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의존하여 추상해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명의 도둑들과 조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두가지 에피소드를 토설해 볼까 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도둑들이 있다. 도둑놈..도 있고, 도둑님도 있을것이다.
한때 부자들의 숨겨진, 그리고 추악한 재물만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리만족감을 선사했던 그래서 유명했던, 조세형이라는 도둑이 있고,(사람들은 그에게 대도/大盜 라는 별호를 지어 주기도 했다.)
하도 신출귀몰해서 세인들에게 영웅(?)시 되기도 했던 신창원이라는 도둑도 있었지.
그날도 늦은 영업을 마치고, 당일에 들어온 현금을, 만원짜리는 만원짜리대로 수표는 수표대로 분류해서 늘 그리했던것처럼, 카운터책상 서랍 안쪽에 수표묶음을, 그 다음엔 만원짜리, 그리고 앞쪽에는 천원짜리...이런식으로 정리해서 넣고는 자물쇠를 잠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장사가 잘되는 큰 주유소에서 변변한 철제금고하나 없었다는게 참 이상하다.
나는 영업이 끝나면 카운터 책상을 벽쪽으로 붙여놓고 그 위에 담요를 두어장 깔고 자곤 했다.
한두시간 눈을 붙이고 새벽장사를 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 많은 현금을 딱히 어디다 둘데가 없어서 차라리 그 돈을 깔고 자는편이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잠들고나면, 경비아저씨가 두어시간 불침번을 서는것이었다.
한참을 잤을까? 잠결에 실내공기가 좀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별생각없이 다시 잠에 들었고, 새벽 세시가 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4시부터 주유소 영업을 개시해야하고, 또 중간에 학원에도 다녀와야 했기에 늘 그 시간이면 잠에서 일어나야 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간단한 세수를 하고, 영업준비를 하기위해 사무실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보통은 경비아저씨가 불침번을 서다가 시간이 되면 나를 깨우시는데, 고단하셨는지 그날은 사무실 책상 하나를 내 옆쪽에 끌어다 놓고 같이 주무시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주유기 전원 스위치를 같이 올렸다.
" 우~~~웅....." 주유기 특유의 양유기 모터 소리가 기분좋게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당번 주유원들을 깨우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그 때였다. 내 업무책상을 제자리로 옮기기 위해서 책상을 밀어내는데, 웬일인지 서랍이 비스듬하게 열려있는것이 아닌가? 놀란 나는 현금을 확인하기 위해서 서랍을 길게 열었다.
도둑이었다. 서랍 자물쇠는 경첩채로 뜯겨져 있고, 급히 현금을 확인해보니 앞쪽에 있던 만원짜리와 천원짜리 묶음들이 안보인다.
플라스틱 캐쉬박스를 끄집어 내고 뒤쪽에 두었던 수표뭉치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것들은 제자리에 있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도둑이 들어왔단 말인가?
지금이야 세콤이니 에스원이니, 이런 사설 경비업체들이 있어서 여러가지 보안관련 장치들을 해두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인프라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와 경비아저씨 두사람이 자고 있었고, 바깥에서 침입할수 있는 통로는 모두 잘 단속했었는데. 어떻게 도둑이 들어왔단 말인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엔 아무 생각이 없고, 나는 멍해져 버렸다.
아침이 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뒤에 소장님이 출근하시면서 주유소는 발칵 뒤집혔다.
그 중에서도 얼마전 나와 쿠폰문제로 시비가 있었던 이모 과장과 정모라는 직원이 제일 난리였다.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이건 내부자의 소행이고, 그 중에서도 야간카운터가 가장 의심스럽다.
내부에서 문을 따주었거나, 적어도 현금이 들어있는 책상위에서 잠을 잤는데, 어떻게 모를수가 있느냐는것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 내가 처해있던 상황들이 여러모로 의심을 사기에 좋은 재료를 주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동안 가지게된 몇가지 징크스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다.
그 즈음 내가 일하던 주유소에 태옥형님이 몇번 다녀 가신일이 있었다.
사실 지나간 일들을 추회하면서 늘 마음에 걸리는것들이 있다.
그것은 나의 지나간 기억들을 늘어 놓으면서 어쩔수 없이 언급할수밖에 없는 내 가족사,
그것도 그다지 행복하지도, 게다가 별로 밝히고 싶지도 않은 사건들이 많다는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위해서 부득이 밝히는 것이니 혹시라도, 가족들의 불편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형님이 그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던것이다.
어려서 일찍 서울로 돈벌러간 형님은 이른바 '빵꾸나시'(이 용어거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형님은 자신의 첫 직업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 )를 했는데, 그 당시에는 '시발택시'라는것이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6~70년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자동차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에야 워낙에 자동차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서 자동차 시동을 버튼 하나로 쉽게 걸지만, 그 당시에는 자동차 앞쪽에서 마치 경운기 시동을 걸듯이 핸들을 가지고 빠르게 돌려야 시동이 걸리는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시발자동차'였다.
시발’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생산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의 일이다. 전쟁은 미군을 통해 들어온 군용 차량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까지 여러 경로로 이 땅에 들어와 운행되고 있던 많은 자동차들을 파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자동차들의 부품을 활용하여 운행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자동차 재생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시발자동차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1900년대 초 고종황제를 위한 포드 자동차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50여년 만에 국산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최초의 자동차는 을지로 천막 안에서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발자동차에는 4기통 1323cc 엔진이 탑재되었는데, 그 엔진은 일본에서 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영삼이 제작하였다. 그가 없었다면 시발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 (네이버 캐스트에서 발췌)
우리형님의 사회 첫직업이랄수 있는 '빵꾸나시'는 바로 그 시발택시의 펑크난 타이어를 때우는 직업이었던것이다. 요즘 같으면 카센터에서 일을 하셨던것 같다.
