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아네스 33 추천 11 조회 931 15.01.27 12:31 댓글 61
시간이 물살 따라 흐르고 배는 점점 불러왔다. 입덧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구토가 약간 나려고 하면 매운 어묵꼬치하고 고구마를 마냥 먹어댔다.
뱃속에서 활기차게 발길질 하는 나의 분신은 아마도 아들인가 보았다.
어느 날, 안집 마루에 걸터앉아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기타 줄을 퉁기고 있는 20살 남짓의 젊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침 마당가에서 마중물을 붓고 비를 맞으며 펌프질을 하고 있다가
기타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빗방울이 통통 튀는 듯한 분위기다. 산간마을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고즈넉하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다. 음악소리에 끌리기도 했지만
딱히 기타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청년의 눈은
갈망을 가득히 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순간 아무 것도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음 날 주인아줌마로부터 그 청년은 13세에 원인 모를 심한 열병을
앓고 난 이후에 실명이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안타까움과 더불어 그가 보지 못하는 만큼 이 세상의 맑고 깊은 소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타인에게 말 걸기 하듯이 가까이 다가서 관심을 보이고 했겠지만
행여 마음을 다칠까 청년이 등산용 스틱을 의지해 더듬거리며
마당가로 나설 때에도 선뜻 도와주지 못했다.
누구나 다 혼자인 걸. 네 운명을 네가 있는 그대로 싸안고 사랑해야만 해.
그렇게 조숙하게 초연한 듯 중얼거리면서.
그러다가 입덧이 유독 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농장으로 일하러 나가던 아줌마가
내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새댁! 입맛이 떨어진 모양이구먼? 살이 빠진 걸 그래. 잘 먹어둬!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할 때야. 저기 뒤란에 고들빼기김치
한 독 땅에 묻어 놨으니 나 없더라도 꺼내다 먹어. 내가 바빠서 그냥 나가니까.”
그 날 늦은 오후였다. 밥 익어 가는 냄새, 다른 날보다 구수했다.
고들빼기김치, 기름 잘잘 도는 밥에 한 가닥 걸쳐 입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뒤란으로 돌아 장독 뚜껑을 열고 막 비닐장갑 낀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렸다. 꺼내먹으라고 했잖아!
다시 용기를 내어 손을 밀어 넣는데 입덧보다 더 심한 울렁거림과 동시에
무슨 벽돌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만 뒷마당 가에 나동그라졌다.
“거기 누구 있나요?”
기타를 든 청년이 웬 도둑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가받은 도둑이에요. 저어~ 사랑방에 사는.
아줌마가 김치 꺼내먹으라고 했거든요.”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가가 놀랐으면 어떡하죠?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뜻으로 기타 연주 하나 들려드릴게요.”
그 이후로 가끔 나는 그 청년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주인집 마루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 꿈을 꾸었네~~”
아이는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던 걸까? 예정일을
훨씬 지나도록 소식이 감감이었다.
그러다가 밤손님처럼 어느 한밤중에 통증이 몰려왔다.
어머나, 어쩜 좋아, 신랑이 비상에 걸려 집에 오지 못하는 밤에 말이야.
나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주인집 마당에서 아줌마 도와주세요 소리쳐 불렀다.
상황을 파악한 주인 아저씨가 운전을 하는 택시에 타고 인제
의원으로 달렸다. 인제에서 유명한 의원이라지만 그 당시
의료시설이나 모든 면에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꼬박 하루를 하늘이 노래지고 눈이 뒤집히도록 통증에
시달려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천형인가 싶었다.
의원이 살펴보더니 아가의 머리털이 까맣게 보인다는데 통뼈인 모양이라며
자궁수축제를 주사하니 5분 간격으로 죽을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도무지 기미가 안보이고 난산이 되자 당황한 의료진은
그냥 제왕절개를 하자고 제안했다. 연락받고 달려온 신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원주 큰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서둘렀지만, 자궁 문이 이미 열려있어
그 상태로는 원주로 가는 동안 산모도 아기도 생명을 보장 못 한다는 바람에
그냥 후진 시설에서 국부마취만 한 채로 제왕 절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의료진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낙후된 시설에서 수술하다가
소중한 생명이 빛을 보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움이 몰려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 기구 부딪치는 소리 들려온다.
의료진들 거친 숨소리도 들려온다. 와아~ 아기 머리가 무지
크다. 잘 집혀지지도 않네. 시간 없으니 빨리 서둘러 등등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잿빛 수술대에 누워 순전하고도 절실한 기도를 했다.
'생명을 축복해주세요. 무사히 아기를 낳게만 해주시면
정말이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 사랑하고 살겠습니다.'
