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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구노력(自救努力)
대한중석은 2개의 큰 사업소가 있는데 상동광업소와 초경사업본부다.
상동광업소는 텅스텐 원광을 채굴하여 정련(精鍊)과정을 거쳐서 텅스텐 정광(精鑛)을 생산하는 사업소이며 대구광역시에 소재하는 초경사업본부에서는 1000여명의 종업원이 정광을 사용하여 초경공구 등(내마모, 내열, 절삭, 중합금 등)의 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소다.
초경사업본부는 초기 단계부터 적자(赤字)에 시달렸지만 기술이 향상되고 흑자로 전환되어 형님 격인 상동광업소가 어려움에 직면하자 동생 격인 초경사업본부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상동광업소는 자체에서 번 돈으로 종업원 급여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상동광업소는 텅스텐 시세 하락이 시작되고 단기간 내에 회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꾸준히 인력과 생산을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부속병원 폐쇄, 겨울철 난방 조정 등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기본운영경비까지 절감하고 망초, 규사 생산 등 연계 사업도 추진하며 자구노력을 꾸준히 진행해 왔으나 “상동광업소는 운영하면 할수록 적자가 누적된다. 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부득이 상동광업소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노동조합에서는 쟁의에 돌입했고 “생산재개”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과 타당성이 없으므로 퇴직위로금을 많이 지급해 줄 것과 많은 종업원이 대구 초경사업본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종업원들은 광산 안전모에 cap lamp를 장착하고 회사 통근버스를 운행하여 대구 본사로 가서 시위를 했고, 수차례 시위와 협의를 진행한 끝에 퇴직위로금 지급과 기술,기능직 사원은 최대한 대구 초경사업본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외의 종업원은 모두 노사합의로 결정한 날짜에 사표를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종업원들이 제출한 사표는 경비원 포함 모두 9명만 제외하고 모두 수리되었고 내가 제출한 사표는 반려되면서 상동광업소 정리(整理)를 마치고 본사 인사계장으로 근무를 하라는 발령을 받았다
노사합의에 의한 퇴직위로금, 퇴직금, 급여 등을 종업원의 편의를 위하여 가급적 빨리 지급할 수 있도록 밤늦도록 작업했고, 회사에서는 급여규정을 적용하여 사표가 수리되면 15일전에 지급하면 지급하던 퇴직금을 즉시 지급했다.
상동지역 인원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줄기 시작했고 경기에 민감한 유흥업소는
폐업을 한지가 오래되었다.
퇴직 종업원들에게 지급할 모든 임금의 정리가 끝나자 본사에서는 “광업소폐광절차”를 진행하기 위하여 “상동광업소 정리팀장”을 임명해서 내려 보냈고 정리팀장은 TF(Task Force)팀을 구성하여 폐광 및 후속조치를 진행했다.
(예비군 부대 해체, 폭발물과 위험물 등 인허가 폐지, 각종 자재류, 광산시설 방치시 위험요소 제거, 사택 철거 등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은 노사합의 이전부터 폐광에 대비하여 조금씩 진행하여 왔으나 TF을 운영하여 한 달여에 걸쳐서 대부분 정리했다.)
■ 고향을 떠나다
상동광업소 정리팀에서 임무를 마치고 발령지인 서울 명동에 소재한 임지(任地)인 본사로 출발하기 전날 아침에 세송에 모신 선친 묘소에 성묘를 갔다. 성묘할 때는 선친과 대화하듯 혼자서 말을 하는 버릇이 나에게 있다. 성묘를 하면서 선친 산소 분봉에 돋아난 잡풀을 돌아가면서 하나씩 뽑으면서 지금까지 회사에서 있었던 일과 내가 본사 발령을 받아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다.
오후에는 회사에 들어가서 상동광업소에 취업하여 첫 출근하였던 ‘태백갱“을 찾아가서 잠시 두 손을 모으고 6년 이상 광부로서 생활했던 나날을 추억하며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근무할 수 있었고 평생직장의 시발점이 태백갱에서 시작된 것에 대한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텅 빈 본관에 내려와서 내가 일했던 자리에 앉아서 총무과장 자리를 쳐다보니 그 자리에 과장님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총무과장님도 사표가 반려되었지만 수많은 종업원이 퇴직한 상황 속에서 종업원의 인사를 관리하던 간부사원으로 회사의 배려를 받아드릴 수 없어서 회사의 반려를 거부하고 퇴직한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마치 선장이 난파선과 운명을 같이 하듯이…….
