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活人) 이당(怡堂) 김성환(金聖煥)의 삶.
이당은 삶의 유일한 가치를 봉사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공경했다.
사람들도 그런 이당을 항상 사랑하고 공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겸손하고 침착하고 온후하였으며 물질에 대한 욕심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이당이었기에 지금도 그의 명성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끝없이 회자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당(怡堂) 김성환(金聖煥)은 자가 주호(周護), 호가 이당으로
경주 김씨 경순왕의 후손으로 겸손하고 단정하며
항상 마음이 가을 달 같이 맑고 밝았으며 봄바람 같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 이당의 삶의 유일한 가치를 봉사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
또한 한학(漢學)과 한시(漢詩)에 조예가 깊어 널리 선비들과 사귐을 소중히 했으며
한의학에 통달하여 병고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술(仁術)을 베풀며
그 즐거움으로 평생 삶의 락(樂)을 삼았다.
- 이당 김성환의 묘역. 뒤로 이당의 고택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
이당은 나아가 지역의 노인분들을 위하여 자비로 경로당을 건립하니 이는 진실로 군자(君子)의 실천이었다.
그는 교육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남달랐다. 그는 방이 비좁도록 배움에 목말라 일신서당을
찾아 온 학생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는데 그의 이러한 가르침에
아이들은 마음가짐을 정갈히 하고 부지런히 하였으며 배움이 차차 넓고 깊어짐에 인성과
예절이 바르게 형성되어 주위로부터 그의 가르침에 칭송의 소리가 높아짐은 당연한 일 이었다.
- 영손인 김덕호 박사의 박사학위 수여식때 사각모를 쓰고 회한에 젖은 이당 -
이당은 신록이 무르익는 여름이면 제자들과 시회(詩會)를 즐겨 열었다.
그는 시회에서 강론하며 뭇 선비들의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앞장섰다.
일신서당을 건립하고 성곡에 장수초등학교 성곡분교장을 유치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에 목말라 하던 어린 학생들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이당의 모습은 한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교육자적 삶의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그는 지역의 노인분들이 쉴 장소가 없어 불편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사비를 털어 장수면 소재지에 경로당을 짓고 때때로 수십대의 관광버스를 전세내어
노인분들의 관광여행도 도맡아 보내주므로서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얻은 재물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 이당 내외분 -
그의 이러한 선행은 비단 교육과 사회 봉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이당은 영주, 안동, 예천, 문경의 선비들을 초청해 시회(詩會)를 개최하고
선비들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안동의 영가한시회, 영주의 소남한시회,
문경한시회, 예천한시회, 장수한시회 등을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역문화 발전에도 지대하게 공헌한 바 있다.
또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남몰래 지금해 준 것이 이루헤아릴 수 조차 없이 많았다.
그의 활인적(活人的) 삶은 비단 이러한 선행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이당은 한의원을 통해 얻은 수입을 지역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 이당은 외국인 등 에게도 일찍이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하였다.
하단 우측이 이당, 상단 중앙이 차남 김기수 목사,
상단 좌측이 김덕호 이사장 대학시절 모습,
하단 좌측이 인도 태생의 데이비드 목사 -
“자기에게 후한 사람은 남에게 후할 수 없다”
이당은 부친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지금도 이당의 후손들은 이 말을 가훈처럼 여기며 생활해 오고 있다.
자신에게는 겸손과 절약과 검소함을 요구하면서도 주변의 이웃에게는 늘 후했던 사람.
이당은 그런 사람이었다.
- 성곡교회에서 좌로부터 이당, 류도연 장로, 정낙순 장로, 김병환 장로 등 -
“마을에서 이름이 알려지면서 고향에 필요한 일을 걱정하는 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불어 살고 함께 즐기며 늙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이당은 평생동안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자신의 삶에 접목시켰던 실천가였다.
그는 평소 [논어(論語)] 의 학이편에 나오는 “제자입칙효(第子入則孝)하고 출칙제(出則悌)하며
근이신(謹而愼)하고 범애중(汎愛衆)하되 행유여력(行有餘力)이면
칙이문학(則以文學)이니라”는 문장을 마음속 깊이 새겨 삶의 사표로 삼은 바 있다.
- 항상 검소한 생활로 살아온 이당부부 -
즉, [모름지기 제자된 자라면 집안에 들어와서는 효도에 힘쓰고
밖에 나가서는 웃어른에게 공손하고 삼가며 믿음직하게 행동하며
많은 사람을 사랑하되 여력이 있거든 글을 배우라]는 뜻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하나의 삶의 실천방안이 될 만한 글이다.
이당의 삶은 한마디로 “이소성대”(이소성대)를 실천한 삶이었다.
이당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 작은 일에 정성을 쏟고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지속적으로 정진해 가면서 큰 성과와 결실을 얻었다.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정성을 다한 이당의 삶은 그 후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 영손인 김덕호 박사의 졸업식에 참석한 이당과 부인 송태령 여사 -
이당은 후덕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다.
일찍이 공자는 “덕(德)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고 했다.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 거짓없이 정성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
타인과 사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봉사정신,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고 거짓없는 마음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은
어느시대 어느곳에서나 복(福)을 받게 된다.
- 이당의 장례식이 성곡교회에서 치뤄졋다. -
이당의 삶은 욕심을 초월한 깨끗하고 성실한 삶이었다.
그는 삶의 최고의 가치를 덕(덕)을 배푸는 일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덕을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찾아온다” (積德之家, 必有餘慶)는 옛말이 있다.
그가 쌓은 덕(덕)은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까지 가업으로 이어져 이제는 집안의 가풍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