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에 매다는 꼬리표로 쓰인 부찰(付札) 즉 하찰(荷札)들로, 화물의 주인, 화물의 내용, 년, 월, 일, 화물의 무게와 수량 등을 기재하고 있어 신안선(新安船)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소나무와 삼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형태는 상단에 V자 홈이 양쪽으로 파인 것, 네모난 것이 있으며, 구멍이 뚫린 것도 있다. 하단부의 형태는 네무난 것과 뾰족한 것 등이 있다. 이들 목간의 묵서(墨書)에 의하여 신안(新安) 침몰선(沈沒船)이 원의 경원(慶元)에서 일본의 교토방면으로 가던 중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교역의 구체적인 실상도 규명(糾明)할 수 있게 되었다. |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413&mode=title&query=%B8%F1%C6%D0&dircode=0
2.남도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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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축조된 석축 성. 1271년(원종 12)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고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하며, 또한 1765년(영조 41)에는 둘레 1,040척(약 370m), 높이 12척, 치첩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둘레 54m의 소규모로 성지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남해 연안지방을 노략질함으로써,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와 백성들이 조선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기도 하였다. 이곳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와 더불어 명량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약탈하려고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에 의하여 격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형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 진관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와 가리포에 두었는데, 남도진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6184&mode=title&query=%B3%B2%B5%B5%BC%AE%BC%BA&dircode=0
3.선죽교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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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고려말의 문신, 학자로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삼은(三隱: 고려가 망해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의 한 사람이다. 고려 말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정몽주는 고려 말의 충신이다. 정몽주가 술을 많이 마셨다는 기록은 없으나,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는 기록을 봤을 때 정몽주 역시 술을 마신 사람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지은 유명한 시조 단심가는 이방원과의 술자리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하니, 그 추측은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혼란한 정치, 기울어가는 국운을 생각하며 그가 자신의 시름을 술로 달랬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8596&mode=content&query=%BC%B1%C1%D7%B1%B3&dircode=0
4.성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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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안향과 이제현을 거쳐 고려로 성리학은 충렬왕 때 처음으로 고려에 도입되어 이제현 등의 제자를 길러내게 되면서 성리학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을 통해 무신집권기를 거치면서 침체된 유학을 되살리고 고려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점들을 개혁하는 이념적인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온건한 개혁과 불교 비판 성리학자들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왕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덕을 닦을 것을 강조하고 고려사회의 문제점들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기존의 것을 잘 보완, 관리해서 지켜나가자는 온건한 것이었다. 이러한 온건한 측면은 그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그 폐해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정도전이나 권근이 철학적,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학자들의 여러 모습 그들 스스로는 권력지향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성품이 관후하며 진중한 인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숭인처럼 '성품이 간사하며 탐욕스럽고 언행이 간교하다' 라는 말을 듣는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대개 다 학문에 관한 관심이 높았고 재질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에 힘썼으며 원의 제과에 응시하고 원의 관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이제현 비범한 과거 성균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과거에도 합격했지만 학문연구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견문 넓히기 1314년 원으로 갔다. 이곳에서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학문도 더욱 발전했다. 그는 주로 만권당에서 학자들과 교유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3차례의 중국내지로의 여행을 했다.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다 이제현은 고려의 성리학 수용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였고 《사서집주》를 간행하여 성리하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부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원을 중화로 삼아 그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은 원을 중화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입성책동이 일어나거나 고려왕의 왕위가 위협받는 일이 일어났을 때는 강력하게 대응했다. 고려로 돌아와서는 두문불출하며 《역웅패설》을 저술했다. 이제현은 온건한 개역을 지지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390&mode=content&query=%BC%BA%B8%AE%C7%D0&dircode=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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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산대렵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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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 31대 공민왕(1330-1374)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에서 말을 탄 귀족 남자가 개체변발을 하고 질손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체변발이란 머리 변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 땋아 늘인 것으로서, 고려후기에 몽고풍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게 되었다.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나라에 다녀올 때 변발호복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을 내리어 모두 몽고의 의복과 개체변발을 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반 서민이 모두 따른 것은 아니고,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희구하는 일부 지식층에서만 호응하였다 한다.
