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바랜사진]
경북 왜관 성마오로기숙사 전경사진
▲ 경북 왜관 성마오로기숙사 전경사진
중학생으로 입학할 당시인 1962년3월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당시인 1972년2월까지
거의 6년간 이곳 기숙사에서 또래들(중1~고3) 70여 명과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며 꿈을 키워왔었다.
어머니 품속과 같았던 성마오로기숙사.
***
[성마오로기숙사 회고록-제1부]
만세에 왕 우러러
- 글쓴이 : 은유시인 김영찬(제15기) -
‘만세에 왕 우러러’를 연재하며……
세월은 여린 새싹을 고목으로 키우고, 제 수명이 다하면 한 줌의 흙으로 바스러뜨린다. 또한 어린 아이도 자라 어른이 되고 원치 않아도 어느덧 기력이 쇠한 노인이 되며, 그 역시 제 수명이 다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한번 흘려보내면 그 어떤 초월적 권능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때문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인생역정을 각기 어떻게 살아왔든 세월의 뒤안길에 서게 되면 무성한 회한(悔恨)만이 남을 뿐이다.
이렇듯 허망한 것이 인생일진대 우리가 과거의 한 순간을 그리워하고 기리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연연함이 아니요, 남은 삶을 더욱 값지게 하는 일일 것이다.
나, 은유시인도 내 인생의 초록빛시절인 청소년기, 중ㆍ고등학교 과정의 6년이란 긴 세월(1966년3월부터 1972년2월까지)을 왜관 ‘성마오로기숙사’에서 보냈다.
성마오로기숙사는 6ㆍ25전(戰) 후 가톨릭종교단체 성베네딕트수도원에서 성직자를 양성하기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일종의 청소년숙박시설이었다. 기숙사생들은 전국 각지의 가톨릭교회 주임신부 등으로부터 추천받아 입사하였으며, 단체신앙생활과 교육을 통해 상당수의 졸업생들이 설립취지에 걸맞게 성소(聖召)의 은혜를 입어왔다.
그러나 우리 동문들 모두에게 있어 ‘젊은 날의 인연’을 간직한 성마오로기숙사는 아쉽게도 1984년2월, 제27기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의 운명을 맞아 더 이상 후배들을 양성치 못했으며, 오호 통제라…… 젊은 날의 인연마저 긴 세월의 흐름 속에 퇴색된 채 어언 20여 성상이 흘렀다.
성마오로기숙사를 거쳐 간 3백여 동문들, 40대 중반을 맞은 막내에서 70대 고령을 맞은 대선배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종교계에서 학계에서 법조계에서 국가기관에서 산업일선에서 각기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을 것이고,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한결같이 다사다난했다 여겨지리라.
그까짓 과거지사가 뭐란 말인가?
과거를 향수하고 되새김질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메마르고 시간에 쫓기는 것인가?’ 반문할 때, 내 경우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할 것이다.
성마오로기숙사에서의 6년간은 최소한 나 ‘김영찬’이라는 사람한테는 그 어떠한 것과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절이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난, 결코 그 시절을 하찮게 폄하하거나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빈정거리진 않는다. 오히려 왜관이라는 곳을, 또 성마오로기숙사에서의 그 시절을 사랑하고, 그런 인연을 맺게 해 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뿐이다.
성마오로기숙사의 추억은 영원하지 않다. 젊은 날의 인연 또한 영원할 수 없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동문들의 부음(訃音)이 전해올 때마다 가슴 저 한 켠에 겹겹이 자리한 젊은 날의 추억과 오랜 인연들이 한 꺼풀씩 증발해버리고 결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공허함에 빠진다.
성마오로기숙사 폐쇄로 말미암아 동문이라면 누구나 단절의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성마오로기숙사 동문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15기 곰방대가 2000년10월7일 다움사이트에 마오로카페를 개설했고, 동문들 간에 서로의 근황을 전하는 메신저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나는 아득한 기억너머 감감하게 자리한 성마오로기숙사 시절, 과거지사의 얘기를 쓰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당시 그 글을 쓸 때만해도 하던 사업이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가족들과도 영영 헤어져야했기에 부평초처럼 마음을 둘 데가 없었다. 따라서 세상일이 심드렁해졌으며, 뭔가 할 일을 찾으려하지도 하려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저 대책 없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시(詩)를 끌쩍이고 수필을 끌쩍였다. 그게 시가 되려니 수필이 되려니 기대하고 끌쩍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라도 끌쩍이지 않으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마냥 무료하여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마오로카페가 개설된 것을 알고는 그때부터 카페를 들락거렸다.
마오로카페가 있었기에……, 또한, 마오로카페를 나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언제부턴가 안타깝게도 마오로카페가 점차 동문들의 관심권에서 밀려나고 있기에…….
그런저런 이유들로 ‘뭐, 성마오로기숙사 시절에 얽힌 얘기나 함 올려볼까?’란 생각에 부지중 졸필을 휘둘러봤다.
처음 마오로카페에 올린 글은 고등학교 졸업 즈음 내게 실제로 벌어졌던 실화를 기초로 한 자전소설 ‘김성혜, 그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로, 2001년9월28일부터 10월2일까지 5일간에 걸쳐 매일 2회분씩 10회분을 지어 올렸다. 이 소설은 내 머리에 털 나고 나서 처음으로 써본 소설이며 소설쓰기의 묘미를 느끼게 해줬다.
이 소설은 내 머리로 짜낸 첫 번째 소설이지만 어쨌든 당시 마오로카페를 드나들던 동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에 고무되어 40여 년 전 당시, 성마오로기숙사에서 60여 명의 선후배, 동기생들과 한 솥밥, 한 침대를 사용하며 이상과 꿈을 키워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성마오로기숙사 회고록’을 이어서 쓰리라 작정했다.
그리고 마오로카페에 1년여 지속적으로 게재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꽤 긴 장편을 쓰리라 궁리하고, 기숙사 사가(舍歌)의 각 소절을 제목으로 인용하기로 했다.
성마오로기숙사의 사가 제1절 가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세에 왕 우러러
배움에 양들이
젊은 날에 인연 맺는 곳
낙동강 칠백 리
물줄기 굽어 솟은
진리에 동산
우리 모여 빛낼
성마오로 기숙사
따라서 사가 제1절은 모두 8개의 소절을 지녔기에 각 소절마다 20회씩 연재하되 첫 번째 소절 ‘만세에 왕 우러러’란 제목의 내용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생으로서 성마오로기숙사에 입사할 당시의 얘기를, 그리고 마지막 소절 ‘성마오로기숙사’란 제목의 내용은 내가 6년간의 성마오로기숙사 생활을 끝낼 즈음의 얘기로 꾸며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김성혜, 그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끝낸 그 다음날인 2001년10월3일부터 10월18일까지 16일간 ‘만세에 왕 우러러’란 제목의 ‘성마오로기숙사 회고록’ 제1부 20회분을 마오로카페에 연재했다.
‘만세에 왕 우러러’란 글은 후일에 발간한 성마오로기숙사 동문회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수록된 글이기도 하다.
성마오로기숙사 회고록 제1부 ‘만세에 왕 우러러’는 내가 1966년3월초, 순심중학교에 입학하고, 또 기숙사에 입사하여 처음 며칠간에 겪은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비교적 객관적 표현으로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20회로 구성된 ‘만세에 왕 우러러’는 나 개인에 대한 서술적 표현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기숙사 생활을 잠시라도 겪은 이들은 예외 없이 같은 경험을 거쳤을 것이고, 또한 같은 생각과 같은 입장을 지녔겠기에 감히 마오로카페에 올렸던 것이다.
나의 기억도 많이 퇴색하여 내가 묘사한 글 중 잘못 표현된 내용도 있을 수 있겠고, 몇몇 실명이 거론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잘못 기재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위해 무진 애를 쓴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공전의 히트를 친 ‘친구’라는 영화가 기억날 것이다. 문화평론가들 말에 의하면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향수에로의 회귀(回歸) 때문’이라 했다.
이 영화의 무대는 엄연히 부산의 일부지역이고, 또 그 시대 부산사투리를 구사하는 부산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라는 영화를 본 대다수 관객들이 자신이 살았던 곳하고 자신들 말투나 기타 등등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왜 공감과 지나 간 삶에 대한 향수를 느꼈을까? 거기엔 미처 계산되어지지 않은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만세에 왕 우러러’를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성마오로기숙사에 대해서, 마오로카페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애정을 쏟아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사람이 사는 게 꼭 돈이나 이득을 따져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 지 지금으로선 기약할 수 없지만, 앞으로 기회가 오면 ‘성마오로기숙사 회고록’ 제2부 ‘배움의 양들이’를 이어 썼으면 한다.
그리고 표현상 다소 시건방진 태도를 보였다면 너른 아량으로 헤아려주시기 바란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회 -
< 성마오로기숙사에 입사하다 >
내가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혀 생경한 농촌, 왜관에 있는 순심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하였을 때, 누나는 나를 왜관으로 떠나보내며 이런 말을 하였다.
“네 친구 상범이는 경기중학교에 입학하는 데, 너는 촌구석에 있는 시골 중학교엘 들어가게 되었구나. 너는 이미 출발선상에서부터 네 친구한테 뒤진 셈이다.”
당시 부모 잃은 어린 사남매의 맏이인 누나의 속마음은 상당히 착잡하였으리라. 동생을 머나먼 낯선 곳으로 떠나보내면서도 먹여주고 재워줄 기숙사가 있기에 그래도 친척들에 얹혀살며 눈칫밥 먹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겼으리라.
누나 역시 여고생신분으로 우리 남매들의 거취를 어찌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천방지축 철딱서니 없이 날뛸 줄만 알았던 나는 부모 없는 설음과 불편함을 분별할 나이가 아니었다. 하물며 누나의 그러한 가슴 저린 한 마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찌 알았겠는가.