한때 2000명이 훨씬 넘던 상동광업소는 7명만 남겨두고 문을 닫았다.
본사에서 사표를 반려한 9명중 과장님은 퇴직하셨고 나는 본사로 발령이 났고 나머지 7명중 관리담당 1명, 경비원 6명(1교대 2명)이 상동광업소에 잔류했다.
고향을 떠나는 날 정문초소에 근무하는 직원과 작별 인사를 하고 정문 앞 도로 중앙에서 회사를 향하여 감사의 목례를 하고 이어서 “이상구선생송덕비” 앞에서도 감사의 목례를 올리고 본사에서 파견되었다가 복귀하는 직원의 차에 동승하여 만 40세가 되던 해 고향을 떠나서 서울로 향했다.
■ 서울 본사 근무
강원도 오지(奧地) 출신이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명동 본사에 올라왔다.
본사의 위치는 외환은행 옆이고 명동성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적한 고향, 그것도 사람들이 거이 떠나가고 썰렁한 곳에 있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혼잡한 명동에서의 근무가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에 본사가 대구에 있었는데 서울로 본사를 이전한 것이다.
(본사는 회사 창립과 동시에 서울 명동 현재의 위치에 있었으나 정부의 “지방균형발전” 정책에 의하여 1974년도에 10만평이 넘는 대구 초경사업본부 부지에 본관을 지어서 이전했고, 그 이후에 본사로 쓰던 건물은 서울 사무소와 영업소로 사용하여 왔다.)
본사가 서울로 이전되자 본사 직원들은 졸지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서 가족과 떨어져 직장생활을 해야 했고 주말부부를 해야 되는 등 불편이 많았다.
(그들은 “사장님의 자택이 서울이라서 자기의 편의를 위해서 본사를 서울로 옮겼다” “군 장성 출신들은 자기 밖에 모르고 직원을 사병 대하듯 한다.”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했다.)
나는 모교 선후배와 몇 명의 직원이 함께 숙소로 쓰고 있는 회사 아파트에 배정받아서 생활했다. 그곳은 강북 외곽인 “번동”이라는 동네인데 마을버스를 타고 20여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숙소에서 회사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그 시간은 고향에서 영월을 갈 때 걸리는 시간과 같다. 한 마디로 출퇴근하는 것도 고생이었다. 그러나 선후배와 같이 출퇴근하니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 부여된 업무는 상동광업소와 달리 노무업무는 노무담당 부서에서 전담해서인사업무를 수행하면서 필요시 노무업무를 지원하면 되므로 여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청정지역에서 40년을 살다가 공기도 나쁘고 복잡한 명동에서 근무를 시작하기부터 환경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두통에 시달렸다.
치료 방법은 오직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판단하고 환경에 익숙해지고자 퇴근 후에는 명동성당 근처에서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들어가곤 했다. .
본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일본 회사 “이토만 스미토모” 한국 지사에 간부사원으로 근무하는 동창이 있었다. 그는 내가 서울 환경이 적응이 되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점심시간에 자주 우리 회사를 찾아와서 점심을 사 주면서 대화를 하며 내가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친구들은 동창회 때 좋은 장소를 마다하고 우리 회사 근처에 있는 “산정”이라는 식당에서 동창회를 계속했다. 그것은 나를 위한 배려였다.
내가 서울 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근무하는 선후배의 도움과 친구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인사서류를 뒤적이다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발견했다.
상동광업소는 기능, 기술, 연구 인력이 “병력특례”의 적용을 받아서 현역 입대를 하지 않고 해당 업체에 근무하면서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받으면 군복무를 마칠 수 있었는데 대구 공장에서는 병력특례를 받는 종업원이 한 명도 없었다.
공장 인사계장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몇 년간 꾸준히 병력특례를 신청했지만 “산업자원부”로 부터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공문을 계속 접수했다고 하면서 지금은 포기하여 아예 신청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사부장님 말씀도 공장 실무자와 같았다.
병력특례에 관한 법률, 규정, 예시 등을 새롭게 검토하고 나서 부장님께 “서류로 신청해서 안 되면 제가 직접 과천 청사에 찾아가서 신청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출장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부장님께서는 “가 봤자 안될 텐데…….”하시며 나를 보시더니 진행하라고 말씀하셨다.