개체변발은 중간에 머리를 남기며 겁구아(怯仇兒)라고도 하였는데, 몽골어로는 '허헐'(Kekul)이라고 한다. 충렬왕 4년(1277) 2월에는 신하에게 강요하여 개체령을 발표하고 있으니 그 때까지 백성들은 개체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몽골은 앞을 치는 데 비하여 국말까지의 변발은 앞머리를 치지 않았다. 다만 성인의 상투 밑을 치는 '백호친다'는 어휘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불교적 어휘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풍속은 변발의 풍습으로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본래의 모습에서는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가잡복고>에 "공민왕 원년에 변발호복은 우리 선조의 제도가 아니라는 신하의 말에 변발을 풀었다."고 하였으며, <고려사>에는 "원(元)을 섬긴 이래 개체변발하여 호복을 입은 지 백년이 가까이 오다가 이때부터 의관문물이 완연히 다시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충렬왕의 개체변발은 1272년에 시작되어 1389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길어야 100년정도 계속된 것이고, 궁에 사는 왕족과 신하들이었고 백성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 후 본래의 고유한 수발양식인 상투와 얹은머리로 되돌아갔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층과 관련하여 '얼음 배급'이라는 흥미로운 제도가 있었다. 전근대사회에서 국가가 신료나 신민에게 얼음을 주는 것은 나름의 철학관이나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귀족권의 견제나 호족 연합을 위해, 조선시대는 여름날 창성한 양기를 얼음을 통해 절제한다는 의미로서 나름의 정치적 철학적 의미가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제 3대 정종시절에 얼음 배급시기를 음력 4월 입하 날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저장과 배급의 원칙을 보면 해가 북륙(음력12월)때 얼음을 저장하고 서륙(음력4월경)에 있을 때 배급했다고 한다. 이처럼 얼음 배급은 단순히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려시대의 역법과 길흉화복을 점치게 하는 중요한 제의 수단이었기에 새끼 염소를 바쳐 제사를 하고 나서야 빙고의 문을 열었으며, 사용 기간도 춘분에서 입추까지로 했다.
정종2년(1036년) 6월에는 문하시중(오늘날의 국무총리)으로 휴직한 유방 등 17인에게 입추까지 매 10일에 1회씩 얼음을 내려주라는 조칙이 있었다. 이때부터 휴직 중인 관리에게도 얼음을 배급했다. 고려 문종 2년(1049)에 얼음 배급에 관한 법제가 완성되었는데 "해마다 6월부터 입추까지 얼음을 나누되 퇴직한 여러 관료들에게는 3일에 한번씩 하고 복야, 상서(尙書), 경(卿), 감(監), 대장군(大將軍) 이상에는 7일에 한번씩" 하라고 했다.
한편 얼음의 지급시기는 고려 정종때는 4월, 문종때는 6월이었다. 지급시기를 보면 얼음이야 더울 때 먹는 것이지만 왕권이 강할수록 얼음지급이 늦어지고 귀족권이 강화되면 약간 앞당겨졌다. 그만큼 얼음 배급은 백성들의 고된 부담이었기에 국가로서는 시기를 늦추려 했고, 혜택받는 귀족들은 이를 앞당기려고 애썼다.
문종 이후 <고려사>에는 귀족에게 얼음을 나눠주었다는 기사가 없다. 귀족들도 얼음을 채취하고 저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무신 집권기에 들어서면 이제는 권문귀족이 얼음을 사적으로 채취 저장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즉 <고려사> 반역열전 최이 항목을 보면 최이가 서산에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하려고 백성을 징발했는데,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470&mode=content&query=%C3%B5%BB%EA%B4%EB%B7%C6%B5%B5&dirco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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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미륵하생경변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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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민(民)을 흔히 백정(白苧)이라 한다. 대개 백정이라고 하면 도살업에 종사한 조선시대 천한 신분의 사람을 생각하는데, 고려시대의 백정은 일반 백성을 뜻하는 용어이다. 백정층은 군현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가에 대해 조세와 역역을 부담한 일반 농민층으로, 조선시대의 양인 농민층에 해당된다. 백정층에는 토지를 경작해서 가계를 꾸려가는 자영 농민층도 있고, 소유지가 부족해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해서 가계의 수입을 보충하는 전호 농민층도 있었다. 한편 고려시대 서민 중 백정층 외에 잡척(雜尺)층도 있었다. 이들은 농업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면서 공해전, 둔전(屯田)과 같은 국가의 토지경작에 동원된 향(鄕), 부곡(部曲)인, 금, 은, 소금, 종이 등 각종 수공업 제품과 농수산물 생산에 동원된 소(所)의 주민, 장처전(莊處田)을 경작해서 궁원과 사원에 조세를 납부하는 장과 처의 주민이다. 이들은 향, 부곡, 소 등 부곡제 지역에 거주했으며 백정 농민층에 비해 위와 같은 추가역을 부담했기 때문에 백정 농민층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하층민이었다.
