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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大祖大王(태조대왕)
三國史記 卷 第十五
高句麗本紀 第三 大祖大王, 재위 94년 (AD53년 ~ AD146년)
수정기년: 재사대왕, 재위 10년, AD64년 ~ AD74년.
수정기년: 國祖王(국조왕), 재위 48년. (AD74년 ~ AD121년)(AD78년은 섭정 후 정식 즉위년)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太后 扶餘人也 慕本王薨 太子不秒 不足以主社稷 國人迎宮繼立 王生而開目能視 幼而岐嶷 以年七歲 太后垂簾聽政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宮(궁)이고, 아명은 於漱(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古鄒加(고추가) 再思(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宮(궁)을 맞이하여,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태조왕 원년(AD53년, 癸丑)11월.
*수정기년: 국조왕 원년, AD74년, AD78년은 정식 즉위년.
*어머니는 호화태후.
*再思가 BC1년에 출생.
*再思의 아들 再思(신명선제)은 AD48년 출생.
*再思의 아들 國祖(국조)는 AD68년 출생. AD74년때, 7살.
AD153년에 86살에 사망?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蝗害穀
3년(AD55년, 乙卯) ==> 3년(AD105년, )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본기신편열전> 에서 築國西十城 으로 되어서 있어, <고구려본기>의 遼西十城는 오류가 난 것.
*신명선제 33년, AD105년, 3월, 鎭北將軍(진북장군) 麻樂(마락)이 개마의 여러 성을 重修(중수)하였고,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백암, 장령, 토성, 문성, 장무, 둔유 등 6성을 얻었다.
*후한서에 8월, 황충 기사가 있음으로, 105년이 맞음.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4년(AD56년, 丙辰) ==> 년(AD106년, )
가을 7월, 東沃沮(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어 국경을 개척하였으니, 동으로는 滄海(창해), 남으로는 薩水(살수)에 이르렀다.
*於卑申(어비신)이 東沃沮(동옥저) 정벌시킴.
七年 夏四月 王如孤岸淵觀魚釣 得赤翅白魚 秋七月 京都大水 漂沒民屋
7년(AD59년, 己未) ==> 년(AD109년, )
여름 4월, 왕이 孤岸淵(고안연)에 가서 낚시를 보다가 붉은 날개의 白魚(백어)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十年 秋八月 東獵得白鹿 國南飛蝗害穀
10년(AD62년, 壬戌)==> 년(AD112년, 壬戌)
가을 8월, 동쪽 지방에서 사냥을 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2월, 3국의 병사을 이끌고, 현도와 부여를 치고 돌아 왔다. 馬樂(마락)이 薨(훙).
*국조왕 년(AD122년)에 麻樂(마락)이 사망.
十六年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珥頭爲于台 冬十月 雷
16년(AD68년, 戊辰)==> 국조왕 년(AD118년, )
가을 8월, 曷思王(갈사왕)의 손자 都頭(도두)가 항복해왔다. 도두를 于台(우태)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二十年 春二月 遣寬那部沛者達賈伐藻那 虜其王 夏四月 京都旱
20년(AD72년, 壬申)==> 국조왕 20년(AD132년, 壬申), 60년 편차.
봄 2월, 寬那部관나부 沛者(패자) 達賈(달가)를 보내 藻那(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藻那(조나) 왕, 心(심).
*<상씨열전>을 보면, 상태후의 아들 尙令(상령)이 壬申년(AD132년)에 達賈(달가)를 따라 가서, 藻那(조나)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움.
壬申 從達賈伐藻那 有功
*尙令(상령),
癸酉(AD133년) 상수현 태수.
庚辰(AD140년) 비류패자.
癸巳(AD153년) 우보.
乙未(AD155년) 사망(50살, AD106년출생 = 丙午)
*太祖皇帝紀 35년 AD146년에 達賈(달가)가 사망.