한국산업은행에 근무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론, 우리 사남매를 당시 서울 신당동성당 주임신부이자 백부이신 김창문 요셉 신부님께서 거두어주셨는데, 당시 신부님께선 ‘한국가톨릭의 어제와 오늘’이란 1,000쪽 가까운 방대한 책자의 국문판과 영문판 발행으로 막대한 빚을 지고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시절, 이미 충청도 이모님 댁을 오가며, 당시 장항선 완행열차를 여러 번 타본 경험이 있었으나, 성마오로기숙사의 입사를 위해 서울역에서 왜관에 이르는 긴 열차여정을 단신으로 여행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농촌의 풍경들과 산과 강, 그리고 도시의 건물들…. 역마다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노라니 늦은 오후 무렵 어느덧 왜관역에 도착하였고, 이미 두 달여 전, 한 집에서 한 가족처럼 함께 기거했던 박명하 안드레아 아저씨와 순심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루면서 사전답사 겸 한번 방문한 터라 손쉽게 기숙사를 찾아들어갈 수 있었다.
지루했던 겨울이 방금 비껴간 기숙사 풍경은 잘 다듬어진 수목과 갓 돋아 난 화초로 생동감과 아울러 희디흰 기숙사 건물은 오후의 긴 햇빛 그림자로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외경의 마음이 절로 우러나왔다.
몇몇 제복의 학생들 안내로 현관을 거쳐 사감실에 들어서니 검은 수단에 역시 검은 인상의 근엄한 이동호 쁠라치도 신부님께서 맞아주셨다.
중학교 신입생으론 나 말고도 강수동, 손창원, 김영남, 김석승, 이성갑, 권순배, 우상섭, 최영철, 서완수, 장상식, 이분도, 서병덕, 박재욱, 이충렬, 김훈, 고창환 등이 있었다.
우리 신입생들은 자습실, 침실, 식당, 세면장 등의 자리배정을 받고, 저녁식사시간에 일일이 자신의 소개를 함으로서 정식으로 성마오로기숙사생 일원이 되어 꿈 많은 청소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친구들과 그리고……, 무척이나 어른스럽던 선배들과 더불어…….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2회 -
< ‘침묵의 시간’과 취침 >
아직 3월의 문턱은 늦추위가 채 가시지도 않아 나를 비롯한 신입생 철부지들이 잔뜩 먹은 겁만큼이나 오돌 오돌 떨게 했다. 선배들은 한결같이 엄숙한 표정과 낮은 목소리로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엄포 놓았다. ‘너희들은 임마, 뛰어봐야 내 손안에 있어!’라는 주문을 외듯 말이다.
저녁 8시경, 지루하고 길게 펼쳐지는 저녁기도 만과가 끝나면 그 이후부터 다음날 아침식사 전까지는 절대적인 ‘침묵의 시간’이다.
만과이후 밤 10시까지 두 시간 가량 저녁자습시간이 있고, 그 이후론 개별적으로 자습을 하든가 책을 읽던가 아니면 잠을 자던가 하였다.
팔도에서 각기 집을 떠나 한 자리에 모인, 그래서 더 낯설고 서먹한 친구들과 한 침실에 나란히 눕게 되면, 하얀 이불보와 묵직한 이불로 쌓인 ‘삐거덕’거리는 철제침대, 그리고 홀로 드는 이불의 싸늘한 감촉만큼이나 서글퍼지는 것이다.
‘소등’ 지시와 함께 침실의 모든 백열등이 일제히 꺼지면…, 전혀 익숙지 않은 생경한 어둠의 나락이 펼쳐졌다.
“물론 저녁만과 이후부턴 침묵을 지켜야하지만, 특히 침실에선 절대로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게 규칙 제1호다. 알았나?”
덩치 큰 대선배의 일갈을 기억하곤 일순 침실 안은 정적에 쌓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곳저곳에서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도란’거리는 소리들…….
짓궂은 1년 선배들이 정색하며 들려주던 얘기들…….
“원래 이곳은 6.25때 죽은 사람들 엄청 묻은 공동묘지 터였거든……. 그래서 밤에 지하실 내려갈 때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사람 신음소리 비슷한 게 나곤 한다…….”
그런 무시무시한 얘기들이 또 있었다.
“밤에 화장실에 혼자 갈 때엔, 똥 누고나선 밑을 조심해야 돼, ‘빨간 종이 줄까? 하얀 종이 줄까?’하고 묻거들랑 절대 대답해서는 안 된다. 대답하면 밑의 구멍에서 크고 시커먼 손이 기어 나와 밑을 대신 닦아준대.”
이렇게 선배들이 짬만 나면 귀신얘기를 들려줌으로써, 첫날밤의 잠자리를 조져놓는 게 전통이란다.
낮에 들은 귀신얘기가 으슥한 밤이 되면 저절로 떠올라 혼자서는 무서워서 화장실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혼자서 가기에는 긴 복도를 거쳐 가는 화장실이 너무 까마득히 떨어져있는데다 긴 복도 끝 시커먼 어둠 속에서 눈에 퍼런 불을 켠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오르내리는 나무계단은 항상 내 발자국이 아닌 남의 발자국 소리에 의해 ‘저벅’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 했으니까….
그러니까 겁쟁이들은 잠자기 미리부터 옆 침대 친구와 약속부터 단단히 챙겨놓는 것이다.
“이따 오줌 마려우면 같이 가자, 응?”
“그래, 같이 가는 거다. 너도 알았지?”
“응…….”
이때다 싶게 한껏 위엄부린 1년 선배의 점잖은 일갈…….
“모두 조용히 해라……!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또 다시 억제된 정적이 흐르고 밤은 깊어만 갔다.
이렇게 기숙사의 첫날밤은 두려움 반 설렘 반, 흐르듯 멈춰있고 멈춰있듯 흐르며 무르익어가는 것이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3회 -
< 기상과 세면 >
새벽 5시만 되면 어김없이……,
“찌러러렁…… 찌러러렁…… 찌러러렁……!”
아직도 밖은 깜깜하고 이불 밑은 따듯한데……, 꿈결인가?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종소리가 혼미하게 들리고……, 잠시 후 침실장 선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기상……!”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부산한 움직임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안 일어나는 놈들은 뭐꼬?”
“…….”
“……?”
“옆에 아직까지 디비자는 놈들 좀 깨워라!”
‘여기는? 아! 그렇구나! 내가 지금 생소한 곳에서 잠자고 있었지? 아……! 근데 왜들 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난리야? 조금만 더 잤으면…….’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서 이불을 ‘확!’ 벗겨버린다. 썰렁한 공기가 순간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얼른 휑한 사추리 부분을 의식하곤 두 손으로 냉큼 가린다. 그 놈의 고추가 눈치코치 없이 발딱 서있고, 팬티만 입고 있는데 창피하잖은가?
기상하여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어거지로 부르던 ‘아침기도’란 노래가 있었는데, 목이 꽉 잠겨 목통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남들 따라 불러 젖혔다.
“주여, 오늘 하루에 내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합하여 주께 드리나이다……, 수호천신과 주보성인은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모두들 침대이불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나자 옷장으로 사용하는 개인별 사물함을 뒤적이는 놈, 타월을 목에 걸고 세면장을 향해 나가는 놈, 허리며 팔굽혀 펴기 하는 놈 등 각양각색이다.
“잘잤니?”
러닝차림에 타월을 목에 건 껑충한 놈이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나보다 대가리가 하나 더 달린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놈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에서 왔다는 ‘강수동’이란 놈이다.
“응……. 너는?”
“나도 잘 잤다.”
“…….”
“너도 서울에서 왔다며?”
“응, 너는……?”
“나도 서울에서 왔다.”
“그래?”
“여기 서울 놈 몇 놈 더 있대더라.”
“누구누군데?”
“뚱뚱한 놈(손창원) 하나있고…….”
“……?”
“기집애처럼 뽀얀 애(박재욱)도 하나 있다더라.”
삐거덕거리는 좁고 가파른 계단, 침실 쪽에서 세면장 쪽으로 이어진 도서실 쪽의 계단을 통해 학생들이 무리지어 다투듯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쫓아 지하실로 들어서는 순간, 특유의 쿰쿰한 냄새와 ‘쏴……!’하며 습기 차고 차디찬 바람이 불어 닥쳤다.
‘터벅, 터벅……!’
‘타박타박’
‘탈라닥, 탈라닥……!’
각각의 발걸음소리들이 불협화음으로 어우러진 소리 외엔 모두들 말이 없었다. 맞다, 아침식사 전까지는 ‘침묵의 시간’이랬지?
새 수건과 새 비누, 그리고 새 칫솔과 새 치약…….
내 자리로 지정받은 세면대를 웬 덩치(권순배)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 여긴 내자린데?”
“아닌데?”
“맞아, 여긴 내 자리야!”
“그러니? 그럼 내 자리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여기가 니 자리겠지…….”
“그런가?”
양보 받은 내 자리의 세면대는 분명 잡티 없이 순수한 하얀색이었을 텐데, 묵고 찌든 때가 잔뜩 끼어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물 빠져나가는 구멍을 막을 때 사용하는 고무패킹도 도망가고 없었다.
어떤 놈들은 비누나 치약도 안 가져왔던지 내 것을 빌려다 썼다. 이놈저놈의 손으로 제 놈들 마음대로 돌리는 비누와 치약, 최종엔 어느 놈의 손으로 건너가는지 일일이 신경 써야했다.
‘야이 새끼들아, 좀 아껴써라!’ 저절로 튀어나오려하는 욕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묵직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너거들! 물 애껴써야 된데이……!”
“예……!”
“네!”
“옙!”
“그리고, 물 흘리지들 말거라!”
“네!”
“옙!”
“예써얼……!”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4회 -
< 성가연습과 아침미사 >
‘땡땡땡……! 땡땡땡……!’
