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산악활동을 하다 보니까 산 관련 자료수집과 동시 관심도에 가속도가 붙어 닥치는대로 탐독을 하게 되었다,하루는
도청 산림부서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친구와 함께 둘이서 모악산을 찾게 되었는데 전주김씨 시조 김태서의 묘(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조 묘)방면 등로를 택하여 오르게 되었다, 이 길은 너무 가파라서 경사도를 오르기가 좀 힘든곳이다,
그러기에 이 등로는 등산객들이 잘 이용하지 않아서 전주시민들중 김태서묘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이가 많다,
묘소에 이르자 사십을 갓넘어 보이는 정장차림의 남자 한분과 젊은 여인한분(부부간인듯 함)이 와 있었고,남자분은 무슨
쇠줄을 느려 뜨리고 묘 주위를 돌고 있있다,
나는 친구와 산행을 목적으로 오른탓으로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그 남자분이 말하기를 "묘 좌향이 잘못 되었다"였다,
"어찌하여 그렇게 보여 지느냐?"고 여쭤 봤더니,"안산이 고덕산이 되어야 하는데 좌향을 잘 못 잡았다"는것이다,남의 묘소를
두고 잘되었다거나 못되었다거나 함부로 평하는 태도는 흔히 풍수들의 버릇중의 하나다,이는 대단히 잘못된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그 분을 향해"생전사후(生前死後)"란 말을 혹시 들어본즉이 있는가?"라고 여쭤 봤더니 그 말이 무슨말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였다,더 이상 대화 할 가치가 없어 보여서 그대로 뒤돌아 서는데 그 말이 매우 궁금했던 모양인지 명함 한장을
건네며 사정을 한다,그래서 설명을 해 주고 산을 올랐는데 그 뒤 그사람의 신분을 알고보니 <한국신령협회 회장>이란
거창(?)한 신분 이였다,
조선을 1백년 연장시켰다는 세종릉 (비룡상천형)
1만원 짜리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다는 것 쯤은 누구든지 알고있다,그려면 또 무엇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오른쪽에는 세종대왕상이, 왼쪽에는 자격루라는 물시계가 그려져 있고,중간에는 비룡상천(飛龍上天)상이 그려져 있는데
용은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려 놓은 것 같다,아무튼 우리는 한글을 사용하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세종대왕을 매일 만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렇게 친숙한 세종이 묻힌 영릉은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여주에 있어 특히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내방객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풍수지리로는 명당의 대명사격으로 알려져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답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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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1백년 연장시킨 명당
세종(1397~1450)은 선왕인 태종이 묻힌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大母山)아래에 있는 헌릉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하여
처음에는 본인의 뜻대로 되었다,우여곡절 끝에 19년 후인 예종1년(1469)에 현재의 위치인 영릉(英陵,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으로 천릉(遷陵)한 사실을 보면 자신의 자리도 본인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유택(幽宅)인 모양이다,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택리지>에 의하면 영릉을 개토(開土)하면서 옛 표석이 나왔는데 표석에는”당연히 동방의 성현이
장사를 할 곳이다”라는 뜻인 당장동방성인(黨葬東方聖人)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세종이 대모산에서 천릉한 것은 세종이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생전에 백성을 위해 많은
덕을 쌓았기 때문에 길지의 명당으로 옮기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왕릉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릉을 제외하면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있는데 경기도 여주까지 찾아와서 왕릉을 조성한
