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지난시절의 포항(1) 사진으로 보는 포항의 변천사" 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 격동기와 60, 70, 80년대를 거치며 발전한 포항의 모습이다. 200여개의 이미지를 편집하며 주제별로 작성하기 보다 년도순으로 올리기로 한점을 이해 바라며, 사진 내용은 일강점기, 6.25 전쟁, 동빈내항과 해안풍경, 농어촌지역, 시가지와 도심뒷골목, 새마을운동, 포스코탄생 등 포항인들의 삶이 그대로 기록된 사진들이다. 대부분의 사진은 포항시 홈피에서 가져온 것들이라 시의 입장에서 보는 기록물로 보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포항 송도해수욕장 (엽서의 희미한 한자는 상도로 표기...) 일강점기의 기록물이라 기모노 입은 여인 모습이...
현 동빈사거리부근의 칠성천하구(형산강 지류)의 섭다리 - 1920년 (이 사진을 눈여겨 보시길,, 다음에 올릴 사진이 있기에...) 강점기 때의 동빈내항 포항은 과거에서 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동해에서 수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90년 전인 1920년대 옛 포항면과 구룡포(창주면) 시가지의 모습, 주요건물, 사회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발견됐다. 이 사료는 1929년도(소화4년)에 당시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河合淸治)이 조선정보협회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2절지 규격의 2도 컬러인쇄물로서 도시단위별 상황을 소상히 알리는 시가지종합안내서다. 영일만에 정박중인 미해군 함정 - 1950년
동빈내항을 경계중인 장병 - 1950년
항구동의 해군포항경비부 - 1950년 1950년 8월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6.25 -포항지역 학도의용군 1950년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사단의 퇴로는 차단되고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은 계속되어 포항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포항에는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학도병 71명이 제3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사령부로 찾아왔으나 자체방위능력은 없던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1950년 8월 11일 소티재를 넘어 포항시내로 진격하였다. 점령을 당한 포항은 포항지구전투라 불리는 학도병들과 국군 제3사단의 후방사령부 행정요원들이 참여한 전투결과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번 민부대(민기식 대령 지휘하에 제7사단 창설을 위한 기간요원)에 의해 포항을 탈환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포항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고 말았다. 원형으로 파인 자리는 폭격 탄흔자리로 보인다.
한국전쟁의 승패가 달린 최후의 저지선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없는 상황이라 낙동강 일대에 전개된 치열한 전투들을 꼽을때 '외관전투' 외에 포항 '형산강(兄山江)도하작전'이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50년 9월 중순, 형산강 북쪽 포항을 점령한 인민군 제2군단 제12사단이 남쪽 F-51 전폭기 출격기지인 영일비행장과 경주시 점령을 시도하자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이를 저지하고 포항을 탈환하려는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 사이에 전개된 공방전이다. 이렇게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한달 반 동안 펼친 공방전은 결국 인민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개시함으로써 전쟁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 때 포항을 단기간에 탈환하지 못했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어 피난정부가 있던 부산도 위기에 처했을 것이 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 상황도. (1950. 9. 1 ~ 9. 15. ①국군 제3사단, ②국군 수도사단, ③국군 제8사단, ④국군 제6사단, ⑤국군 제1사단, ⑥미 제1기병사단, ⑦미 제2사단, ⑧미 제25사단, ⑨미 제 24사단.
조선 경북 포항 전경 이라고 쓰인 일,강점기 엽서
조금 뒤쪽에서 촬영된듯 하다.
부산 영도다리 처럼 들어 올리는 기능이...
포항뉴스 2009. 2. 2 남빈동 사거리-부두방향 도로 1959년 호미곶 등대 - 1960년 6.25 -포항지역 학도의용군 1950년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사단의 퇴로는 차단되고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은 계속되어 포항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포항에는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학도병 71명이 제3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사령부로 찾아왔으나 자체방위능력은 없던 상태였다.
1950 년 8월 10일 목요일 날씨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읍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읍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71명 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청결한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그러나 71명의 학도병은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학도병은 시신 훼손이 심했고, 수첩 역시 피에 잔뜩 젖어 알아 볼수가 없었다... 이 글을 옮겨 적으며 눈물이 나네요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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