아침미사를 알리는 예비종소리가 울리자 모든 기숙사생들은 묵묵히 기숙사 2층에 위치한 구내성당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미사시작 전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 테너로 나뉘어 몇 곡의 ‘성가’를 연습하였는데, 처음엔 소프라노만 먼저 한 두곡 불러보고 다음엔 알토만……, 그리곤 4개 화음 모두 동시에 몇 곡을 연습하였다.
구성진 오르간 소리에 맞춰 몇 번씩 부르다보면, 그만 목청이 ‘탁!’ 터지는 것이었다. 사감신부님께서 집전하는 미사는 전 사생뿐만 아니라 인근 베네딕트수도원의 몇몇 수사님들과 주방, 빨래방에서 일하는 아줌마들, 그리고 수녀님도 참여하였다.
입장성가가 울려 퍼지고, 신부님께서 두 명의 복사와 함께 제단으로 등장하면서 미사가 진행되는데, 이러한 아침미사는 하루도 거름 없이 지속되었다. 기숙사 미사는 여느 일반성당보다 성가대의 화음이 웅장하였다.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당시에 그렇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만물에 대 주재를…… 인자하신 나의 목자여…….”
“……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하소서…….”
있는 목통껏 뽑아 젖히는 성가는 참으로 구성지고 감격적이어서 그래서 우리의 절대적인 신(神), 하느님에 대한 존경심과 맹목적 복종심이 절로 우러나오게 하였다.
나 같은 경우는 기도시간에는 꾸벅꾸벅 졸지언정 성가를 부를 때만은 신바람이 날 지경이었다. 특히 퇴장성가 부를 때는 힘이 넘쳐나 악을 쓰다시피 하였다.
나와 장상식, 서완수는 변성기 전이라 목소리가 쨍쨍하다하여 소프라노를 맡았다. 그리고 이충렬과 권순배, 강수동은 목소리가 굵다하여 알토를 맡았고, 우상섭과 손창원은 엉거주춤 테너를 맡았다.
미사시간 중간에는 ‘독서’와 ‘신자들의 기도’가 있었는데, 독서는 신구약성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예전부장의 몫이었고, 신자들의 기도는 모든 사생들이 돌아가며 서너 개 정도의 기도문을 작성하였다가 이를 낭독하는데, 각 항목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라고 복창했다.
신자들의 기도 단골메뉴로는 ‘아파 누워있는 아무개가 빨리 완쾌되도록 해 주소서!’와 ‘모든 사생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하소서!’, 그리고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들이 늘 행복하고 건강하도록 지켜주소서!’였다. 그리고 어떤 행사라도 예정되어 있으면, ‘이번 행사를 무사히 성공적으로 잘 치르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또, 조금 궁색하다 싶으면 인류애를 발휘해서 ‘아프리카 기아선상의 어린이들이 하루빨리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가 자주 사용하는 메뉴였다.
미사가 끝날 즈음, 창문에 드리워진 두터운 커튼사이로 이른 봄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면, 그제야 남아있던 졸음의 찌끼와 하품이 가시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은 미사 후에 ‘고백성사’가 있었다.
‘누구랑 싸웠다’, ‘누구를 미워했다’, ‘기도시간에 졸았다’ 그리고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생각을 했다’가 나의 주 레퍼토리였다. 참 희한한 것이 매주 고백성사를 통해 지난 주간의 죄를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노라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매주 짓게 되는 죄는 하나같이 똑같은 것들로만 반복되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허구한 날 사감신부님께 고백하는 죄의 내용이란 것이 녹음하여 들려주듯 같기만 하여 아마 신부님께서도 ‘요놈 또 지난번과 똑같은 죄를 고백할게 뻔하겠지?’란 지레짐작 속에 고백을 들었을 것이 뻔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소위 십계명에 위반되는 음탕한 생각들은 왜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는지 그것만은 도무지 내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예뻐 보이는 여학생만 보면 온갖 해괴한 성적 상상의 나래가 너울너울 끝 가는데 모르고 충동이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지말자’라든가 ‘거짓말을 하지말자’라든가 하는 따위는 얼마든지 안하고 배겨낼 수 있었으나, 저절로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음탕한 생각들은 환갑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서도 의지만으로는 통제 안 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 ‘나’ 라는 인간은 역시 구제불능이기 때문이리라.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5회 -
< 아침자습 >
아침미사가 끝나면, 사생들은 각자의 자습실로 나뉘어 들어가 아침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의 자습시간을 가졌다.
아직 교과서를 수령 받지 못한 우리 신입생들은 새로 배당받은 책상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니스 칠로 반들거리는 밝은 갈색의 목재책상 윗면은 앞쪽으로 경사져 내려앉은 형태로 연필이나 둥근 모양의 물건들은 ‘또르르~!’ 굴러 맨 앞쪽의 턱받이에 걸리게끔 되어있다. 책상의 위판은 뒤로 젖혀지게 되어있고, 위판을 들어 올리면 그 밑으로 교과서며 참고서며 노트며 그 외 각종 사물을 넣을 수 있도록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있다.
벌써 몇 놈은 집으로 보낼 편지를 쓰는 놈, 만화책을 끄집어내어 읽는 놈, 턱을 괴고 앉아 뭔 생각에 골똘한 놈, 두리번거리며 장난치고 싶어 안달하는 놈 등 그 긴 자습시간을 때우기에는 할 일이 너무 없었다.
자습실 뒤편에는 1년 선배들과 자습실장인 고1 선배 하나가 제법 공부에 몰입한 척 폼 잡으며, 가끔씩 눈에 힘 발을 주고 둘러봄으로써 나름대로 질서를 장악하려는 것이다.
한 놈이 책상에서 살그머니 이탈하여 건너편 녀석 곁에 바짝 붙어 뭐라고 수군거리면, 또 한 놈이 옆 놈한테 다가가서 장난을 건다. 그렇게 되면 이내 자습실 분위기는 도떼기시장처럼 소란스러워진다.
“어허~! 지금 뭣들 하는 거야?”
“……”
“……?”
“이크~!”
“지금이 뭐하는 시간이냐?”
자습실장의 근엄한 목소리에 주제넘은 녀석 하나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공부하는 시간입니다아~!”
“킥킥~! 읍!”
“쿡쿡~!”
“그래, 맞다.”
“……”
“지금은 공부하는 시간이다.”
“……”
“그리고, 침묵의 시간이다.”
“……”
“모두 조용히 하고….”
“……”
“신입생들은 할일 없으면 집에 보낼 편지를 쓰도록 해라.”
“네~!”
“옙!”
“예이~!”
아침자습시간이란 게 원래 소란스럽다. 그러니 진득하니 공부가 될 리 없다. 창문 밖은 햇살이 따스하고 만물이 역동하는 활기가 넘친다. 괜스레 몸이 근질거리고 어쩌다 날라 들어온 날벌레 한 마리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시장기가 돈다.
시간표대로 교과서나 지참물을 정리하고 책상 속을 뒤적이며 뭉그적거리다 보면, 식사시간을 알리는 타종소리에만 자연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6회 -
< 아침식사 >
‘땡땡~~ 땡땡~~ 땡땡~~’
아침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힘차게 울리면, 모두들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학년별, 생일순서별로 지정된 식탁 자기자리 앞에 서서 대기한다.
이윽고 사감신부님께서 입장하여 자리에 앉게 되면, 그때 부산하게 의자 빼어 앉는 소리가 들린다.
‘삐그닥~!’
‘삐걱~!’
‘투당탕!’
식전에는 반드시 식당 앞쪽 코너에 마련된 독서대에서 또 한 차례 ‘성경이야기’란 책의 일부분이 낭독된다. 이 낭독자는 모든 사생들이 순번대로 돌려가며 일주일씩 맡게 되어있다. 우렁차게 낭독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알아듣기 어렵게 낭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생들은 책만큼은 잘 읽는 편인지라 낭독하는 솜씨들이 탁월하다 할 수 있다.
‘땡~~!’
사감신부님 식탁에 마련되어있는 작은 종에서 단발의 종소리가 울리면, 이를 신호로 식탁에서의 전쟁이 시작된다.
네 명씩 두 팀이 긴 식탁 하나에 앉게 되며, 밥이 담긴 대형밥통과 국이 담긴 커다란 찜통이 식탁마다 하나씩 놓여있다. 그리고 네 명 앞에 각각의 반찬들이 놓여있다. 국은 대부분 멀겋게 끓인 감자국이었으며, 간혹 쇠고기 조각이 그 비계와 함께 간간이 떠있는 맑은 무국이 나오기도 하였다. 반찬은 대개 고등어조림이나 감자조림, 콩나물무침, 시금치나물무침 그리고 예외 없이 시큼한 김치가 놓여있다.
‘아~! 그 꿀맛이라니…, 쩝~!’
각자에게는 밥그릇과 국그릇, 숟가락과 젓가락이 각기 한 벌씩 나뉘어 지급되고, 식사 후엔 각자 자신이 먹은 그릇들을 깨끗이 설거지하여 식탁 밑의 빈 공간에 넣어 보관한다.
식탁에서의 자리배정은 나이 순, 생일 순으로 정해졌는데, 덩치가 유난히 작은 나의 경우는 하필이면 입사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줄곧 6년간 먹성이 가장 좋기로 소문난 덩치들과 같이 배정되어 큰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동 시절에 기숙사생활을 같이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강수동, 손창원, 권순배가 그들이다. 덩치가 작나? 그렇다고 적게 먹나? 식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아니었던가?
