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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島山) 안창호 선생 순국 80주기에
1. 도산(島山)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하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선생의 순국 80주기를 맞아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힘써야 되어야 하겠기에 우리는 다시 도산선생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혼탁한 한국사회에서 도산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코우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그날 오후 프랑스 관헌에 체포되어 일경에 인도됐다. 도산은 같은 해 6월초 인천을 거쳐 호송되어 4년형을 받고 서대문과 대전의 감옥에서 복역하게 된다.
또한 도산은 1937년 6월에 소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수양동우회란 흥사단계열의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 26년 1월에 서울에서 조직됐다. 당시 수양동우회 조직에는 춘원(春園) 이광수도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마침내 도산은 60세의 일기로 영원히 잠들게 된다.
도산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롱섬에서 농업을 경영하는 안흥국(安興國)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도산은 18세가 되는 1894년까지 고향에서 서당 수업을 받으며 지내다가 청일전쟁이 끝나갈 1895년경 서울에 가서 공부할 욕심으로 상경하여 언더우드(H.G.Underwood)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에서 3년간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예수교학당을 통해서다.
주요한이 쓴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는, 예심판사의 심문조서에 따르면, 도산은 자기의 종교를 기독교 장로파라 하였고 17세때에 단신으로 상경하여 당시 정동에 있는 원두우 학교의 보통반에 입학하여 동반을 졸업하고 특별반에 들어가 17세때 졸업했노라고 했다1)는 것이다. 뒤의 '17'세는 19세일 것이다.
서울에 와서 노자가 떨어진 도산은 마침 정동 거리를 지나다가 선교사 밀러(F.S.Miller, 閔老雅)가 서툰 한국말로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라는 권면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 무렵 밀러는 그의 선교 보고서에서 안창호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즉, 도산은 새해를 맞아 옷 수선을 위한 명목으로 3원을 밀러 교장에게 빌린 일이 있었는데 그후 새 옷이 보이지 않고 일감을 달라고 요청하기에 속임수인가 의심이 들어, 옷 수선을 위해 빌려간 3원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저는 그 돈을 갚을 일거리를 찾고 있는데 당신께서 요구하면 언제든지 돌려줄 수 있도록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라고 대답하자 밀러는 "그를 잘못 판단했음을 깨닫고 눈물이 났다"2)고 기술하고 있다. 젊은 시절이지만 도산의 정직성과 근면성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그 학교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했지만 일찍부터 한국인 교사도 있었다. 처음에 정동명(鄭東鳴)이 있었고 도산의 입교 당시에는 송순명(宋淳命)이 있었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동안, 도산은 그 학교의 접장으로 있던 송순명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도산은 그 이듬해 자신도 접장이 되어 한 달에 일원이란 보수를 받게 되었다.3) 이 때도 밀러는 도산을 세심하게 관찰한 듯 그의 보고서에서 다시 도산을 언급하고 있었다. 밀러는, 도산이 18세로서 상급반 학생의 일부가 자존심을 내세워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아 실망하고 있으면서도 구세학당의 접장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평양에서 온 소년 안창호는 전에 있던 접장(영길이)보다 훨씬 훌륭하였다. 실제로, 학당은 평양에서 온 이 소년의 열정과 활력 덕분에 새로운 단체가 된 것 같다. … 창호는 자기 주위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들을 끌어 모아 열정과 활력을 불어넣고자 노력하고 있다"4) 이 보고서를 쓰고 있을 때에 밀러가 주관하고 있던 구세학당에는 등록된 학생 수가 50명 정도였고, 출석 학생은 35-40명 정도였으며 교육과목은 성경을 비롯해 산술, 지리, 음악, 생물 등 근대적 학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5)
이 학교는 뒷날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되거니와 성경을 기초로 하여 근대학문까지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 도산은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며 자기성장에 큰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이 한말 양계초(梁啓超)의『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비롯한 개화와 관련된 책을 읽었고 미국에서 짧은 기간동안 교육을 받게 되지만 그의 학력이 이 구세학당으로 거의 끝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학교의 기독교교육이 도산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학교에서 도산이 밀러로부터 위와 같은 관찰과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뒷날 밀러가 도산의 도미(渡美)를 적극 지원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미국 유학의 목적을 묻는 흥사단 사건 예심 조서에서 밀러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도산은 밀러를 두고, "그 사람은 본인이 통학하던 원두우학교의 교장이요, 또 미국 선교사이므로 동인의 주선으로 본인이 도미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6)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이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언더우드가 책임자가 되어 간행한 장로회의 주간신문인 『그리스도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1895년 당시 '정동학당'(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던 안창호가 구원의 도리를 말하며 전도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안창호의 신앙고백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수용될 당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7)