이들과 달리 향리, 군인과 같이 국가에 대해 일정한 직역을 갖는 계층을 정호층이라 한다. 정호층은 지배질서에 참여할 권한이 있다는 점에서 넓게는 지배층의 범주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민(民)계층 백정 농민은 평균 1결의 농지를 소유했다. 고려 전기 1결의 면적은 대체로 오늘의 1200평, 즉 6마지기 정도가 된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 20석이 생산되는 면적을 1결로 정함에 따라 1결의 절대면적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들쭉날쭉하게 된다. 당시 1결의 농지에서 나오는 최고 생산량으로도 기본 생활경비를 충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경조사나 예상 밖의 지출은 그대로 부채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팔아 빚을 갚은 일이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적자를 보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당시 정부가 적극 장려한 개간을 통해 소유 토지를 늘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돼지, 닭 등 가축을 기르거나 채마밭을 경작한다거나,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한다거나, 땔감이나 약초, 나물을 채취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생계를 보충해 나갔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는 당시 농민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햇곡식 푸릇푸릇 아직 논밭에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 세금걷는다 야단이네... 붉은 알몸 짧은 갈옷으로 가리고 하루에도 밭갈기를 얼마였던가. 그리하여 벼싹 파릇파릇해지면 가라지 피매기에 괴로울 따름. 풍년 들어 천종의 곡식을 거둔다 해도 한갓 관청에 바치는 것일뿐. 어쩌지 못하고 다 빼앗긴채 돌아오니 가진 것이라고는 한 알도 없네." 한편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실려 있는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 농사를 지어도 한 말의 조를 얻을 수 없구나. 바꾸어 조정에 있기만 하면 앉아서 만 섬의 곡식을 먹을 수 있구나." 위의 시는 무인쿠테타가 일어나기 직전 의종이 전국의 역이나 원에서 지은 시를 수집한 것 가운데 하나로, 무인정권기 농민항쟁 폭발 직전 어려운 농민의 처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1350년에 제작되어 일본 오방적정원(五坊寂靜院,親王院)에서 소장하고 있는 미륵하생경변상도에는 그림 하부 우측에 고려시대 추수하는 농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벼를 베는 사람과 도리께로 타작하고 떨어진 낱알을 쓰는 등의 갖가지 풍요로운 가을 정경은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하생경의 표현을 도상화시켰다 할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추수하는 농민들의 복식은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고, 저고리와 바지를 착용하였으며 저고리는 허리부분의 대로 고정되어 있다. 허리 아래로 옆선에 트임이 있는 저고리는 백색이거나 붉은 계열, 혹은 녹색계열이며, 바지는 모두 흰색에 가깝다. 특징적인 것은 바지의 통이 매우 좁다는 것이다. |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421&mode=content&query=%C7%E2+%BA%CE%B0%EE+%BC%D2&dircode=0 |
8.강동6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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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만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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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滿月台)는 고려의 거의 전기간 왕국이 자리잡고 있던 유적이다. 원래 이 궁궐안에 망월대라고 불리우던 궁전이 있었는데 후세 그 어느 때인가 이 궁궐 전체를 만월대(滿月台)라고 부르게 되었다. 송악산(松嶽山)을 배경으로 그 남쪽기슭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려 왕궁은 궁성과 황성을 합하여 125만 평방미터, 궁성은 약 39만 평방미터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만월대(滿月台)의 특징은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 경사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러 개의 건물들이 하나의 건축군으로 묶어지고 건물들의 지붕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왕궁에는 황성의 정문인 동쪽의 광화문과 궁성의 정문인 남쪽의 승평문, 그 뒤에 연이어 세운 신봉문, 창합문 등 많은 문이 있었다. 정면 7간 약 27미터, 측면은 4간 약 11미터으로 된 신봉문터에는 지금도 3개의 문길을 가진 2층 문루의 장엄하고 화려하였던 옛모습을 상상케 하는 커다란 주춧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만월대(滿月台)의 중심 축대 위에는 회경전(會慶殿), 장화전(長和殿), 원덕전(元德殿)과 그 밖의 건물들이 규모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맨 앞 회경전(會慶殿)의 축대 정면에는 높이 7.8미터 되는 커다란 돌계단이 놓여있다. 만월대(滿月台)의 기본정전인 회경전터는 동서 약 60미터, 남북 약 100m의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막혀 있다. 만월대(滿月台) 중심축대 동쪽에는 동궁터, 서쪽에는 건덕전터, 침전터 등 수많은 건물터들이 있다. 만월대(滿月台)의 뒤 언덕에는 정자터들이 남아 있다. 황성의 성벽은 후삼국때 태봉국(泰封國)이 쌓았던 발어참성(勃禦塹城) 성벽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 안을 따로 가로막아 궁성 성벽으로 삼았다. 고려시기 천문 기상을 관측하던 유적으로 유명한 개성 첨성대(開城瞻星臺)는 여기 황성 서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만월대(滿月台)에서는 기와와 벽돌, 치미, 괴면, 기둥밑 장식 등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다. 유물들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것을 계승한 점들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고려의 괴면과 기둥밑 장식은 발해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고려 왕궁터 만월대(滿月台)는 고려시기 궁성제도와 건축기술의 발전된 높이와 함께 왕궁의 규모와 배치, 건물들의 평면구조와 건축 부재 등을 통하여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고려 백성들의 지향과 감정을 잘 보여준다. |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235&mode=title&query=%B8%B8%BF%F9%B4%EB&dircode=0