내가 끼인 식탁이 다른 식탁들과는 좀 유별나다 할 수 있었으니, 식사 개시종이 울리기 무섭게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반찬은 무조건 사등분하여 각자의 밥그릇에 비우고, 빈 접시를 잽싸게 주방창구에 들이민다. 그리고 다시 타온 반찬 역시 사등분하여 다시 비운다. 그렇게 주방에서 ‘더 줄게 없다.’란 말이 나올 때까지 그 짓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밥이든 반찬이든 신청하기만 하면 무한정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식탁 저 식탁, 너도 나도 신청하다 보면 어느새 주방에선 ‘진짜로 다 떨어졌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내 경우엔, 돌을 씹어도 반찬담긴 밥 그릇째 들고 가서 돌을 뱉어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밥알 한 알갱이까지 몽땅 도둑맞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세 놈에게 오죽 당했으면 180은 충분히 되었을 키가 여직 160에 머물렀겠는가.
식탁에서의 그들에 대한 기억은 오직 하나,
‘엄청 먹는 것만 밝히려들었던 게걸스러운 걸신(乞身)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7회 -
< 학교등교 >
‘땡~~~ 땡~~~ 땡~~~’
학교 등교를 알리는 예비종소리가 울리면, 아직도 식당에 남아 늦은 아침을 씹는 이들, 기숙사 뒤편의 농구장에서 농구하던 이들, 세면장에서 빨래하던 이들, 자습실에서 웅성거리며 잡담에 열을 올리던 이들, 도서실에서 소설 나부랭이를 읽던 이들 모두가 부랴부랴 책가방을 챙긴다. 그리고 신발주머니와 도시락도 챙긴다.
학년별로 또는 어울리는 놈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려 기숙사 정문과 불과 5분 거리의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학교로 간다.
학교 정문에는 덩치 큰 규율부학생들이 훈육주임교사와 함께 들어오는 학생들마다 차림새며 지각을 점검한다.
머리길이, 모자와 복장, 그리고 신발상태, 명찰과 모표 및 각종 표찰의 부착유무를 일일이 확인한다.
머리가 규정 이상으로 길 경우, 훈육선생님은 미리 준비한 바리캉을 들이밀고 가차 없이 머리중앙에 허연 고속도로를 내주셨다. 물론 고3 고참학생들의 경우는 3~4센티까지 머리를 키울 수 있게끔 특별한 배려도 베풀긴 했지만….
신발의 경우, 검은색 운동화나 교련화가 주종이었지만, 고참선배들은 빤질빤질하게 잘 닦아놓아 광이 번쩍거리는 ‘워커’를 신고 오기도 했다. 하물며, 기차표 검정고무신이나 장화, 심지어 짚신을 신고 오는 놈도 있긴 있다.
좀 불량끼 있는 놈들은 일부러 모자 한가운데를 기역자로 찢어 눈에 잘 띄게 흰 실로 꿰맨, 빳빳하게 각진 모자를 쓰고 나팔바지처럼 바지부리를 넓힌 바지를 입기도 했다. 바지부리 14인치 이상은 절대로 용인되지 않았다.
당시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멋지게 불러 젖히던 남진이 유행시킨 나팔바지…, 걸을 때마다 바람에 나부끼듯 발목에 휘감기는 그게 퍽이나 멋이었으니까…, 하여튼 나팔바지가 그리도 멋들어지게 여겨졌던 시절이다.
복장불량이나 지각생들은 쪼글뛰기나 푸샵, 운동장돌기로 체력을 다졌고, 자기반에 들어가면 또 다시 담임선생으로부터 매질을 당하거나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하여튼 교칙을 위반하면 이중의 고충을 각오해야했었는데도 위반하는 놈들은 여전히 위반하려들었으니, 농띠들 상당수가 그러한 고충을 오히려 즐기려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당시 ‘순심중고등학교’는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뉘어져있었다. 여자부는 1키로 쯤 더 떨어진 수도원농장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입어보는 헐렁한 로만칼라의 검은 제복, 그리고 박박 밀은 머리…. 후에 알았지만 머리카락을 5미리 정도 남기는 2부로 깎아도 되는 머리를 괜히 중처럼 바리캉으로 소위 ‘백호’머리로 박박 밀었다. 그리고 생소한 교실 풍경 등등 지금 돌이켜보면 여간 감회에 젖게 하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교실은 학교 교장실이 딸린 본관 뒤쪽에 자리 잡은 낡고 허름한 일제식 건물 2층에 있었고, 그 건물은 아마 왜정 때 지은 건물로 추측되었다. 그 교실로 들어서려면 본관 뒤쪽에 난 출구를 통해 본관과 그 낡은 건물 2층 사이를 이어주는 일종의 구름다리를 건너야했다. 지대가 낮은 곳에 지어진 그 건물 1층은 본관과 비교하면 지하처럼 느껴졌고, 아마 허드레 물건들을 쌓아놓는 창고로 쓰여 진 듯 여겨졌으며, 교련 때 제식훈련에 쓸 목총도 보관되었던 장소로 기억된다.
다 낡은 마룻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리고, 묵은 곰팡내가 물씬 풍겼다. 또한 채광도 전혀 안되어 교실은 항상 어둑어둑했으며, 특히 비 오는 날이면 칠판글씨가 거의 안보일 정도였다. 어둡기로는 백열전구 몇 개가 천장에 매달려있으나마나였다. 비만 오면 천정 여기저기서 새는 빗물로 교실 안은 아수라장이 되는 낡은 지붕과 촌 학생들의 몇 세대 걸쳐 물려 입었음직한 낡고 헤어진 교복만큼이나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이 건물에는 미술부작업실과 중학교 1학년 1반과 2반 등 2개 교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똑같은 1학년이라도 3반과 4반은 새로 지은 신관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이후로 묵은 교실에서 공부해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불만거리일수밖에 없었다.
난, 중학교 1학년 2반에 배정되었고, 담임은 ‘강판석’선생님이셨다. 강 선생님은 키가 껑충하니 크신 분으로 얼굴이 넙적하고 긴 말상이었으며, 말소리가 느려 터지고 억양이 긴 분이셨다. 그러나 성격이 유순하고 어진 분으로 좀처럼 매를 들거나 야단치는 일은 없었다.
우리 반엔 나 말고도 기숙사 동기생으로는 우상섭과 손창원, 그리고 강수동이 함께 배정받았다.
중학교 1학년의 경우는 모두 4개 반으로 구성되었으며, 1개 반이 대략 60여명으로 채워졌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8회 -
< 아침조회 >
‘땡땡땡~~ 땡땡땡~~’
전체 아침조회 종소리가 울리면, 전교생뿐만 아니라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들께서도 본관 앞 소(小)운동장으로 모이셨다. 당시 서상우 신부님께서 교장으로 계셨는데, 대단한 카리스마로 학교운영에는 절대적이셨다. 그분의 지시라면 교감선생님 이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선각 선생님이 교감으로 계셨는데, 다소 작은 체구에도 학자풍의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학생들을 사로잡았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1년 선배 ‘김세호’ 형의 아버님이셨다.
당시 학생회장은 기숙사생이었던 고3 ‘한성수’선배가 맡았다. 한성수 선배는 큰 키는 아니지만 듬직한 체구와 점잖은 말솜씨로 전교생들을 압도하였다.
“일동~ 차려엇~!”
학생회장의 우렁찬 구령소리에 천오백여 전교생은 차렷 자세를 취했다.
“열중~ 쉬엇~!”
“차려엇~!”
“경례~엣!”
이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봉창, 교장신부님의 신입생 환영사와 훈계, 다시 이어지는 여러 선생님들의 훈계, 그리고 지시사항들….
어느새 다리도 아파오고 오와 열도 흩뜨려진다. 수군거리는 잡담소리…, 발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보고 글씨도 써본다. 그리고 지웠다가 다시 써본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인 교가(校歌) 제창….
“하늘에 맑게 솟은 성당에 저 종탑….”
선생님들 모두가 퇴장한 뒤, 학생회장의 신입생에 대한 당부의 말과 학생회간부들의 한차례 소개가 진행되었다. 당시 학생회 간부명단에는 기숙사 고3 선배 몇몇이 끼어있다. 규율부장과 체육부장…,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서로 돕는 사람이 되자’
이러한 내용의 교훈은 어느 교실이든 예외 없이 교실 앞 흑판위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사진과 태극기와 함께 나란히 걸려있었다. 먼지를 뽀얗게 덮어써가며….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9회 -
< 출석부 신고 >
교실로 들어온 우리들은 각기 그중 좋아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처음 보는 놈들을 둘러보며 마냥 신기하게 여겼다. 교실 안은 왁자지껄 장터처럼 소란스럽고 몇몇 비위 좋은 놈들은 기선을 선점하려는 듯 설쳐대고 있었다. 출석부와 몇 가지 프린트인쇄물을 들고 담임 강판석 선생님께서 교단에 좌정할 때까지 소란은 멎을 줄 몰랐다.
“모두 일어서서 키 순서대로 서봐라.”
60여명 반 애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키 순서대로 선다고 아우성이다. 키 작은 놈들은 발뒤꿈치를 슬그머니 들어 올려서 더 커 보이려고 하는가하면, 키도 별로 안 큰 놈이 뒤쪽으로 숨어버리고 난리가 아니다. 한참 술렁이는 가운데 대충대충이나마 정렬되었다. 키 작은 순서대로 담임 앞으로 나가서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다.
내 번호는 5번. 나보다도 더 작은 놈이 네놈이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놈은 내 어깨밖에 오지 않았다.
난, 책상 줄 중간지점의 제일 앞자리를 배정받았다. 교탁 바로 밑이다. 책상에 앉아서 칠판을 보니 칠판의 일부가 교탁에 가려져 보이질 않는다.
강수동, 손창원, 우상섭은 키가 커서 제일 뒷자리들을 차지했다.
책상 두 줄씩 뒤쪽으로 6~7개가량 길게 놓였고, 대략 열 두서너 명이 한 분단에 편성, 모두 5개 분단으로 나뉘었다. 분단배정이 끝나자 분단장 임명이 있었다. 뒤쪽의 덩치 큰 놈들의 차지였다.
그리고….
“너거들 중 초등학교 다닐 때 반장했었던 애 있나?”