이렇게 신앙고백이 가능했다면 그는 구세학당 시절에 세례를 받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선생은 20년 전 소년시절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고 열심으로 전도"했고,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계몽교육을 힘쓰는 한편 교회를 세우고 일심으로 전도를 하고 친히 설교를 하였"다는 전영택이 증언하였다.8)
도산은 서울 유학에서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김현진 문하에서 사서삼경을 읽고 필대은에게서 민족사상을 받은 그가 이제 기독교 사상에 접하고 과학 문명이라는 새로운 지평선의 광경을 제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는 점에서 기독교적이었다거나 중요한 일을 당할 때에 예수교식으로 기도를 올렸다는 것은 서울 유학에서 받은 기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9)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주요한도 도산이 예수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가 흥사단을 창립하고 규칙을 정할 때에, 문답식과 입단식·서약례 등을 행하게 하고, 모일 때에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 등은 기독교의 의식에서 본뜬 것이 분명하다. 도산이 사랑의 세계를 말하고, 자유 인권을 존중하며, 동포간의 무저항주의를 주장한 것 등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10)
앞의 인용문에서 도산이 자기 고향인 도롱섬에 와서 이석관을 전도하여 큰 교회를 세우게 한 것을 보았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에 열심히 전도한 도산의 영향력은 강서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강서군 탄포리(灘浦里)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 곳에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한 것으로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성립시켰다,11) 강서군 청산리교회도 안창호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12) 이로도교회는 도산의 전도를 받아 세운 탄포리교회와 송호리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이로도교회와 송호리교회도 또한 안창호의 영향력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
도산이 기독교를 수용하기 전에 미국 북감리회(1892)와 북장로회(1893)가 선교사를 평양에 파송, 전도하여 개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1894년에는 평양감사 민병석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가함으로 기독교 선교가 불안했다.14)
도산이 개종했던 시기를 전후하여 그와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었다. 임기반·필대은·이강 등이다.15) 이들의 개종이 도산의 전도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도산이 개종 초기에 그렇게 열심히 전도했다면 이들 동지들의 개종이 도산의 전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16)
1894년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여 영어와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업하고, 기독교 교육을 받은 그는 이즈음에 예수교 장로교에 입교하고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했다고 적었다. 그는 이 무렵에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이다.
2. 도산선생, 교육자로 복음을 전하다.
서울의 언더우드 학당에서 접장을 하는 동안 그는 청일전쟁이 끝나고 민비시해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건과 변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1897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그 후 5년간 경향각지를 유세하며 청년웅변가로, 애국운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점진(漸進)학교를 세워 경영하다 후에 기독교 장로교에서 인계하여 일제시대에도 계속되다가, 해방 후 공산 정권의 손으로 폐쇄되었다.17)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밀러 목사의 주례로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그는 미국 유학에 오르게 되었다. 구세학당에서 배운 신문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를 유학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도산 부부에게는 그날 하루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눈물겨운 신혼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 미국인 선교사를 알게 되어 도산 부부는 그의 집에 들어가 가사 일을 도우면서 말을 배우고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었다.18)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는 동포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도산은 미주본토에 상륙한 한인들이 상부상조와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고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이광수는 그의 책에서, 도산이 한인을 지도하기 위해 사용한 회관이 뒷날 예수교회당이 되었다고 한다.19) 여기서도 도산은 자신이 예수교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했을 뿐아니라 교민들도 그렇게 지도했음을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을 지도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후 도산은 1904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기독교가 운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게 되었다. 이어서 1905년 4월 5일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되었으며, 그 해 11월 14일에는 퍼시픽 가에 공립협회 회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11월 20일에는 『공립신보』를 창간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민사회를 섬기는 지도자로 등장한 도산은 동포들에게 교회에 나가기를 권하는 한편 교민들이 출석할 만한 교회를 친히 점검하고 그런 교회를 소개하기도 했다.