이유는 명당을 찾아 여주까지 내려온 까닭이다,
또<택리지>에 의하면 술사(術士)의 말을 빌어 영릉은 여러 왕릉 중에서 제일간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풍수지리가들도 이구동성으로 휼륭한 명당이라고 한다,심지어 영릉으로 인하여 조선의 1백년 더
연장되었다(英陵加百年)는 말이 있을 정도의 대명당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대명당임은 틀림이 없지만 영릉의 형국을 풍수지리가에 따라
모란꽃이 절반정도 피어 있다는 목단반개(牧丹半開)형,
봉황이 날개를 펴서 알을 품고 있다는 비봉포란(飛鳳抱卵)형,
용이 조산(祖山)이 되는 산을 돌아본다는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의 명당이라고 각각 이름지어 소개하고 있다,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산세
명당도는 언제,누구에 의해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지만 따분한 문자를 떠나 그림 속에서나마 명당을 구경 해 보자,명당도는
명당의 위치를 혈을 중심으로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에서 그려놓은 그림이지만,정적인 산줄기와 동적인 물줄기가 균형
있게 조화된 천태만상의 산그림은 단순한 명당의 약도가 아니라 미적 가치가 있는 민속 그림이라고 볼수 있다,
<명당도 1>은 전체적으로 세종의 영릉과 비슷한 산세이고,조산(祖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회룡고조”의 명당도인데
회룡고조에 “형”자를 붙이지 않았다,경우에 따라서는 “회룡고조형”이라고 하기도 한다,
,<명당도 2>는 회룡고조와 비슷한 회룡은산(回龍隱山)형의 명당도인데 조산(祖山)을 회룡하기는 하지만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용이 숨어있는 모양의 명당인데 “형”자를 붙였다,이렇게 명당도를 보면 형국의 이름끝에 “형”자를 붙이는 것이
통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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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은 비룡상천(飛龍上天)형국
필자는 영릉의 형국에 대해 비룡상천(飛龍上天)형,혹은 이와 같은 비룡등공(飛龍登空)형이라 보고,영릉과 주변의 산 전체의
흐름은 회룡고조의 산세라고도 본다,용 형국에서 혈은 양각(兩角)사이에 혈이 맺히는데 비룡상천의 형은 서두에서 말한 현행
만원권 지폐 중앙에 나온 비룡상천상의 그림을 보면 참고가 될것이다,
풍수지리에서 용과 뱀이 서로 비슷하지만 영릉처럼 내룡의 규모가 크고 혈장(穴場,혈이 있는 바닥)이 크고 넓으면 용형으로
큰 명당이 되고 내룡의 규모가 작고 혈장이 좁으면 뱀형의 작은 명당을 이룬다,
그래서 혈장이 크고 넓은 용 형국은 부부간에 합장자리의 명당이 되지만 뱀 형국의 명당은 묘 쓸 자리가 한 자리만 나오는
명당이 되기 때문에 한 자리만 쓰거나 상하장으로 쓴다,
영릉의 혈장이 넓다고 하더라도 정혈(定穴)은 혈장에 비해 좁게 떨어지는 법이다,그래서 세종의 영릉은 단릉(單陵)형식에
합장(合葬)을 한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한 것이다,외관상으로 보면 한 개의 능이지만 상석(床石,묘앞에 제물을 차려놓기
위한 판판한 돌상)은 두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면 합장임을 짐작 할 수가 있을것이다,
회룡고조란 산흐름이 용이 뒤돌아서 조산(祖山)을 바라보는 곳이 되기 때문에 조산(祖山)임과 동시에 조산(朝山)이 된다,
영릉에서 북성산이 조산(祖山)이 되는데 북성산에서 출발한 용이 영릉에서 맥이 멈추고 기가 뭉쳐 혈을 이루고 있다,능앞에
보이는 조산은 정향(丁向,남쪽에서 서쪽으로 15도방향)으로 정확히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지는 않다,
영릉은 분명히 대명당이기는 하지만 회룡고조 산세 자체에 약간의 흠이있다,바꾸어 말하자면 손자가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조산을 바라보는 격으로 이런곳을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면 후손중에 점잖치 못하고 버릇없는 후손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혈에서 조산을 정확히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정도는 심하지 않으리라 본다,
[주]
위 내용은 최명우의 명산답산기에서 발췌한 것으로 전체의 중략 및 끝맺음에 있어서 복잡다난한 역사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데(연산군 대 까지) 전주이가인 필자가 보기엔 썩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라서 간추려 편집 하였음을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