신의학회의 기관지”이면서 “전문학계로부터 무시를 당했으며, 이런 측면이 오히려 잡지의 의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17년 무렵부터, 일본에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 불가능한 정신, 심리현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이를 ‘정신병학’의 관점이 아닌 ‘정신의학’의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정신병’을 진단하고 치료, 감호하는 관점의 ‘정신병학’이 아닌,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관심을 소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시초였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사전 항목들을 훑어보면서, ‘언론매체’를 통해서 근대화 과정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변화된 움직임,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조선인의 모습이 기록되어온 과정, 조선이라는 지리적 영역과 그 인근에서 퍼져나가는 사회 운동의 모습 등이 세력처럼 튀어나오기도 하고, 아주 미약하지만 의미 있는, 즉 다른 여타 매체의 주제와는 다른 정신의학에 대한 움직임도 나타나는 등 100여 년의 세월을 바라볼 수 있는 안경같은 책이라고 ‘동/언/사’를 조심스럽게 규정해 본다.
2. 반영: 명칭은 개념을, 개념은 인식을.
2011년 한국에서는 ‘정신분열병(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언어를 통해서 규정했다. <대한정신분열병학회>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2007년 무렵부터 ‘정신분열병’을 대체할 명칭을 고심하다가 이를 ‘조현병’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기로 하고 2011년 공식적으로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으로 개정하였다. 이는 국회 입법 활동을 통해서 법적인 개정도 함께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병명에 대한 공식적 명칭 변경은 의료보험 수가코드의 변경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 이루어지는 교육에서도 명칭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한정신분열병학회>는 <대한조현병학회>로 명칭 변경을 하였다. 2011년부터는 학술지의 제호도 “대한정신분열병학회지”에서 “대한조현병학회지”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미세하고 작은 것이다. 한 해에 이루어지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변화가 누적되어 100여 년 뒤에 우리 후손들 중에는 ‘조현병’이라는 증상을 과거에 어떻게 인식했을지, 나처럼 궁금해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한국어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조현병’이라는 명칭이 유지되고 있다고 전제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조현병(調絃病)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중앙일보 2011년 6월 17일 [분수대]에서는 ‘조현지법(調絃之法)’에 그 기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 정신분열병 병명이 조만간 사라질 모양이다. ‘조현병’으로 바꾸는 내용의 약사법 개정안이 이달 중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다고 한다. 조현(調絃)은 ‘현악기의 줄을 조율한다’는 뜻이다. 휴정 서산대사가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인용해 쓴 ‘조현지법(調絃之法)’에 보인다. 부처가 거문고 줄 고르는 법에 비유해 “정진도 너무 조급히 하면 들떠서 병나기 쉽고, 너무 느리면 게을러지게 된다”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현악기의 줄이 적당히 긴장을 유지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듯 인간의 정신도 적절하게 조율돼야 제 기능이 유지되는 법이다. 이런 뜻이 담긴 조현병이란 병명이 참으로 절묘하다. 50만 정신분열병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의 편견을 없애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중앙일보 [분수대], 2011. 6. 17.)
‘정신분열병’이라는 명칭은 질병의 증상에 중심을 둔 규정이다. 이러한 명칭을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해당 환자들의 정신 상태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대상이며, 그럼으로써 환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편견을 부추긴다면 ‘조현병’은 인간의 정신은 조율이 가능하다는 긍정적 의미를 연상시킨다. ‘조현’이라는 명칭은 ‘고전문학/한문학’을 전공하신, 지금은 은퇴하신 어느 원로 국문학자께서 제시하였다고 사석에서 들었다.
100여 년 뒤에 나올 한국 정기출간물 목록 해제의 어느 한 귀퉁이에는 “대한조현병학회지”가 2011년 중반까지는 “대한정신분열병학회지”였다는 사실이 작게나마 기록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명칭 변경이라는 작은 사건을 통해서 환자의 증상을 대상으로 지칭하였던 ‘정신분열병’이라는 명칭을 개정함으로써, 그러한 명칭이 가지고 있던 사회의 부정적 인식과 편견에 변화를 유발했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기를 또한 바란다.