10.신진사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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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단순한 성씨의 교체가 아닌, 고려의 불교를 대신하여 주자학적 유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는 시기로서 사회 제부분에 변동을 가져왔다.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안고 있는 대내적인 모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실천윤리로서 주자가례에 바탕을 둔 유교적 상장의 시행과 가묘설립과 같은 예제의 보급을 통해 국가의식의 변천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도 상장의례와 제례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시되었던 상장과 제례는 너무나 비생산적으로 세분화되고, 절차 또한 매우 복잡하여 위로는 왕실에서 아래로는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실행하기가 어려워 여러 차례 개정·보완되었고 일상 행동에 많은 제약을 가져왔다. 특히 상제례는 사회질서의 유지 명분과 교화의 수단으로 작용하여 조선초의 예제 운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소위 무불식 상장과 같은 전래의 전통적 상장과 외래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유교식 상장이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조선시대의 상장의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다 보니 왕실과 사대부는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한 유교식 상장을, 일반 백성들은 고려조의 무불이 습합된 무불식 상장을 고수하여 이원화된 상장제가 혼재되어 시행되었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왕실에서 행하면 자연적으로 일반 백성들이 따르고 외방도 자연히 행할 것이라 하여 그 시행도 서인보다는 사대부가, 외방보다는 경중이 더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국가차원의 강력한 제재와 사대부 중심의 가례 시행과는 달리 일반 서인들은 상장에 향도(香徒)를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가무 등과 같은 고려시대의 불교와 민간신앙적 요소가 습합된 무불식 상장의 유풍을 행하였다. 민간에서는 초상(初喪)이 나면 상여 멜 향도들을 불러 모아 음식과 술을 대접하였고, 반대로 향도들은 피리 불고 노래를 불러 상주들을 위로하였다. 조선 초기 세종 때의 한 예를 보자.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런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나면 즉시 야제를 행하고,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 승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을 맞아들여 향화와 다식을 차려놓고 노래와 춤과 범패가 뒤섞여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수령들로 엄하게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정장·색장 등을 함께 그 죄로 다스리도록 하라.” 이는 초상이 나면 무당이나 승을 불러 제물을 차리고 가무로 사자의 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말하는데, 지금도 전라도 진도 지역에서 장사 전날 밤에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씻김굿이나, 동해안 지방의 오구굿, 서울·경기지방의 진오기굿·자리걷이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위호(衛護)’라 해서 조부모나 부모의 혼을 무당집으로 부르고 혹은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을 그려 모시기도 하며, 노비를 무당집에 바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신을 무당집에 가져가서 제사지내는 자도 많았다. 이는 조상신을 무당집에 위탁하고 제사를 올려서 음덕을 받고자 함인데, 사대부들이 집안에 가묘를 두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민간신앙의 측면에서 본 일종의 가묘이며 무속과 유교제의가 습합된 조상숭배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무불식 상장속은 성종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당시는 초상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장사 치르기 전날 밤에는 손님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주악을 베풀어 빈객을 즐겁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으며, 돈이 없어 빈객을 대접치 못할 경우에는 장사를 연장하기까지 하여 심지어는 수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 양도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장사지내기 전날 큰 장막을 설치해 놓고서 그 속에 관을 놓고 큰 쟁반에 유밀과를 잔뜩 차려 관 앞에서 전을 올리고, 승려와 사람들을 많이 모아 잡희를 즐기면서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노래하며 춤을 추었고, 충청도 지역에서도 경상·전라 양도와 마찬가지로 장사 전날 음주 잡희에 광대들이 동원되어 놀고 양반집 아녀자들도 섞여서 밤새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은 지 3일과 7일째에는 무당이 새 혼령이 내려와 지난 일과 미래를 말해 준다고 하여 으레 술과 떡을 준비하여 무당집에 가기도 한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성호 이익도 “사람이 죽어 염을 한 뒤에 무당을 불러 길귀신을 내리게 하는데, 이는 시골 무당이 가무로 망자의 혼을 불러 망자의 말을 흉내내며 어리석은 세속인을 유혹하고 재물을 