광활한 우주의 운전자에게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좀 안정이 되었다.
드디어 뱃속의 온갖 내용물이 뜯어져 나오는 듯
무지룩한 둔통과 더불어 뭔가가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가가 울지 않는 거였다. 양수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아가의 얼굴은 온통 태변으로 범벅, 피범벅이 되었더라나.
간호조무사가 아가를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아무리 두드려도
아가가 울지 않는다는 소리, 개미소리만큼 들려왔다.
내 가슴은 다시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지친 신랑이 수술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신랑이 아기를 재빠르게 받아 안고
똥 범벅이고 피범벅인 아가의 콧구멍을 힘 있게 빨았더니
드디어 아가가 울음을 터트렸다고. 모성 못지 않은 믿음직한 부성이었다.
나는 그런 고난 끝에 태어난 아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 난산 끝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술을 하는 바람에 세균이 감염이 되어 산후열이 올랐던 거다.
40도 가까이 오르는 열을 견디기도 힘들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빈혈로 내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당장 수혈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신랑은 사색이 되어 숨을 헐떡이며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병원에는 마침 내 혈액형인 A형의 혈액이 떨어졌다는 거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의무중대 병장 셋이 (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김병장, 이병장 조병장, )
즉석에서 피를 뽑아 나에게 수혈하자 당장 위기는 면했지만
산후열은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쯤 그 병장들도 오십은 넘었을 텐데.
그 병장들도 보고 싶은 밤이다.
"이그~ 쯔쯧 불쌍한 우리 손주, 엄마젖도 못 먹고
그깟 소젖 먹어봐야 뭐 힘이 날까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미안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순산하지 못한 죄. 빚을 잔뜩 진 느낌이었다.
아가는 시어머니께서 원통의 방으로 데려가 우유로 40일을 키우셨다.
다가온 삶에 대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나와 아가의 생명을 요구하시는가?!
40도에 가까운 열이 떨어질 기미가 안보이자 나는 이제 죽을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 아~ 나를 구세주처럼 믿고 있는 신랑이랑
사랑스런 내 아가를 두고 그냥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마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친정엄마한테 연락하지 말라는 내 부탁을 신랑은
들어주었지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는지 연락을 했나보았다.
엄마와 여동생 둘이 원통으로 달려와 울음바다가 되었다.
울 기력도 없이 눈가에 눈물만 맺힌 나를 보던 엄마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 예약해두었다고 의원에 구급차를 부탁했다.
바로 그날, 의무중대 참모님이 부하의 참담한 소식을 듣고 신랑을 호출하셨다.
서울까지 가는 거보다 현리 야전병원으로 가면 그곳은 시설도 의료진도 일급이라며
신랑한테 특별히 한 달 동안 아내를 보살피라고 휴가를 주신 거다.
잊지 못할 은혜로운 의무중대 참모님 보고싶은 밤이다.
현리 야전병원에 도착하여 새로운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열은 39도에서 머물렀다. 한 달을 옴짝달싹 못하고 죽은 듯 누워서 지내는 동안
신랑이 오물 묻은 걸레까지 빨아가며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폈는데도 무심하게 말이다.
황대위님 마저 신랑한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날,
신랑은 내 얼굴을 비비며 손을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연이 아빠! 거울 좀 줘봐. 어제 밤에 연꽃을 캐는 꿈을 꾸었어.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 말이야."
참으로 신기하게 바로 그 다음 날로부터 열이 미미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40일 만에 37도 5부까지 떨어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났다.
황대위님이 신랑한테 했다는 말이 기억나는 밤이다. 이렇게 인내력이
강한 분은 처음 봤다고. 너무 기쁘다고. 의사로써 보람을 느낀다고.
야전병원 황대위님, 세브란스 산부인과 전문의로 날
치료했던 분도 보고 싶은 밤이다.
꼬랑지 : 아네스가 인제 원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마운 분들이 있어 지금 이렇게 글춤도 추고
즐겁게 댄스도 하고 있잖아요. 일요일 찬3모임에서
댄스했던 모든 분들 감사했어요. ^^
원통해서 못살겠네
월견초 작사
백영호 작곡
백설희 이미자 (1968)
원통해서 못살겠네 원통해서 못살겠네
믿지못할 그말씀에 청춘을 빼앗기고
하지못할 그맹서에 사랑도 짓밟아놓고
생각을 말어라 그 인사라니
원통해서 내 못살겠네
울어봐도 못살겠네 땅을쳐도 못살겠네
주지못할 그사랑에 처녀란 이름잃고
자랑삼든 제비댕기 물들여 못쓰게하고
마즈막 길이다 이별이라니
억울해서 내 못살겠네
2020-05-3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