이제 1815년-1945년에 걸쳐 출간된 간행물들의 명칭에 나타나 있던 그 당시 근대이행기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다루고자 했던 개념과 그러한 개념이 반영하고자 했던 인식이 무엇이었는가를 탐색해 볼까 한다. 그 전에, ‘사전12’이든 ‘사전22’이든,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먼저 대략 살펴보자.
3. 배를 엮다.
2013년 4월, 일본 소설 한 권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소설의 제목은, ‘은행나무’에서 출판된 『배를 엮다舟を編む』(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이다. 소설은 사전을 편찬하는 사전편찬자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사전’은 ‘사전22’이다. 그렇지만, 소설의 내용은 ‘사전12’의 편찬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소설의 제목은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을 ‘배를 엮(편찬하)’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라키는 지금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새 사전 이름을 《대도해》라고 정했는지 아는가?”
... (중략) ...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마쓰모토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배를 엮다』, 35-36쪽)
‘사전22’의 편찬자가 가지고 있는 사명감은 바로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비유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배가 문제가 있다면, 승선원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바다를 건너갈 수도 있고 말의 바다에서 배가 가라앉을 수도 있다.
‘사전22’의 편찬자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드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면, ‘사전12’의 편찬자는 ‘사건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드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사전22’의 편찬자는 ‘말’을 이루는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한 강박 관념은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의 기원과 개념의 변화까지도 추적해야 한다는 의식의 실천과 준비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거워 보이는 검은 가방을 안고 마쓰모토 선생이 물었다. 가방에는 헌책이 잔뜩 들어 있다. 겐부쇼보 오는 길에 선생은 반드시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지나오며 신구의 다양한 소설 초판본을 자비로 구입한다. 문학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전 용례로 쓸 만한 문장을 찾기 위해서도. 사전에서는 ‘어떤 말이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게 언제인가’ 하는 걸 중시한다. 그 버릇이 붙어서 선생은 소설도 초판본을 모으고 있다.
(『배를 엮다』, 60-61쪽)
사전의 편찬 과정은 표제항(definiendum)의 선정, 뜻풀이(definiens)의 구조 확정, 뜻풀이 문법의 규정, 관련어의 기술 방법의 확정 과정을 거치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편찬 지침을 확정한다. ‘동/언/사’에는 1,822개의 표제항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간략한 서지정보와 해제가 풀이의 영역을 채우고 있다. 사전 편찬 과정을 몇 줄의 말로 풀어썼지만, 이 과정은 많은 토론과 지침 수정의 반복이다. 그리고,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교정과 상호 교열의 반복이다.
‘동/언/사’의 풀이는 기본적으로 1차 자료보다는 2차 자료를 참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점은, 아쉽다. 다시 말하면, ‘동/언/사’라는 배가 떠다닐 자료의 바다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배에는 작은 구멍도 존재한다. 1896년~1899년에 발행된 『독립신문』에 대한 정보가 누락된 점이다. 그럼에도, ‘배’가 엮어졌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동/언/사’라는 ‘배’가 떠나닐 바다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만들어 나가야 할 영역이다. 바다의 확장은 곧 1815년-1945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는 “디지털 인문학” 영역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4. 배를 조감하다.
내가 자주 읽는 잡지(학술지)는, ‘언어학’, ‘알타이학보’, ‘Computational Linguistics’, ‘Literary and Linguistic Computing’, ‘Quantitative Linguistics’, ‘Journal of Corpus Linguistics’, ‘이중언어학’, ‘한국어학’, ‘국어국문학’, ‘국어학’, ‘판소리연구’ 등이다. 이러한 학술지 제목에 나타난 어휘들을 보면,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어떤 분야인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사용되는 어휘들이 literary, linguistic(s), quantitative, computation(al), corpus 같은 어휘들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어/국어국문/국어 등의 어휘라는 것을 통해서 국어학/언어학/계산/코퍼스 등이 내 주요 관심사라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동/언/사’에 수록된 표제항을 통해서 이 사전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1815년-1945년까지 언론 매체를 통해서 표출하고자 했던 당대 인물들의 의식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동/언/사’ 뒷면에 있는 수록 매체 목록을 파일로 만들어서 간단한 몇 가지 분석을 수행해 보았다. ‘동/언/사’에 수록된 언론매체는 어떤 어휘들을 통해서 당대의 주요 관심사들을 표출하고자 했을까? 이제 ‘동/언/사’라는 ‘배’를, 조금 높은 곳에서 반 보쯤 떨어져, 조감해 본다.
