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끼와 오랜 동료 관계 속에 일본의 70년대 TV만화와 8, 90년대 극장 장편 만화영화를 대표해온 일본 만화영화계의 거장입니다. 그는 곧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비교가 됩니다. 아니 미야자키의 이름은 알아도 그의 이름은 잘모르더군요. 다카하타는 미야자키 보다 6살이나 많은 선배이자 친구이자 스승입니다. 미야자끼와 달리, 다카하타는 처음부터 감독으로서 그의 경력을 쌓아 왔습니다. 그는 1935년에 태어나, 당시 일본에서 가장 명문인 도꾜대학교 법정학부를 졸업하였으나, 특이 하게 새로이 설립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도에이 동화에 1959년에 합류했습니다. 다카하타와 미야자끼는 도에이 동화에서 애니메이터들의 노조 활동을 통해 친구가 되었는데, 미야자끼는 노조의 위원장이었고 그는 부위원장이었습니다. 그가 감독한 첫 영화인, 1968년 작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 모험"은 지금까지 도 일본 만화영화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미야자키는 이 영화에서 애니메 이터로 그와 함께 일했으며 수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다카하타와 미야자끼는 그 작품 후에도 계속 감독과 애니메이터의 팀으로서 많은 위대한 만화영화의 걸작들, "루팡 3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 "엄마 찾아 삼 만리" 그리고 "녹색 지붕 집의 앤" 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도쿠마가 미야자키에게 "나우시카"를 영화로 만들자고 교섭을 했을 때, 미야자키가 요구한 유일한 조건은 다카하타가 프로듀서로서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우시카"를 통해 다카하타는 처음으로 프로듀서 일을 맡아 훌륭히 잘 해내었고 그 후 그와 미야자끼는 1985년에 만화영화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하고,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제작과 감독을 맡아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들을 만들고 있습다. 지브리 창립 이후 내놓는 그의 작품들은 냉혹한 리얼리티와 독특한 시선으로 원작을 재해석한 [ 반딧불의 묘 ] 를 필두로 다소 소녀 만화 풍의 분위기로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자기성찰을 하는 [ 추억은 방울방울 ] 유쾌한 사회풍자 와 해학 그리고 패러디로 가득찬 [ 헤이세이 너구리 대작전 ] 이 있습니다. 과연 이 작품들이 같은 한사람에 의해 감독되었나 할정도로 각기 다른 분위기 로 관객을 압도하는 연출력을 과시하합니다. 그의 작품들은 일본의 시대상황과 분위기를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죠. 어린이와 어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깊이와 오락성을 갖춤으로써 극장 흥행 순위에서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고. 그의 이런 리얼리즘 경향과 교훈성을 잘 조화시킴으로써 그의 작품 중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대표작으로 꼽히게 된 작품이 1994년 작 "평성 너구리 대 전쟁 폼포코"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너구리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파괴를 비판하였습니다. 다카하타는 자신만의 이런 독특한 작품세계를 통해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 을 뿐 아니라, 만화영화를 통해 실사 영화 못지 않은 내용과 깊이로 사회적 발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미야자키하고 확연히 다릅니다. 미야자키에게 꿈과 희망 액션이 있다면 다카하타는 철저한 리얼리티를 필두로 지금 현시점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다고 할수있습니다.
대표작:알프스소녀 하이디