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한자) | 안중돈(安重敦) | 본 관 (한자) | 죽산(竹山) | 자(한자) | 덕혼(德渾) |
호(한 자) | 미상 | 생 몰 년 대 | 1541년(중종 36) ~ 1565년(명종 20) | ||
출생지 (거주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출생지)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솔매마을(거주지) | ||||
주 요 경 력 | ●1561년(명종 16)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1564년(명종 19) 성균관의 제술시(製述試)에서 세차례 장원 ●1565년(명종 20) 동당직부시(東堂直赴試)에 급제했지만, 창방 전에 사망함. | ||||
출전(出典) 및 주요저서 | ●《죽산안씨족보(1994년)》 ● 《가정 40년 신유 식 사마 방목(嘉靖四十年辛酉式司馬榜目)》 ●『은봉전서(隱峯全書)』 | ||||
기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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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자 | 16대손 안재중(011-628-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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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족보(1994)
안중돈(安重敦)
자(字) 덕혼(德渾)
생(生) 중종 신축(辛丑, 중종36, 1541년) 2월 12일
졸(卒) 명종 을축(乙丑, 명종20, 1565년) 6월 21일 享年 25세
배(配) 南原梁氏。父郡守允純, 祖左贊成淵, 曾祖縣令贈左贊成琥, 文襄公南原君誠之后。
부인 남원양씨는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양윤순(梁允純), 조부는 좌찬성을 지낸 양연(梁淵), 증조가 현령(증 좌찬성)을 지낸 양호(梁琥)/양안호(梁安琥)이며 문양공(文襄公)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이다.
묘(墓) 尺紗先兆右麓寶內城坤坐雙墳
묘소는 보성군 보성읍 쾌상리 척사에 모셨다.
〇考鈍庵公, 親題基墓曰。文章燁然。學業粹美。眞君子人也。天不假年。齎志以歿。吾誰尤尤天乎。
아버지 둔암공(鈍庵公, 안축)이 죽은 아들의 무덤을 둘러보고 친히 지은 글에서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학문(學問) 이 순수(純粹)하고 아름다워 군자(君子)라 할 만 했다. 하늘이 더 이상의 수명을 허락하지 않아, 뜻을 펴지 못하고 죽으니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하늘이 내 허물을 책망하는 것이리라."라 하셨다.
〇後孫壽麟撰, 碣陰。
우봉파문중의 후손 순호(蓴湖) 안수린(安壽麟,1763~1807)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있다.
여(女) 廣州李惟昌。父秀莞。子允男, 信男, 義男, 奇男, 泰男縣令。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수완(李秀莞)의 아들 이유창(李惟昌)에게 시집을 가서, 이윤남(李允男), 이신남(李信男), 이의남(李義男), 이기남(李奇男)과 현령을 지낸 이태남(李泰男)까지 5형제를 두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마방목의 기록
안중돈(安重敦)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1위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2위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548C911B3C8B1541X0
자 덕혼(德渾)
생년 신축(辛丑) 1541년
졸년 을축(乙丑) 1565년
합격연령 21세
본관 죽산(竹山)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양시 양시(兩試)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안축(安舳)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전행남원도호부사(前行南原都護府使)
[처부]
성명 : 양윤순(梁允純)
본관 : 남원(南原)
[형]
성명 : 안중관(安重寬)
성명 : 안중홍(安重洪)
[출전]
《가정 40년 신유 식 사마 방목(嘉靖四十年辛酉式司馬榜目)》(고려대학교)
안중돈(安重敦)과 남원양씨(南原梁氏) 부인의 8고조도
출처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중세연구실
http://khistory.korea.ac.kr/korea/gen_win.php?per_id=EC02943
http://khistory.korea.ac.kr/korea/gen_win.php?per_id=E804391
사마공(司馬公) 안중돈(安重敦)
작성자 : 안동교
공의 휘는 중돈(重敦), 자는 덕혼(德渾)이니, 중종 신축년(1541) 2월 12일생으로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고 어렸을 적부터 하나를 들으면 셋을 알았다. 조금 성장해서는 구경[九經,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효경(孝經), 춘추(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례(周禮)를 말함.]을 통달하니 둔암부군(鈍庵府君, 죽산안씨9세 안축)이 애지중지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이미 학문에 힘쓸 줄을 아니 나는 참으로 걱정이 없다.”고 했다.
일찍이 관아에서 부군을 배종하고 있을 때 여자들을 가까이 하거나 희롱하지 않았고, 오직 부모에게 조석으로 문안만 드리고 물러나서 배웠던 학문을 갈고 닦았으며, 과거공부와 성리학(性理學) 두가지 학업에 전일하게 힘썼다. 19세에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1501~1570)선생에게 나아가 배알하자,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과거공부에 마음을 쏟다보면 자기의 큰 뜻을 잃게 되니 주자서(朱子書)를 정밀히 읽어야 한다.”고 하니, 공은 그 말에 공경과 감복을 표한 뒤 돌아왔다.
신유년(1561)에 생원,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갑자년(1564)에는 성균관의 제술시(製述試)에 세차례 장원하였으며, 을축년(1565)에는 동당직부시[東堂直赴試, 식년과(式年科)나 증광시(增廣試) 때에 강경(講經) 시험을 보던 곳을 동당(東堂)이라 하는데, 나중에는 식년과나 증광시 자체를 동당이라 불렀음.]를 보아 급제하였는데 창방(唱榜, 과거급제자 이름을 부르던 일.)하기 전에 졸하니 때는 6월 21일(향년 25세)이었다. 8월에 보성으로 운구되니 고을 어른과 친구들이 친족처럼 슬퍼하였다. 묘소는 척사(尺紗) 우측 산기슭 곤좌(坤坐)이다. 부인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군수 윤순(允純)의 따님이며 문양공(文襄公) 성지(誠之)의 현손으로, 후사가 없어서 조카인 방준(邦俊)을 후계로 삼았다. 생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선조 기해년(1599) 2월에 별세하니 묘소는 같은 벌안에 쌍분으로 되어 있다.
【부록】
1842년 간행된 양응정(梁應鼎,1519~1581)의『송천유집(松川遺集)』1권에 안중돈(安重敦,1541~1565)의 죽음을 애도하는 7언 절구의 시(詩) 1수가 남아있다 양응정의 부친 양팽손과 안중돈의 조부 안수륜은 1516년(중종 11) 문과에 동방으로 급제한 인연이 있다.
양팽손(梁彭孫.1480~1545) - (아들) 양응정(梁應鼎,1519~1581)
안수륜(安秀崙,1483~1517) - (아들) 안축(安舳,1500~1572) - (손자) 안중돈(安重敦,1541~1565)
挽安重敦 牧使安舳之子。以文才名於泮宮。客死洛下。 037_512d (안중돈을 애도하며)
목사 안축(安舳)의 아들로 글재주가 있어 성균관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서울(한양)에서 객사했다.
○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만시(輓詩)에서 말하기를,
生才如許忽呑冤。/ 하늘이 낳은 인재 이토록 원통함을 머금다니
高步蟾宮衆口喧。/ 섬궁(蟾宮, 과거급제)으로 높은 걸음 뭇사람이 떠든다네
一片丹旌湖海路。/ 한 조각 붉은 깃발 호수로 바닷길로 떠나니
山陽知有斷腸猿。/산양(山陽, 보성) 땅 어딘가에도 애끊는 원숭이(사람)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