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동(松林洞)
⚫ 수도국산
⚫ 송현동(松峴洞)
⚫ 중앙시장(양키시장)
송림동은 구한말에 인천부 다소면(多所面) 지역이었다.
‘소나무 숲’이라는 뜻의 ‘송림’이라는 이름은 1789년(정조 13년)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 부터 등장한다.
당시 전국의 인구와 가구 숫자를 조사해 기록한 이 책에는 인천부 다소면 산하에 10개 리(里)가 있는 것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 도마교리(刀馬橋里), 충훈부리(忠勳府里), 장천리(長川里) 등과 함께 송림리(松林里)가 나온다.
이 동네를 일제(日帝)가 1914년 전국적 인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새로 만든 부천군(富川郡)에 포함시켰다가 한 달여 뒤인 같은 해 4월 다시 인천부로 편입시켰다. 이 때 주변의 새말, 장승거리, 샛골 등의 마을을 합쳐 송림리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1956년 제1차 인천부(仁川府) 지역(地域) 확장 때 일본식으로 송림정(松林町)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뒤인 1946년에 그대로 송림동이 됐다. 조선시대의 이름 ‘송림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다.
이처럼 ‘송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동네의 뒷산인 만수산(萬壽山)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높이가 해발 56m에 불과해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까운 이 만수산은 소나무가 많아 ‘송림산’, ‘송현’ 또는 ‘솔고개’, ‘송림고개’, ‘솔재’, ‘송치(松峙)’라고도 불렸다. 이 일대는 원래 상당 부분이 바닷가였다가 1930년대부터 시작된 매립사업에 따라 육지가 된 곳인데, 매립이 시작되기 전까지 만수산은 바닷가에 있는 작은 소나무숲 언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로 이 산은 ‘만수산’이나 ‘송림산’이라는 이름보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많이 알려지고 불려왔다.
수도국산
수도국산의 ‘수도국’은 대한제국 시절을 거쳐 일제 식 민지 시절에 상수도를 관리하던 정부 기구의 이름이다.
인천은 바다와 맞닿아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물이 적고, 수질도 대부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 옛날 비류 백제(沸流 百濟)의 전설에서부터 나오는 얘기다. 그 탓에 구한말 개항(開港) 이후 인천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선박 통행도 늘어나자 사람들이 마시고 쓸 물을 구하는 것이 당장 큰 문제가 됐다.
이에 1905년부터 수도를 설치하려는 계획이 시작되는데, 이를 주도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인천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이 빠르게 늘고, 그들이 운영하는 공장과 상가 등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문학산 계곡에 빗물을 담아 두는 방식을 생각했으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추진되지 않았다. 이어 서울의 노량진을 수원지(水源池)로 삼아 한강물을 인천으로 끌어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 오늘날 재무부(財務部)격인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일본계 은행에서 건설비용을 빌리게 한 뒤, 1906년 11월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물론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조선의 국권(國權)을 실질적으로 모두 뻬앗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도 공사도 일본인들이 맡았는데, 이때 이곳 송림산 꼭대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가 들어섰다. 이 배수지는 수도국에서 관리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을 ‘수도국이 있는 산’ 이라는 뜻에서 ‘수도국산’이라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이것이 아예 산 이름처럼 돼버린 것이다.
이 배수지는 1906년 11월에 공사를 시작해 1908년 준공됐으며, 1910년 10월에는 노량진의 수원지(水源池) 정수시설이 준공됐다. 이와 함께 노량진~인천 사이에 32.62km의 수도관을 깔아 같은 해 12월10일부터 인천으로 급수를 시작했다.
이처럼 수도시설이 있다고 해서 ‘수도국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곳은 인천 이외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이나 충청남도 천안시 등지에도 있다.
이곳 수도국산은 오랫동안 인천의 대표적 인 ‘달동네’로서도 널 리 알려졌었다.
이곳에는 1904년 무렵부터 주민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이때 러일전쟁으로 지금의 중구 전동(錢洞) 주변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을 내쫓아 강제로 이곳에 옮겨 살게 한 것이다. 그 뒤 6·25 전쟁 이후 이북에서 내려온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또 자리를 잡았고, 여기에 1960~70년 대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이 더해졌다.
그 결과 이곳에 있던 소나무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산비탈에 3000여 가구의 켜다란 판자촌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수도국산이 ‘인천 달동네의 대명사’가 됐는데, 이 판잣집들은 1999년 재개발사업이 시작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지금은 판자촌 대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됐지만, 이 동네에 생긴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가면 그 옛날의 모습을 조금은 느껴볼 수 있다.
