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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인과 충주시 |
‘중원고구려비’의 기상 ‘충주중원답’의 신비/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정신/ 목계장터 민심의 소리 신경림 시인을 탄생시킨 충주시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결코 바람도 달빛도 아니요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었다.” 몇 번이고 시인의 「갈대」 울음을 되새기며 아직 쌀쌀히 걸려있는 겨울바람을 바라본다.
만해 상을 비롯, 총 10여 차례의 수상 경력을 가진 충주의 대표시인, 신경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시인의 생가! 어린시절, 시인의 숨결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듯... 낡은 스레트 지붕을 이고 있는 흙벽돌이 쓰러질듯 힘겹다. 햇빛 진한 날! 들판의 교회 종소리 울리고 석양이라도 붉게 물들라치면 땅거미가 질때까지 경림이 내려오지 않았을 늙은 느티나무! 떠난 시인의 그리움인지 뿌리부분 많은 혹을 매단 혹부리 영감이 되어있다. 신경림 시인이 다녔던 노은초등학교 학생들이 파한 빈 운동장은 막 「농무」를 시작한 꽹과리 소리가 휘감아 도는 상모꼭지와 함께 멀어질 듯 달려온다. 징징징... 꽹괄 꽹괄 꽹과괄... 막걸리 한잔 얼큰 오른 주름 짙은 할아범, 질곡의 세월을 다 잊고 싶어, 아픈 춤사위 운동장 가득 하얗게 펼쳐본다. 산 그늘 촉촉이 젖어 올 때까지 꽹과리 소리는 계속되고... 한과 설움 그대로 두고 간 민중들 생각에 아리하게 목젖이 아파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인은 공업화로 몰락해가는 농촌을「농무」라는 시로 아픈 농촌의 현실을 표현한다.
꽹과리 소리, 징소리 아직도 귀에 가득한데 우리는 벌써 국보 제205호로 지정된 중원고구려비에 와 있다. 고구려비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광개토왕비와 중원 고구려비 둘 뿐인데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선돌이 고구려비로 밝혀진 것은 1979년 예성문화연구회에서이다. 중원고구려비는 1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반도에 유일한 고구려비다.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다가 글씨를 발견하여 예성동우회에 알리게 되고 단국대학 학술조사단이 현지 조사하여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글씨는 모두 400자 정도인데 내용은 5월 중 고구려왕이 신라 매금(왕을 칭함)에게 말하기를 형은 고구려, 동생은 신라이니 세세 영원토록 친하게 지내자는 내용과 고구려는 의복 등의 선물을 신라에게 주니 반가이 받으라는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는 충주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격전장이었음을 말해줄 뿐 아니라 실제로는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야 마땅한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어 우리는 중부지방의 모든 특산물의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목계시장으로 향한다.
목계장터는 넓고 깊은 강과 백사장이 있어 소금 등 물물교환장소로 편리했으며 충북, 강원, 경북에 있는 보부상들의 임시장(파시)이 섰던 곳이다. 지금은 ‘목계나루터’라는 팻말뿐인 목계시장은 넓은 강줄기와 백사장 그리고 묵묵한 물새뿐이다. “와글와글” “북적북적” “시끌시끌” 가난한 민중의 애환서린 파시장이 아픈 소리들과 함께 떠오른다. 목계장터를 어느 화가가 민중화로 옮긴다면 민중들의 생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실감나는 역사의 현장일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져간 목계시장의 아리한 향수에 젖어본다. 40리 먼 길을 걸어 목계장터를 다녔다는 신경림 시인의 시는 이곳에서도 목계장터라는 시비로 의연하게 서 있다.
예부터 많은 철이 생산되었던 충주는 본래 ‘중원경’이라 하여 고구려의 영토인데 신라의 북진정책으로 진흥왕 14년(AD553) 신라의 땅이 된다. 철의 생산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충주는 삼국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었고 신라가 삼국통일 후 중원고구려비 근처에 중원탑 평리 7층 석탑이라는 중앙탑을 세운다. 신라의 중앙이라는 의미의 이 탑은 안정감보다는 치솟는 상승감을 주어 하늘 구름과 맞닿은 신성감을 느끼게 한다. 중앙탑에 걸려있는 구름떼를 카메라에 담으며 좀 더 하늘과 가까이 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생각해 본다. 다시 일행은 탄금대로 향한다. 이름부터 한이 서려 있는 탄금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 유명한 탄금대에서 달빛 파고드는 가야금 소리와 우륵을 되새겨 본다. 우륵은 대가야국 출신으로 가야왕 가실왕의 뜻에 따라 12현금 가야금을 고안한다. 가야가 신라에 항복하고 우륵의 가야금 소리에 반한 신라의 진흥왕은 가야금 곡을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인정해 준다.
또한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온- 강물이 피로 물든 격전장으로 유명하다. 선조는 두만강 변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명장 신립 장군에게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신립 장군은 병사 80명을 모아 충주에 도착, 충주 인근 군사를 모아 8000명과 함께 일본군과 대항하였다. 협곡이 있는 문경세제에서 싸우자는 장수들의 주장을 뒤로하고 신립 장군은 이곳 탄금대 남한강에 배수의 진을 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조총을 가진 일본군을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참패의 책임을 지고 탄금대 열두대에서 장군은 몸을 던진다. 낙화암을 닮아 있는 탄금대는 명장 신립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에 안타까이 서로를 껴안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열두대란? 신립이 부하들을 독려하느라 하루에 12번을 오르내렸다 하여 열두대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신립 장군의 패배가 알려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경복궁에 불을 지르는 등 한양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푸른 물결에 몸을 던져 망국의 한으로 넋이 되어버린 신립장군의 탄금대엔 오늘도 동천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이 서럽게 피어있다.
「감자꽃」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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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답사지를 소개하셨습니다. 중원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탑중의 하나입니다. 전통문화반에서 답사를 한번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