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4. 17. 23:04
■ 이인정(李仁挺)
● 문과시(文科試)
[고려문과]시년미상
● 인적사항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자]
[호] 성암(誠菴)
[시호]
[합격연령]
[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 이력사항
[전력]
[관직] 문하평리(文下評理)
[기타]
● 가족사항
[부] 이핵(李翮)
[조부] 이득견(李得堅)
[증조부] 이승고(李升高)
[외조부] 金○○)
본관 : 김해(金海)
[처부]
● 안항:형제
[제] 이진(李瑱)[麗文]
[제] 이세기(李世基)[麗文]
[출전]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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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광주판관, 전중시사, 기거사인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이진(李瑱)의 형이며, 이제현(李齊賢)의 큰아버지이다. 아들은 이부(李榑)와 이규(李樛)로 각각 사인과 헌납에 이르렀다.
1276년(충렬 2) 윤3월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내수(內竪: 內僚)들이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으로 허통(許通)되어 조정의 반열을 어지럽히는 것을 첨의부(僉議府)의 낭사(郎舍)들과 더불어 간쟁하였는데, 충렬왕이 노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 때 100여 인과 공모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다루가치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278년 사간으로 있을 때에도 능력이나 공로가 없고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낭사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의대부(司議大夫) 백문절(白文節)·김서(金㥠), 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1280년 3월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첨의부의 낭사로서 고신에 서명할 때에는 반드시 공적과 허물을 따졌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