과천청사에 들리니 지방 군수와 동급인 서기관급 공무원 모두가 작은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영월군청 군수실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그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
담당 사무관에게 회사의 작업 공정과 그 공정에 투입되는 경험 있는 기능 인력의 필요성을 간곡히 설명하고 의견을 주고받는데 사무관 뒤 책상에 앉아 계시던 서기관이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듣고 우리와 함께 의견을 나누고 나서는 잘 알았다고 하시면서 “다음에 신청을 해 보라”고 하셨다.
이듬해 병력특례 신청이 있었는데 우리 회사가 “병역특례 기업체”로 승인되고 공장에서 신청한 병력특례인원은 모두 승인되었다.
❏ 듣도 보도 못한 놈
총동문회 망년회에 참석했는데 회의가 끝나고 술을 한잔하다가 보니 1994년 정부의 민영화 정책으로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이 “거평”이라는 작은 회사에 인수되어 민영화된 사건이 화재로 올랐다.
내가 앉은 좌석 옆은 대선배님들이 모인 술자리인데 선배님들의 대화중에도
대한중석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님 한 분이 목소리를 높여서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대한 중석을 인수했다 ! 포철 같은 회사에서 인수를 해야지 이게 될 말이냐 !”하시며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분개하셨다. 그 선배님은 아마도 대한중석에 다니셨던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 선배님만큼 “거평”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게 우리 회사가 인수된데 대하여 분개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분개함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한중석이 민영화되고 군 장성 출신이던 사장님과 임원들이 모두 물러났기 때문이다. 대한중석이 군 출신을 경영진으로 두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하잘것없는 거평이라는 작은 회사에 인수되는 수모는 면했을 것인데 아쉬울 뿐이다.
(거평그룹은 대한중석 사장을 공채로 뽑았다. 그분은 삼성전자 임원, 중앙일보 부사장을 역임하였고 241 : 1의 엄청난 경쟁을 뚫고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룹에서는 대한중석을 주력 기업으로 하여 M&A를 통하여 사세를 확장하여 나갔다)
❏ 점령군
거평이라는 회사는 부동산 시행과 건축을 주력으로 하고 작은 공장 몇 개를 운영하고 있는 중소기업이다.
그러한 회사가 대한중석을 인수했으니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풍자한 말이 매스컴을 통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대한중석을 인수한 거평은 대한중석 자산을 담보하여 은행에서 확보한 자금으로 “포스코켐” 등 우량 기업도 인수했지만 대부분 인수한 회사는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하거나 부도 직전의 회사였다.
항간에 거평그룹 회장을 M&A의 귀재라고 했다. 그분은 대한중석 자산을 담보로 하여 대구에 있는 금속공업고등학교를 포함해서 10곳의 회사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대한중석을 인수한 거평은 대한중석 각 부서를 실사(實査)를 했다. 표현하기 좋아서 실사이지 인수분해를 간신히 푸는 사람에게 미적분을 풀어 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패전국가에 점령군처럼 폼을 잡고 내려왔지만 실사과정에서 우리 회사 업무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원가계산서, 운영계획서, 심사분석보고서, 표준작업지침서 같은 업무는 거평에서는 해보지 않았고 그 업무 자체가 없다고 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내려왔던 점령군(?)들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음을 알고 이틀째 되는 오후에 철수하고 경리부문에 몇 명이 남아서 자금의 집행과 흐름을 실사했다.
인사 총무 부문은 우리 부장님이 그룹과 소통을 잘해서 점령군들의 실사를 면했지만 단순한 인사통계자료는 제출했다.
기업에서는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당연하듯이 생산을 줄이고 인원을 감축한다.
이러한 계획과 실행은 보통 기획조정실이나 관리조직에서 하는데 거평 사장의 친조카며 실세인 기획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한중석의 회사의 상벌대장을 지참해서 자기 방으로 오라는 것이다. 이는 마침내 종업원의 상훈(賞勳)보다는 징계를 참고해서 필요시 종업원을 감축하는 자료로 사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종업원의 징계자료는 결코 제공할 수 없어서 상벌대장에서 징계대장은 분리하고 상훈대장만 지참하고 갔다. 그 자료는 대한중석 자체에서 활용하면 되고 그룹까지 제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기획실장께 “상동광업소 쟁의행위가 있을 때 인사부문의 몇몇 자료가 분실되었는데 그때 징계대장도 분실되었다”고 거짓 설명을 했다.