三十五年 丙戌 二月 達賈薨
二十二年 冬十月 王遣桓那部沛者薛儒伐朱那 盧其王子乙音爲古鄒加
22년(AD74년, 甲戌)==> 국조왕 22년(AD134년, 甲戌)
겨울 10월, 왕이 桓那部(환나부) 沛者(패자) 薛儒(설유)를 보내 朱那(주나)를 치고, 그 왕자 乙音(을음)을 사로잡아 古鄒加(고추가)를 삼았다.
* 년(AD135년) 1월, 朱那(주나) 왕자 乙音(을음)이 항복하니 봉하여 古鄒加(고추가)를 삼았다.
二十五年 冬十月 扶餘使來 獻三角鹿長尾免 王以爲瑞物 大赦 十一月 京都雪三尺
25년(AD77년, 丁丑)==> 국조왕 년(AD137년, 丁丑)
겨울 10월, 扶餘(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서울에 눈이 3자 내렸다.
*十一月 京都雪三尺 ==> 十二月 大雪 京都五尺
*5월, 주나...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 有差 遂紀功於巖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46년(AD98년, 戊戌)==> 국조왕 33년(AD145년, 乙酉)
봄 3월, 왕이 동쪽으로 柵城(책성)을 순수하였다. 柵城(책성) 西罽山(서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柵城(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柵城(책성)에서 돌아왔다.
*AD145년 - AD98년 = 47년.
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
50년(AD102년, 壬寅)==> 국조왕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柵城(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五十三年 春正月 扶餘使來 獻虎 長丈二 毛色甚明而無尾 // 王遣將人漢遼東 奪掠六縣 太守耿夔出兵拒之 王軍大敗 秋九月 耿夔擊破貊人
53년(AD105년, 乙巳)==> 국조왕 27년(AD139년, 己卯)
봄 1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3월) 왕이 한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6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 (9월) 요동 태수 耿夔(경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왕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耿夔(경기)가 貊人(맥인)을 격파하였다.
*AD139년 - AD105년 = 34년.
*1월 기사 = AD139년 기사임.
*3월, 9월 기사 = AD105년 기사임.
*元興元年 秋,九月,遼東太守耿夔擊高句驪,破之。<자치통감> 105년.
<자치통감>에서 司馬(사마) 耿夔(경기)는 永元元年(AD89년)에 처음 나타남. 延光三年(AD124년)까지 耿夔(경기)란 인물이 <자치통감>에 나타남.
*6월, 尙令(상령)이 漢의 嶺東六懸(영동6현)을 약탈. 이때 尙令(상령)은 尙水縣太守(상수현태수)임. 고구려사략에서 西河太守(서하태수)로 나옴.
*9월, 嶺東太守(영동태수) (??)이 貊部(맥부)을 래침, 패하여 돌아옴. <본기신편열전>
孝順皇帝下 陽嘉四年(乙亥,公元 一三五年)
冬,十月,烏桓寇雲中,度遼將軍耿曄追擊,不利。十一月,烏桓圍曄於蘭池城;發兵數千人救之,烏桓乃退。
<자치통감>에서 135년에는 耿曄(경엽)이 度遼將軍(도요장군)이였음.
*AD139년에 嶺東六懸(영동6현)의 태수는 公孫玄(공손현) <고구려사략>
*<고구려사초> 신명선제 33년, AD105년, 3월, 鎭北將軍(진북장군) 麻樂(마락)이 개마의 여러 성을 重修(중수)하였고,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백암, 장령, 토성, 문성, 장무, 둔유 등 6성을 얻었다.
五十五年 秋九月 王獵質山陽 獲紫獐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
55년(AD107년, 丁未)==> 국조왕 29년(AD141년, 辛巳)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五十六年 春 大旱 至夏赤地 民饑 王發使賑恤
56년(AD108년, 戊申)==> 국조왕 30년(AD142년, 壬午)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붉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국조왕 30년 기사가 본기신편열전에 없음.
五十七年 春正月 遣使如漢 賀安帝加元服
57년(AD109년, 己酉) ==> AD109년. 국조왕 31년(AD143년, 癸未)
봄 1월, 漢(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安帝(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하였다.