담임선생님은 좌중을 쭉 둘러보셨다. 장내가 한참동안 시끌버끌 소란스러워지고 난 끝에 몇 놈이 서넛을 추천했다. 그렇다고 우리 기숙사생이 넷이나 있는데 뒤질 이유가 없었다.
“우상섭을 추천합니다.”
상섭이도 초등학교 때 반장 몇 번 해봤다고 하잖던가? 촌놈들 중 비교적 때가 말끔하게 벗겨진 우리 기숙사생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당연히 우리 반 반장자리는 상섭이에게로 돌아갔다. 반장임명이 끝나고 반 간부가 추천되었다. 부반장, 규율부장, 미화부장, 체육부장 등등….
그림 좀 그려봤다는 한마디 말 때문에 나에게는 미화부장이란 감투가 씌워졌다. 주로 교실 뒤편의 벽면을 그림이나 게시물로 꾸미는 것이 주 업무였다.
때가 잔뜩 끼고 삐거덕거리는 책상, 그리고 간간이 섞인 만든 지 얼마 안 된 듯 보이는 제법 진한갈색 색상이 온건하게 남아있는 깨끗해 보이는 책상, 그러한 것들이 뒤섞여있는 터라 운이 좋아야 좋은 책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걸상의 대부분은 다리부분에 부목을 대서 고정한 그야말로 성한 것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멋모르고 책상 밑에 손을 댔다가 뭔가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져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맙소사!’ 코딱지를 어찌나 떼다 붙여놨던지 덕지지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우웩~! 퇘퇘퇘….’
우리 반 애들 중 절반정도는 왜관읍 관내에서 오지만, 절반정도는 북삼면, 석적면, 약목면 등 인근 읍, 면 외에도 멀리 성주군이나 구미, 대구 쪽에서 오는 애들도 꽤 되었다. 웬만한 거리는 도보로 오지만, 장거리는 통학열차(완행)편으로 또는 자전거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등하교 길에 자전거로 오가는 데만 각기 두 시간씩 걸리는 놈도 있다했다. 아주 부지런한 놈이었나 보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0회 -
< 새로운 교과서 >
우리에겐 새로운 교과서가 배부되었다. 과거 국민(초등)학교 때 보다 몇 개 과목이 더 추가되었으며, 명칭부터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땐 ‘산수’라 불리던 과목이 ‘수학’으로 바뀌었고, ‘과학’과목은 ‘물상’과 ‘화학’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영어’과목과 ‘실업’과목이 추가되었다. 그중 영어과목이 단연 호기심과 인기가 좋았다.
“아이 엠 어 보이~”
“유알 어 거얼~”
마치 입에 버터가 발린 기분이었다.
“마이네임 이즈 영찬~ 킴!”
우리 반 담임 강 선생님이 영어를 담당하셨는데, 사실 이분의 발음은 그리 썩 매끄럽지 못하고 딱딱 끊기는 이른바 ‘콩글리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멋져 보였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좀 전에 배운 기본영어문장 몇 마디씩 주절거리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홧 이즈 유어 네임?”
“마이네임 이즈 수동~ 캉!”
“하우 알 유?”
“아이 엠 어 보이~”
처음 시작된 중학교과목은 모두가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물론 초등학교 때 배운 것들도 상당수 있었으나 새 책에 새 노트라 마음속에 다져지는 각오는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일등은 내꺼다.’
‘이까짓 촌놈들한테 뒤질 수 없다.’
분위기가 어느덧 익숙해지자 차분한 시선으로 같은 반 애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딴에는 중학교 신입생이라고 학교 올 땐 나름대로 때 좀 뺏을 텐데, 한결같이 추레하고 행색이 구질구질해보였다. 서울 애들처럼 깔끔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이 모두가 일 년 열두 달 목욕 한번 안하여 때가 낀 것처럼 거무티티하고, 몇몇을 제외하고는 중학교교복이라고 입은 것이 누더기일색이었다. 아마 형이 입던 것이나 이웃집, 아니면 먼 친척 형뻘이 입던 교복을 얻어 입힌 모양이다.
걔네들에 비하면 난, 뽀얗고 이뻐서 걔네들 눈에도 제법 어려워보였을 게다. 어떤 놈은 내게 은근히 다가와 삶은 감자와 삶은 계란을 쥐어주는 놈도 있었다.
“너 서울에서 왔다며?”
“응”
“……”
괜히 야코부터 죽은 놈들은 내 눈치 보기에 바쁠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내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가뜩이나 궁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이 어딘지 지도상에서나 찾을 줄 알았지 얼마만한 거리인지 감조차 못 잡는, 그래서 서울이 마치 미국의 뉴욕만큼이나 동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서울에 창경원이 그리 좋다던 디….”
“그럼~!”
“넌 가봤냐?”
“몇 번 가봤지.”
“코끼리도 있고 호랭이도 있다면서?”
“그럼~! 별거 다 있지.”
“……”
“넌, 못 가봤니?”
“응~”
“한번도?”
“응~”
“그럼 한번 가봐라.”
“……”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1회 -
< 점심시간 >
점심시간이 되어 각자 준비해간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도시락을 안 싸온 애들을 손들라 하셨다. 의외로 많은 애들이 손을 들었다. 대략 10여명, 아니 20명도 넘을 듯하였다.
도시락 싸온 애들도 대부분 깡 보리밥에 장아찌나 시커먼 김치 쪼가리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애들은 감자 삶은 것 몇 개가 고작이었다. 기숙사에서 싸준 도시락은 보리가 약간 섞인 하얀 쌀밥에다 새우조림과 노란단무지(닥꽝), 포기김치가 정갈하게 들어있었다.
“지금 학교구내식당에 가면 옥수수 죽을 줄 거다. 누구 두 사람 그리로 가서 가져오도록 해라.”
한참 후, 옥수수 죽이 바께스에 그득 담겨져 왔다. 샛노란 색이 먹음직스러웠다. 그리고 냄새도 구수했다. 점심을 굶은 애들이 빈 도시락 통을 빌려 큰 국자 그득히 떠서 먹는걸 보자니 군침이 절로 흘렀다. 한 놈이 내게 옥수수 죽을 떠서 내밀었다. 생각보다 멀건 죽은 처음 몇 술은 고소하고 맛이 있었으나 많이 먹히지는 않았다. 그러한 옥수수 죽은 매일 점심시간만 되면 날라져와 허기진 애들의 배를 채워주었다. 참으로 지지리도 못살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그 옥수수 죽은 베네딕트수도원 측에서 학교의 결식학생들을 위해 무상으로 공급하여왔는데, 우리가 중학교 2학년인가 된 후 얼마 안 되어 중단하였다. 대신에 학교구내매점을 통해 옥수수 빵으로 가공되어 싼값으로 판매되었다.
10환에 손바닥만한 옥수수 빵 3개와 꽈배기 하나….
네 귀퉁이가 둥그스름하고 납작한, 윗부분은 조금 통통하게 부풀어져 올라와있고 바닥은 평편한, 노릿 노릿하게 구워졌으면서도 일부 바닥이 검붉게 태워진, 그리고 달착지근한 맛과 고소한 맛은 군것질감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엔 참으로 별미였다. 또한, 한창 배고플 때라 도시락 까먹고도 간식삼아 사먹었다. 특히 수업시간 중에도 선생님들 눈치 살펴가며 책상 밑에 숨겨놓고 야금야금 뜯어먹는 그 맛이란~! 아마 우리 대선배들께서는 그 맛을 모를 것이 구만?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2회 -
< 각 과목별 선생님 >
각 과목별로 새로운 선생님들이 정해졌다. 국어과목은 키가 유난히 크고 깡마른, 그리고 목울대가 많이 튀어나와 그것만 눈에 띄던 ‘하욱진’선생님이셨다.
이분은 성격이 호인이신지라 애들이 떠들든 말든 일체 체벌이나 고함 한번 안 지르는 분이셨다. 단지 사람 좋은 목소리로
“이놈들아~! 좀 조용히 해봐라~!”
라며 점잖게 타이름이 고작이셨다.
영어과목은 우리 담임 ‘강판석’선생님. 역시 큰 키에 호인이셨고, 보기엔 무뚝뚝해 뵈지만 역시 겪어보니 만만한 분이셨다.
“자~ 봐라, 뭐가 문제인고?”
수학과목은 ‘이정숙’선생님. 아마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신참선생님이셨을 거다. 무척 앳되어보였고 처녀였음이 틀림없었다. 한번은 수학시간에 예의 그 옥수수 빵을 부지런히 씹고 있다가 그만 이 선생님한테 직빵으로 걸리고 말았다. 선생경험이 적은 만큼 학생에 대한 프라이버시도 또한 대단했으리라.
이 선생님은 내게 귀퉁이가 조금 뜯겨져나간 옥수수 빵을 입에 물리고, 나머지 한개 남은 멀쩡한 빵은 두 손으로 받쳐 들게 하여 교실 앞에 나가 꿇어앉게 하셨다.
난 장난기가 발동하여 느릿느릿 거드름을 피어가며, 또한 배실 배실 웃기까지 하며 선생님의 애간장(?)을 녹였다. 반애들도 배꼽잡고 웃지를 않나 심한 놈은 책상을 마치 북처럼 뚜드려가며 괴성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드디어 울음보를 터뜨리셨고, 내게 숙연해질만한 말씀을 해주셨다.
“영찬아~!”
“……”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
“니가 명색이 기숙사생인데….”
“……?”
“어째 그럴 수가 있니?”
“……”
명색이 기숙사생이라?
그렇다. 당시에 기숙사생이라 하면 공부 잘하기로 그리고 타의 모범으로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왜관사회에서는 1순위로 꼽았고, 기숙사생에 대해 대단한 호감과 엘리트란 인식들을 갖고 있었다.