그림 1. ‘동/언/사’ 표제항 수록 언론매체의 어휘 사용 양상
‘동/언/사’에 수록된 언론 매체의 제목에는 다양한 개념들이 표출되어 있다. 위의 <그림 1>은 이를 어휘 개념 단위로 분석한 것이다. 요새 유행하는 용어로는 이를 word cloud라고 부른다. 글자의 크기가 큰 것은 그만큼 많이 사용된 어휘(개념)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서 ‘동/언/사’를 조망해 보면, ‘조선’이라는 개념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내용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표제항의 비율에서 한국에서 발행된 매체의 유형이 많아서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다른 개념들을 보면, ‘영화, 사회, 청년, 통계, 소년, 노동, 문예, 교육, 국민, 상공, 일본, 문화, 세계’ 등의 다양한 개념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언/사’에는 다양한 유형의 언론 매체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신문’, ‘잡지’, ‘-보’와 같은 대중 매체 성격의 유형을 조감해 본 것이 <그림 2>이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 유형은 다양한 유형의 ‘-보’와 ‘신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발간 주기로는 ‘월보’, ‘일보’, ‘칠일보(주간)’, ‘주보’ 등의 유형이 많이 발간되고 있음을 ‘동/언/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대중에게 노출되는 양적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적어도 매체의 생태계가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 언론 매체 유형이 제목으로 드러난 양상
‘동/언/사’에 수록된 매체에서 매체 제목에 ‘조선(대한/한국)’이 포함된 언론매체는 어떤 유형의 정보를 전달하고자 했을까? 아래 그림은 ‘조선’ 관련 개념이 포함된 언론매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매체 유형을 조감하기 위해서 네트워크 분석을 수행하여 알아본 결과이다. 다양한 유형의 정보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다양성 중에는 ‘독립’, ‘교육’, ‘흥학’과 같은 독립 자강 운동의 개념, ‘물산’, ‘직물’, ‘광업’ 등과 같은 산업 정보 전달의 개념, ‘총독부’, ‘치형’, ‘검찰’ 등의 일제강점기 일제의 공보성 매체 유형 등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종교와 관련하여 ‘(러시아) 정교’, ‘그리스도인회’, ‘불교’ 등의 종교 매체 유형도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정교’는 러시아 지역에서 출판된 한인 잡지로 ‘정교’의 이름으로 포장된 한인 잡지이기는 하다.
이번에는 언론매체 제목에 나타난 어휘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살펴볼까 한다. 다양한 매체 중에서 ‘조선’이라는 어휘가 제목으로 사용된 매체는 어떤 어휘와 함께 나타나는지를 엮어 보았다. 이를 단어의 공기 관계(word co-occurrence)라고 부른다. 보통은 어떤 단어가 다른 단어와 함께 나타는 분포의 양적, 질적 특성에 의해서 어휘의 의미를 파악하고 단일 어휘가 아닌 함께 자주 출현하는 어휘의 패턴을 추출하는 분포주의 의미, 연어관계, MWE (Multi-Word __EXPRESSION__) 등의 연구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이다. 이를 매체 제목에 적용해서, ‘조선’과 공기하는 어휘들의 공기 관계를 조감해 본 것이 <그림 3>이다. ‘조선’이 사용된 매체는 ‘조선직물협회지’, ‘조선종교공론’, ‘조선수의축산학회보’, ‘조선수의학회보’, ‘조선공업협회회보’처럼 다양한 주제와 관련이 있다. 이를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달리 표현하면, ‘조선’이라는 어휘(개념)는 ‘직물’, ‘종교’, ‘수의’, ‘축산’, ‘공업’, ‘협회’, ‘-회보’, ‘-지’, ‘공론’ 등과 공기(co-occurring)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림 3>은 이러한 공기 관계를 네트워크 그래프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프는 G = <V, E>로 정의되고 구성된다. V는 정점, 마디(vertex 또는 node)를 나타내며 E는 연결선(edge 또는 link)을 나타낸다. 언어로 표현하면, 그래프는 정점과 정점을 연결하는 연결선으로 구성된 개체이다. <그림 3>의 그래프에서 연결선의 굵기는 결합의 강도, 즉 함께 많이 출현한 관계를 나타낸다. ‘조선’을 중심으로 ‘종교, 흥학, 치형, 총독부, 경제, 곡물, 축산, 주조’ 등 다양한 주제가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조감할 수 있다.