기획실장은 “쟁의가 있다 하더라도 인사부서에서 가장 먼저 쟁여야 할 자료를 소홀히 했다”고 언급하기에 제 잘못이 크다고 답변했다. 기획실장은 ”상훈대장“은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라고 했다.
❏ 상동 석회석 공장
계장급 중에서 유일하게 인사계장은 과장, 부장의 결재를 득한 후 필요에 따라서 사장 결재를 대면해서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장님께 결재를 받으러 들어가니 마침 잘 왔다고 하시며 상동광업소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사장님께서는 상동광업소에서 석회석 사업을 하는 것을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하시며 상동에 대한 궁금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여러 가지를 질문하시기에 내가 아는 범위대로 말씀드리고 ”상동광업소를 버리다시피 하고 나온 이후 침체된 지역의 경기를 조금이라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석회석공장이 건설되었으면 좋겠다. 고 내 소망도 곁들여 말씀드렸다.
그 후에 선광장과 화공공장 부지에 석회석 가공 공장을 설립하여 석회석 원광을 가공하여 상품화한 후 판매했고 20여명 가까운 상동광업소 퇴직자들이 석회석 사업에 종사했으나 몇 년 후 경제성이 없어서 가동을 중단했다.
(상동광업소 지역의 지질 구조는 식물이 생육하는 지표 아래 석회석 층이 있고 그 아래는 규암층 있는데 텅스텐은 규암 층에서 채굴했다. 상동광업소는 텅스텐에 비하여 수익성이 현저히 낮은 석회석에 매력을 두지 않았다)
❏ 간부사원
사장님께서 며칠에 걸쳐서 행정직과 영업직 계장급에게 고기 집에서 점심을 사시며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역대 사장님들께서 부장급 이하 사원과 얼굴을 마주하고 별도로 식사를 하신 일이 대한중석 창립 이후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 각자에게 업무 추진시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질문하시고 회사 발전을 위한 의견도 제시하라고 하시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대화의 방향을 업무가 아닌 것으로 바꾸어 “군자삼락(君子三樂)이 무엇인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의 최종 승자는 누구며 가장 큰 전투는 어떤 전투인가?”를 묻기도 하셨다.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 했다. 그것도 질문 전체의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군자삼락”에 대하여 답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백수 생활을 할 때 삼국지는 물론 한글로 번역한 맹자(孟子)를 읽어본 적이 있어서 운수 좋게 질문 모두를 답을 할 수 있었다.
사장님과 식사를 한 시점에서 열흘 정도 지났을 때 인사과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대졸 계장급 사원들은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지만 고졸인 나는 대졸 출신 계장급이 대부분 차지하는 과장 승진에 대하여 꿈도 꾸지 않았다.
총무부장님이 임원 Tea Time에 참석하고 나와서 내 옆으로 오시더니 나를 “박 과장”이라고 호칭을 하면서 축하한다고 하셨다.
무슨 영문이지 몰라서 부장님 얼굴을 바라보니 “Tea Time에서 인사과장에 보임할 적격자를 사내 계장급 사원들 중에서 심사했는데 박계장이 적임자로 결정되었다”고 하시며 즉시 “승진발령”을 기안하여 사장님 결제를 맡고 그룹에 보고하라고 하셨다.
승진을 증명하는 사령장을 가지고 집에 내려가서 이 소식을 어머니와 가족에게 보여주었더니 모두 좋아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자식이 과장이 되어서 기쁘지만 그것보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사원이 되었을 때가 더 좋았다”.... 이러한 말씀은 계장 승진을 해서 말씀드릴 때도 하셨다.
상동에서 정규직 사원이 되기 전까지 어렵고 궁핍한 환경 속에서 우리 집을 이끌어 가신 어머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장으로 승진 후 3년이 되지 않아서 인사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어서 총무부장이 공석이 되자 사장님은 별도로 총무부장을 선임하지 말고 나에게 겸직을 하라고 하셨다.
그 시점에 기구조직 개편하여 우리 부서를 인사총무팀으로 개칭했다.