*孝殤皇帝 永初三年(己酉,公元一零九年)春,正月,庚子,皇帝加元服,赦天下。 <자치통감>
*국조왕 31년(AD143년, 癸未) 1월, 尙溫(상온) 太輔(태보), 達賈(달가) 左輔(좌보), 穆度婁(목도루) 右輔(우보).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 是年三月 麗玉宮與濊貊 寇玄菟 不知或求屬 或寇耶 抑一誤耶)
59년(AD111년, 辛亥) ==> AD111년. 국조왕 33년(AD145년, 乙酉)
漢(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玄菟(현토)에 소속되기를 요구하였다. ([통감]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속하기를 원하고, 다른 편으로는 침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이 잘못 기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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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62년(AD114년, 甲寅) ==> 국조왕 2년(AD114년, 甲寅)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六十四年 春三月 日有食之 冬十二月 雪五尺
64년(AD116년, 丙辰) ==> 국조왕 4년(AD116년, 丙辰), 국조왕 25년(AD137년, 丁丑)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冬十二月 雪五尺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濊貊襲漢玄菟 攻華麗城 秋七月 蝗雹害穀 八月 命所司 擧賢良孝順 問鰥寡孤獨及老不能自存者 給衣食
66년(AD118년, 戊午) ==> 국조왕 6년(AD118년, 戊午)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巷(諷 魏志作風) 將兵來侵 擊殺濊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 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隊縣(隊 魏志作隧) 遼東太守蔡諷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緣龍端-兵馬緣公孫酺(功 後漢書作兵) 以身扞諷 俱沒於陣 死者百餘人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因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十二月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69년(AD121년, 辛酉) ==> 국조왕 9년(AD121년, 辛酉)
봄(2월), 한 나라 유주자사 馮煥(풍환), 현토태수 姚光(요광), 요동태수 蔡巷(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遂成(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환, 요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遂成(수성)이 한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환등은 이 말을 믿었다. 遂成(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명을 보내 현토,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명과 함께 요대현(신성)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龍端(용단)과 병마연 公孫酺(공손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풍을 엄호하다가,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100여명이었다.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濊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 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蓋滅而復興者歟)
70년(AD122년, 壬戌)==> 국조왕 10년(AD122년, 壬戌)
(2월) 왕이 馬韓(마한)·濊貊(예맥)과 함께 遼東(요동)을 공격하였다. 扶餘王(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2월, 3국의 병사을 이끌고, 현도와 부여를 쳤다.
七十一年 冬十月 以沛者穆度婁爲左輔 高福章爲右輔 令與遂成參政事
71년(AD123년, 癸亥) ==> 차대왕 1년(AD146년, 丙戌)
겨울 10월(12월), 패자 穆度婁(목도루)를 左輔(좌보)로 삼고, 高福章(고복장)을 右輔(우보)로 삼아, 遂成(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達賈(달가) 薨.
*수성은 2월에 섭행을 맡아, 12월에 穆度婁(목도루)를 左輔(좌보)로 삼음.
七十二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漢朝貢 十一月 京都地震
72년(AD124년, 甲子) ==> 차대왕 2년(AD147년, 丁亥), 국조왕 12년(AD124년, 甲子)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地震(지진)이 있었다.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3년, AD124년 기사에도 똑같은 일식 기사가 있다.
八十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 與左右宴 於是 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菸支留-沸流那皁衣陽神等 陰謂遂成曰 初慕本之薨也 太子不肖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欲使兄老弟及 今王旣已老矣 而無讓意 惟吾子計之 遂成曰 承襲必嫡 天下之常道也 王今雖老 有嫡子在 豈敢顗覦乎 彌儒曰 以弟之賢 承兄之後 古亦有之 子其勿疑 於是 左輔沛者穆度婁 知遂成有異心 稱疾不仕
80년(AD132년, 壬申) ==> 차대왕 3년(AD148년, 戊子)
가을 7월, 遂成(수성)은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이때 관나(貫那) 于台(우태) 미유(彌儒), 환나(桓那) 于台(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遂成(수성)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慕本(모본)이 죽었을 때 太子(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再思(재사)를 세우려 하였으나, 再思(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당신은 헤아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성은 말하였다.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맏아들이 하는 것이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왕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엿보겠느냐?” 彌儒(미유)가 말하였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으니 당신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로써 左輔(좌보) 패자 穆度婁(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목도루가 물러난 것은 차대왕 4년, 1월임. 彌儒(미유)가 左輔(좌보)가 됨.
