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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내 것은 없다 / 남경태
고집이 센 사람들이 주위의 충고를 거부할 때 흔히 쓰는 말투가 있다 .
"나는 내가 가장 잘 알아."
내 일은 내가 알라서 할 테니 상관하지 말라는 뜻을 완곡하게 둘러 말한 것이지만 실상은 매우 오만한 말아기도 하다. 그러나 틀린 얘기는 아닌 듯 싶다. 자기만큼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으라구.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말의 배후에는 인식주체(주어 "나")와 인식대상(목적어 "나")이 분리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럴 때 쓰기 편리한 영어를 도입하여 그말을 분석하면, 나를 주어인 I 와 목적어인 me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둘로 편리하게 나누었다가 합쳤다가 하는 것은 의식선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무의식의 경우라면 사태는 달라진다. 내가 나를 아는 부분은 의식된 나일 뿐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I 와 me는 모두 의식에 속하는 나이다. 의식되지 않는 나, 즉 무의식의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의식이 나라는 사람에게서 차지하는 부분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될까? 의식의 수면 아래에는 그보다 훨씬 커다란 무의식의 빙산이 도사리고 있다면? 만약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더 중요할 뿐 아니라 본래의 나에 더 가깝다면,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말은 단순히 듣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라 틀린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라캉(Jaques Lacan, 1901~81)같은 사람은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고 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감히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을 터이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무의식을 발견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이다. 무의식의 발견은 의식적 자명성에 기초한 데카르트의 근대적 인간관을 근본적으로 회의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일이었다. 의식이 아닌 다른 곳에 인간행위의 진정한 기초가 있음을 밝히려 했던 프로이트가 처음에 기대었던 학문은 의학과 물리학이었다.
프로이트를 이어받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게로 돌라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소쉬르에게서 배운 언어학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정신분석에 임하고자 했다. 라캉은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욕망이론을 개인의 성격과 인성 분석에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넓혀 나갔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것이 라캉의 사상이다. 언어활동은 무의식의 조건이며, 인간의 언어활동이 없다면 무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한국어나 영어, 중국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언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포함하여 총체적인 언어,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 전체를 뜻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은 직접적으로 성욕과 연결되어 있으며, 억압은 직접적인 가족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주로 환자 개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다른 연관고리들은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라캉은 언어학을 도입함으로써 욕망, 억압 등의 의미를 사회적 상징체계들이나 문화, 제도 등과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프로이드의 의학적 혹은 개인심리학적 욕망이론을 라캉은 언어학과 결합시켜 사회철학적인 의미로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제왕에서 노예로"
서양에서는 거울이 깨지면 재수 없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동양에 비해 유난히 시각적 효과에 집착하는 서양 문화에서는 거울이 그만큼 중요하며 신화적인 역할을 한다. 백설공주가 불행을 겪게 되는 일도 거울에서 시작하며, 중세 설화에 등장하는 마녀의 주무기도 빗자루라는 운송수단과 수정구슬이라는 시각장치다. 그런데 라캉은 거울을 깨는 재수 없는 일을 성장의 천 단계라고 본다.
갓난아기는 거울의 단계에 속한다. 라캉은 거울을 통해 갓난아기가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며 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생후 6∼18개월까지의 갓난아기는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대단히 즐거워한다. 아기는 거울 앞에서 거기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그 영상이 자기 것이라는 "동일화의 경험"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아기는 아직 말을 배우지 않았기에 언어활동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지는 않은 상태다. 언어활동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므로 이 거울 단계의 아기는 언어를 매개로 해서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지 못한다.
라캉은 이 거울 단계를 세 가지 과정으로 나눈다.
① 처음에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실재적 존재라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아기는 거울 속의 존재를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
② 이제 아기는 거울에 비친 존재가 실재가 아니고 하나의 영상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기는 거울을 밀치거나 그 뒤쪽으로 가서 진짜 실물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물론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③ 마침내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영상이 실재가 아니라 영상에 지나지 않으며 바로 자기 자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치 동물실험에 나오는 침팬지 같아서 아기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아기는 사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주체의 동일성을 확립한다.
그런데 거울 앞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아기의 행동양식은 다른 아기 앞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실 아기에게 다른 아기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아기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기 앞에서 그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울 앞에서와 같은 제스처를 취한다. 그래서 거울을 밀치듯이 그 아기를 밀어 그 아기가 넘어지면 오히려 자기가 운다. 자기가 넘어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기와 타인 사이에 일종의 전이적 혼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단계를 라캉은 "이자(二者)관계"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상상계이다.
이 시기에 아기가 가지게 되는 자아의식은 거울 속에 박힌, 즉 주체의 바깥에 있는 객관화된 자기 몸의 통일적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주체의 기능을 정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아기와 같이 말을 못하는 존재가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기 이전의 상태다. 그래서 거울 단계는, 비록 자기 신체의 통일성을 지각하며 자기 동일성을 이해하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 자기 동일성은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므로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때의 아기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며, 자신이나 자기 영상 또는 자기 어머니와의 동일성의 관계가 우주의 모든 것이라 여기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자관계"이자 "상상적 단계"가 된다. 이때의 아기는 다른 아기나 거울 속의 자기 모습, 그리고 어머니에게서도 자기만을 인식한다.