(나는 시험과 승진 운이 좋았다. 주임승진시험은 1차에 불합격하였지만 그 후에는 계장시험까지 단번에 합격했다. 운이 좋게 아는 문제가 대부분 출제되어 덕을 봤다, 간부사원 승진도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은 퇴직을 했고 회사에 숨은 인재들은 발현(發現)하지 않았기에 내가 승진을 한 것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국내 일류대학 출신이 농담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박부장보면 열 받는다. 나는 일류대학 출신이고 당신은 산간 오지의 작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자네와 내가 같은 부장인 것도 열 받는데 끗발은 당신이 더 있으니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노름판에서 타짜도 운수가 좋아서 끗발이 잘 나오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 IMF와 대한중석
거평그룹이 사세(社勢)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한중석을 입보(立保)케 하거나 자산을 담보로 하여 은행에 거액의 대출을 했고, 그 돈으로 M&A를 하여 한 때 재계 30위의 기업이 되어 기념행사를 하고 축제 분위기에 젖기도 했으나 그 분위는 1년을 넘기지도 못하고 IMF가 시작되자 역전되어 부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룹 내 10여개의 기업체 중에서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회사는 “대한중석”과 “포스코켐” 뿐이고 여타 회사는 IMF가 시작되고 3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가장 큰 충격은 거평에서 대한중석을 입보 또는 담보로 세워 은행에 대출받은 자금을 변제할 능력이 없어지자 불똥이 대한중석에 튄 것이다.
급기야 거평그룹은 은행 대출금 변제를 위하여 멀쩡한 대한중석을 외국기업에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다. 불미스럽게도 IMF로 인하여 대한중석이 외국에 매각되는 1호 기업이 되었다.
“점잖은 양반이 망신살이 들면 시정잡배에게 우습게 망신당한다. 고 하더니 우리 회사가 그 꼴이 되어 듣도 보도 못한 작은 회사에 팔리지 않나, 이번에는 국내 기업도 아닌 외국기업에 팔리게 되었으니 이제는 기업 혼(魂)도 없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에 몹시 괴롭고 분통이 터졌다.
대한중석은 이스라엘에서 대한중석과 같이 초경공구를 제조하는 ISCAR라는 회사에서 적극 매수 의향을 표명해서 그 회사와 MOU를 체결하고 양사(兩社)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김&장법률사무소에 위임하여 매수 절차를 진행했다.
인사총무부는 고정자산, 쟁송사건, 인력, 미지급임금 등의 업무에 대하여 김&장법률사무소의 실사를 받았다. 일주일 정도 법률사무소를 드나들면서 담당 변호사와 일을 하면서 대한중석의 향후 어떻게 될 것 같냐 고 질문을 했다.
일본의 초경공구 회사와 이스라엘 현 회사가 대한중석을 서로 인수하려고 경쟁이 붙었고 일본에서 경쟁에서 밀렸다고 하면서 참으로 아까운 회사가 외국에 매각되게 되어서 본인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다.
■ 이스라엘 ISCAR사 대한중석 인수
세계2대 금속 재벌인 IMC(International Metal Working)그룹의 주력회사인 이스라엘에 소재하고 있는 “ISCAR社”는 “거평그룹”과 대한중석 자산 중 “초경공장과 지방영업소”만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상동광업소와 서울 본사 그리고 강원도 등에 산재한 임야와 토지는 인수하지 않는 계약이다.
그 계약 속에는 종업원의 퇴직금 등 모든 임금 채권과 채무를 이스카사에서 책임을 지기로 했고 계약일자를 기준하여 대한중석에 소속된 인력을 모두 고용하기로 했다. 계약체결로 인하여 대한중석은 이스카(ISCAR)사에 매각되어 우리나라 기업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사명도 대구텍(TaeGuTec)으로 바뀌었다.
(대한중석은 대한민국 최대 기업이었고, 국내 수출의 70%를 담당하며 경제개발에 기여했고, 포항제철 설립시 30% 가깝게 투자했던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기업인데 수세적(守勢的)경영으로 일괄해 오다가 작은 중소기업인 “거평”에 인수되었고, “거평”의 무분별한 사세확장에 입보와 담보를 제공하여 외국기업에 다시 인수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종업원들은 회사에서 지시에 순종하며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해 왔는데 돌아온 결과는 분노와 비통한 마음뿐이었다. 기업의 의무는 영구히 존속하며 발전하는데 대한중석은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 대구텍(TaeGuTec) 본사 근무
이스카(ISCAR)사에서는 대한중석을 인수하자 본사는 대구로 옮겼다.