주요한의 증언이다.
"리버사이드 동리에서 18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모이어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미구에 회원이 35명으로 늘었다. 도산은 또 회원들을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근방 예배당들을 찾아 다니면서 목사의 선을 보고,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목사가 있는 장로교 신령회교회에 다니기로 하였다. 도산은 그 목사한테 캠프에 와서 야학을 봉사적으로 가르쳐 줄 선생을 청구했더니, 주일날 목사가 설교 끝에 지원자를 나서라고 하는데 열 한 명이나 자원해 나섰다. …도산이 또 교사 선을 보고 그 중에서 골라 오게 하였다."20)
이같이 교회에 다니도록 권고하고 또 잘 지도하는 교회를 선정하여 출석토록 하면서 도산은 늘 입버릇처럼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산의 이러한 노력은 농장의 수입을 올려주어 한인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곳 교회의 여러분들이 도산과 한인들의 성실한 노력에 감사하도록 만들었다.21)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이렇게 신뢰를 얻게 된 것은 도산의 탁월한 지도력과 함께 교회가 신앙적으로 이들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도산이 미국에서 지나는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노일전쟁을 거쳐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을 받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서두르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진 청나라·러시아는 물론 미국과 영국이 노골적으로 일본을 뒷받침하면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를 측면 지원하고 있었다. 도산은 조국의 이런 위기를 강 건너 불 보듯이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젊은 학창 시절 기독교 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장으로 기독교 교육이 대성학교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 당시 기독교계의 애국지도자인 전덕기 목사와, 게일(J.S.Gale) 푸트(W.R.Foote) 같은 선교사를 초청, 기독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기갈모의(飢渴慕義)' 등의 문제로서 설교하였고 그 자신 교회당에 출석하기를 게으르지 않았다고 한다.22)
또 도산이 직접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23)는 대성중학교 제자 전영택의 증언은 도산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초기부터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까지 그의 기독교 신앙생활은 종래와 다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여전히 교회당에 열심히 나갔으며 때로는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했던 것이다. 증언자들은 도산이 이 때 민족문제를 두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해준다.24)
그는 점진학교 시절부터 전도와 설교에 힘썼을 뿐 아니라 교민을 교육하는 데에도 기독교 신앙을 활용하였고 귀국해서 대성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몸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피교육자들에게도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권유하고 있었다.
3.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나서다.
1910년, 도산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오른다. 4월 중순 중국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 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911년 5월, 도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치타·이르크츠크·페테르스부르그·베를린·런던·글래스고우를 거쳐 9월에 뉴욕에 도착했고 시카고를 경유, 새클라멘트의 한인 농장을 방문한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으며 클래어몬트·샌프란시스코·스팍톤 등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이 무렵부터 1919년 다시 미국을 떠날 때까지 도산은 비교적 순탄한 가정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의 뉴욕 도착은 1911년 9월 2일이었다. -안창호씨 도미- 라는 제목으로 도산의 뉴욕 도착을 보도한 신한민보는 도산을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여 조국의 역사를 광복코자 동서 내외에 무한한 풍상을 무릅쓰고 다니는 안창호"25) 로 묘사하면서, 교민들을 대신하여 그의 미주 도착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도산에 대한 최대의 찬사였다. 그가 이같은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나 그 뒤에 도산이 대한인국민회 등을 조직함에 따른 교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도산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주에 도착한 도산은 교민들의 여러 환영회에 참석하여 그 동안 겪은 소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도산은 한 환영석상에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없지만 그는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면서 나라 망한 책임이 이완용, 송병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된 자는 다 망국의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전일에 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곧 금일에 나라를 회복할 자이니 이제 여러 방면으로 보건대 … 무궁한 희망이 있으니 이것이 나의 기쁜 소식이요"라고 했다. 이어서 도산은 한국의 기독교인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망국과 관련,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곁들이고 있다.27)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 같은 그의 평가는 도미 후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한국 교회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형식을 띄고 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곁들인 이런 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국권회복 운동에 임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국권회복운동이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의 도움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도산은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미주 교민들의 의혹을 제거함으로써 그 뒤에 계획하고 있는 민족운동에 미주 거주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도움을 끌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신뢰는 곧 미주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산은 1912년에 들어서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미주 지역 기구조직에 착수한다. 도산은 이해 11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중앙총회장에 피선되었고, 북미지방총회(샌프란시스코)·하와이지방총회·시베리아지방총회·만주지방총회 등을 두었다. 그 이듬해 5월에는 흥사단을 창립하고 7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부설로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도 재창립했다.
