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한집안의 음식을 좌우한 장맛. 최근 들어 된장, 고추장, 간장 등 한국 고유의 토종 장류가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통 장류로 유명한 서일농원은 경기도의 ‘슬로푸드 명소(Place)’. 주5일 근무제와 최근의 웰빙 열기를 타고 무공해 전통 자연식 명소로 떠오른 서일농원을 찾았다.
경기 안성시 일죽면 화봉리 389번지. 3만평에 자리한 서일농원(www.seoilfarm.com)은 ‘슬로푸드 명소’로 지정되기 전부터 이미 관광명소였다. 하루 400명, 연간 15만명이 방문한다. 일요일이면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줄을 서고, 식사하기 위해 1시간 이상 기다리는 일도 흔하다. 전통 장을 체험하고, 맛 보고, 사기 위해서다. 농원 뜰에 질서있게 늘어선 2,000여개의 장독대 안에서는 된장·고추장과 장아찌류가 구수하고 맛깔스럽게 익어간다.
서일농원은 1982년 서분례 원장(57)이 ‘시설 좋은 양로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과수원 6,000평을 사면서 문을 열었다. 지난 91년 양로원 예정지에 재미삼아 콩을 심었고, 그해 다섯 가마를 수확했다. 솥을 내걸고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장을 담가 친지·친구에게 나눠줬다. 주변에서 “젊은 사람이 이렇게 장을 잘 담그냐”, “어머니 손맛보다 낫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더러 거름값, 교통비에 보태라고 돈을 줬다. 내년에도 꼭 부탁한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서울에서 여행사를 경영하던 영덕 출신 경상도 아줌마는 하나둘 항아리 숫자를 늘리게 됐고, 점차 본격적인 사업으로 바뀌었다. 제대로 된 된장맛을 내기 위해 옛 문헌을 뒤지고, 솜씨 좋은 어른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대갓집과 종갓집을 문턱이 닳도록 찾았다.
서일농원의 장맛에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재료를 써서 전통방식으로 정성을 담아 만드는 것이 전부다. 콩·소금·옹기·물, 어느 하나 소홀해서는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없다. 서일농원의 장류는 대량생산해 내는 ‘공장제품’이 아니다. 옛날식으로 햇콩을 삶고 다져서 메주를 빚고, 그 메주를 띄워서 장을 담그기 때문에 장맛이 기가 막히다.
장을 담그기 위해 삶는 콩은 5가마에서 지금은 300가마로 늘었다. 콩을 거둬들인 뒤 11~12월 13개 가마솥에서 하루 두 번, 한달을 삶는다. 불리지 않고 씻어 바로 앉혀 끓여낸 콩을 메주로 만들어 짚에 묶어 원두막에 내건다. 이곳에서 60~70일 말린 메주를 짚을 풀지 않은 상태로 발효실로 옮긴다. 발효실은 40도안팎을 유지하는 온돌방이다. 짚에서 나온 고초균이 메주 전체에서 골고루 증식할 수 있도록 목화솜 이불을 덮는다. 3주의 발효기간 동안 벽돌처럼 쌓아놓은 메주더미의 순서를 한번 뒤바꿔줘 모든 메주가 제대로 숙성되도록 한다. 이 때쯤 메주가 된장될 기초적인 준비를 마치게 된다.
마무리작업은 먼저 씻기. 흐르는 물에서 솔로 곰팡이 닦아낸다. 하루 정도 음지에서 말린 다음 건조실로 옮겨 1주일동안 추가로 말린다. 이 즈음이면 2월말~3월초가 된다. 음력으론 정월 그믐께. ‘장 담그기’ 작업이 시작된다. 담그는 때에 따라 정월장, 이월장이라고 하는데 정월장을 더 상품으로 친다. 온도 낮은 때 만들어 염도가 더 낮고, 더 오래 숙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된장과 간장을 나누는 장가르기는 5~6월초에 한다.
우리 장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일농원은 전통 된장·간장의 대명사 중 하나로 떠올랐다. 전통음식 시식점에서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고 우리 장으로 만든 음식을 맛본 사람이 다시 서일농원을 찾는다. 벌써 2만5천명이 회원으로 등록했다. 장담그기·장아찌만들기·김치담그기 등을 내용으로 한 체험프로그램도 인기다.
서일농원은 된장·고추장·간장·쌈장·청국장 등 전통장과 장아찌, 매실식품 등 발효식품을 상품화해 일반에 판매하고 있다. 96년 ‘서일농원’ 브랜드로 소비자에게 팔기 시작했다.