그림 3. 언론 매체 제목에서 ‘조선’과 공기하는 어휘들의 네트워크 관계
‘조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론 매체를 조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본’이라는 어휘/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론 매체의 제목을 조감해 보자. 언론매체 제목에서 ‘일본’의 개념과 연결된 개념 항목들을 <그림 4>를 통해서 살펴보면 ‘조선’과 함께 연결된 개념들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정당’, ‘자유’, ‘보국’, ‘입헌’, ‘연맹’ 등의 개념은 ‘조선’과 관련된 개념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다. 그리고 ‘은행’-‘통계’, ‘산업’-‘노동’, ‘산업’- ‘보국’, ‘입헌’-‘일본’, ‘자유’-‘일본’, ‘연맹’-‘일본’, ‘산업’-‘일본’ 등의 연관 개념들이 그 당시 언론매체를 통하여 일본에서 표출되고 있던 주요 개념 특성이라고 분석될 수 있다.
그림 4. 언론 매체 제목에서 ‘일본’과 공기하는 어휘들의 네트워크 관계
‘동/언/사’라는 ‘배’를 구성하고 있는 언론매체 제목만으로도 당대의 사회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간단한 조감도가 구성된다. 이 ‘배’가 항해할 ‘바다’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5. 배를 띄우다, 바다를 넓히다.
‘동/언/사’라는 배가 항해할 ‘바다’는 표제항으로 실려 있는 각 언론매체 원문이다. 그리고 그 ‘바다’는 디지털화 되어야 한다. 디지털화된 근대 동아시아 언론 매체를 ‘동/언/사’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다 보면 다양한 모양의 항해도가 만들어진다. 그 항해도는 항해 경로만 표시된 직선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네트워크가 얽혀 있는 거미줄 모양이 될 수도 있다. 각각의 항해도는,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분석하고 해석해내는 다양한 모양의 근대에 대한 이해를 표상하는 항해도가 될 것이다.
1) 경기도 여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찾다.
수년 전 1896년-1899년까지 간행된 『독립신문』을 전자텍스트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4년 간 조선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조선에 유입된 정보를 ‘훑어읽어’ 보는 연구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국어학을 하시는 원로 선생님이자 존경하는 어르신인 홍윤표 선생님의 도움으로 『독립신문』 원전을 전자텍스트로 입수하여 이를 바탕으로 활용 가능한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언론학과 근대 문화 연구를 하시는 선생님들과의 협업체계로 자료를 구성하면서 현대어로 검색 가능한 변환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역시 사소한 궁금증에서 내가 구성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여 경기도의 ‘여주’라는 지명을 검색하였다. 나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고향 마을에는 종친인 해주 최씨들이 많이 살고 계신다. 그래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니 백여 년 전에도 여주와 관련해서 혹시 내가 알 만한 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잠시 원문을 검색했더니, 1899년 11월 1일 「잡보」에 여주에서 있었던 사건이 발견되었다.
1899년 11월 1일 「잡보」 (출처: KINDS 데이터베이스)
관련 기사만 추려서 텍스트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어 표기를 함께 제시하였다.)
(『독립신문』, 1899년 11월 1일, 「잡보」)
● 사주전 기계) 여주군 사는 최순오가 서울 사동 사는 이경돈의 심부름으로 진고개 사는 일본 야장 에게 주전 기계를 사오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경무청으로 갔다더라
(『독립신문』, 1899년 11월 1일, 「잡보」, 현대어 표기)
여주군 사는 최순오라는 분이 사주전 기계를 사오는 심부름을 했다가 경무청에 잡혀갔다는 내용이다. 사주전(私鑄錢)은 지금으로 치면 위조 지폐 제조를 말한다. 정확히는 쇠붙이를 녹여서 위조 동전을 제조하는 것을 말한다. ‘야장(冶匠)’은 대장장이를 가리키는 한자어다. ‘진고개(이현, 泥峴)’는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 남산 자락에 있던 언덕길을 가리킨다. 여주군에 사는 최순오씨가 서울 사람의 심부름으로 지금의 명동/충무로 인근 지역의 일본인 대장간에서 위조 동전 제조기를 사오는 심부름을 하다가 붙잡혔다는, 요새 표현으로는 ‘위조지폐(동전) 제조기 운반책 검거 사건’에 해당하는 기사이다.