회사의 사장은 두분 이셨다. 이스카사에서 임명하여 부임하신 이스라엘 국적의 유대인 사장과 1960년대 상동광업소에 수습사원으로 오셔서 전무이사까지 하시고 퇴직하셨다가 이스카사에서 채용한 한국인 사장이다.
한국인 사장은 행정과 국내 영업을 관장하셨고 나머지 업무는 유대인 사장이 관장하셨다. 물론 대구텍의(TaeGuTec) 총괄 책임자는 유대인 사장이다.
이스라엘 기업문화는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몇몇 있었다.
ISCAR에 근무하는 박사들은 학위 취득 후 5년 정도 박사 예우를 하고 그 이후에는 예우를 중지하는데 그 이유는 5년이 지나면 박사 논문에 실린 기술이 보편화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기업뿐만 아니라 의료계 경제계 법조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박사 학위 취득자를 영구히 예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동안 예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기업체에서 인사 총무 경리 자금 기획 등 제반 행정직은 만 45세가 지나면 두뇌 활동이 저하되고 창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45세가 지나면 보직을 변경하거나 이직을 권유한다고 한다.
종전 대한중석은 업무와 관련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정년까지 “박사수당”을 지급하고, 행정직에 근무하는 부장급 사원들의 평균연령은 모두 45세가 넘지만 ISCAR처럼 보직별 연령제한은 없다.
(ISCAR의 기업문화와 인사제도는 우리회사에 묵시적으로 일부 적용되어 행정부문의 45세 이상 되는 부장급 사원들은 기업인수 초기에 보직변경 이직 권유 등의 조치를 우려하여 스스로 퇴직했다. 나도 당연히 대상자이었으나 회사가 안정될 때까지 처리할 일들이 많으니 잠정기간 근무를 해달라고 하여서 근무를 했다.
박사들에게 지급하는 “박사수당”은 대한민국의 노동법과 취업규칙에 특별한 이유 없이 근로조건을 저하할 수 없음을 설명하여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는 대신 박사들은 연구소에만 머무르지 말고 현장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대폭 늘리라고 했다.)
어느 날 서화(書畫)를 정리하던 직원이 수많은 그림 사이에서 상동광업소 전경을 그린 큰 그림을 발견했는데 그 그림은 1970년도 상동광업소 전경을 섬세하게 그린 큰 유화(油畫)였다.
한국인 사장님께 보고했더니 그 그림은 사장실과 회의실에 번갈아 가며 걸었던 그림이라고 하시면서 “지금은 대한중석이 없어졌고 상동광업소도 폐광이 되고 회사도 바뀌었으니 그 유화는 상동 사람 박상동이가 가져야 하지 않겠어?” 하시며 “주인은 박부장이야”라고 하시며 선물로 주셨다.
(그 유화는 현재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그 그림은 중앙대 미술학과 교수를 지내신 장리석 교수께서 1970년에 상동광업소 요청으로 객실에 머물면서 구래초등학교 옆 민가 뒷산에서 광업소 전경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ISCAR사는 대한중석을 인수한 후 종업원의 가슴에 있는 대한중석의 흔적을 하나하나 서서히 지워 나가게 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먼저 회사를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으로 바꿨다. 본관과 공장 등 모든 건축물을 개축하거나 리모델링 하였고 식당도 3개소로 증설하여 종업원의 식당 접근을 용이하게 했고 특히 배식은 자유 배식이 아니고 테이블에 앉기만 하면 식당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음식을 차려주는 시스템으로 운영했다.
종업원 대부분을 이스라엘에 소재한 이스카사에 견학을 시키면서 유럽을 경유해서 관광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종업원 가족 모두가 경주 보문단지 현대호텔에 투숙하며 경주 관광을 하도록 배려했다.
회사의 정성과 배려를 통하여 종업원들의 마음은 거이 평정을 찾았고 회사 매각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안전사고 발생을 우려했는데 다행히 안전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끔 ‘표준작업지침서’와 “인력배치자료”를 들고 현장을 방문해서 보완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현장에서 담당자나 부서장과 협의하기도 하고, 공장 별 공정별 필요인력을 산출하기도 하는데 현장에서 만난 부서장 몇 명이 조심스럽게 이러한 말을 했다.
