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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
누가복음 3장23-38절
누가는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후에 헤롯의 악한 행위를 책망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힌 사건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을 설명한 후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전합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3:23a)
누가는 예수께서 가르침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셨다고 설명합니다(23절). 예수의 나이가 기록되고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누가가 공생애 시작 당시 예수의 나이를 '30세 쯤' 으로 밝힌 것은, 30세라 하는 나이가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는 시기(민 4:3)인 점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 마침내 예수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실 시점에 이르신 것입니다(히 5:10). 즉, 예수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죄(無罪)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죄악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여실(히 10:20)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한편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고(창 41:46)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삼하 5:4). 또한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도 30세가 되어야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누가는 이러한 여러 배경을 감안하여 예수의 나이를 밝혔을 것입니다.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연륜을 감안해볼 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사역을 하기에 충분한 시기에 이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때'를 잘 알았습니다(요 7:6).
2. 예수님의 족보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3:23b-38)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리고 이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와 다릅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소개되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올라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소개됩니다. 이것은 마태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유대인의 왕으로 소개한 것과 달리,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 이방인의 구원임을 알기기 위해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족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누가의 족보는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이 아니라 나단으로 소개됩니다. 이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마리아의 족보라고 합니다. 누가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리아의 족보를 사용한 것입니다.
헬리는(23절) 학자들에 따라 요셉의 의붓아버지이거나 마리아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맛닷’은(24절)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또 나타나고 '맛다다'(31절)와 '맛다디아'(25, 26절)라는 이름과 비슷합니다. ‘레위’의 어원은 불확실 하나 히브리어 '레위'의 뜻을 따라 일반적으로 '점착(粘着)하다', '연합하다'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멜기’는 아마도 '말기야'(말키야, '나의 왕은 야웨이시다')의 축소형인 것 같습니(G.Kuhn). 이 이름은 28절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안나’의 뜻은 '조롱하다'입니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맛다디아’는(25절)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26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아모스’는 성경상에서 이사야의 아버지로(왕하 19:2) 혹은 선지자(암 1:1)로서 나타납니다. 이 이름은 '짐지는 자' 또는 '강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나훔’은 예수의 조상으로서 그리고 선지자로서 성경에서 언급됩니다. '위로하고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에슬리’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를 가까이 함'이라는 뜻입니다. ‘낙개’는 대상 3:7에 나오는 '노가'와 비슷합니다. '빛나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앗’은(26절) '끊는 것'을 뜻합니다. 대하 29:12; 31:13에서 나오는 마핫과 비교됩니다. 서머인은 히브리어로 '시므이'(출 6:17등)가 됩니다. '몰약성'이라는 뜻입니다. 요섹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인물인 듯한데 이곳 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다는 바벨론 포로기 때의 인물입니다.
요아난(27절)은 히브리어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1) 유다 왕 요시야의 장남(대상 3:15), (2) 다윗의 여덟번 째 용사(대상 12:8-12), (3) 느헤미야 당시 도비야의 아들(느 6:14)등에게도 붙여진 바 있습니다. 레사는 '황태자'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원래 스룹바벨의 칭호로 소개된 말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스룹바벨이 유대의 지도자로 바벨론에서 포로들을 인솔해 유대 땅으로 귀환하자 백성들은 그를 유대 왕의 계승자로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황태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스룹바벨'과 '스알디엘'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도 나타납니다(마 1:12).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뒷받침됩니다(스 3:2; 학 1:1).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설명되었듯이 수혼(嫂婚) 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대상 3:17,18를 보면 스알디엘과 브다야는 여고냐의 아들로서 서로가 형제지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법적 아버지이며 브다야는 그의 원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여고냐’라고 대상 3:17에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본문은 그의 아버지를 ‘네리’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수혼 제도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 즉 여고냐가 아들이 없이 죽자(렘 22:30) 네리의 친아들이 여고냐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Machen, Plummer).
멜기(28절)은 스룹바벨의 증조부로서 '왕'이란 뜻입니다. 앗디는 스룹바벨의 5대조이며 그 이름은 '붙들다'라는 뜻입니다. 고삼은 '나누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마담은 창 10:26의 '알모닷'이라는 이름과 비교됩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광대'라는 의미입니다. ‘에르’라는 이름의 인물은 구약성경에 두 명 등장합니다. 한 명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난 유다의 장자이며(민 26:19) 다른 하나는 겔라의 자손입니다(대상 4:21).
