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첩(空名帖)과 신분사회의 동요
공명첩은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이라고도 한다.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관청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받고
부유층에게 관직을 팔 때 관직명 ·성명을 기입하여 발급하던, 일종의 매관직첩(賣官職帖)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1677년(숙종 3) 이후 시행되었던 진휼책(賑恤策)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재정이 탕진
된 데다 당쟁의 폐해로 국가기강이 문란하였고, 또 흉년이 자주 들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나라에
서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명예직(名譽職)을 주고 그 대가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진휼청(賑恤廳)에서 가설첩(加設帖)을 만들어 매매하였는데, 이 매매로 얻은 돈은 영남지방의 기민(飢
民)들의 구제에 쓰였다. 이 밖에 영조 때 공명첩을 여러 번 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였고, 순조 때에도 김재찬
(金在讚)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또한 절을 크게 짓기 위하여 그 비용을 부담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하급무직(下級武職)의 공명첩을 주었다.
1793년(정조 17) 유점사(楡岾寺)에 100장을 주어 영산전(靈山殿)을 지었고, 1851년(철종 2) 법주사(法住寺)
에 400장, 1879년(고종 16)에는 귀주사(歸州寺)에 500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일시적인 긴급 시책이기는 했으나 당시 신분제 사회에 큰 동요를 가져왔다. 비록 이름뿐인
관직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당시 지배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병역면제 혜택등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배계층의 특권의식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피지배 계층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더욱 증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공명첩의 발행이 신분제 사회를 크게 동요시키긴 하였지만, 신분제 사회의 붕괴를 막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비록 부유층에 해당하는 일이긴 하겠지만, 공명첩의 발행은 정당한 방법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이처럼 손쉬운 방법으로 신분상승의 길이 열리게 되자 지배계층인 양반은 수는 매우 빠르게 증가하게 되
었는데, 이렇게 양반계층의 인구가 두터워 져 결국 지배층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