한편 ‘달동네’라는 말은 흔히 높은 산자락에 있어 ‘밤이면 달〈月〉이 잘 보이는 동네’라는 뜻으로 쓰인다. 주로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빈민층(貧民層) 사람들이 도심에서 쫓겨나 한 데 모여 살던 곳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가 방영 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고 한다. 이 연속극은 어려운 생활 형편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달동네’는 낡고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난한 산동네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국어학자들은 달동네의 어원(語源)을 하늘의 ‘달〈月〉’이 아니라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 옛말 ‘들(〉달)’에서 찾기도 한다.( → ‘들’에 대해서는 남동구 ‘구월동+ 전재울’ 편 참고)
이를 따른다면 ‘달동네’라는 말은 ‘달이 보이는 동네’라는 뜻이 아니라 ‘높은 곳〈달〉에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땅값과 집값이 싼 곳을 찾다보니 다니기 힘든 높은 지역에 살 수밖에 없었는데, 높은 곳을 ‘들’ 이라 불렀기에 ‘달동네’ 라는 말이 생 겼다는 해석이다.
송현동
송림동 옆에 붙어있는 송현동도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지역 이었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송현리라는 이름으로 인천부에 편입 됐는데, ‘송현’이란 이름 그대로 ‘소나무〈松〉 고개〈峴〉’라는 뜻이다. 앞에서 수도국산(만수산)의 여러 가지 다른 이름들을 밝혔는데, 이 중 ‘송현’이 일본인들에 의해 지금의 동네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인천부역(仁川府域) 확장 때 일본식으로 송현정(松峴町)이라 했다가 광복 뒤 이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송현동이 됐다.
따라서 송현동은 ‘송림동’과 마찬가지로 만수산의 소나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인천부 다소면 산하 10개 리(里) 가운데 ‘송림 리(松林里)’는 나오는 반면 ‘송현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 이후 1871년과 1899년에 나온 「인친부읍지(仁川府邑誌)」에도 ‘송림리’만 나올 뿐 ‘송현리’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송현동은 송림동과는 달리 일본인들이 새로 만들어 붙인 이름인 것이다.
송현동은 원래 만석동 괭이부리를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넓은 저지대로, 갯벌과 논이 있던 땅이었다. 이곳 갯골은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구문(水口門)이 있어 ‘수문통(水門通)’ 이라 불렸는데, 갯골물은 지금의 배다리 앞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수문통은 이제 복개돼 주차장 등이 들어서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고일(高逸) 선생의 책 「인천석금(仁川昔今)」에 보면 러일전쟁 무렵 일본군이 중구 전동 일대에 살던 우리 주민들을 이곳으로 내쫓았을 때의 상황이 나온다.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송림산 자락에 자리를 잡을 당시 그 아래 땅은 모두 논이었다. 그러나 이주민들이 버린 양잿물 섞인 빨랫물이 계속 이 논으로 흘러들고, 걸핏하면 바닷물까지 넘쳐 들어와 이곳의 논은 모두 망가지고, 결국은 황량한 갈대밭으로 변해 버렸다는 내용이다.
수문통 갯골과 갈대밭은 그 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매립돼 택지와 공장, 상가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들 지역이 매립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인천에도 전후(戰後) 호황이 계속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 호황에 힘 입어 기존의 인천시내에는 각종 상점이나 서비스업종이 번창하고, 학교나 공공기관들이 자리를 잡아 빈 땅이 거의 없었다.
결국 인천부(仁川府)가 땅을 마련하기 위해 해안가인 지금의 중구 북성동과 동구 만석동·송현동 일대를 매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자 일본의 기업들은 땅값과 인건비가 싼 인천으로의 진출을 서둘렀고, 만석동과 송현동의 매립지는 점차 공업 지대로 바뀌어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중앙시장(양키시장)
지금 동인천역의 뒤펀, 송현동에 있는 중앙시장은 이렇게 해서 생긴 매립지의 야시장(夜市場)에서 시작됐다.
매립사업으로 새로운 땅이 생기자 밤이 되면 이곳에서 야시장(夜市場)이 열려 크게 번창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배가 드나드는데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파는 곳들이 생긴 것이 매립사업과 더불어 점차 시장으로 커나갔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인천에서 유도(柔道) 사범을 한 유창호(柳昌浩)씨가 광복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절에 이곳 송현동 공설시장 개천가에서 야시장을 연 것이 그 시초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야시장 자리에 있던 상점들은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모두 없어졌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생계수단으로 장사를 했다. 이전에 번성 했던 야시장의 맥(脈)을 이은 셈이다.
그 뒤 1960년대 초 이곳이 정비되면서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다시 ‘중앙시장’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던 1950~60년대에는 북한과의 냉전적(冷戰的) 대결 구도에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유’라는 이름을 많이 썼다. 이곳 자유시장뿐 아니라 ‘자유공원’(원래 이름은 만국공원)이나 ‘자유극장’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사람들은 이곳을(자유시장'이 아니라 ‘양키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많이 불렀고, 그렇게 불러야 잘 통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로도 오랫동안 미군부대에서 몰래 빼낸 군용(軍用) 물건이나 원조 물폽, 암달러 등이 이곶에서 많이 거래됐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제는 오래된 일이지만 지금도 나이가 든 인천시민들 중에는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