“부장님이 공장에 들어오면 비상이 걸립니다. 무슨 이유로 비상이 걸리냐 고 물었더니 “전에는 공장에 인사부장이나 총무부장이 들어오면 인원을 줄이거나 문방구 등을 줄이거나 뭐든지 줄여서 그렇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대한중석 시절에는 주인의식, 원가절감, 생산성향상 등을 입에 달고 일했는데 결과는 거평에게 먹히고 외국기업에게 팔리는 꼴이 되었으니 내가 재임하는 기간에는 회사 방침은 할 수 없지만 내 스스로 인력을 줄이거나 여타 지급 물품을 줄이는 작업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재임기간 중 그 약속을 지켰다.
인사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인력을 채용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러나 회사의 생존을 위하여 부득이 인원을 정리할 때는 가슴이 아프다. 사적(私的)인 관점에서 보면 그 들은 모두 내가 아는 종업원이고 그 중에는 금쪽같은 우리 동문들도 있다.
IMF로 인하여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철광과 자동차, 조선, 선박 등 기계공업의 경기가 바닥을 치자 중합금과 초경공구 시장이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회사가 계속하여 어려움에 직면하자 내가 하기 싫은 인력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대한중석은 ISCAR사에 인수되기 전에 이미 구조조정을 시행하여 왔다.
신규채용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금지했고 모든 부문에서 경비 등을 긴축하며 버티어 왔었다.
가끔 판매한 제품이 수금이 되지 않고 부도를 맞은 거래처가 많아서 종업원 급여를 제대로 줄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보유한 유동성으로 해결해 나갔다
대한중석에서는 인력구조조정시 조정대상이 되는 종업원을 강제퇴직 시키지 않고 담당하는 업무가 없는 보직을 부여하여 사내외 교육을 시키면서 IMF 늪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인력구조조정은 해당부서에서 올라온 자료와 인사부서에서 관리하는 자료를 토대로 심사하여 간부사원은 “조사역” 사원은 “조사원”이라는 보직을 부여하고 업무에서 배제 하는 발령을 낸다.
서울 지역의 인력구조조정은 이미 시행했고 대구초경공장은 거평그룹과 ISCAR사 간의 M&A가 확정되지 않고 한 달 이상 진행 중이라서 조정 작업을 잠정 중단한 상태였다.
ISCAR사에서 회사를 인수하고 나서도 회사 매출은 하향되고 경기는 호전되지 않았다. 외국인 사장께서도 생산량에 비하여 인력이 모(母)회사인 ISCAR사 보다 30% 정도 많다는 언급을 몇 차례 하셨고 그 말씀은 한국인 사장께서도 동의하셨다.
두 분 사장님으로부터 대한중석에서 진행하다가 잠시 중단한 인력구조조정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진정 인사부서에서는 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작업을 다시하게 되었다.
외국인 사장님께 결재를 받는 문서는 모두 한글로 작성하고 통역을 통하여 내용을 설명하는데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결재를 받는 직원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한중석 때 진행하다가 잠정 중지한 인력조정 및 배치 계획서를 지참해서 사장실에 들어갔다. 사장님과 책상을 나란히 하여 근무하는 통역담당직원에게 통역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핵심사항을 기록한 메모를 주면서 기안문서 중에서 다음 사항은 특별히 강조하도록 통역을 부탁했다.
“강제퇴직 조치는 하지 않는다. 담당업무에서 배제하되 급여의 감소는 없다. 조정된 직원은 담당업무가 없는 보직으로 발령한 후 사내외 교육을 이수토록 한다. 인력조정은 30%를 목표로 하되 3단계에 걸쳐서 진행한다. 조정인력에 대한 교육계획은 조정이 종료되면 별도로 보고 하겠다. 회사 상황이 호전되면 인력 조정을 즉시 중지하고 조정된 인력은 전원 복귀시키되 원 직에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통역에 의존하여 사장님께 1시간여 인력구조조정 계획을 설명을 하면서 서로 의견이 대립되는 것도 있었지만 사장님은 모두 수용하셨고 결재 란에 서명을 하시고 악수를 청하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벼운 영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Thank you Mr. Park. Your manpower plan is great. Please do your best ”
결재 서류를 들고 사장실을 나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인력구조조정을 시작하자 구조조정에 포함된 직원 몇 명은 회사에서 난동을 부리며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기도 했고 노동조합의 저항도 심했다. 구조조정은 전체종업원의 10%미만으로 진행했다. 1차 구조조정에 포함된 직원들은 종전 대한중석에서 시행했던 구조조정 때와 같이 경기 호전시까지 기다리지 않고 모두 스스로 퇴직했다.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노동조합과 회사는 쟁송하게 되었고 행정법원에서 회사의 승소로 소송은 종결되었다.IMF는 1997년11월에 시작되어 2001년 8월에 종료되었고 1999년도부터 기계 금속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생산량을 늘리고 부족한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
■ 퇴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텅스텐을 바탕으로 하는 대한중석과 ISCAR에서 30년 가깝게 근무하고 퇴직했다. 내가 어려운 시기를 지낼 때 용기를 주시고 격려해 주신 분들과 직장 선후배 그리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오랜 직장생활을 무리 없이 잘 수행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사직서를 쓰는데 지금까지 나를 항상 사랑과 격려로 지켜 주신 하나님과 내가 존경하는 어르신 그리고 나의 업무상 지시를 순종하며 잘 받쳐준 훌륭한 직원들에게 대한 감사가 마음이 가득 찼다.