인간이 이자관계에서만 살고 있다면 사회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자관계란 바꾸어 말하면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동일하게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바깥밖에 없는데, 그 바깥이라는 게 한 가지 색깔뿐이니 거의 유아독존일 수밖에 없다. 아기 특유의 고집스러운 행동방식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실상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우리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인생을 살아가기가 그리 어렵지도 않은 듯하다. 바깥 세상에 대해서 눈을 감고 이자관계로만 살면 되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살기가 더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넓고 할 일도 많다는 세계 속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사회생활이다.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이자관계를 극복해야 한다. 이자관계를 지배했던 상상은 삼자관계의 상징에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
사회적인 인간 개체의 성장은 상징질서 속에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타인과의 삼자관계에서 자신의 정당한 정체성이 얻어지는 것이다. 갓난아기 시절에는 이자관계만으로 자신의 주체 형성이 가능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데도 계속 이자관계만 고집한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될 뿐이다.
상징질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것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질서이다. 거울 단계를 벗어난 아기가 자라서 언어를 배우게 되면, 그 이전에 거울과 싸우면서 만들었던 자신의 주체를 언어세계 속에서 또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게 문제다.
거울 단계에서는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거울을 깨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아기는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고, 자기가 만든 나르시시즘 속에서 제왕처럼 살았다. 그러나 언어의 세계의 뛰어들면 그럴수 없다. 우선 언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이 만든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주체 형성은 과거에 누렸던 자유로운 선택과는 거기 멀다. 우선 출발부터가 심상치 않다. 아기는 "누구의 아들(딸)"이라는 관계,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이름을 통하여 상징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아기는 일차적으로 가정과 사회가 포괄하고 있는 문화적 기표가 만든 존재다. 아기는 그 기표를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뒤 상당기간 동안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언어와 각종 지식을 일방적으로 배워야 한다. 거울을 깬 뒤로부터 아기는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세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제 두 번 다시 갓난아기 시절과 같은 제왕의 위치는 누릴 수 없다. 설사 제왕과 진배없이 사회적인 부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언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언어의 결과다. 인간은 언어의 질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내었다기보다 오히려 언어의 질서가 인간을 인간으로 구성한다. 바로 여기서 라캉은 생각하는 주체의 자명성에서 출발하는 근대 인간관과 확실하게 결별한다.
언어가 인간을 만드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자. 우선 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아기는 자기 자신을 3인칭 고유명사와 대명사로 객관화하고 주위의 타인들이 자기를 "아무개의 아들(딸), 동생, 친구" 등의 자격으로 부르는 데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언표하는 주체(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다른 사람들이 불러주는 주체)" 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가 생겨난다. 앞의 것은 스스로의 상상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뒤의 것은 타인이 붙여준 상징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앞서 말한 I 와 me의 분열이다).
라캉은 모든 도덕의 기본이 바로 이 "틈"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도덕적 주체는 그에게 "언표된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바꿔 말하면 타인들이 이름지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의 분배에 다름아니다. 만약 스스로를 자유스럽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를 결정하는 원인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유란 환상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도덕은 주체가 타인과의 상징적 관계 때문에 자아를 억업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억압은 "원억압"이며 근원적인 "자기 소외"다. 당연히 욕구불만이 없을 수 없다. 도덕과 상징이 있는 곳에 욕구불만은 숙명적으로 생긴다. 이렇게 해서 도덕-원억압-자기 소외-욕구불만-부정 등과 같은 하나의 진술적 연쇄가 생겨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내 것이 아니다."
이자 관계에서 삼자관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는 삼자관계를 가능케 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존재다. 이때의 아버지는 실제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법, 제도, 규범의 총체를 가리킨다.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아버지, 제도, 규범, 언표된 자신의 정체성 등)에서 자신의 성욕과 리비도를 어떤 규범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이 의무는 인간화의 첫걸음이지만 동시에 억압과 욕구불만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니기 전의 아기는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모든 것이기를 원한다. 아기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결핍"을 보충하는 존재이고자 한다. 어머니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남근(phallus)이다. 이때의 남근이란 생물학적인 남자 성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남자의 기표나 상징의 욕망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이란 언제나 결핍된 것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기는 어머니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스스로 이 욕망의 대상인 남근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아기는 자신을 타인(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하나의 독립적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인의 욕망의 연장으로 존재하기를 바라게 된다. 다시 말해 "나의 욕망은 내가 동일화하고 싶은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나의 욕망조차 내 것이 아니다? 믿지 못할 일이지만 라캉에 따르면 그렇다. 라캉은 "언어활동에서 우리가 전해듣는 내용은 타자로부터 온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내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허상이다. 무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나의 진술은 타자의 진술로써 구성된다. 나는 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언어구조(이를테면 문법체계)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여 이야기하며, 나의 욕망 역시 타자의 욕망으로 구성된다. 태양 아래 내 것이란 없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내 욕망이 겨냥하는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주체의 무의식이 말하고 있는 장소이다. 이제 라캉은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며, 욕망은 욕망의 욕망이고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한다. 이 욕망(desire)은 갈증이나 배고픔과 같은 "욕구(need)"와 구별되며 욕망에 대한 의식작용의 표현인 "요구(demand)"와도 다르다. 욕구는 억압의 관계 바깥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구는 사회적으로 허용되고 적응된 표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욕망과는 다르다. 욕망은 존재의 결핍과 관계하면서 무의식의 밑바닥에 침잠하며 주체의 "상상적인 것" 속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프로이트 이래 무의식과 욕망은 흔히 직접적으로 성욕이자 맹목적인 충동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라캉은 무의식이 인간의 언어활동처럼 법칙과 구조를 가지고 형성된다고 보았다. 인간 주체는 운명적으로 분열을 겪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고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분열의 동력이 곧 상징과 상징적 관계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된 틈이 곧 욕망을 구성하는 것이다.
**현대 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 두산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