八十六年 春三月 遂成獵於質陽 七日不歸 戱樂無度 秋七月 又獵箕丘 五日乃反 其弟伯固諫曰 禍福無門 惟人所召 今子以王弟之親 爲百寮之首 位已極矣 功亦盛矣 宜以忠義存心 禮讓克己 上同王德 下得民心 然後 富貴不離於身 而禍亂不作矣 今不出於此 而貪樂忘憂 竊爲足下危之 答曰 凡人之情 誰不欲富貴而歎樂者哉 而得之者 萬無一耳 今吾居可樂之勢 而不能肆志 將焉用哉 遂不從
86년(AD138년, 戊寅) ==> 차대왕 5년(AD150년, 庚寅)
봄 3월, 遂成(수성)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즐기기만 할 뿐 행동에 절도가 없었다.가을 7월, 수성이 또 箕丘(기구)에 사냥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伯固(백고)가 간했다. "화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따라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예절과 겸양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형을 떠나지 않고 화란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인들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으랴만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伯固(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九十年 秋九月 丸都地震 王夜夢 一豹齧斷虎尾 覺而問其吉凶 或曰 虎者百獸之長 豹者同類而小者也 意者王之族類 殆有謨絶大王之後者乎 王不悅 謂右輔高福章曰 我昨夢有所見 占者之言如此 爲之奈何 答曰 作不善卽吉變爲凶 作善卽災反爲福 今大王憂國如家 愛民如子 雖有小異 庸何傷乎
90년(AD142년, 壬午) ==> 차대왕 6년(AD151년, 辛卯)
가을 9월, 丸都(환도)에 地震(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끊었다. 왕이 잠을 깨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어른이며, 표범은 호랑이의 한 종류로서 작은 짐승이다. 아마도 왕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대를 끊으려고 획책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치않아 우보 고복장에게 "내가 어제 밤 꿈에 본 것에 대하여,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고 복장이 대답하였다. "안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좋은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 일과 같이 걱정하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사소한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151년 - 142년 = 9년 편차.
九十四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之下 謂左右曰 大王老而不死 吾齒卽將暮矣 不可待也 惟願左右爲我計之 左右皆曰 敬從命矣 於是 一人獨進曰 向王子有不祥之言 而左右不能直諫 皆曰 敬從名者 可謂姦且諛矣 吾欲直言 未知尊意如何 遂成曰 子能直言 藥石也 何疑之有 其人對曰 今大王之賢 內外無異心 子雖有功 率群下姦諛之人 謀廢明上 此何異將以單縷繫萬鈞之重而倒曳乎 雖復愚人 猶知其不可也 若王子改圖易慮 孝順事上 卽大王深知王子之善 必有揖讓之心 不然卽禍將及也 遂成不悅 左右妬其直 讒於遂成曰 王子以大王年老 恐國祚之危 欲爲後圖 此人妄言如此 我等惟恐漏洩 以致患也 宜殺以滅口 遂成從之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冬十月 右輔高福章 言於王曰 遂成將叛 請先誅之 王曰 吾旣老矣 遂成有功於國 吾將禪位 子無煩慮 福章曰 遂成之爲人也 忍而不仁 今日受大王之禪 卽明日害大王之子孫 大王但知施惠於不仁之弟 不知胎患於無辜之子孫 願大王熟計之 十二月 王謂遂成曰 吾旣老 倦於萬機 天之曆數 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充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其卽位(作 恐或汝之誤歟) 永孚于休 乃禪位 退老於別宮 稱爲大祖大王(後漢書云 安帝建光元年 高句麗王宮死子遂成立 玄菟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陣忠曰 宮前桀黠光 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弔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 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案海東古記 高句麗國祖王高宮 以後漢建武二十九年癸巳(巳 當作 丑) 卽位 時年七歲 國母攝政 至孝桓帝本初元年丙戌 遜位讓母弟遂成 時宮年一百歲 在位九十四年 卽建光元年 是宮在位第六十九年 卽漢書所記與古記 抵梧不相符合 豈漢書所記誤耶)
94년(AD146년, 丙戌) ==> 차대왕 7년(AD152년, 壬辰)
가을 7월, 遂成(수성)이 倭山(왜산) 아래서 사냥하면서, 左右(좌우)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많으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기 바란다." 근신들이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누군가가 혼자 나서서 "조금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결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올바른 말로 말리지 않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당신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라고 말하였다. 수성이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무엇을 의심하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우리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비록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위시키려고 하니, 이것이 한 오라기의 실로 1만 균의 물건을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충효와 공손함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당신의 어진 마음을 깊이 헤아려, 반드시 당신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의 근신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였다. "대왕이 나이 많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환을 초래할까 염려된다. 따라서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그 말을 따랐다.
