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대일항쟁기 위원회>에 질의를 했는데
그날 곧장 답장이 왔습니다.
접수는 되었지만 신청서와 각종 자료의 도착 여부는 아직 확인 불가랍니다
내일 6일 월요일에 팩스와 등기 우편을 보낼 예정입니다.
내용은 아래에~~~
위로금 담당자 조사 4과 정원창
(전화: 02 - 2180 - 2658)(팩스 02 - 731 - 2576)
미수금 담당자 심사 3과 전영숙
(전화: 02 - 731 - 2525)(팩스 02 - 731 - 2577)
조사 4과 정원창 선생님 귀하
(전화: 02 - 2180 - 2658)(팩스 02 - 731 - 2576)
*** 총 3페이지입니다. 팩스와 등기 속달로 동시에 보내 드립니다 ***
① 접수번호 : 위로금(전북임실-12-0017) 미수금(전북임실-12-0002)
② 피해자(희생자) : 김 두 영
③ 신청인 : 김진호
더운 날씨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징용 피해자인 아버지 김두영과 관련해서 몇 가지 추가할 사항과
문의할 사항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위원회의 존재 여부와 역할에 대해 몰랐었고, 뉴스를 보고 6월 30일 마감 시한에 쫓기다 보니, 급하게 자료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접수 이후에도 추가로 발견되는 사항은 위원회로 보내면 된다고 위원회에서 알려주셔서, 이렇게 추가 내용을 보내드립니다.
추가할 사항 1은, 아버지의 창씨개명입니다.
위로금과 미수금 지급신청서에 <모름>이라고 적었는데, 아버지가 다녔던 <관촌공립보통학교> 졸업대장과 학적부를 <관촌초등학교>와 국가기록원 성남 <나라기록원>(원본 보관 중)에서 입수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창씨개명은 金本斗永입니다.
추가할 사항 2는, <등록기준지>입니다.
위로금과 미수금 지급신청서에 <확실하지 않음>이라고 적었는데, 일본에 관련 서류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일본측에서 좀 까다롭게 굴어서 자세히 조사를 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대부분 돌아가셨고, 살아계신 분들도 당시에 어렸거나, 주소 개념이 없고, 연로하시고, 당시의 서류들이 보관된 <관촌면사무소>가 6.25때 폭격을 맞고, 그 후 화재까지 발생해서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 보낸 서류에는 그 같은 정황을 자세히 적어 보냈습니다.
일본 총무성/후생성/일본연금기구(구 사회보험센터)/유초은행 등 4곳에 보낸 주소 관련 사항을 그대로 알려드립니다.
△ 父親の出生住所は下記のようです。徴用当時、この住所が本籍地として使われた可能性が高いと思っております。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福興里 236番地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복흥리 236번지)
△ 1941年、伯父の戸籍に載せられた父親の住所は下記のようです。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館村里 378番地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 378번지)
△ 徵用当時の住所は2つで、下記のようです。
-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瑟峙里 406番地, 又は323番地, 又は326番地,
-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新平面 虎岩里(=上泉里)
(法政里名は虎岩里で、行政里名は上泉里となっています。)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슬치리406/323/326번지 / 전라북도 임실군 신평면 호암리(상천리)
△ 現在, 韓国公式書類に記されている父親の本籍は1965年のことで、内容は下記のようです。
-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德川里(=市基里) 670番地(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670번지)
당시 상황과 관련된 궁금증 해소와 미수금 회수 등을 위해, 현재 일본에 편지와 서류를 보낸 상황이고, 2달 후에 연락이 온다고 합니다. 자료가 오면 추가로 접수를 하겠습니다.
문의할 사항은,
형제들이 지방과 서울에 흩어진 관계로, 준비 서류와 도장 등의 문제로 접수자인 큰형 김진호가 살고 있는 전북, 그리고 아버지가 평생 사셨던 임실에서 접수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서울에서 서류를 완비해서, 6월 25일 임실로 내려가, 임실군청에 접수를 하는 과정에서, 미수금 신청에도 인우보증을 서야 한다는 임실군 담당자(행정 지원과 이승규)의 말에, 허탕을 치고 다시 누나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류 등을 준비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던 3남 김진만은, 알고 있던 사실과 달라서 확인차 위원회에 전화를 해서, 미수금에는 인우보증이 필요 없다는 말을 재차 확인받고 위원회 담당자가 임실군청에 전화를 해달라는 부탁을 드렸고 위원회 담당자 분은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즉각, 임실군청 담당자에게 김진만은 다시 전화를 해서 준비한 서류가 완벽함을 알렸고, 임실군청 이승규 씨는 곧장 수긍을 했습니다(위원회에서 전화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이미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었습니다. 임실군청 이승규 씨가 무척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셨지만, 징용 관련 업무는 정확하게 모르고 계셨습니다.