도산은 이 때부터 캘리포니아주 일대의 한인사회를 심방하면서 동포를 격려했다. 망국민의 설움을 딛고 교민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도산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15년 8월에는 하와이 국민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호놀룰루를 방문하고 이어서 하와이 각 섬을 방문하였으며, 1917-1918년에는 멕시코 각지의 교민들을 순방하였다. 도산이 한인순방할 때에 교민들은 대부분 한인예배당을 이용하여 그를 환영했고 그 또한 한인 예배당에서 한인들에게 연설했다. 1918년 11월 1일,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서 북미·하와이·멕시코 지방총회 및 동포들에게 단합 권고문을 보냈는가 하면, 제1차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파리강화회의와 약소국민동맹회에 한국대표 파송을 결정하는 대외활동에도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인국민회가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 기능을 대신 수행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기간에 있었던 도산의 활동은 결국 1919년 3·1운동으로 연결되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활동의 역할로 평가될 수 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휘명령 아래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도 보인다.
"(전략) 하나님의 지휘명령아래서 죽음이 아니면 독립, 두 가지로써 뒤를 이어 나아갈 것이 올시다. …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준비하여 널리 유세하며 각 신문·잡지를 이용하여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종교계에는 지금 한국 교도의 악형받는 참상을 널리 고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청구합시다. 이렇게 하여 미국 전국 상하로 하여금 사람마다 한국의 사정을 알아서 많은 동정을 기울이게 되면 장래 우리 활동에 힘 있는 도움을 얻을 것이올시다. 이것이 곧 외교의 활동이니 우리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특별히 당부할 책임이요. (후략)"28)
도산은 3·1운동이 발발한 한달 후인 4월 1일 상해로 가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다. 이 때 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모금한 6,000달러를 휴대하고 보좌관 정인과와 통역관 황진남을 대동하고 있었다. 휴대한 금전은 결국 도산이 임정을 꾸리는 데에 사용하게 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모금은 대부분 미주 안의 한인교회를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상해에 도착해서도 그는 5월 26일과 6월 4일에 각각 상해 북경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 진행방침을 연설하였다. 아직 교민단체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한 회집 장소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교회당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본다면 도산의 독립운동이 기독교계와의 연대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도산선생, 기독교에서 희망을 보다.
목회자이자 문필가였던 전영택은 스승 도산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선생은 20년 전 소년시절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고 열심으로 전도를 했읍니다. 그는 그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새교육을 힘쓰는 한편 교회를 세우고 일심으로 전도를 하고 친히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의 시대의 우리 민족이 당한 처지와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한 운명으로 보아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활동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요 가장 큰 사명이라고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극히 사랑하고 애독하였읍니다. 특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한 말씀이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한 말씀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읍니다. 그리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나니라' 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민족지도 이념의 근본 사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사람은 정치가나 교육가나 종교가나 문학자가 되기전에 먼저 하나님앞에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저한 신념이었읍니다. 그래서 그가 친히 성경을 애독하면서 청년들에게도 읽기를 권했읍니다. 선생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웨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을 하고 회개를 하면서도 신앙과 희망을 가지고 기도로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읍니다. 이 기도의 정신과 성경의 교훈은 그의 평생의 나라를 위한 활동을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애국자요 민족운동가이었으나 종교가는 아니라'고 하겠읍니다. 판에 박힌 소위 종교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신과 그 생애로 보아서 또 종교가라고 보아도 잘못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 어른은 철두철미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였고 사(私)를 떠나서 오직 '공'(公)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부정(自己否定)의 정신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높은 자기희생의 정신을 배와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겠읍니다.…"29)
전영택은 도산선생을 매우 독실한 기독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도산은 소년시절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열심으로 전도했고, 여러 교회를 세우고, 또한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친히 설교를 했다. 