‘여주군’이 지금의 경기도 여주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최순오라는 분은 아마 우리 집안의 누군가일 가능성이 크다. 『독립신문』은 그 면수만 4,000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를 찾으려면 형광펜을 들고 일일이 밑줄을 쳐 가면서 영인본을 읽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원로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한 여름 작업을 해서 구성한 현대어 표기 정규화『독립신문』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잠시 짬을 내어, 나는 1899년이라는 시간에 있었던 사건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 파트너였던 선생님은 그 당시 서울 ‘정동’이라는 시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화제가 되고 있었고 ‘정동’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언론에 비친 양상을 쉽게 찾아내시게 되었다.
2) 1815-1945년 동아시아 시공간의 지식 항해도
문자라는 개체로 표상된 개념과 사건의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 디지털화된 전자텍스트의 구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항해를 위해 출항 기점이 있어야 한다. 항해도의 기준점은 ‘동/언/사’라는 배에서 뽑아낸다면, 각 표제어항목에는 도서관 분류표목과 같은 고유 개체 식별 번호가 부여되고, 이러한 식별번호는 디지털 라이브러리의 시작점이 되며, 언론매체 원문은 그러한 분류표목의 고유번호에 의해서 분류되고 그물망 같은 다양한 종류의 유의한 정보가 분석이 된다.
가장 먼저 그려보고 싶은 항해도는, 동아시아 근대 공간에 새로 유입되는 개념어들의 출현 양상과 정의이다. 우리는 새로운 개념어들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하였는지가 궁금증의 대상이다. 각 개념어들은 어떤 개념들과 공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의미를 분포적으로 정의하는가 하는 점이 첫 번째 그려보고 싶은 항해도이다. 『독립신문』이라는 시공간을 예를 들면, 당대의 인물들은 ‘문명’이라는 개념을 ‘개화’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음이 해당 어휘 개념의 분포 양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개화’라는 개념은 ‘부국강병’으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문명’은 ‘물질-문명’, ‘기계-문명’의 도입으로 규정하고 당대에 ‘문명’은 도달해야 할 ‘상태’로 인식했다. 이러한 특성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형용사로 표출되어서 ‘문명한 나라’라는 어휘 사용 양상이 보편적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3) 지식의 바다로...
배를 바다로 몰고 나간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표류’라고 부른다. 유명한 ‘아들’ Seneca의 ‘아버지’ Seneca의 표현을 사용해보자.
Ignoranti quem portum petat nullus suus ventus est.
(어떤 항구로 가야할지 모르는 자는, 어떤 바람이 순풍인지도 모른다)
‘동/언/사’는 종이로 출판된 사전이다. 그렇지만,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근대 이행기의 언론 매체 디지털 라이브러리라는 플랫폼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광범위한 내용을 집적해 놓았다. Seneca의 표현대로, ‘어디로 항해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나아가야 할 항구는 하나가 아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동/언/사’에 소개된 언론매체의 원문부터 확보해 가면서 하나씩 장기적인 안목으로 확장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장기적으로 진행해야 할 일은 분명하지만, 그 시작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동/언/사’라는 사전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았을 때의 난감함은 이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사전에 대한 서평이라니!
사전은 참조하는 것이지 평론하는 대상이라고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사전’의 개념과 편찬과정의 어려움을 소개하고, ‘동/언/사’의 표제항목들이 보여주고 있는 내용을 단선적 나열이 아닌, 분석된 자료로 제시하고 함께 조망하는 것으로 ‘서평’을 갈음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언/사’가 디지털 라이브러리로 확장되는 플랫폼의 시발점이 되었을 때 구성하게 될 항해도를 천천히, 함께 구상해 보기를 촉구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 최운호,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