텅스텐은 내 인생과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고마운 광물이다.
텅스텐으로 인하여 나는 상동에서 태어났고, 상동에서 학교를 다녔고, 상동에 위치한 상동광업소에 입사하여 궁핍하고 어려운 시절을 탈피하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텅스텐으로 인하여 선친의 유언을 지킬 수 있었다.
“ 우리 형제는 모두 건강하며, 어머님이 천수를 다하시도록 자택에서 봉양(奉養)했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있으며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 무렵 모두 중산층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격려금을 지급했고 대구텍(TaeGuTec) 협력업체(인력파견)에 취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2년간 근무하고 어머니와 처 자식이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자택(평택)과 직장이 원거리라서 고향을 떠난 후 계속 주말, 월말 부부를 했었는데 이제는 가족의 얼굴을 매일 보면서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도 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大韓重石 株式會社 年表
■ 1916 노두발견(황순원)
■ 1943 선광장 준공
■ 1947 중석 최초 미국 수출
■ 1951.12. 1. 미군 상동 주둔(상동광업소 경비)
■ 1952. 4. 1. 한미중석 협정 체결 (1954. 3. 31까지)
■ 1953.10.30. 채광장비 반입(Slusher. Loader. 철광차)
■ 1954. 1. 20. Locomotive운행(갱내 운반 작업 기계화)
■ 1954. 4. 1. 상동 주둔 미군 철수(한미중석협정 종료)
■ 1954. 4.27. 상동학원 설립(상동 중학교 시설)
■ 1958. 1.24. 만항 탄광 채탄(도급계약)
■ 1959. 5.20. 화공공장 준공(D/B)
■ 1959. 7. 1. 본사 신축 기공(서울 중구 명동 1가 10번지)
■ 1962. 5.10. 금속제련종합공장 기공(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 1965. 1.30. 권투팀 창단(김기수 선수 입단 – 1966.6.25. WBA 타이틀 획득)
■ 1965. 3.31. 주한미국대사(駐韓美國大使) Winthrop G. Brown 상동광업소 방문
■ 1968. 3. 6. 포항제철 투자 개시
■ 1968. 3.20. 박태준사장 포항제철 사장 취임
■ 1970. 6. 24. 수갱(竪坑) 준공
■ 1973. 1. 1. APT생산(Ammonium Para Tengstate)
■ 1974. 4. 3. 제 1 폐재처리장 완공 (폭우로 일부 流失 1979.7.26.)
■ 1975. 4.29. 달성광업소 휴광
■ 1976. 5. 1. 초경합금공장 기공식
■ 1976. 12. 15.황산(H2SO4)공장 매입 (1980.7.16. 폐쇄)
■ 1978. 7. 1. 금속공고 기공식(대구초경공장 인근 부지)
■ 1979. 8.10. 염산(HCl)공장 조업 개시
■ 1979. 11. 1. 초경공구공장 준공
■ 1982. 8. 1. 제 2 퍠재처리장 완공
■ 1984. 11.30. 신사갱 완공
■ 1991. 3. 세라믹공장 준공
■ 1994. 2. 상동광업소 폐광
■ 1994. 3. 민영화 (거평 주식회사 대한중석 인수)
■ 1998. 7. IMC (ISCAR社) 그룹 대한중석(대구 초경공장 인수) -
TaeguTec으로 사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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