물상과목은 말대가리 ‘장영국’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머리부터 몸통까지 마냥 통통한 장 선생님은 수업 내내 머리를 말처럼 끄덕인다하여 별명이 ‘말대가리’다. 역시 사람 좋기로 유명하여 체벌이나 욕설은 전혀 없으셨다. 내 기억으로도 이분한테 배우는 동안 손바닥을 회초리로, 그것도 전혀 안 아프게 ‘살살’ 세 차례 맞은 게 전부일거다.
사회과목은 ‘권오진’선생님께서 맡으셨고, 다소 작은 체구에 좀 마르신 편으로 좀 춥다 싶으면 코끝이 빨개지는 분이셨다. 화가 나면 한동안 먼 곳을 응시하며 화를 삭이는 분으로 어쩌다 종아리를 회초리로 몇 대씩 내리치는 분이셨다.
미술과목 ‘윤정선’선생님. 썩 좋은 인상에 미남형이랄까? 이분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와 비교적 인연이 많은 분이셨다. 특히 나를 어여삐 보시어 나의 간땡이를 많이 키워주신 분이셨다. 나의 재능을 과대평가 내지 탁월하게 평가해주셨고, 이내 ‘미술반’에 전격 스카우트해주셨다. 무조건 미술점수는 ‘올백’을 주셨고, 농띠 피워도 무조건 ‘옹냐옹냐’해주셨다.
근데 한번은 정말로 이분 눈에서 눈물이 나오도록 했다. 미술시간에 미술도구나 재료를 일부러 안 가져간 것이다. 선생님을 깔본 것이다. 선생님께선 내 앞에 서서 뭐라 말씀조차 못하곤 눈물만 흘리고 계신 것이다. 진짜 ‘닭똥 같은 눈물’을…, 그래서 반성 많이 했고, 당분간은 모범 좀 보였다.
음악과목 ‘서성설’선생님. 첫 강의 때, 흑판에 자신의 이름을 ‘서서서’라 썼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고서야 두 번째 ‘서’자 밑에 ‘ㅇ’을, 세 번째 ‘서’자 밑에 ‘ㄹ’을 적어놓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분이셨다. 그래서 이분의 이름만큼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도록 하셨다.
서 선생님은 보통체격에 얼굴은 다소 검은 편이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성악을 전공한터라 노래도 기막히게 부르셨고, 악기도 못 다루는 게 없을 정도였다. 특히 ‘안니로리’를 기막히게 부르셨는데, 그 영향 덕분에 고교 졸업할 때까지 내 18번이 예의 그 ‘안니로리’가 될 정도였었으니까…. 이분은 후에 그 실력을 인정받아 음대로 유명한 계명대학 음대교수가 되었다한다.
‘아침 햇살 빛나면…, 사랑스런 안니~로~리~ 그대 만나리라~’
체육과목 ‘최기식’선생님. 이분은 연세가 많으신 고참선생님이셨다. 우리는 주로 체육시간만 되면 운동장에서 공차기하며 놀았다. 축구공은 너무 딴딴해 발이 아팠다. 해서 배구공을 차고 놀았는데 그때마다 잔소리하셨다.
“축구는 축구공으로…, 배구는 배구공으로….”
실업과목은 ‘서일석’선생님. 이분은 우리 기숙사동기로 대단한 농띠였던 서완수의 아버님이시기도 했다. 입담이 좋으셔서 항상 귀에 솔깃한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애들은 부모로부터 지능지수를 물려받는다.”
“특히 부모가 학교선생이라든가 은행원일 경우, 대개 애들이 머리가 좋은 경우가 많다.”
꼭 나를 두고 말씀하신 것 같다. 내 경우는 비록 작고했지만, 아버지께선 은행원이셨고 어머니께선 선생이셨으니까….
그 외에 도덕과목이나 가끔씩 땜빵으로 ‘김선각’ 교감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애들은 상대가 교감선생님이신지라 더욱 조심했다. 이분도 말씀은 꽤나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셨고 또 은근히 재미있게 하셨다. 주로 역사적 인물과 연관된 교훈적인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3회 -
< 학교청소 >
마지막수업이 끝나고 소란스러움이 극에 달할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종례를 하러 들어오셨다.
“오늘 수업 어땠노?”
“좋았습니다~!”
“할만 하드나?”
“예~!”
“반장 이리 나와 봐라.”
“예~!”
“그리고 분단장들도….”
“예~!”
“넵!”
“분단별로 청소구역 함 정해봐라.”
교실은 물론이고 화장실, 주변화단과 공터 등 몇몇 군데가 우리 반 청소구역이었다.
“청소 끝나거든 반장한테 검사받고 가그라.”
“예~!”
“그리고 낼 올 때, 걸레나 빗자루 등 청소도구 하나씩은 꼭 챙겨온나.”
“예~!”
학교일과 첫날부터 농띠들은 티가 나나 보았다. 벌써부터 몇몇 덩치들과 농띠들은 청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저희들끼리 모여서 무슨 작당질하고 있는 눈치였다. 애꿎게 몇 놈이서 죽어라하고 청소를 도맡아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바께쓰에 길어온 물에 걸레를 자주 빨기에는 손이 시렸다. 한쪽으로 책걸상을 밀쳐내곤 교실바닥의 진흙먼지나 쓸어내고 대충대충 걸레로 물만 축인다. 근데 유리창만큼은 대충이 통하질 않는다. 대충 닦노라면 오히려 더 추접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애들은 고생한 만큼 표가 안 나는 유리창담당이 되는 걸 제일 싫어한다.
특히 화장실청소는 가장 꺼리는 구역이다. 매캐하게 쏘는 듯한 독한 냄새와 여기저기 벽에 칠갑해 놓은 똥칠은 보기에도 마냥 역겹다. 그리고 빈 공간마다 웬 거시기 그림이 그리 과장되어 그려져 있는지…, 바닥을 무딘 청소솔로 긁고 있노라면, 그 크게 뚫린 시커먼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괜한 걱정으로 차라리 낮에 먹은 것까지 토하고 싶을 지경이다.
화단이나 공터 청소담당이 제일 속편하고 간단하였다. 뛰어놀면서 짬짬이 비질흔적만 남기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속편한 청소구역은 이내 덩치들이나 농땡이들한테 자연스레 넘어가는 것이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4회 -
< 방과 후 시간과 간식 >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나자 다소 추레해진 몰골로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해는 아직까지 쨍쨍하니 오후 한낮을 가리키고, 아직 선배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중1들만 마치 기숙사 주인이라도 된 듯싶었다.
한동안 자습실 여기저기서 모여앉아 잡담하기에 여념이 없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담임선생이 어떻다는 둥…, 어떤 놈이 개구신이라는 둥…, 또, 몇 마디 배운 영어실력을 다시 한 번 써먹어보는 둥….
그리고 왜 그리 배가 고프던가? 한 놈이 혼자 먹으려고 꼬불쳐둔 과자부스러기를 끄집어내놓았다. 충남 서산에서 온 고창환이란 놈이다. 이내 박재욱이란 서울 놈도 그 귀하디귀한 초콜릿과 드롭프스를 꺼내왔다. 가뜩이나 허기진 배, 그들 먹거리는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몇 놈은 벌써 뒤쪽 농구장에 가서 농구하고 있었다. 강수동, 손창원, 권순배, 이충렬, 우상섭, 김영남 등 덩치가 비교적 큰 놈들이다. 상섭이가 그중 운동을 제일 잘하는 것 같았다. 창원이나 충렬이, 순배는 영 무뎁뽀였고, 수동이나 영남이는 몸을 안 다치려하는지 살살 피하는 투로 보아 조금은 약은 놈으로 비쳤다. 어쨌든 그 덩치들 틈에 끼어 공 좀 만져보려 해도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양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들…….’
놈들이 아무리 야속해도 어쩔 것인가? 모두들 나보다 대가리 하나씩은 더 있는 놈들인데…. 철봉대와 평행봉대에 가서 매달려본다. 철봉대는 그래도 뭔가 친숙하였다. 서울 ‘숭덕국민학교’다닐 때, 철봉에서 하는 ‘꽈배기’놀이 엄청 했었는데….
‘내가 철봉대에 매달린 채로 술래 허리를 두 발로 한번 꼬면 못 빠져나가고 죽는다고 난리쳤었지…. 흐흐흐…, 내 허벅지 힘이 여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평행봉은 처음 본다. 이게 뭐하는 건지 궁리해 봐도 잘 모르겠다. 평행봉 위에 올라가 걸터앉아보니, 제법 높긴 높아 보였다.
오후 5시.
‘땡땡~~ 땡땡~~ 땡땡~~’
‘이건 뭔 종소리람?’
어느새 많은 선배들이 돌아왔는지 웅성거리며 식당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뭔 일이고?”
우리 기숙사막내들은 영문도 모르고 식당으로 줄줄이 따라 들어가서야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응, 간식시간이구나!”
마치 스펀지처럼 흐들흐들한 빵이 커다란 소쿠리에 수북하니 쌓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커다란 주전자에는 하얀 우유가 그득 담겨져 있는 것이다. 빵은 노르스름하고 한입 베어 물면 단물이 왕창 쏟아질 것처럼 맛이 꼬소한 옥수수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일명 스펀지 빵이었다.
“아~! 이제사 살 것 같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5회 -
< 오후자습 >
오후 4시부터 저녁식사 전인 6시까지는 의무적인 자습시간이다. 이 시간엔 화장실도 예사로 못 다녀왔다. 그런데, 오줌보가 여린 어린 녀석들이 두 시간 가까이 어떻게 오줌 마려운 걸 참을 수 있겠는가. 꼭 화장실에 다녀오려면 반드시 자습실장의 허락을 받아야했다.