어쨌든 그 어려웠던 6~70년대, 보릿고개가 극심했던 그 시절에, 어머니의 말씀을 빌자면, 형님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굶지않고, 오히려 보리쌀을 쌓아두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형님은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기술로 택시운전수가 되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때의 일을 추억하곤 하는데, 정말 돈을 많이 벌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택시운전수로 번 돈을 저축하지 못한 형님은 사고가 있을때마다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했던 기억이 있다. 울형님의 슬픈 과거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려고 한다.
어느날, 일을 하고 있는데, 주유원 한명이 내게 와서 누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전해주고 갔다.
누굴까? 궁금한 마음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초췌한 모습의 한 남자가 막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서있었다.
공군장교들이 입던 장교복 상의에 까만 염색군복을 입은 그 남자는 바로 울형님이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깐, 초췌한 모습의 형님을 보는 순간,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즈음, 형님은 충식이와 충배, 두 아들을 시골 어머니께 맡겨두고 서울의 모 택시회사에서 택시기사로 일하고 계실때이다. 지금도 인생이 썩 잘풀리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태옥형님은 참 고단한 삶을 살고 계셨다.
남달리 인정도 많고, 의리도 있는 분이었지만,
그의 삶의 방식은 고지식하기만 했던 나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런 삶의 패턴을 가지고 계셨던것 같다.
우리 형님에 관한 기억들을 늘어 놓자면, 며칠밤을 새워 써도 다 못할 얘기들이 있다.
어쨌든, 오랫만에 본 형님의 모습은 많이 지쳐 보였다.
형님은 내게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했다. 형제간에 돈을 빌려달라는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것이었지만, 형님은 어렵게 내게 돈얘기를 꺼내셨다.
형이 어려우면 동생이 나서서 돕는것이 당연하고, 또 반대로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형님이 기꺼이 도와 주는것이 당연한 형제간의 일이겠지만, 그 당시 나의 형편은, 형님의 SOS에 선뜻, 도움의 손길을 펼칠 상황이 못되었다.
많지도 않은 월급이었지만 월급은 고스란히 시골 어머니께 보내 드리고, 매일 지급되는 500원의 야식비 마저 모았다가 구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태준에게 보내주던, 그런 형편이었기에 내게는 형님을 도와드릴 단 한푼의 돈도 없던 때였다.
난 어쩔수 없이 소장님께 부탁을 드렸다.
가불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으셨다.
30만원이 필요하다고 하니, 깜짝 놀라신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 내 한달 월급이 8만원 정도였는데, 거의 넉달치 월급을 가불해 달라고 하니 놀랄수밖에...
소장님은 흔쾌히 돈을 해주셨다. 하지만, 가불하는 사연을 들으시고는 당사자를 직접 오시라 해서 형님이 많이 민망해 할만큼 나무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은 그 뒤로 내가 그 주유소를 떠나게 될때까지 단 한푼도 급여에서 공제를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내게는 은인이셨다.
그런 사연이 있었던터라, 사무실 남자직원들은 혹시나, 내가 돈이 너무도 궁해서 도둑을 빙자해서 800만원 가량의 현금을 절취한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고, 노골적으로 경찰에 신고해서 나를 절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끝내 소장님은 나를 믿어 주셨다. 자신의 돈으로, 도난당한 800만원을 보충하셨고,
돈만 잃었기에 망정이지 잠자던 내가 깨어나기라도 해서 그들에게 몸이라도 상했으면
어쩔뻔 했느냐며 오히려 나를 의심하던 그 남직원들을 심하게 문책하셨다.
다행히, 얼마 안지나서 절도범이 잡히는 바람에 도둑 누명을 벗게는 되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낀다.
내가 책상을 벽쪽으로 최대한 붙여 놓은 까닭에, 책상 서랍을 끝까지 열어볼수가 없었고,
간신히 조금열린 서랍이 앞쪽으로 약간 기울어지면서 마침 앞쪽에 있던 만원짜리와
천원짜리 몇다발만 가져가고, 뒤쪽에 두었던 수표뭉치는 못가져 간것이었다.
예전에 주유원으로 근무했던 사람이 범인이었다.
정확하게 내부사정을 잘알던 친구라서 분명히 뒤쪽에 수표가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꺼내려면 부득이하게 나를 깨워야 하겠고, 또 바로 옆에 경비아저씨까지 자고 있어서
부담을 느꼈다고 했다. 게다가 수표는 사용하다가 발각될 위험이 많다는 점도
그들이 나를 깨워가면서까지 수표를 가져갈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자칫 목숨이 위태로워질수도 있는 상황에서 무사할수 있었고, 다시금, 학업에의 꿈을 계속 이어갈수가 있었다.
............... 다음6회에 계속...........
첫댓글 에그 참 여러가지 일이 많았네요. 오빠.. 나중에 슬빈이가 오빠의 삶을 각색해서 영화하나 주연해도 되겠어요.
나는 오빠의 친 동생이 맞나 싶을정도로 오빠에게 일어난 많은 힘들었던 일들을 그리도 몰랐을까....막내랍시고 너무 나만 챙겼나봐.....
동생들...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래서도 안되고...그렇게 말하자면, 이 오라비는 더욱 부끄러워 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