*차대왕 7년(AD152년) 7월, 또 왜산에서 사냥. 간신 麻正(마정)을 살해.
가을(AD146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 西安平縣(서안평현)을 습격하여 帶方令(대방령)을 죽이고 樂浪太守(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차대왕 8년(AD153년, 癸巳)
겨울 10월, 右輔(우보) 高福章(고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했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高福章(고복장)은 차대왕 6년, 9월에 右輔(우보)가 됨.
차대왕 8년(AD153년, 癸巳)
12월, 왕이 遂成(수성)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 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또한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오랫 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왕은 곧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이를 태조대왕이라 하였다.
*12월이 맞음.
([후한서]에는 "안제 建光元年(건광 원년, 辛酉, AD121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현토 태수 요광이 왕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하여 치고 싶다고 안제에게 말하니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전에는 궁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안제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에 수성이 한 나라 포로를 돌려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 癸丑(계축, AD53년, 癸巳)에 즉위하니, 이 때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丙戌(병술, AD146년, 국조왕 34년, 遂成은 副君이 됨)에 이르러, 동복 아우 遂成(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 때 궁의 나이가 100세로서, 재위 94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建光元年(건광 원년, 辛酉, AD121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의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癸巳= AD33년= 後漢 建武 9年
*癸丑= AD53년= 後漢 建武 29年 (AD113년, )
*癸酉= AD73년= 後漢 永平 16년
*이것은 신명선제기 2년 기사인데..
*國祖王(국조왕)은 156년 차대왕 20년에 사망. 나이 98살 사망. 156년 - 97살 = AD68년생.
*AD74년 - AD68년 = 6살 + 1살 = 7살.
*朱那(주나)가 반란한 것은 甲戌= AD134년이다.
고구려본기 次大王(차대왕) AD146년 ~ AD165년. 20년 재위.
次大王 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大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次大王(차대왕)의 이름은 遂成(수성)이며, 대조왕의 동복 아우이다. 그는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 태조대왕이 물려 준 자리를 받아 즉위하엿다. 이 때 나이 76세였다.
*차대왕 1년(AD146년, 丙戌) 2월.