우리 자습실장은 3년 선배인 고1 ‘이영준’선배가 맡았다. 키가 크고 말을 좀 더듬기는 했으나 제법 자상한 선배였다. 우리 자습실은 A, B, C로 명칭이 붙은 세 개의 자습실 중 기숙사 현관 우측으로 바로 옆에 붙은 ‘자습실 C’였다. 중학교 1학년생과 2학년생 등 모두 30명 안팎이 함께 이용하였다. 1학년들은 앞쪽으로 앉고, 2학년들은 뒤쪽으로 앉고, 자습실장은 출입구 쪽에 앉았다.
‘사각~! 사각~!’
연필소리와 이따금씩 ‘쿰쿰’거리는 기침소리, 그리고 책장 넘기는 소리, 책이나 연필 등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하품하는 소리, 자습실 앞 벽면에 붙어있는 원반형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
거기에 어떤 놈은 책상에 벌써 코를 박고 코까지 골고….
자습실장이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자습실을 한 바퀴 돈다. 자는 놈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깨운다.
“저~, 이것 좀 풀어 주실래요?”
그중 제법 공부 열심히 하는 놈이 자습실장에게 문제를 내민다. 한참동안 문제를 푼다고 수군댄다. 어느덧 자습실 분위기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술렁인다.
여기저기서 ‘킥킥’대고, 지우개며 연필들이 날아다닌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문제를 풀어주던 자습실장이 머리를 번쩍 들고, 좌중을 훑어보며 내지른 한마디 고함소리에 다시 자습실은 평정을 되찾는다.
이 두 시간에 걸친 자습시간은 수도승의 고행만큼이나 내겐 고행이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책만 들여다봐야했으니 자연 몸에 쥐가 나고 숨이 가빠지는 것이다. 일어설 수도 없고, 또 장난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소설책이나 만화책을 읽거나 다른 취미활동도 할 수 없다. 오로지 교과서나 참고서 외엔 책상위로 끄집어 낼 수도 없다. 참으로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이었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6회 -
< 저녁식사, 그리고 단체기합 >
‘땡땡~~ 땡땡~~ 땡땡~~’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반가웠다. 특히 지겨운 자습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은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공복감을 메울 수 없는 것이 비단 나뿐이었을까?
식탁에 모여 잠시 웅성거리다보면, 이어서 사감신부님께서 입장하시고….
식사에 대한 ‘감사의 기도’후 착석하여 잠시 독서자의 ‘성경이야기’ 낭독에 귀를 기울인다.
‘땡~!’ 하는 단발의 종소리가 울리면, 그릇 부딪치는 소리며 수저 ‘달그락’소리에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식당 안은 활기로 넘쳐났다.
식사시간은 30분 남짓.
각자 자기가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대에 가서 씻기 바쁘고, 설거지가 끝나면 그때부터 저녁 만과시간까지는 뭘 해도 좋은 자유시간이다. 물론 저녁식사가 끝나도 자리를 지키라는 별도의 지시가 있으면 분명 단체기합이나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대개 총급장의 지시사항이나 훈계로 끝나지만, 고참선배들이 돌아가며 훈계하는 경우도 있고, 어느 땐 날벼락이 떨어지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다.
“전원 지하실 집합~!”
어느 땐 학년단위로 불려 내려가 경을 치는데, 지하실이라 하면 계단초입에 있는 샤워장을 일컬음이다. 아무리 소리 질러도 막힌 공간이라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염려도 없을뿐더러 지하실이 주는 음습함은 살벌한 분위기를 잡는 데에도 일조하는 모양이다. 보통 ‘지하실집합!’에는 몽둥이찜질이 다반사였는데, 야구방망이나 청소용 밀대를 많이 사용했다.
덩치 큰 놈들이 주로 바로 위 1년 선배들 눈에 가시처럼 밉보여 빳따 맞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찮은 이유 때문이다.
“니가 쪼매 덩치 크다고 내게 반항하는 거가?”
따라서 덩치 크고 인상이 좀 그렇다면, 이건 상급생들한테 ‘동네북’이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어떤 그룹이든 대개 미련한 놈들이 한둘은 꼭 끼어있게 마련이다. 아프다고 엄살 부리면 덜 얻어터질 텐데도 마냥 꿋꿋하여 이게 상급자의 부아를 더 돋우는 것 같다.
덩치 큰 놈들 중에는 지독한 엄살꾸러기도 있다. 도무지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몽둥이로 때리기도 전에 바닥에 사정없이 나뒹구는 것이다. 하물며 살짝 건드려도 게거품을 쏟으며 ‘으메~! 나, 죽는다.’고 난리니 때리는 입장에선 여간 강심장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쩌지를 못한다.
미리 울음보를 터뜨리는 놈, 바들바들 떨면서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놈, 몸의 어디가 몹시 아프다며 ‘환자’인척 하는 놈, ‘잘못했슴다, 용서해주이소.’라며 미리 선처를 읍소하는 놈 등등…, 별 희한한 놈들이 다 있다.
빳따 때리는 선배들도 각양각색이다.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은 듯 매몰차게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선배가 있는가하면, 긴 잔소리 끝에 깐죽거리듯 때리는 선배도 있고, 금방이라도 때려죽일 듯이 엄포만 잔뜩 주다간,
“앞으로 잘할 끼가?”
“예~! 잘하겠습니다~”
복창으로 그만, 개운하게 끝내는 선배도 있다.
그런 반면에 기합 주는 선배 곁에서 같이 폼 잡는 ‘간신형’ 선배도 있다. 괜히 덩달아 따라와 ‘감 내놔라, 곶감 내놔라’하는 선배다.
사실 기숙사 1년 선배가 어딘가? 감히 대들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아무리 선배가 체구가 왜소하고 행동거지가 반 등신 같아도 절대로 맞먹거나 우습게봐서는 큰 코 다친다. 반드시 ‘형님’이라 칭해야하고, 무엇이든 지시하는 걸 거부해서는 안 된다.
나의 경우에는 ‘서울말 쓴다’는 이유 때문에 사정없이 얻어터진 적도 있었다. ‘얄미워서 때린다’는 것이 나를 때린 1년 선배의 변(辯)이었다. 물론 그 선배도 나처럼 덩치가 왜소했다. 아마 지보다는 내가 더 귀염 받았기에 질투라는 감정이 개입되었을 게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7회 -
< 저녁만과 >
저녁식사 후, 저녁만과 전까지는 거의 한 시간 넘게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었다. 보통은 농구장에서 편 갈라 농구를 하거나 철봉대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도서실에서 책을 읽거나 기숙사주위를 어슬렁거리기도 하였다.
기숙사주변은 인근 수도원과 함께 비교적 조경이 잘 되어있고, 잘 다듬어진 수목들이 제법 우거져있어 이른 봄이라하여도 산책코스로는 아주 운치가 있다. 특히 감나무, 자두나무, 호두나무, 살구나무 등 유실수들이 많아 이들 과실들이 무르익을 때면 ‘서리’에 나서는 악동(惡童)들이 많아 이를 지키는 수사님을 어지간히 골탕 먹였다.
이 긴 자유시간을 이용해 간땡이가 좀 부은 고참선배들은 몰래 울타리 너머 왜관읍내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물론 동동주 한 사발씩 들이키고 오겠지만….
왜관역 쪽으로 둘러쳐진 기숙사 가시철망 울타리엔 비밀스런 개구멍이 있다. 은밀하게 위장되어 언뜻 보이진 않지만 노상 출입하는 놈들에겐 아주 훌륭한 통로였던 것이다. 이 개구멍을 통하면 제법 널찍하고 밑으로 경사진, 잡풀이 우거진 공터가 나타나며, 쭉 타고 내려가면 경부선철로가 나타나는데 이들 철로는 대기차량이나 비껴가기위한 차량을 위해 실타래처럼 겹겹이 엉켜있었다. 이 많은 철로를 무단 횡단하여 건너서면, 비스듬히 왜관역사가 나온다.
이 왜관역사의 개찰구를 거치거나 역시 역사부근의 개구멍을 거치면 왜관읍내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해는 어느덧 기울어 대략 저녁만과 전후로 하여 날은 완전히 어둑해졌다. 저녁만과는 보통 8시에 시작되어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30분 이내로 끝난다. 그러나 만과 후에 ‘성가연습’을 할 경우는 연습하는 데만 한 시간이상 걸릴 때도 있다. 이 경우에는 대신 밤에 하는 자습시간이 없다.
부활대축일이라든가 성탄절, 사순절의 경우엔 며칠씩 걸려 성가 연습할 때도 많다. 똑같은 성가를 몇 번씩 되풀이해도 음정이나 화음이 안 맞으면 맞을 때까지 거듭 되풀이해야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가고 성가도 단조로운 곡일 경우, 앞에서 제아무리 목청을 높여 야단을 쳐본들 자장가소리처럼 귓가에 맴돌 뿐이다.
따라서 누가 이의를 제기하랴? 이 만과시간이 제일 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간임을….
아침미사 때처럼 수시로 일어났다 앉았다하는 것도 아니고, 성가를 목 터지게 부르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무릎 꿇고 앉아 기도만하니 무릎도 여간 아픈 게 아니고, 웅얼웅얼 기도문 외우는 소리가 마치 자장가소리인양 잠을 재촉하는 것이다.
특히 사순절의 경우, 만과는 엄청 지루하다. 그 시간도 오래 걸렸으려니와 만과이후 별도로 ‘예수의 십자가고행 길’을 따라가며 ‘14처 기도문’을 봉송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앉았다 일어 섰다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양쪽 무릎엔 시퍼런 멍까지 생기는 것이다.
저녁만과 이후로는 다음날 아침식사 전까지 절대적 ‘침묵의 시간’이 지속된다. 이 시간에는 사적(私的)인 대화는 일체 금지되고 동적(動的)인 활동도 제한된다. 단, 조용히 하는 운동, 즉 아령이나 담베르, 역도, 근력기, 철봉, 평행봉 정도는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1년 선배 ‘김종기’형이 육체미 가꾼다고 엄청 해대더라….