다음날인 6월 26일, 다시 임실군청을 큰형이 방문해서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서류를 제출하고 접수증을 받는데 30분을 기다려야 했고 식사 시간과 겹쳐 접수증을 받지 못하고 왔습니다. 미안함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임실군청 이승규 씨가 등기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했지만 나중에 찾아가서 받기로 하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며칠 전, 7월 30일, 월요일에, 가족 모두가 휴가 기간을 맞춰, 접수증을 찾으러 임실군청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이승규 씨는 근무처가 임실읍으로 바뀌었고, 새로 일을 맞게 된 담당자는 접수증 출력을 하는 법도 모르고, 여기저기 전화하시고, 질문에 대답도 잘 못하시고, 엄청 착하고 친절하신 분이셨지만, 가족 모두, 서류가 제대로 위원회에 제출되었는지, 동시에 걱정되고 불안하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제출한 서류가 정확히 위원회에 접수되었는지 확인을 요청합니다. 8월 3일 홈피 <질의 응답>코너를 통해 질문을 드렸지만, 출장 중이시라 알 수 없다 했고,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을 하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질의응답> 2000번-작성자 김진만).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와 각종 행정 서류 등 위원회에서 요구한 모든 서류는 구비되어 제출했습니다.
다만, 저희가 나름대로 따로 마련한 서류가 있습니다. ‘가족이 드리는 편지’가 포함된, <이수례와 김복자의 증언 녹취록>(표지본문 합 15페이지)과 동영상 파일(CD)입니다. 아울러, 동영상에 나오는 인물들과 징용피해자인 아버지와의 연관성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따로 제출했습니다.
확인 요청 드립니다.
앞으로, 추가 자료 등은 정원창 선생님께 계속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더위 잘 이기셔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위원회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12년 8월 6일
징용피해자 김두영의 3남 김진만 드림
010 -
trini@hanmail.net
유족 대표 신청자 김진호 010
심사 3과 전영숙 선생님 귀하
(전화: 02 - 731 - 2525)(팩스 02 - 731 - 2577)
*** 총 2페이지입니다. 팩스와 등기 속달로 동시에 보내 드립니다***
① 접수번호 : 미수금(전북임실-12-0002) 위로금(전북임실-12-0017)
② 피해자(희생자) : 김 두 영
③ 신청인 : 김진호
더운 날씨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징용 피해자인 아버지 김두영과 관련해서 몇 가지 추가할 사항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위원회의 존재 여부와 역할에 대해 몰랐었고, 뉴스를 보고 6월 30일 마감 시한에 쫓기다 보니, 급하게 자료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접수 이후에도 추가로 발견되는 사항은 위원회로 보내면 된다고 위원회에서 알려주셔서, 이렇게 추가 내용을 보내드립니다.
추가할 사항 1은, 아버지의 창씨개명입니다.
위로금과 미수금 지급신청서에 <모름>이라고 적었는데, 아버지가 다녔던 <관촌공립보통학교> 졸업대장과 학적부를 <관촌초등학교>와 국가기록원 성남 <나라기록원>(원본 보관 중)에서 입수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창씨개명은 金本斗永입니다.
추가할 사항 2는, <등록기준지>입니다.
위로금과 미수금 지급신청서에 <확실하지 않음>이라고 적었는데, 일본에 관련 서류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일본측에서 좀 까다롭게 굴어서 자세히 조사를 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대부분 돌아가셨고, 살아계신 분들도 당시에 어렸거나, 주소 개념이 없고, 연로하시고, 당시의 서류들이 보관된 <관촌면사무소>가 6.25때 폭격을 맞고, 그 후 화재까지 발생해서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 보낸 서류에는 그 같은 정황을 자세히 적어 보냈습니다.
일본 총무성/후생성/일본연금기구(구 사회센터)/유초은행 등 4곳에 보낸 주소 관련 사항을 그대로 알려드립니다.
△ 父親の出生住所は下記のようです。徴用当時、この住所が本籍地として使われた可能性が高いと思っております。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福興里 236番地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복흥리 236번지)
△ 1941年、伯父の戸籍に載せられた父親の住所は下記のようです。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館村里 378番地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 378번지)
△ 徵用当時の住所は2つで、下記のようです。
-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瑟峙里 406番地, 又は323番地, 又は326番地,
-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新平面 虎岩里(=上泉里)
(法政里名は虎岩里で、行政里名は上泉里となっています。)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슬치리406/323/326번지 / 전라북도 임실군 신평면 호암리(상천리)
△ 現在, 韓国公式書類に記されている父親の本籍は1965年のことで、内容は下記のようです。
- 全羅北道(全北) 任實郡 館村面 德川里(=市基里) 670番地(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670번지)
당시 상황과 관련된 궁금증 해소와 미수금 회수를 위해, 현재 일본에 편지와 서류를 보낸 상황이고, 2달 후에 연락이 온다고 합니다. 앞으로, 추가 자료 등은 전영숙 선생님께 계속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더위 잘 이기셔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위원회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12년 8월 6일
징용피해자 김두영의 3남 김진만 드림
010 - tri@hanmail.net
유족 대표 신청자 김진호 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