예수(Jesus)(29절)는 구약의 '여호수아'(수 1:1)와 같은 이름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여호와의 구원' 혹은 '구세주'라는 뜻입니다(마 1:21). ‘엘리에서’라는 이름은 '엘리에셀'을 달리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창 15:2; 출 18:4에 나타난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요림’은 '여호와의 칭찬'을 뜻합니다.
유다(30절) 역시 이스라엘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입니다. 본문의 인물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입니다. 요남은 다윗 이래 약 200년 후의 인물로 추정됩니다. 엘리아김은 왕하 18:18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름입니다. 이 사람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멜레아’(31절)라는 이름은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다윗의 고손(高孫)이며 이름의 뜻은 '충만'입니다. ‘멘나’라는 이름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다윗의 증손이며, 이름의 뜻은 '큰 고통'입니다. 나단은 다윗의 셋째 아들로 예루살렘에서 출생했습니다(삼하 5:14; 대상 3:5; 14:4). 이 이름은 '양심' 또는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이며 이새의 막내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새 임금이며 지혜와 용맹과 많은 시편의 저작들로 유명합니다(삼상 16장-왕상 2장). 이름의 뜻은 '사랑함'입니다.
다윗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는 마 1:2-6에 나오는 족보와 거의 같습니다. 이새(32절)는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으로 다윗왕의 아버지입니다(삼상 17:12). 사 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벳은 보아스와 룻의 아들입니다(룻 4:17, 21,22; 마 1:5).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룻 1:4) 다윗과 예수를 잇는 가계(家系)의 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남편이며 살몬의 아들입니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의 큰 부호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모압땅에서 시모 나오미와 함께 돌아왔을 때 그녀를 다방면에서 돕고 그녀의 효성에 탄복하며 그녀와 결혼하게 되기까지 이르렀습니다(룻기). 살몬은 '그늘'이란 뜻입니다.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입니다(마 1:5 비교). 나손은 '점쟁이'란 뜻으로, 그는 보아스의 조부입니다(룻 4:20).
‘아미나답’(33절)은 유대 헤스론 계통인 '람'의 아들입니다(룻 4:19; 대상 2:10). 그리고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부친이기도 합니다(출 6:23).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친척은 고귀하시다'입니다. ‘아니’는 '높은 땅'이란 뜻으로, 룻 4:19과 대상 2:9에 히브리 이름 '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스론’은 '닫힌'이란 뜻으로, 유다의 손자로 창 46:12; 민 26:21; 룻 4:18; 대상 2:5; 마 1:3 등에서 언급됩니다. ‘베레스’는 '파괴'란 뜻입니다. 유다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의 형입니다(창 38:24-30; 46:12). 베레스에게서 두 종족이 생겼습니다(민 26:20,21; 대상 2:4,5). ‘유다’는 '찬송'이란 뜻으로,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소생입니다(창 29:35; 마 1:2). 그는 밧단아람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야곱은(34절) '발뒤꿈치를 잡다'란 뜻으로,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의 동생입니다(창 25:21-26). 그는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 대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은 하란의 외삼촌댁 라반의 집으로 피하여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 두 부인과 부인들의 하녀 빌하와 실바를 통하여 12아들을 얻었으며, 이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창 29장). 야곱은 애굽 근교 고센 땅에서 살다가 14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으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태어났으며 그때 그의 아버지가 100세, 어머니는 90세였습니다(창 17:17; 21:2,3,5). 이삭은 어렸을 때 아브라함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증거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습니다(창 22:1-18).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 리브가와 결혼하며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는 노후에 기럇아르바 마므레에서 살다가 180세에 죽었습니다(창 35:27, 28).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란 뜻으로,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며 나홀과 하란의 형입니다.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으며 이복누이 사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그의 신실한 삶은 성경에서 믿음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 25:1-9). 데라는 '표백'이란 뜻으로,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하며(수 24:2),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란으로 이사가서 205세에 죽었습니다(창 11:24-32). 나홀은 아브라함의 조부입니다.
