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 10. 24
■ 제1차 세계대전시기(1914-1918)의 극동지역 정세
●중국 - 전쟁 중립선언
제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투쟁을 무력적 수단에 호소하게 된 것으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국제적인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즉 19세기 말부터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세력관계와 영토관계에 심한 불균형이 일어나자 세계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유럽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전화(戰禍)가 자국에게 파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14년 8월 3일 대총통 원세개의 이름으로 중국의 영토, 수역 또는 조차지 등에서의 전투행위 억제를 교전국에 요청했다. 이어 8월 6일 중립규칙 24개조를 발표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의 중립입장을 선언했다.
●일본-독일의 조차지 산동 반도점령
유럽에서의 전쟁개시는 아시아 특히 극동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정세와 전략태세를 변화시켰다. 즉 제국주의 열강이 극동지역에서 일제히 철수하자 일본은 극동, 즉 아시아에서의 정세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되었음을 감지하면서 대 중국 정책에서도 호기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일본은 영·일 동맹조약 의무에 따른다는 이유로 연합국 측에 가담해서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독일군이 조차(租借)하고 있던 산동 반도의 교주만(膠州灣)을 공격했다. 교주만의 청도(靑島)에는 독일군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29,000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투입해 독일의 조차지를 단숨에 점령하고 말았다.
이어 일제는 1915년 1월 중국 측에 산동 반도는 물론 남만주와 내몽고 등에 대해서도 이권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의 21개 요구조건을 강요하고, 1915년 5월 9일에 원세개 정부 측의 수락을 받아냈다. 주1)
즉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원세개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황제추대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하지만 도처에서 일어난 반원(反袁) 운동(제3혁명)이 확대되자 원세개는 황제칭호를 취소하고 1916년 6월 6일 반원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중국 군벌정부 - 연합국 참전
당시 중국에는 전국을 통제할 만한 권력이 없었다. 원세개가 사망한 후, 중국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10여개의 군벌이 세력다툼을 하는 군벌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군벌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소유한 지방 세력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외국 세력과의 결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들끼리도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동지가 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중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전쟁의 후반기인 1917년에 이르러 연합국 진영에 가담했다. 손문, 강유위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군벌정부 내의 총통 여원홍과 부총통 풍국장도 참전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국무원 총리 단기서와 양계초 등이 당초의 중립 방침을 깨고 참전을 선언했다. 주2)
한편 1917년 4월 참전한 미국도 극동에서 지속적으로 팽창해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중국의 참전을 전폭 지지했다. 하지만 중국은 처음부터 연합국 측에 서서 싸운 것도 아니고 내내 관망하다가 연합국 측에 붙은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전국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가 없었다. 주3)
●러시아 - 고립주의
한편 유럽에서 세계대전의 포화가 터지자, 러시아는 일본의 배후공격을 두려워하며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한편 1917년 제정러시아를 붕괴시킨 볼셰비키정권은 유럽에서도 고립되어 있었지만 동북아 국제정치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욕구를 한층 조장해 러시아의 세력 아래 있던 북만주는 물론 연해주 일대까지 지배하려고 시베리아로 출병했다.
즉 볼세비키정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3)으로 독일제국과 단독강화를 맺으려 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로 파병했고, 일본도 1918년 8월에 7만 2천여 명의 병사를 동부시베리아로 파견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열강들이 시베리아에 대한 무력개입을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적군과 파르티잔의 끈질긴 저항으로 백위파와 연합군세력의 시베리아 점령은 좌절되었다.
●한인 - 독립운동의 기회와 위기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에게 세계대전의 발발 소식은 조국독립의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으로 연해주에서의 광복운동은 큰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의 모든 대한국인들의 사회활동, 특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권업회가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당하고 말았다.
또 권업회가 모체가 되어 성립되어가던 대한광복군정부도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광복활동의 중심은 1910년을 전후로 해외에서 중요한 독립운동기지 역할을 했던 연해주 지역에서 중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경과에 따라 만주와 중국본토에서도 여건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당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유럽에서의 전쟁이 발발하면 중국과 일본 간의 큰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혈전준비’에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들은 중·일 간의 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군벌정부와 당시 힘이 미약했던 손문도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의 불똥이 튈 것을 두려워한 중국 당국은 대한국인의 광복운동을 억제하려고 합법·비합법적인 한인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그에 따라서 북간도의 간민회(墾民會)가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해산당하고, 무력투쟁을 기대했던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백서농장(白西農場)으로 위장한 채 혈전 태세를 겨우 유지해가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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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주1) 일본은 1914년 말, 군비확장을 위해 중의원을 해산했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 3월 치른 선거에서 육군의 군비확장에 반대했던 정우회
(政友會)는 대패하여 제2당으로 전락했다. 즉 일본의 참전은 중국에 있는 독일 권익의 인수와 중국 본토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함으
로써 아시아의 패자가 되려는 데 있었다.
주2) 단기서(段祺瑞)는 자신의 참전 안(案)에 반대했던 국회를 회복시키지 않고 안휘파(安徽派)의 정객들로 구성된 새로운 국회(안복국
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한편 손문 등 남방의 혁명세력은 안복국회의 비정통성을 지적하며, 옛 국회를 회복한다는 호법(護法)운동 벌
였다.
주3) 중국의 참전은 유럽 전쟁터에서 14만 중국노동자군단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유럽 전선에서는 연합군의 큰 희생으로 전선과 후방에서
노동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부터 중국 교회 조직을 이용해 중국 노동자들을 모집하다가, 1917년 8월
중국 북양정부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본격적으로 중국노동자들을 모집했다.
즉 중국은 ‘노동자들을 병사대신 보내는 방식’으로 유럽전선에 참전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산동· 직예· 강소 등에서 14만 중국노동자
들을 모집해 유럽전선에 배치했다. 이들은 전선과 후방에서 도로보수, 탄약수송, 지뢰제거 등 가장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중국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단 한 명의 병사도 파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음에도 전승국 대우
를 받지 못한 채 독일에 내준 조차지 산동 지역을 다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을 당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