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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하 14장 21절, 사무엘하 14장 31절, 시편 51편 12절, 마태복음 12장 12절
그러자 왕이 직접 요압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시오, 내가 장군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가서, 그 어린 아이 압살롬을 데려오시오." <새번역>
그러자 요압이 압살롬의 집으로 찾아가서 따졌다. "어찌하여 종들을 시켜, 나의 밭에다가 불을 질렀습니까?" <새번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편 12절, 개역개정>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마태복음 12장 12절, 새번역>
좀처럼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하시는 편이십니까?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기초가 탄탄한 신앙생활은 사실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성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것보다 말씀을 읽다보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하는 순종이 따라오게 되어 있고,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장이 더디다고 느껴지거나, 늘 제자리걸음이라 생각될 때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2가지 허들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허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이 2가지 허들을 잘 넘지 못하면 앞으로 더 높은 허들을 넘을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2가지 허들을 잘 넘어가면서 신앙이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허들은 바로 '~때문에'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자원'이 아닌 '핑계'라는 허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드립니다. 신앙 생활을 왜 시작하셨습니까? 가족 때문입니까? 친구 때문입니까? 사회생활 때문입니까? 문제해결 때문입니까? 마음의 평안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 첫번째 허들을 잘 넘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시작했는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그 어떤 허들을 만나더라도, 혹시 그 허들을 뛰어 넘을지라도 계속해서 당신 앞에 이 허들은 놓여져 있을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리는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로 첫번째 허들을 뛰어넘지 못한 것입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스스로 간절함이 없는데,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우리는 늘 핑계를 댑니다. "'~때문에' 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해야 할 거 같아서요." 그런데 우린 이내 발견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한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수도 없이 실수하고, 도망치고, 변하지 않던 제자들을 3년이나 기다려 주셨겠습니까? 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 '성령'을 보내 주셨겠습니까? 제자들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결심할 수 있도록 스승의 '인내'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사무엘하 14장은 첫째 아들 암논을 죽인 셋째 아들 압살롬을 조금씩 그리워하는 다윗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왕위를 이어갈 첫째가 죽었으니, 이제 원하지는 않지만 다음 왕이 될 사람은 압살롬이었기에 자꾸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술로 도망가 있는 압살롬을 부르자니 암논을 죽인 과거가 떠올라 망설이게 되는 다윗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던 다윗의 심복 요압은 드고아 여인에게 연기를 시켜 다윗에게 이제 압살롬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마음을 전하게 됩니다. 물론 심복 요압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억지로 진행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연기'를 해서 관계가 회복되어진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마는 사실 이 일을 통하여 다윗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그런 노력이 고맙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을 불러 말합니다.
그러자 왕이 직접 요압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시오, 내가 장군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가서, 그 어린 아이 압살롬을 데려오시오." <사무엘하 14장 21절, 새번역>
다윗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요압의 간절한 부탁에 요압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한 후에 그술에서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다윗은 아직 압살롬을 볼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그러나 왕의 지시는 단호하였다.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라. 그러나 내 얼굴은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사무엘하 14장 24절, 새번역>
정말 다윗은 못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할거면 부르지 않는 것이 차라리 좋을터인데, 요압 때문에 어쩔수 없이 부르긴 했지만 아직 닫혀 있는 마음 때문에 압살롬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다윗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왕의 식탁에서 같이 식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지난 3년이란 시간동안 압살롬이 그술에 있으면서 아버지 다윗에게 가졌던 죄송함과 뉘우침의 마음마저도 점점 분노로 변하게 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토록 '~때문에'라는 핑계가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솔직히 아직 압살롬을 볼 마음이 없었다면 요압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압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앞으로 자신을 왕위에서 내려오게 만들 '반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 신앙생활의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성장하지 않는지 궁금하시다면 반드시 이 부분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모든 신앙생활은 당신의 '자원'입니까? 하나님께 내어 드리드린 중심으로 행하는 '순종'입니까? 기꺼이 감사하며 행하는 '기쁨'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마지 못해, 누군가에 등 떠밀려 행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이 첫번째 허들을 잘 넘으셔야 합니다.
두번째 허들은 내 신앙생활이 '사람'중심인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비대면이 가져온 나비효과 '무관심증후군'에 빠져 계시진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찮아지고, 사람에게 관심이 사라지고,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 자꾸만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시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린 지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수도사'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No'라고 말하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의 부탁으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같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어떻게 2년동안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간절히 부탁을 했던 요압도 중간에서 난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편도 계속 들지 못하고 다윗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압살롬의 강력한 '컴백홈'을 요청했던 요압마저도 압살롬에게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압살롬이 아무리 요압을 찾아도 요압 역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합니다.
그러자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을 불러다가 지시하였다. "내 밭 곁에 요압의 밭이 있다. 그가 거기에 보리 농사를 지어 놓았으니, 너희는 가서, 그 밭에다가 불을 질러라." 그래서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다. <사무엘하 14장 30절, 새번역>
여러번 자신을 만나달라고 부탁했지만 찾아오지 않는 요압을 제발로 찾아오게 만드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탁해도, 사람을 보내어도 오지 않던 요압이 자신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자 당장 압살롬을 찾아오게 됩니다. 전 이 장면이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그토록 외면하며 지내다가 고작 '보리밭' 때문에 압살롬을 찾아온 요압에게서 오늘을 살고 있는 많은 관계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소위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마저 인간관계를 점점 '비즈니스 관계'로 설정해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필요하면 만나고, 나에게 필요없으면 만나지 않는 '필요'에 의해, '물질'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관계는 정말 그리스도인이 꼭 넘어서야 할 '허들'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린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들려주신 비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결코 인간관계를 '비즈니스 관계'로 만들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심을 다해 전하시는 마음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34~40절, 새번역>
"사람이 중요합니까? 물질이 중요합니까?" 이런 질문은 원래 질문을 해야 할 내용도 아닙니다. 그런데 현 시대에는 자꾸 묻게 됩니다. 물질만능주의가 교회 안으로 침투하면서, 신앙생활 속으로 침투하면서 이런 슬픈 질문을 자꾸 하게 만듭니다. 왜 물질과 사람을 비교하는 시대에 와 버린 것입니까? 아무리 물질이 중요해도, 물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라 할 지라도 사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외쳐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허들을 넘을 생각없이 세상 풍조에 나날이 묻혀간다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존재는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한 사람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장 31절, 개역개정>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참새보다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사람, 그렇게 만들고 있는 이 세대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이 두번째 허들을 잘 넘어서길 바라지 않으실까요? '사람'중심의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어떤 물질과도 사람은 결코 비교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 성장을 방해하려는 수많은 방해공작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해공작은 결국 '나의 선택'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핑계대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때문에'를 외치고 있기에 여전히 우리는 '자원'하는 심령이 아니라 '핑계'대며 억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에게 물질이 사람보다 중요하기에 오늘도 '물질'중심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기초를 더욱 더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이물질들을 과감히 버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방법들이 자리잡고 있던 돌짝밭을 갈아 엎어 옥토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가지 허들을 뛰어 넘으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느덧 자라고 있는 나의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고, 말씀이 삶이 되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진 이 두 가지 허들을 멋지게 넘어 주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의 부족함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주와 함께! 뛰어 넘어 버리십시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편 12절, 개역개정>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마태복음 12장 12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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