*AD146년 - 75살 = AD71년생.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三月 誅右輔高福章 福章臨死嘆曰 痛哉寃乎 我當時爲先朝近臣 其可見賊亂之人 黙然不言哉 恨先君不用吾言 以至於此 今君甫陟大位 宜新政敎 以示百姓 而以不義 殺一忠臣 吾與其生於無道之時 不如死之速也 乃卽刑 遠近聞之 莫不憤惜 秋七月 左輔穆度婁 稱疾退老 以桓那于台菸支留爲左輔 加爵爲大主簿 冬十月 沸流那陽神爲中畏大夫 加爵爲于台 皆王之故舊 十一月 地震
2년(AD147년, 丁亥)
봄 2월, 관나 패자 彌儒(미유)를 左輔(좌보)로 임명하였다.(차대왕 4년(AD149년) 1월. 左輔(좌보) 穆度婁(목도루)가 병을 칭함)
3월, 右輔(우보) 高福章(고복장)을 죽였다. 高福章(고복장)이 죽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先朝(선조)의 近臣(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한다. 내가 이와 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고 高福章(고복장)은 곧 형을 받았다. 遠近(원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차대왕 9년(AD154년) 3월, 右輔(우보) 高福章(고복장) 살해당함)
가을 7월, 左輔(좌보) 穆度婁(목도루)가 병을 구실로 퇴직하자, 桓那(환나부) 于台(우태) 菸支留(어지류)를 左輔(좌보)로 삼고, 작위를 올려 大主簿(대주부)라 하였다. (차대왕 9년(AD154년) 3월, 菸支留(어지류)를 右輔(우보)로 함)
겨울 10월, 비류나부 陽神(양신)을 中畏大夫(중외대부)로 삼고, 작위를 올려 于台(우태)로 하니, 그들은 모두 왕의 옛친구였다. (차대왕 9년(AD154년) 3월, 陽神(양신)을 中畏大夫(중외대부)로 함)
11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殺大祖大王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
論曰 昔宋宣公 不立其子與夷 而立其弟繆公(繆 左傳作穆 疑是據公羊傳) 小不忍亂大謀 以致累世之亂 故春秋大居正 今大祖王不知義 輕大位 以授不仁之弟 禍及一忠臣-二愛子 可勝歎耶
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 不中 問於師巫曰 狐者妖獸 非吉祥況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 以自新也 君若修德 卽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卽爲凶 吉卽爲吉爾 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也 遂殺之
3년(AD148년, 戊子) ==> 차대왕 10년(AD155년, 乙未)
여름 4월,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莫勤(막근)을 죽이자, 그의 아우 莫德(막덕)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매어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 송 선공이 그의 아들 여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아우 목공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작은 인정에 이끌려 국가의 대계를 어지럽힌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여러 세대에 걸친 환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춘추에서는 "정도(正道)에 처하는 것을 가장 크게 여기라"라고 말하였다. 이제 태조왕이 정의를 알지 못하고, 중대한 왕위를 가볍게 여겨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넘김으로써, 화란이 한 명의 충신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으랴?
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 오면서 울었다. 왕이 여우를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왕이 사무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여우는 원래 요사스럽고,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더구나 그 빛깔이 희니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간절한 뜻을 말로 전할 수 없으므로 요괴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반성할 줄 알게 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덕을 닦으면, 禍(화)를 福(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흉하면 흉하다 하고, 길하면 길하다 할 것이지, 이미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말해놓고 다시 복이 된다고 하니, 이 무슨 거짓말인가?" 마침내 그를 죽였다.
四年 夏四月丁卯晦 日有食之 五月 五星聚於東方 日者畏王之怒 誣告曰 是君之德也 國之福也 王喜 冬十二月 無氷
4년(AD149년, 己丑) ==> 차대왕 11년(AD156년, 丙申)
여름 4월 그믐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5월, 오성이 동방에 모였다. 천기를 맡은 관원이 왕이 노할까 두려워 하여 거짓으로 "이는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기뻐하였다. 겨울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차대왕7년(壬辰, AD92년)에,
白面(백면)이 左輔(좌보), 尙曲(상곡)이 右輔(우보).
*이것은 간지가 움직였음.
八年 夏六月 隕霜 冬十二月 雷地震 晦 客星犯月
8년(AD153년, 癸巳)
여름 6월, 서리가 내렸다. 겨울 12월, 우뢰와 지진이 있었고, 그믐날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12월, 수성이 옥새를 받음.
十三年 春二月 星孛于北斗 夏五月甲戌晦 日有食之
13년(AD158년, 戊戌)
봄 2월,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여름 5월 그믐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年 春正月晦 日有食之 三月 大祖大王薨於別宮 年百十九歲 冬十月 椽那皁衣明臨答夫 因民不忍試王 號爲次大王
20년(AD165년, 乙巳)
봄 1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별세하니, 나이 119세였다.(98살)
겨울 10월, 椽那(연나부) 皁衣(조의) 明臨答夫(명림답부)가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하여 왕을 죽였다. 호를 次大王(차대왕)이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