이러한 절체절명의 침묵을 ‘깜빡’잊고, 하물며 신입생주제에 똥오줌 못 가리듯, 복도에서 큰소리 냈다가는,
“쉿~!”
눈을 무섭게 치뜬 선배의 얼굴보고 쫄은 적이 한두 번이었겠나.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8회 -
< 밤 자습 >
저녁만과 이후로 밤 10시까지는 의무적인 자습시간이다. 혼자서 복습이나 예습을 해야 하는데 웬 잠이 그리 쏟아 붓는지 잠이 많은 나는 이 시간에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러한 늦은 시간에도 그러한 잠의 유혹을 뿌리치며 시종일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공부하는 진득한 친구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신기하였다. 김영남, 김석승, 손창원, 권순배, 이분도, 장상식이 그러하였다. 특히, 김영남과 손창원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똑바로 가누려 해도 내 의사대로 따르질 않는 것이다. 비록, 눈은 감더라도 머리라도 똑바로 버텨준다면 뒤쪽 감시자의 눈을 속여 얼마든지 달콤한 잠을 즐길 수 있으련만 머리는 자꾸 책상위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뒤쪽에 앉아 있는 박선택, 석호익, 박훈, 백영호, 김세호, 김종기, 정학용, 강대근, 이호, 최태해 등등 1년 선배들한테 괜히 찍혀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방아 몇 번 오가다 보면, 그만 책상위에 질펀하니 퍼질러지기 마련이다.
‘아이고~, 공부고 뭐고 잠이 최고다~!’
‘누가 뭐라 하든, 설혹 뚜드려 팬다 한들, 난 잠이나 잘련다.’
자포자기보다는 은근히 뱃장도 생기고, 더 눈치 볼 것 없이 편안한 자세로 고쳐 엎디며, 본격적으로 잠 속에 몰입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꾸 똥파리보다도 더 집요하고 귀찮게, 그리고 고약하게 잠을 깨우는 것이다.
처음엔 몇 번 머리를 ‘툭툭’ 치다가 의자를 뒤로 당겨 엉덩방아 찧게 하더니, 나중엔 목덜미에 주전자 주둥이를 갖다 대고는 찬물을 내리쏟아 붓는 것이다.
주전자 물은 목덜미를 거쳐 잔등이로, 또다시 엉덩이를 적시고 바닥을 홍건하게 적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전자 물은 1년 선배 박선택의 짓이다.
“킬킬킬~”
“히히히….”
“우헤헤헤~”
정신이 번쩍 들어 벌떡 일어서서 주변을 훑어보면 모두가 웃겨죽는다고 발광들이다. 기분이 썩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감히 대들만한 상대가 아니다.
“마~! 가서 디비 자라.”
자습실장은 안쓰럽고 또, 미안한지 들어가 자란다.
비실비실 일어나 침실로 향하지만, 그 어두컴컴하고 너른 침실이 예사롭지가 않다. 뭔가가 저 구석에서 ‘헬롱~!’거리며 ‘우적우적’ 걸어 나올 것만 같고, 허연 것이 허우적거리며 날아다니는 것만 같아 도저히 무서워서 혼자서는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다.
다시 자습실로 돌아가자니 그건 말도 안 되고, 모두 자습실에 모여 있는 까닭에 무덤처럼 적막감에 쌓인 넓은 기숙사 어디 한군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 도서실에 들어가 책을 읽으려 해도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더 서늘하게 할뿐이다.
‘괜히 나왔나 보다.’ 싶지만 다시 돌아가 본들 웃음거리밖엔 더 되랴 싶어 자습시간 끝나길 애타게 기다릴 수밖엔 없었다.
아~! 난생 처음 ‘고독’이란 걸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19회 -
< 취침 전 >
밤 10시가 되면 밤 자습시간이 끝나는 게 아니라 잠과의 지루한 전쟁을 끝내는 기분이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지만 그 쏟아지던 잠들은 어디론가 그 모습을 감춘다. 참으로 묘한 것이 오히려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지고 정신도 맑다 못해 ‘초롱초롱’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할일 없이 분주해지며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이 시간 역시, 기숙사 분위기가 하루일과 중 가장 활기에 넘치는 시간이다. 물론, 이 시간엔 잠자리에 들 사람은 들 수 있으나 대개 밤 12시가 다 되도록 침실 안은 거의 텅 비어있게 마련이다.
자습실은 자습실대로 공부버러지들이 몇몇 더 남아 있을 테고, 세면장에서는 샤워한다고 물 내려가는 소리로 요란하고, 도서실도 책 읽는 이들로 북적거린다.
화장실을 거쳐나가는 기숙사후문은 사생들이 기숙사내부로 들고나는 출입구로 신발장과 운동기구함이 놓여있는 조그마한 방을 겸하고 있는데, 이 방도 아령이나 담베르 등 근육 키우는 운동을 하기위해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하늘에 별들이 유난히도 반짝이고 보름달이라도 휘영청 밝다면, 대부분 잠자거나 실내에 머물러있기 보다는 괜스레 밖으로 꾸역꾸역 나오기 마련이다.
농구장에는 줄넘기를 하거나 서성이는 사람들로, 철봉이나 평행봉에는 ‘대차돌기’나 ‘오구리’를 하기 위한 사람들로 붐빈다. 천천히 기숙사주변을 돌며 영어단어를 외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둘씩, 셋씩, 아니면 네다섯씩 짝을 지어 비록 나지막하지만 때론 심각하게, 때론 시시덕거리며 ‘침묵의 시간’을 망각하기도 한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기차레일 마찰음과 경적음이 유난히 가까이 들리는 시간, 문득 떠나온 집과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르는 시간, 이러한 것들이 무르익어가는 밤하늘과 더불어 농구장주변을 수놓는 것들이다.
어느덧 흐르는 시간만큼 으슥해지면 하나, 둘…, 모두가 잠자리에 들 땐, 고요한 정적(靜寂)과 꿈이 교차하겠지?
이때를 생각하며 시 한 수를 읊어본다.
마오로동산에 올라
나는
마오로동산에 올라
밤하늘에 떠있는
저 별들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꿈을 꾸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리…
나는
마오로동산에 올라
온 누리 휘영청 밝게 비취는
저 보름달만큼이나
세상을 밝게 비취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리…
나는
마오로동산에 올라
무수한 사연을 싣고 질주하는
저 기차만큼이나
큰 그릇을 가슴에 품는
꿈을 꾸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무엇을 이루리…
********************************
만세에 왕 우러러
성마오로기숙사 - 그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片鱗)을 찾아서…….
- 제20회 -
< 아침청소 >
그러고 보니 ‘김소동’이란 2년 후배 말마따나 아침기상 때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부르던 ‘아침기도’ 노래가 생각난다.
“주여, 오늘 하루에 내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합하여 주께 드리나이다. 아멘~”
물론 이 노래는 기숙사졸업 이후로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지만….
어쨌든 기상해서 대충 얼굴을 씻고 나면, 각자 맡겨진 청소구역을 청소하게 되며, 청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0분 내외였다. 청소구역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변경되며, 날씨가 따뜻한 계절엔 야외청소당번이 단연 제일 인기가 좋았고, 반면 화장실청소를 제일 기피하였다.
실내 청소의 경우, 빗자루나 대걸레가 많질 않아 먼저 차지하는 게 주인이며, 그 때문에 다툼도 심심찮았다.
자습실은 A, B, C 세 개 구역으로, 침실은 A, B, C, D 네 개 구역으로 각기 청소당번이 따로 정해지며, 대부분 그 방에 소속된 사람이 맡게 되어있다. 그 외 성당, 사감실, 식당, 시청각실, 탁구장, 도서실, 복도와 지하실이 주된 청소구역이다.
야외청소는 농구장과 철봉대주변, 그리고 화단 등 기숙사주변을 대나무 빗자루로 쓸고 잡풀을 뽑거나 돌멩이 정도 치우면 되는 그야말로 제일 한량한 구역이다. 그러나 날씨가 아주 춥고 바람이 많이 불거나 비가 오면, 야외당번은 자연히 실내청소를 도와야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숙사에서도 제일 기피하는 청소구역이 단연 화장실이다. 화장실은 일층과 이층에 각각 하나씩 있어서 상, 하로 구분되어 구역을 정했다. 이들 화장실은 소변기나 대변기 모두 당시에 보기 드물게 하얀 수세식변기를 갖추고 있었다.
소변기는 꼭지를 누르면 물이 내려가고, 대변기는 머리 윗부분쯤에 커다란 저수조가 달리고, 그 저수조에서 늘어뜨린 쇠줄에 붙은 손잡이를 아래로 당기면 물이 변기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게으르고 대충하는 친구가 청소당번을 맡게 되면, 그 하얀 변기가 누렇게 찌들고 지린내가 독하게 배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숙사 화장실은 학교변소처럼 벽에 똥으로 칠갑되어 있거나 해괴한 낙서 따위는 일체 없었다.
그러나 아침마다 칸칸이 설치되어 있는 대변기들을 보면, 어김없이 내리지 않은 똥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그걸 일일이 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물을 내려야했으며, 특히 단단하고 굵은 것은 막대기로 잘게 으깨서 치워야했으니 그 짓도 보통 고역이 아니다.
내가 화장실 당번일 경우는 염산을 구해서 누렇게 따가리 붙은 것들을 녹여내고,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면 거짓말처럼 변기들은 누런색을 걷어내고 대신 반짝이는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말 이처럼 기분 좋고 개운한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따라서 청소한 보람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져 기분 좋게 배설하는 걸 지켜보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게 한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대청소였다. 보통 휴일 오전에 실시하는데, 기숙사실내는 모두 마룻바닥이라 일일이 왁스를 먹이고 마른걸레로 광을 내야하기에 그야말로 허리가 빠개지는 중노동이었다.
******* 성마오로기숙사 회고록 제1부 ‘만세에 왕 우러러’ 끝 *******
2001/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