스룩은(35절)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며(창 11:20-23; 대상 1:26) 이 이름은 '활'이라는 뜻입니다. 르우는 '친구'란 뜻으로, 셈의 6대손입니다(창 11:19). 벨렉은 셈의 자손 에벨의 아들입니이다(창 10:25-29; 11:16). '나뉘다'는 뜻의 이름은 그가 태어날 즈음 세상 사람들이 나뉘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정확히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정화 운동 혹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다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헤버는 '과거'라는 뜻으로, '헤벨' 또는 '에벨'을 달리 번역한 것입니다. 그는 노아의 6 대손입니다. 살라는 '보내다'는 뜻으로, 노아의 고손이며 창 10:24; 11:13; 대상 1:18,24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난(36절)은 '철공'이란 뜻으로, 셈의 손자이나 창 10장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박삿은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을 가리킵니다(창 10:22,24; 대상 1:17,18), 그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출생했으며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후 403년을 더 살다가 438세에 사망했습니다(창 11:10-13). 셈은 노아가 500세에 낳은 아들로 3형제 중 맏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을 피해 아내와 같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7:7; 벧전 3:20). 또한 그는 술 취한 아버지의 실수를 조심성있게 덮어주어 축복을 받기도 했습니다(창 9:20-27). 또한 그는 셈족의 조상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름' 또는 '명성'이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입니다. 이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 대해 창 5:29은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의인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 6:9).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며 그 심판을 피할 방주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가족과 동물 암수 한 쌍씩만이 구원받았습니다. 노아가 대홍수를 만났을 때가 600세였으며, 그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죽었습니다(창 9:28). 레멕은 구약성경에 '라멕'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는 182세에 아들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는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고 777세에 사망했습니다(창 5:25, 28-31; 대상 1:3).
므두셀라는(37절) 셋의 후손 에녹의 아들입니다(창 5:21-27). 그는 969세까지 산 것으로 기록되어져 성경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대확장' 또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이며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65세에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最長壽者) 므두셀라를 낳으며 그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365세를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으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창 5:18-24; 히 11:5; 유 1:14). 그의 이름은 '교수' 또는 '시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렛은 에녹의 부친으로 마할랄렐이 65세에 낳은 아들입니다(창 5:15-20; 대상 1:2). 그는 므두셀라 다음가는 장수자로(962세) 알려져 있습니다. 마할랄렐은 아담의 5대손이며 셋 계통의 한 조상입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에노스(38절)는 아담의 손자입니다. 셋은 109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으며 905세를 향수했습니다. 가인의 시대가 폭행으로 표현된 반면 에노스의 시대는 경건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셋은 아담의 셋째 아들로 맏아들 가인이 죽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창 4:25). 그는 아담이 130세 때 태어났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습니다(창 5:3-8). 그의 이름은 '대신 주다'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는 타락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만드신 아내 하와와 함께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해산의 고통을 맛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아담은 막내 '셋'을 130세에 낳고 그후 800년을 더 살다가 930세에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람' 또는 '붉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담의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시된 족보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담의 아들로서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점일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불순종한 첫째 아담과 대조하여 비록 암시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께 순종했던 둘째 아담으로 묘사해 줍니다(고전 15:47). 이와같이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적용: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묵상하기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을 거역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류가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없고, 오직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으로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은 이미 죄에 오염되어있어서 그 누구도 죄사함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뱀에게 저주를 하시는 중에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약속의 말씀대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덮으시어 성자를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게 하신 것입니다(눅 1:35).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시되 죄없는 몸으로 오셔야 하므로 아담의 혈통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시어 베들레헴 구유에 누이시고 그의 부모를 통해 자라시고 부모를 섬기시다가(눅 2:7,40,52), 공생애를 통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마침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어 그의 보혈로 우리를 죄가운데서 속량하시었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이 되시고 그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부활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행 1:9; 7:55,56).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어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행 2:1-4).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사도들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케 하시어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고, 오늘도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거하실 때 믿음으로 받고 우리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전파하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중보기도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도우십니다(롬 8:26).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가져갈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로서 성부하나님께 아뢰시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히 4:14-16). 예수님은 언젠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든 성도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땅에서 사는 날 동안 비록 어렵고 힘들지라도 성령님을 의지해 간구하며 믿음의 발걸음을 걸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힘쓰면(요 15:7), 비록 힘든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14:17).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