도산은 기독교를 의의 종교라면서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20세를 넘은 나이에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가 다시 귀국하여 중국과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또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흥사단)을 조직하고 샌프란시스코,뉴욕, 시카고, 상해, 그리고 멕시코에까지 그 지부를 두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그 당시 도산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종횡으로 수차 뛰어 다녔으니 이런 활동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역만리에서 고초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민족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선각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하고 회개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따라서 도산은 전형적인 종교인은 아니지만 진실한 신앙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산을 철저히 자기 부정·자기희생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도산이 외적으로는 흡연문제가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누구보다 앞선 독실한 기독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민족의 희망을 보았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정교분리의 신앙이나 민족이 빠진 신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신앙은 당시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고, 민족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신앙이다. 그는 민족문제를 추구하는 신앙인인 한편 의와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힘-이었다. 한말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것도 힘이요,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국가를 이룩하는 것도 힘이었다. 그가 이 힘을 발견한 것은 오랜 사고와 경험을 통해서였다. 한말 일제하를 살아온 도산은 반봉건·반침략의 민족운동을 하려고 해도 무엇보다 건전한 힘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힘은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정직의 힘과, 무실역행(務實力行)에서 보여주는 성실과 근면(부지런함)의 힘, 언어와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신독(愼獨)과 절제(節制)의 힘 등이 어울려 이룩되었고 또 그것들로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사상과 행동에서 보이는 절제(節制)함은 유머와 부드러움을 동반한 근엄(謹嚴)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이 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여, 좁게는 공동체운동을, 넓게는 민족운동·국권회복운동을 추진하는 밑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이러한 힘의 배경이 되는 사상의 근원은 기독교의 성경과 체험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서 선교사들을 통해 구세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이끌었던 것이다.
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도산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본보기이자 국가 지도자의 귀감으로 선생의 신앙인격과 교훈은 시대성을 초월해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다.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그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교회가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힘써야 되어야 하겠기에 우리는 다시 도산선생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혼탁한 한국사회에서 도산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참고문헌
1) 주요한이 쓴 『安島山全書』상 -傳記篇- 23p
2)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Korea Seoul, Oct. 1895(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1884-1920)(『도산안창호전집』제5권, 53p∼66p).
3) 주요한, 앞의 책, 24p.
4)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Oct. 16th. 1896(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1884-1920)(『도산안창호전집』제5권, 67∼75p).
5)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Oct. 16th. 1896(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1884-1920)(『도산안창호전집』제5권, 67∼75p).
6) (주요한, 『안도산전서』, 35p).
7) "평양 보통문안 교회", 『그리스도신문』1897. 7. 1(『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7p).
8)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p
9) 이광수, 『도산 안창호』75p.
10) 주요한, 『안도산전서』25-26p.
11)『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조선예수교장로회, 1928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6p) (1894년)
12)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조선예수교장로회, 1928(『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6p)
13)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조선예수교장로회, 1928(『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8p)
14) 한국 기독교의 역사 I』(기독교문사, 1990) 249p
<188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사건>, 김승태,(韓國基督敎史硏究, 15·16호, 1987, 19-20p) 및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15) 주요한,『안도산전서』 19-20p.
16)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895∼916p
17) (주요한, 『안도산전서』, 32-33p.
18) 주요한, 『안도산전서』, 53p.
19) 이광수, 『도산 안창호』, 31p.
20) 주요한, 『안도산전서』, 47p.
21) 주요한, 『안도산전서』, 48-49p.
22) 洪箕疇, "安島山의 校長時代; 一學生의 메모란담", 『東光』1933. 1·2(『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67∼68p)
23) 전영택, "大成學校의 精神", 『새벽』1954. 9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574p.
24)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쪽/ 張利郁, "安島山 秘錄", 『思想界』1965. 3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51p
25) "안창호씨 도미", 『신한민보』1911. 9. 13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201쪽.
美山靑年, "安昌浩君을 歡迎홈", 『신한민보』1911. 9. 27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202p.
27) "안챵호씨의 연셜-상항동포환영회 셕샹에셔", 『신한민보』1911. 10. 4 -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204p.
28) 도산기념사업회 편, 『安島山全書』中 (1990) 89-90쪽 -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903p.
29)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 4. 12 -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432p.
발표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사진작가, 서지학자,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