사취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풍속이 귀신 섬기기를 좋아한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무속적 상례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방에서는 여전히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식 상장보다는 민간신앙적인 무불식(巫佛式) 상장(喪葬)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무불식 상장 행위는 사대부 층에서 보면 폐풍으로 치부될 수 있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유교식 상장이 오히려 외래적 요소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장사에 향도를 불러 음식과 술을 대접한 것은 상여를 메고, 매장·조묘 등에 필요한 집단노동력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관행은 고구려 이래로 지속되어온 유습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조직과 구성원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로 작용되어, 정부가 교화적 차원에서 유교식 상장의례의 시행을 권장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식 상장 유풍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그 유풍이 남아 있다. 한편 상장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관료의 업무 공백을 메우고, 인재를 적기에 활용하기 위해 변례인 기복제도를 시행하여 국가 경영의 원활성을 꾀하는 한편, 예장과 증시(贈諡)의 법을 마련하여 신료들의 국정 참여에 대한 일정한 예우를 상장에 반영하였으며, 관료와 그 가족의 상장, 그리고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공무로 사망한 자에게 부의를 내려 공로를 인정해 줌으로써 국가의 공신력을 높여 갔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품계에 따라 장례기간을 다르게 정해 시행하였다. 장기(葬期)란 죽은 날부터 묘지에 장사를 치를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사람이 죽어 장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상복을 마련하거나 장지를 선택하는 등 절차에 따른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장기는 3일장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것은 예전처럼 장일을 길흉에 따라 정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3일이란 시간적 여유를 갖지 않으면 장사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3일은 걸려야 최소한의 예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장사에는 일정한 기준을 두어 행하였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공후 이하는 3일 만에 장사한다”라든가 “모든 전현직 관원은 삼년상을 지내고, 삼일장과 화장을 금지하며 신분에 따라 삼월장과 유월장(踰月葬, 1개월장)을 시행토록 하라”는 태조 4년 6월 헌사(憲司)의 상언 내용으로 보아 장례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禮記》 王制篇의 “천자는 7일만에 빈하고 7개월만에 장사지내고, 제후는 5일만에 빈하고 5개월만에 장사지내며, 대부·사·서인은 3일만에 빈하고 3개월만에 장사지낸다”라는 신분별 장기를 참작하여, 《경국대전》에 4품(大夫) 이상은 3월장을, 5품 이하는 유월장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5품 이하도 유월장보다는 3월장을 많이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 서인들은 삼일장을 금한다는 사실로 보아 선비(士)에 기준하여 유월장을 행하였거나 적어도 고려시대의 3일장보다는 긴 5,7,11일장을 행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세속에서는 정해진 장례 기일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들에 가장(假葬)해 놓고 오로지 음양설에 따라 자신의 이해득실만을 따져 2~3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10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 말한 가장이란 현재도 일부 서남해 도서 지방에서 시행되고 있는 초분과 같은 가매장의 한 형태로 생각된다. 초분(草墳)은 육탈이 된 뼈만 추려 길일에 치르는 2차장을 전제로 시신을 안치한 일종의 임시 무덤이다. 오늘날과 같은 유교식 상장의례는 조선 중후기 주자가례의 이해가 심화되고 사례편람과 같은 예서가 보급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되어 하나의 전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선조 500년을 거쳐 현재까지 시행되어온 유교식 상장의례는 외래적인 것이다. 주자가례가 도입되고 시행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고유의 전래 상장례 습속은 토속적인 민간신앙과 불교적인 요소가 습합된 것이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1333&mode=content&query=%BD%C5%C1%F8+%BB%E7%B4%EB%BA%CE&dirco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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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왜구와 북방민족과 싸워서 자주 개혁을 펼치는 고려가 자랑스럽다. 한사람이나 한 물건에 대한 설명이 길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겠다. 복사를 해서 편하게했지만 아직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시간 날때 읽어 볼것이다. 지금까지 조사한 글이 거의 다 고려 후기에 한것 들이다. 대몽항쟁, 조선건국전, 신진사대부, 남도석성 등이 있다. 이 조사로 고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수있엇다. 하여튼 고려 사전만들기 프로젝트가 도움이 된것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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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원군 형식에 맞추어 수정하고, 소감을 쓰기 바랍니다. 하나 당 해당되는 관련 사이트를 적어 주어야 합니다.
수정 완료 했습니다.
역시 전원주는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