대리점이나 백화점 같은 기존 유통방식을 피하고 농원 현지에서와, 전화 및 인터넷으로만 팔고 있다. 이같은 유통방식이 처음에는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나중에는 차별화를 통해 소비자에게 ‘아무데서나 살 수 없는 식품명품’이란 강한 인식을 남기는 데 성공하게 된다. 200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인증을 받아 아직 소량이지만 청국장·청국장환·된장 등을 북미지역에 수출하고 있다. 분유업체·중앙대 식품공학과와 함께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기술 개발비를 받아 청국장이 든 즉석이유식을 개발중이다. (031)673-3171
〈글 안치용·사진 김영민기자 ahna@kyunghyang.com〉
-안성유기공방…향교·서원의 고장-
◇주변 관광지
서일농원에서 가까운 안성시내 주변에는 안성유기공방을 비롯, 향교·서원·사찰·호수 등 제법 볼거리가 많다. 안성유기는 모양이 아담하고 정교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식기는 물론 혼사·제사·불기·난방용구, 등잔류 등 종류가 다양하고 광채가 좋다. 문자·문양을 장식·조각하는 기술이 뛰어나다. 안성유기공방에서 볼 수 있다.
안성향교는 조선 중종 27년(1532년) 세워졌다. 큰 고을에서 볼 수 있는 풍화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죽주산성은 매산리 비봉산 아래 위치한다. 현재 2.5m 높이 석축이 남아 있다. 고려 고종 23년 죽주방호 별감이 돼 15일 동안 몽골의 공격을 막아낸 송문주 장군의 묘비와 사당이 모셔져 있다. 죽산리5층석탑은 높이 6m로 단층기단 위에 5층탑신을 올린 일반형 석탑으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덕봉서원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충정공 오두인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21년(1695년) 창건했다. 바리봉을 뒤에 두고 외삼문·정의당·내심문·사우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숙종이 하사한 현판이 남아 있다.
◇5가지 맛의 비밀
장자식지주(醬者食之主)란 말이 있다. 장이 모든 음식의 으뜸이란 뜻이다.
각종 연구결과 된장에서 항암·지방간치료·콜레스테롤저하·혈전용해·고혈압 완화 효능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자체로 우수한 식품이기도 하다. ‘모든 음식의 으뜸’인 장을 제대로 만들면 더 좋은 맛과 영양을 기대할 수 있다. 서분례 서일농원 원장(사진)은 콩·물·소금·장독·정성을 장 만드는 5대 비법으로 소개했다.
우선 유기농 콩을 사용한다. 직접 재배한 물량이 모자라 인근 농가에서 계약재배한다. 종자를 직접 나눠준다. 기름진 흙에서 자라 콩깍지가 저절로 터질 만큼 잘 여물면 그 햇콩으로 메주를 쑨다. 묵은 콩은 수분과 영양분 손실이 있어 냄새가 좋지 않고 윤기가 적다.
물은 지하 150m 암반수를 끌어 올려 쓴다. 서일농원 인근은 한강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오염물질을 발생시키는 시설이 거의 없다. 된장 맛을 제대로 내려면 좋은 물을 써야 한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장 담그는 데 소금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일년 중 가장 볕이 좋은 6월에 거둬들인 전남 영광의 광백사 천일염을 고집하고 있다. 3년동안 지하실에 쌓아 놓아 간수가 다 빠져나가길 기다린다. 간수가 남은 소금으로 간하면 된장 맛이 씁쓸해진다고 한다.
장독에서 선조의 지혜를 새삼 느낄 수 있다. 황토로 빚은 뒤 천연잿물을 발라 1,200도 이상 고온에서 구운 것이어야 한다. 가마의 맨 앞에서 열은 받은 제품이어야 불순물을 다 태워 숨구멍이 만들어진다. 숨구멍이 있는 장독을 써야 전통 된장을 만들 수 있다. 서일농원 장독대를 채우고 있는 장독은 서원장이 오랫동안 전국에서 수집한 것이다.
초기에 기계로 대량생산한 장독을 썼다가 낭패 본 경험이 있다. 숨구멍이 없어 제대로 발효하지 않았던 것. 된장을 발효시키다 보면 숨구멍으로 콩까지 빠져 나와 장독 옆구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합쳐져야 제대로 된 장맛을 낼 수 있다고 서원장은 강조했다.
<모놀과 정수, 이종원님 글>
첫댓글 서분례씨의 장맛이 대대손손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